존 하블리첵

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in 1996. ESPN / 영상
네이트 서몬드네이트 아치볼트데이브 빙데이비드 로빈슨데이브 코웬스돌프 세이즈레니 윌킨스
래리 버드로버트 패리시릭 베리마이클 조던매직 존슨모제스 말론밥 페팃
빌 러셀빌 셔먼빌 커닝햄빌 월튼샤킬 오닐샘 존스스카티 피펜
아이재아 토마스얼 먼로엘빈 헤이즈엘진 베일러오스카 로버트슨웨스 언셀드윌리스 리드
윌트 체임벌린월트 프레이저제리 루카스제리 웨스트제임스 워디조지 거빈조지 마이칸
존 스탁턴존 하블리첵줄리어스 어빙카림 압둘 자바칼 말론케빈 맥헤일클라이드 드렉슬러
폴 아리진패트릭 유잉피트 마라비치하킴 올라주원할 그리어찰스 바클리밥 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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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존 하블리첵
John Havlicek
생년월일1940년 4월 8일
신체 조건196cm, 93kg
포지션스몰 포워드/슈팅 가드
드래프트1962년 드래프트 1라운드 7순위
보스턴 셀틱스에 지명
선수경력보스턴 셀틱스 (1963~1978)
수상내역NBA Finals MVP 1회 (1974)
All-NBA First Team 4회
All-NBA Second Team 7회
NBA All-Defensive First Team 5회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3회
NBA All-Rookie First Team (1963)
8회 NBA Champion
등번호17번
1974년 NBA 파이널 MVP
윌리스 리드존 하블리첵릭 베리
보스턴 셀틱스 영구결번
No. 17

1 개요

식스맨의 정의를 바꾼 NBA 역사상 최고의 식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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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NBA 농구선수. 커리어 내내 16시즌을 보스턴 셀틱스에서만 선수생활을 했으며 커리어 초반 7시즌은 식스맨으로 활동하여 식스맨의 중요성을 알려준 레전드. [1]

플레이오프때 더욱 날뛰던 큰 경기에서 강한 선수.

2 커리어

하블리첵은 리그 내 최고의 클러치 플레이어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로 데뷔 이후 7년이나 식스맨의 롤을 받고 활동했던 매우 이례적인 사례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하블리첵은 자신을 벤치멤버로 기용한 팀의 결정에 순응했다.

하블리첵이 루키로써 팀에 입단했을 당시에는 이미 보스턴 셀틱스는 4연패를 달성한 상태였다. 팀에는 밥 쿠지,빌 러셀,빌 셔먼,프랭크 램지라는 우주 방위대급 선수들이 있었고 신인이었던 하블리첵은 주전자리는 꿰차지 못했지만 벤치멤버로써 위기상황마다 출장, 좋은 활약을 펼쳤다.

루키시절 하블리첵은 다양한 허슬플레이와 수비는 인상적이었으나 팀 동료인 밥 쿠지는 그를 보고 "하블리첵은 결코 슈터가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하블리첵은 루키 시즌이 끝난후 고향에 내려와 슛과 드리블연습에 매진하여 그 다음 시즌에 평균 19.9점으로 거의 20점에 가까운 득점력으로 쿠지의 비판을 묵살한다.

1965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당시 괴물 윌트 체임벌린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의 7차전에서 경기종료 5초가량을 남기고 필라델피아가 109-110으로 한점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필라델피아는 작전타임을 불렀다. 필라델피아의 감독인 돌프 셰이즈 코치는 자유투가 좋지못한 체임벌린에 보스턴 선수들이 신경을 쏟을 때 다른 선수에게 패스를 해서 자유투를 얻어내는 변칙 작전을 사용하려 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는 공격을 이으려 패스를 하려는 찰나에... 하블리첵이 이 기회를 노리고 쏜살같이 공을 스틸해내며 샘 존스에게 패스, 그리곤 곧바로 경기가 끝났다. 하블리첵의 이 스틸은 플레이오프 하이라이트에 끊임없이 나오는 단골 명장면.

백문이불여일견, 영상으로 보자.

격양된 해설도 일품.

1969년 러셀의 은퇴와 함께 보스턴 왕조가 몰락하는 듯 싶었으나 러셀은 하블리첵에게 "보스턴은 너의 팀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보스턴의 정신적 지주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이후 본격적으로 스타팅 멤버가 된 하블리첵은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 모두 팀내 리더가 되며 기록적으로도 팀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된다.

1974년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27.1점 6.4 리바운드 6 어시스트를 기록한 하블리첵은 카림 압둘자바가 이끄는 밀워키 벅스를 7차전 끝에 누르고 다시한번 NBA정상에 오르며 파이널 MVP까지 수상하고 최고의 시즌을 보낸다.

이후 팀에서 꾸준한 활약을 보이며 하블리첵의 마지막 시즌인 1977-1978 시즌까지 평균 16.1 득점으로 기량을 유지하며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현대농구의 스윙맨 스타일을 60년대에 구사했던 선수다. 자세한건 추가바람

4 만능 스포츠맨

하블리첵은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좋아하고 자전거가 없어서 친구들의 자전거를 달리기로 따라잡았다고 전해진다.헝그리 정신 이러한 유년기를 보냈던 탓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야구,미식축구,농구 세 종목 모두 주 대표로 뽑힐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미식축구에서 80야드 가까이 공을 던지는 강한 어깨덕에 쿼터백 유망주로 꼽히기도.

대학 1학년 때는 야구에서 4할 가까이 치는 야구재능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농구에 전념하면서 왜? 1960년 NCAA를 패권을 차지. 시간이 흘러 하블리첵은 1962년 드래프트에 참가하는데 NBA뿐만 아니라 NFL에도 지명된다.보 잭슨? 이때 하블리첵을 지명했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는 그를 와이드 리시버로 쓸 예정이었다.

5 트리비아

원래 통산 야투 실패 1위 (13,417개) 기록을 보유하고있었지만, 2014년 11월 11일 코비 브라이언트엄청난 난사로 그 기록을 넘어섰다.

사실 하블레첵의 통산 야투율은 43.6%로 언뜻 낮아보이지만 그의 시절엔 농구 기술과 전술의 부족으로 현재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갈 정도로 필드골 성공률이 전체적으로 낮았다. 일단 60시즌 전까지 시즌 야투성공률이 5할을 넘어본 적이 있는 선수는 단 한명도 없었으며 67시즌에 가자미 모드로 변신한 윌트 체임벌린이 의도적으로 득점을 자제하며 비상식적인 야투율을 기록하기 전까지 리그 야투율 1위 선수들이래봤자 5할 초반대에 그쳤다. 하블레첵이 기록한 야투 성공률은 현대로 따지면 4할 후반대~5할 초반대까지도 볼 수 있는 괜찮은 기록인 셈. 전체적으로 야투 성공률이 올라간 현대에 이 기록을 깬 건 어찌보면 코비의 위엄 (?)이다. 사실 코비도 그렇게까지 야투율이 낮은 건 아니지만
  1. 하블리첵은 통산 우승 8번 중에 6번을 식스맨으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