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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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
스티븐 더글라스 커 (Stephen Douglas Kerr)
생년월일1965년 9월 27일
국적미국
출신지레바논 베이루트
학력애리조나 대학교
포지션포인트 가드
프로입단1988년 드래프트 2라운드 50순위
피닉스 선즈 지명
소속팀피닉스 선즈 (1988~1989)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989~1992)
올랜도 매직 (1992~1993)
시카고 불스 (1993~1998)
샌안토니오 스퍼스 (1999~2001)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2001~2002)
샌안토니오 스퍼스 (2002~2003)
지도자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 (2014~)
프런트피닉스 선즈 단장 (2007~2010)
수상내역NBA Championship (1996~99,2003)
NBA Three-point Contest Champion (1997)
NBA Shooting Stars champion (2006)
2016년 NBA 올해의 감독상
마이크 부덴홀저스티브 커미정

1 개요

NBA 선수 및 NBA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감독.

2 현역 시절

코난 오브라이언시카고 불스 시절1997년 유타 재즈상대로 파이널 6차전 게임위닝 슛을 성공시키는 모습.

현역시절에는 191cm(6-3)의 삐쩍 마른 백인 포인트가드이자 3점 슛 스페셜리스트였다. 1번으로는 키가 비교적 큰 편이었지만 팔도 짧은 편인데다가 체격도 빈약하고 운동능력도 매우 떨어져서 커리어 내내 주전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오직 3점 슛 하나로 10년이 넘게 험한 NBA에서 살아남은 선수이다.

시카고 불스의 2번째 쓰리핏 당시 조던의 팀 메이트로 많이 알려졌으며 불스 왕조에서 2대 궁병대장[1]이자 2기 3연패 불스의 키 식스 맨이었다. 조던이 어시스트 해준 1996-97 파이널 샷을 쏘기도 했다.[2] 또한 98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7차전 당시에도 큰 거 한방 날렸는데, 시카고가 4쿼터에 지고 있다가 맹추격을 하던 막판에 경기를 동점으로 만드는 3점슛을 적중시켰다. [3]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태어나 애리조나 대학교로 진학한 커는 대학생 당시 1986년 FIBA 농구 월드컵때는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미국팀이 순수 아마추어 팀으로는 마지막으로 농구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4] 1988년 NCAA에서 파이널 포까지 오르기도 했다.

1988년 대학 졸업 후 피닉스 선즈에 2라운드 지명을 받아 데뷔했지만, 입단 당시 케빈 존슨이라는 명 포인트가드가 선즈의 주전 포인트가드였기에 백업으로써 큰 족적은 남기지 못했다. 이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트레이드 되었지만 거기에도 마크 프라이스라는 캡스의 레전드 포인트가드가 주전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었기에 프라이스의 백업으로 지냈고 1992-93시즌 또다시 올랜도에 트레이드 되었을때는 15-16시즌 매직의 감독을 맡고 있는 스캇 스카일스가 주전 포인트가드였기 때문에 계속 백업으로만 뛰었었다. 그런 평범한 백업멤버였던 스티브 커 농구 인생의 전기가 된 것은 1993년 시카고 불스 입단. 비록 마이클 조던이 야구로 외도를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팀은 어려웠으며 여전히 주전 포인트가드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트라이앵글 시스템이라는 포인트가드 1명의 패싱이나 개인기에 의존하지 않는 팀 전술, 그리고 1994-95시즌부터 3점슛 라인의 거리가 짧아져 3점슛의 전술적 가치를 알아챈 NBA팀들이 적극적으로 3점슛을 던지는 변화의 수혜자가 되면서 출장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불스 궁병대의 2대 궁병대장이 된다.

조던이 돌아온 불스에서는 클리퍼스의 스타였지만 무릎부상으로 하락세였던 올스타가드 론 하퍼의 백업이자 키 식스 맨으로 조던과 피펜이 만들어주는 3점슛 찬스를 칼같이 받아먹는 궁병대장으로 활약하며 커리어 처음으로 100개 이상의 3점슛을 성공시키기도 했으며, 위 짤방에 나오는 1997년 NBA 파이널 6차전 승부를 결정짓는 슛을 성공시키며 3개의 반지를 손에 넣는다. 또한 이전까지 커는 경기당 출장시간 20분이 넘은 적이 한 번 밖에 없었는데, 불스에서 보낸 다섯 시즌 모두 20분을 넘겼고, 커리어 하이 8.6점 역시 불스에서 찍었다.

불스 왕조가 해체되면서 그가 향한 곳은 샌안토니오 스퍼스. 하락세였던 33세에 이적한 것이라 더이상 팀의 중심적 역할은 하지 못했지만 98~99 스퍼스의 궁병대원으로 활약하며 NBA에서 두명밖에 없는 서로 다른팀에서 2년 연속으로 NBA 우승을 차지한 선수중 1명이 된다.[5] 선수생활의 황혼기인 2002-03 시즌 스퍼스에서 커리어 5번째 우승반지를 획득하고 은퇴를 하게 된다. [6]

NBA 통산 3점 슛 성공률 45.4%로 역대 1위 선수이며 한 시즌 3점 슛 성공률 2위 기록도 가지고 있다. (52.35%, 1994-95 시즌)[7]
사실 커가 현역시절 성공시킨 거의 모든 슛은 수비가 없는 사이에 패스를 받아 넣은 받아먹기슛인데다가 갯수가 적어 은근히 폄훼되기도 하는데, 커처럼 벤치에서 출장하며 슛시도가 극히 적은 선수가 고감도 슈팅력을 커리어 내내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NBA선수들도 사람인만큼 컨디션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이 경우 공격을 하면서 슛감을 되찾는다. 그런데 커처럼 수비, 리바운드도 못하고 리딩도 그렇고 좋지 않아 존재의의가 오직 슛에만 있는 선수들은 이런 식으로 슛감을 찾는게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슛 쏘는 기계"가 되어 투입 즉시 고감도의 슈팅력을 선보여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댈러스와의 플옵에서 그는 플옵 내내 못 뛰어 슛감이고 뭐고 없는 상황에서 딱 삼점슛 네 개만 던져 네 개 모두 성공시키는 극강의 효율을 보였다. 게다가 스티브 커는 93시즌에 팀을 옮기며 출장시간과 슈팅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을때와 말년을 제외하면 시즌 삼점성공률이 4할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5할 성공률을 세번이나 기록했는데, 전체적으로 삼점을 많이 쏠 수록 성공률이 높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커리어 통틀어 경기당 삼점갯수가 가장 높았던 시카고 시절 성공률은 47.9%로 커리어에서 가장 높았으며, 클리블랜드 시절에도 삼점을 가장 많이 쏜 89-90시즌에 50.7%로 성공률이 가장 높았다. 슛 시도수가 더 많았다면 지금보다 성공률이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고 추측되는 부분.
또한 상당히 강심장이라 필 잭슨이 다름아닌 마이클 조던을 제치고 위닝샷을 맡기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1997파이널 6차전에서 위닝샷이 더욱 대단한 것이 4차전에 이미 잭슨은 커에게 경기 막판에 스코어를 역전시킬 수 있는 슛기회를 줬는데 커가 이걸 놓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차전 종료 직전에 조던이 위닝샷 기회를 맡기자, "내가 대기하고 있을테니까 패스해줘!"라고 자신감 있게 나섰고 멋지게 적중시켰다. 피지컬이 워낙에 심하게 떨어져서 그렇지 멘탈이나 슈팅력은 챔피언으로서 손색이 없는 선수

선수시절엔 본의 아니게 NBA와 길거리 농구의 수준차를 언급하는데 종종 언급되기도 했다. 당시 뉴욕 길거리 농구의 성지 러커파크에는 화려한 드리블링과 운동능력을 뽐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친구들 사이에 '3점 쏘는거 말고 할 줄 아는거 아무것도 없는 스티브 커 같은 녀석도 NBA에서 뛰고 우승을 하는데....'식으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이에 前 휴스턴 로케츠 포인트 가드이자 찰스 바클리와 영혼의 만담 콤비이고 뉴욕 토박이로 러커파크에도 종종 출현했던 해설자 케니 스미스가 그해 러커파크 1 on 1 챔피언과 50점내기 1 on 1 시합을 했는데, 대충대충 뛰다가 스코어가 0 대 37까지 벌어지고 관중들이 NBA도 별 것 아니구만 이러면서 비웃자 발동걸기 시작해서 50 대 37로 게임을 끝내버린 뒤 사람들을 향해 "니네 스티브 커가 우스워 보이지? 걔가 매치업 하는 상대는 게리 페이튼, 존 스탁턴 같은 인간도 아닌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 떨쳐내고 3점 쏜다는게 쉬운건줄 알아?"라며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8] [9] [10]

3 피닉스 선즈 GM

은퇴한 커는 TNT에서 1년간 해설을 하다가, 2004년 자신이 데뷔했던 피닉스 선즈의 매각에 참여하여, 구단주 그룹의 컨설턴트로 활동하다가 2007-08 시즌 정식으로 피닉스 선즈의 GM이 된다.

선즈 GM으로 부임한 커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스티브 내쉬, 아마레 스타더마이어가 이끌던 화려한 닥공팀 피닉스 선즈는 마지막 한 끝을 넘지 못하고 결국 파이널 진출에 실패하면서 하락세를 타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일명 선골동놀(선즈 골밑은 동네 놀이터)이라는 비아냥을 듣던 골밑 수비 부재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커는 전격적으로 팀의 주전 스포 숀 매리언을 히트로 보내고 샤킬 오닐을 영입했다. 하지만 오닐의 영입은 선즈의 팀컬러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팀은 1라운드 탈락했고 감독 마이크 댄토니는 사임한다.

후임 감독으로 테리 포터를 선임하지만 한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사임하고, 앨빈 젠트리가 들어와서 2008-09시즌을 마친 선즈는 다시 예전의 닥공모드로 돌아가 서부 파이널까지 올라가는 선전을 보였지만 또다시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하고, 짠돌이 구단주인 로버트 사버가 팀의 에이스인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재계약을 망설이는 행보를 보이면서, 커는 GM직을 그만두게 된다.

4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

선즈의 GM을 관두면서 다시 해설자로 돌아간 커는, 전격적으로 2014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감독으로 선임된다. 전임 마크 잭슨 감독이 팀은 잘 만들어놨지만 팀과 상관없는 개인사에 집중하는 행보 및 독선적인 행동으로 구설수에 오르며 구단주 및 프런트와 갈등을 빚어 사퇴한 자리에 전격적으로 들어온 커는, 전임 잭슨 감독이 만들어놓은 팀의 시스템을 손보면서 잭슨 체제에서 수비적인 역할에 치중하던 앤드류 보거트, 안드레 이궈달라를 좀더 공격쪽으로 활용하고, 트위너 성향때문에 중용하지 않았던 드레이먼드 그린의 공격전개능력을 높이사 전격적으로 주전으로 끌어올리면서 지난시즌 수비 중심의 팀컬러를 스테판 커리, 클레이 톰슨의 스플래쉬 듀오의 공격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양궁농구로 전환했다.[11] 이런 골스의 태세전환은 발목 부상 때문에 꾸준하지 못했던 커리의 건강문제가 해결되면서 커리와 탐슨 두 슈터가 폭발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양궁농구를 선보이며 67승을 기록, 팀 역사상 최초의 정규시즌 60+승과 리그 전체 승률 1위를 달성하는 등 감독 데뷔 1년만에 NBA 최고의 팀을 이끄는 감독으로 주목받게 된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승리를 질주한 끝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4:2로 누르고 감독 데뷔 첫 시즌만에 파이널 우승을 달성했다. 신인 감독이 우승을 차지한 것은 1982년 팻 라일리가 LA 레이커스를 이끌고 우승한 뒤로 33년만의 기록. 골든스테이트도 76년 우승 후 39년만에 정상에 오른 것이니 여러모로 겹경사라 할 수 있다.

시즌 종료 후 허리부상으로 인한 수술 및 재활로 인해 43경기를 결장했다. 그 기간 동안 루크 월튼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는데, 팀이 개막 24연승을 달리면서 거품 소리를 듣기도 했다(...). 물론 농담삼아 하는 소리지만. 그리고 루크 월튼 감독대행 기간의 성적도 스티브 커 감독의 전적으로 인정된다.[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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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으로 1월 23일,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홈 경기에서 복귀했다. 공교롭게도 다음 경기 상대가 골든스테이트를 2경기 차이로 바짝 추격하고 있는 샌안토니오 스퍼스라, 복귀시점은 매우 절묘했다는 평이다.

그리고 4월 7일 자신의 멘토이자 스승인 포포비치가 이끄는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상대로 70승을 거둠으로 70승을 두번씩이나 달승한 유일한 사람 (한번은 선수로 한번은 감독으로) 이 되는 업적을 달성했다. 포포비치: 이거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만...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끄는 팀에서 자신이 선수로 있었던 팀의 72-10라는 기록을 깨기 위한 도전을 한다. 미국서부 현지 4월 13일기준 그가 이끄는 팀는 72승 9패. 홈경기에 상대는 멤피스 그리즐리스. 과연 그는 NBA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할수 있을것일지 모두의 눈과 귀가 주목되어있는 상태이다. 결국 125-104로 멤피스 그리즐리스에게 승리를 거두며 NBA 한 시즌 최다승이라는 신기록을 썼다! #

결국 이 업적으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2라운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의 시리즈는 대단했다. 주축 4명을 오프시즌에 보내며 탱킹시즌을 보낼줄 알았던 포틀랜드를 매력적인 팀으로 만들며 44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켜 올해의 감독상 투표 2위를 차지한 테리 스토츠 감독과의 치열한 지략싸움이 볼만했다. MVP 스테픈 커리가 무릎 부상으로 시리즈 초반을 결장한 가운데 워리어스는 1차전 홈경기를 무난히 가져갔지만, 2차전 홈에서 포틀랜드의 경기력은 매서웠다. 엄청난 야투감과 좋은 수비를 보여주며 3쿼터를 11점차 리드로 마친것. 11점차로 밀리며 매우 분개한 커 감독은 경기 최고의 한 수를 두게 되는데, 바로 4쿼터 시작할때 주전 센터 앤드류 보것을 빼고 페스터스 에질리를 투입한 것이었다. 포틀랜드의 엄청난 화력의 줄기를 담당했던 센터 메이슨 플럼리의 활약을 발이 느린 보것 대신에 발이 빠른 에질리로 교체하며 드레이먼드 그린과 함께 플럼리에서 시작되는 공격 줄기를 막으라 지시했고, 에질리는 그 지시를 훌륭히 수행했다. 플럼리 입장에서는 패스를 줄곳이 마땅치 않아지자 어쩔수 없이 본인이 골밑으로 돌격했지만 그 돌격이 잘 먹히지 않았고, 자연스레 포틀랜드의 화력도 급감했다. 심지어 에질리는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에서도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며 반격의 시작을 알렸고, 결국 워리어스는 4쿼터 스코어 34-12로 대역전승에 성공했다. 이후 3,4,5차전에서도 치열한 화력전이 벌어졌지만 결국 스테픈 커리의 복귀에 힘입어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오클라호마 시티 썬더와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빌리 도노반 감독의 유연한 전술에 매우 고전하며 1:3으로 감독 부임이후 처음으로 엘리미네이션 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썬더의 무서운 기세에도 불구하고 다소 위험성이 있는 선택이었지만 주전 체력 관리를 꾸준히 해줬다. 특히 6차전은 원정 엘리미네이션인데도 불구하고 2쿼터 초반에 주전들을 과감히 빼다가 13점차로 리드를 당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클레이 탐슨의 미친 슛감으로 경기를 놓지 않을수 있었고, 결국 시리즈를 빠르게 끝내기 위해 케빈 듀란트-러셀 웨스트브룩이 긴 출장시간을 가지게 했던 썬더에게 장기전으로 갈수록 출장시간 관리를 해준것이 빛을 보며 3연승을 따내 대역전승으로 2년 연속 NBA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NBA 파이널에서는 그런 시간분배가 독이되었다. 골든스테이트는 시리즈 스코어 3:1로 앞서고 있었지만 드레이먼드 그린의 징계로 분위기가 이상해진 가운데 5차전을 내주고 그 과정에서 주전센터 앤드류 보것이 부상으로 시리즈 아웃되었으며, 그린이 돌아온 원정 6차전마저 패배하며 3:3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홈 오라클 아레나에서 열리는 7차전이라 워리어스의 우세를 점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4쿼터에 흐름을 잡고 있었을때 잘 돌아가던 스몰라인업을 버리고 기용했던 페스터스 에질리가 르브론 제임스에게 쓸데없는 3점파울로 흐름을 다시 넘겨주는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저지르면서 패배의 원흉중 하나가 되었다. 에질리는 포틀랜드전까지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오클라호마와의 컨퍼런스 파이널부터 핵작전에 멘탈이 붕괴되며 그 이후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했고, 파이널에서도 부진을 이어갔는데 굳이 플로어에 세웠어야 했었나라는 아쉬움이 골든스테이트 팬들에게 크게 남았다. 결국 골든스테이트는 르브론 제임스의 클러치 블락과 카이리 어빙의 클러치 3점에 좌절하면서 리핏 기회를 놓쳐버렸다. 만장일치 MVP의 스테픈 커리의 부진도 그렇지만 스티브 커 감독의 용병술 실수도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5 감독으로서의 평가

젊은 그렉 포포비치
감독 첫해에 팀을 우승시킨 NBA판 로열로더

역대 최고의 슈터 및 그린과 톰슨 등 사기급 라인업을 보여하고 있어서 자칫 선수빨로 오해받기 쉽지만, 같은 선수들을 가지고 마크 잭슨은 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그의 역량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실 이제와서야 골스가 사기멤버 얘기 듣는거지 커가 팀을 맡을 때만 하더라도 골스는 전도유망한,떠오르는 젊은 강팀 정도였다. 실제로 잭슨이 이 스쿼드를 이끌고 50승대 초반으로 이끌자 칭송이 자자할 정도였다.

NBA Open Court 에서는 그는 종종 감독이 되고 싶은 열망을 이야기했고, 아마 선수가 아니었으면 선생이 되었을 것이라도 한적이 있는듯 감독직에 욕심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선수시절 함께 한 감독들이 다 넘사벽급이었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그는 레니 윌킨스, 젠 마스터 필 잭슨 그리고 그렉 포포비치 감독과 선수생활을 했는데 둘은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한명은 백퍼 입성각이다. 그런 감독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지 않았겠는가?

현재 진행형이고 더 지켜봐야 하지만 좋은 선수들을 가지고 망치는 경우는 NBA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간과하지 못할 점은 그냥 커리와 톰슨의 원투 펀치 팀 정도에 머물렀던 골든 스테이트를 그린을 과감히 스타터로 기용, 이궈달라를 식스맨으로 전환, 그럭저럭이었던 벤치 멤버들의 적시적소에 잘 사용하는 것 등은 커가 부임한 이후로 생긴 일이다. 어째 포포비치의 행보와 비슷생각되면 그런가보다 하자 A급을 S+ 급으로 만드는 일 역시 쉬운 것이 아니다. 감독으로써 선수빨을 안 받는 감독이 어디있겠는가? 실제 위대하다는 감독들은 재능있는 슈퍼스타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잘 채울 줄 아는 감독들이다.

또한 포포비치의 시스템을 받아들여 선수들 대부분이 10분내지 20분 이상을 뛸수있도록 양분의 기회를 제공하는 감독이기도하다. 장난삼아 워리어스를 상대할때는 2팀을 상대하는 기분이 든다고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편. 현재 교체멤버로 있는 선수들은 사실 어느팀에서는 이제 스타팅 멤버로도 뛸수있는 역량을 가지게된 엄청난 기량발전을 이끌어낸 양반이 이양반이다. 사실 커리어 내내 스타터로 뛰었던 이궈달라를 벤치로 돌리고, 플레이시간이 10분에서 20분 내외인 교체자원들과 지속적인 대화로 모두가 즐겁게 스리쿠션 패스를 돌리며 뛸수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낸것도 그가 감독으로서의 선수들과의 대화를 중요시하며 그들을 잘 이끌어간다는 것을 보여줄수있는 부분이다.

현지 언론에서는 탁월한 리더십, 선수의 재능을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능력. 그리고 시스템 농구를 시도하는 뛰어난 전술적 역량으로 인해 제2의 그렉 포포비치로 주목하고 있다. 스티브 커는 이미 우승과 73-9라는 업적으로 자신의 능력은 증명했기에 워리어스에서 지속적으로 왕조를 세우면 이러한 평가가 무색하지 않을 듯 싶다. 다만 2016 NBA 파이널에서 사상 최초의 3-1 상황에서 역전패를 당하며 감독 생활에서의 첫 실패를 너무 크게 겪은게 아쉬운 부분.

6 기타

  • 마이클 조던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인상과 달리 그 제왕적인 조던에게 대들어 둘이 연습중에 주먹을 주고받을 정도로 성깔있는 양반이다. [14] 98파이널 도중에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거대한 칼 말론에게 스크린을 걸어서 토니 쿠코치가 동점 삼점슛을 꽂을 수 있게 도와준 적도 있다. 물론 스크린을 걸고는 나자빠졌지만...성깔만 있는게 아니라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붙임성도 좋아서 해설자로 활동할 때나 선수 시절 당시에나 주변에서 인기가 좋았다. 슈퍼스타는 아니지만 팬들 사이에서 은근히 인기가 있는 이런 선수들을 Fan favorite이라고 하는데, 시카고 왕조 당시에 또다른 fan favorite은 론 하퍼가 있다.
  • 입담 덕에 NBA Open Court라는 프로그램에 패널로도 오래 활동했다. 각자 현역시절 가장 힘들었던 상대선수를 꼽는 대화 중 존 스탁턴에 대해 "나는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며,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더러운 후레자식(dirty bastard)"(...)이라고 한 적이 있다. 수비를 잘하기도 하지만, 정말 욕나오게 한다고 한다.[15] 심판에게 안 걸릴 정도의 파울을 미친듯이 해서 정줄을 놓게 만든다고. 또한 선수로서 참 난감했던 상황으로는 벤치 클리어링을 꼽기도 했다. 최저연봉을 받아서 벌금이나 이런 부분을 다른 스타들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는데, 한번 팀에서 패싸움이 나면[16] 스타부터 루키까지 다 뛰어나가야 했던 시절인지라 뛰어나갈 때마다 안 그래도 박봉인 판에 물어야 되는 벌금을 생각하고 한숨쉬면서 뛰어나갔다고(...)
  • 아울러 NBA Open Court에서 자신이 진짜 NBA에 데뷔했구나를 실감하게 된 시절을 얘기하면서 조던과의 추억(...)을 이야기한 적도 있다. 루키 데뷔 후 벤치에서 구경 중인 스티브의 바로 앞에서 조던이 공을 잡았다. 그런데 이 양반이 사이드라인에서 공을 잡더니, 쫄대로 쫄아있는 루키에게 씨익 웃으며 "Watch this"하더니 돌파 후 그대로 덩크를 꽂아버렸다고(...) 그 순간 제발 이 경기에 투입되지 않게 해주세요(...)를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 양반과 같은 팀에서 나중에는 주먹다짐도 하고 우승도 했으니 인생사는 모를 일.[17]
  • 조던과의 여러 일화들과는 별개로, 커는 현재 농구 관계인들 중에서 손꼽히는 조던빠이기도 하다. TNT에서 해설을 하던 시절에도 NBA Open Court에서 조던 관련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고 기본적으로 조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상당히 즐긴다. 그 외에도 NBA 닷컴에서 진행한 72승 불스는 역대 최고의 팀이었나?' 인터뷰에서도 거의 절반이 조던을 극찬하는 내용이었고 골든스테이트에서 감독으로 뛰면서 굉장히 잘 나가는 와중에도 72승 불스와 2015년의 골든스테이트와의 비교에 골든스테이트는 72승 불스와 비교할 수 없다며 조던 찬양(...)을 하기 시작하는 등. 다만 이러한 성향은 조던과 함께 뛴 선수들 대부분에게서 보이는데 현역 시절 조던과 다소 불편한 사이였던 호레이스 그랜트[18] 역시 자신이 뛴 레이커스 왕조와 불스 왕조의 비교에서 시카고의 손을 들어주며 조던은 "어떻게든 승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선수"라고 묘사하는 등 조던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아무래도 조던의 플레이를 자주 옆에서 본 선수들이니 조던의 실력이나 노력, 승부근성 등에 대해 잘 알기 때문인 듯. 다만 스카티 피펜같은 경우 불스 왕조를 언급할 때 조던만 찬양하는 것이 불편했는지 은근슬쩍 조던을 디스하기도 했다. [19] 마이클 조던은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지만 르브론 제임스는 역대 최고 선수라고 하는 등. 물론 엄청 까였다.(...)
  • 운동능력이 NBA에서 뛴 선수들 중에서 거의 원톱수준으로 떨어지다보니 191cm로 그리 작지만은 않은 신장[20]임에도 불구하고 경기 중 성공시킨 덩크가 하나도 없다. NBA란 동네가 워낙 괴물이다 보니 딱히 점프력으로 부각되지 않는 제이슨 윌리엄스나 데이먼 스타더마이어같은 선수들(둘다 178cm)도 경기 중 쉽게 덩크를 성공시킨 적이 있는데, 커는 젊은 시절에도 어림도 없었다. TNT의 어니 존슨과의 인터뷰 도중에 그의 유일한 덩크 영상이 공개된 적이 있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UYLm2s7Uc2U), 경기는 당연히 아니고 연습 도중에 동료가 림 근처로 공을 살~짝 띄워주자 여기에 거의 손만 댄 수준이다. 이것도 덩크라고 성공시키고 동료와 환호하는게 개그포인트. 사실 위에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NBA가 문제가 아니라 웬만한 KBL선수들보다도 떨어지는 수준의 운동능력이다. 한국선수들이 NBA에 비해 넘사벽으로 운동능력이 낮지만, KBL경기에 가보면 경기 시작 전 shoot around에서 젊은 포워드, 일부 가드들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덩크를 보여준다. 근데 커는 키가 191인데도 연습중에도 제대로 된 덩크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년이나 뛰었다는 점에서 그의 노력과 근성을 엿볼 수 있다.
  • 15년 2월, 올스타 주간에 스티브 커의 현역 시절과 감독 시절에 관한 기사가 올라왔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지, 워리어스를 잘 이끌어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잘 나타나 있다. 번역기사
  • 스퍼스 시절 감독이었던 포포비치나 동료이자 후배였던 팀 던컨 등과 코트 위에서 만나면 장난을 치는 등 친근한 모습을 보인다. 2015년 올스타전 당시 서부의 감독이 커였는데, 이때 던컨을 늙었다고 놀리는 (https://www.youtube.com/watch?v=H3btB7CsIQU) 등 상당한 입담을 보여준다. 1. 던컨: 저 누구 막아요? 커: 음....아니. 그냥...저기 저쪽에 볼보이 옆에 자리 있는데 거기 앉아 있어. 2. (경기 시작 전) 자네 4쿼터에 투입할 때니까 지금부터 몸 풀고 있어. 던컨: 5분 전에 얘기해줬어야죠. 너무 늦었어요. 커: 혹시 올스타전에 복도에서 (몸풀기용) 자전거 타본 적 있는 사람? 3. (던컨이 덩크를 하자) 커: 티미~~~~~!!!! 의료진! 의료진!!
  • 커의 아버지 말콤 커(1931~1984)는 생전에 중동 전문가로서 중동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내는 등 학계에서 꽤 이름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프린스턴에서 학사, American University of Beirut에서 석사, 프린스턴에서 국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UCLA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다가 레바논의 베이루트, 이집트 카이로 등을 돌아다니다가[21] 1982년에 AUB의 총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레바논은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라 치안이 안 좋았으며, 미국 대학의 총장이란 위치상 반미세력의 타겟이 되어 1984년 두 명의 자객들에게 암살당하게 된다. 그가 사망할 당시 아들인 커는 애리조나 대학에서 신입생으로 뛰고 있었다. 당시 그는 울적한 마음을 감추고 경기를 뛰었는데 팀 동료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고...
커는 4년 뒤인 1988년(3학년 때 부상을 당해 그 다음 시즌을 통째로 날려서 대학을 5년 다녔다)에 애리조나의 라이벌 애리조나 주립대와 원정경기를 치르게 되는데 경기 도중 일부 무개념 팬들이 "네 아버진 어딨냐?"란 심각한 패드립을 날리는 걸 듣게 된다. 빡돈 커는 전반에만 삼점슛을 6개를 꽂아넣는 맹활약을 보이고 애리조나는 상대팀을 28점차로 발라버린다. 4학년 때 커는 스타는 아니었지만 정확한 외곽슛[22]과 리더쉽을 바탕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소속팀을 4강으로 이끄는 맹활약을 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한때 "대학 농구에서나 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던 커는 NBA드래프트에서 2라운드로 피닉스 선즈에 지명되게 된다.
  1. 1대 궁병대장은 존 팩슨시카고 불스 GM이다. 두 선수 모두 포지션은 포인트가드 겸 3점 전문 슈터. 다만 존 팩슨은 첫 두번 우승까지는 주전이다가 1993년에 BJ 암스트롱의 성장과 본인의 노쇠화 때문에 백업으로 밀려난 것이라 평생 후보였던 커보단 훨씬 나은 선수. 물론 그래봤자 평범한 선수였던 건 마찬가지라 1991년 기준으로 "NBA 주전 포인트가드 중 가장 낮은 연봉을 받는 선수"기도 했다.
  2. 우승하고 시카고에서 열린 팬 행사에서 "마이클이 어쩔줄 몰라하길래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처럼 입담이 좋은 선수라 은퇴후 한동안 해설자로 일하기도 했다. 전설적인 NBC/TNT의 캐스터 마브 알버트와 콤비를 이뤘는데, 이 콤비는 NBA 게임인 NBA 라이브에도 목소리로 출연했으며 티맥타임을 중계하기도 했다.
  3. 이를 그냥 넘길리 없는 커는 역시 우승 후 팬 행사에서 "흠... 삼점슈터가 동점을 만들기에 좋은 상황이군, 이라고 생각해서 필(잭슨 감독)에게 그렇게 말했죠. 그러자 필은 역겹다는 듯이 '스티브. 솔직해지자고. 작년(위닝샷)은 뽀록이었어. 마이클한테 공 주고 꺼져있어(stay out of his way)'라고 하더군요. 제가 정말 훌륭히 꺼져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농담을 던졌다.과연 농담이었을까
  4. 당시 미국 대표팀으로 데이비드 로빈슨, NBA 최단신 선수 먹시 보거스, 샌 안토니오의 올스타 SF로 대학팀에서도 팀 메이트였던 숀 엘리엇, 요즘은 방송인으로 더 유명한 케니 스미스 등이 선발되었다.
  5. 다른 1명은 51년 로체스터, 52년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에서 우승한 프랭크 사울이라는 선수다.
  6. 커의 농구인생에서 가장 큰 하일라잇은 위의 1997년 위닝샷과 이때 댈러스를 상대로 한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6차전에서의 활약이었다. 당시 커는 은퇴를 앞둔 노장으로 플레이오프 내내 출전이 없었다. 그러나 승부사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팀이 지고 있는 상태에서 베테랑 커를 과감히 투입했는데 그는 3점 슛 네개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팀의 역전승에 크게 공헌한다. 이 외에 스티븐 잭슨, 마누 지노빌리 등이 활약하며 스퍼스는 난적 댈러스를 꺾고 결승진출에 성공.
  7. 한 시즌 3점 슛 성공률 1위는 2009-10 시즌 카일 코버가 기록한 53.6%
  8. 다른 버전으로는 게리 페이튼이 '니네 스티브 커가 우습냐? 걔가 여기 뜨면 너네 누가 와서 붙어도 다 발려.'했다던 버전도 있고, 심지어 스티브 커 본인이 1 on 1으로 상대를 개발라 버렸다는 버전도 있다.
  9. 어떻게 보면 당연한게 길거리 농구와 프로의 가장 큰 차이가 수비력이다. 커가 아무리 운동능력이 허접하고는 하나 (191cm에 덩크도 못 하는 운동능력이라, 운동능력만 치면 상당수 길거리 선수들보다도 못하다) NBA에서 괴물같은 운동능력을 자랑하는 포인트가드를 수비해온 선수다. 커가 비록 수비력이 약한 편이긴 하지만 아예 구멍이었다면 맨투맨 수비밖에 허용안되던 8,90년대에서 버틸 수 있었을리가 없다. 한 마디로 게리 페이튼, 페니 하더웨이, 케빈 존슨같은 괴물들을 막던 커가 작정하고 수비하는데 길거리 선수들이 그 화려한 기술을 선보일 수 있겠는가? 또한 반대로 NBA의 그 엄청난 수비를 뚫고 득점을 하곤 했던 커에게 길거리 농구선수들의 수비가 간의 기별이나 가겠는가? 아마추어가 아무리 대단해도 프로의 벽은 높다. 그리고 커가 비리비리해보여도 프로무대에서 무려 15년간이나 뛴 선수다. 결정적으로 커가 그 정도 수준밖에 안되는 선수였다면 조던이 위닝샷을 맡겼겠는가?
  10. 이 케니 스미스란 해설자도 현역시절 NBA에서 오래 활약했던 잔뼈굵은 포인트가드였다. 전술했듯 스티브 커와는 1986년 FIBA 세계선수권대회 대표팀 동기였고, 비록 NBA에서 상을 받거나 올스타에 선정된 적은 없지만 NBA에서 13시즌 737경기, 22,213분이나 코트에서 뛰었고 하킴 올라주원이 이끌던 휴스턴 로케츠 93~94,94~95 2연속 파이널 우승때 주전 포인트가드를 봤던 NBA에서도 준수한 주전급 선수였다. 이런 NBA의 A급 선수가 인정하는게 커의 실력이었던 것. 여담으로 스미스의 커리어 하이라이트로는 95파이널 1차전 올랜도 매직전이 꼽히는데 무려 7개의 3점슛을 성공시키며 당시 파이널 신기록을 갈아치웠고 특히 4쿼터 종료직전에 3점차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페니 하더웨이를 페이크로 낚은 다음에 결정적인 동점 3점슛을 적중시키기도 했다. 이 경기 승리의 1등공신으로는 경기 전반적으로 맹활약을 하고 연장종료 직전에 팁인으로 결승점을 넣은 하킴 올라주원이 꼽히지만 스미스가 없었다면 연장까지 가지도 못하고 패배했을 것이다. 또한 스미스는 은퇴선수치고 농구실력을 상당히 잘 유지한 편인데, 97년 은퇴했음에도 위 언급한 러커파크 역관광 사건은 물론, NBA 신인이었던 애틀랜타 호크스의 제이슨 테리와 3점슛 대결을 해서 이기기도 하고, 이후에도 13살이나 어렸던 前 밀워키 벅스의 올스타 3점슈터 마이클 레드를 이기기도 했다. 물론 정장을 입은 상태에서 한 거라 제대로 된 대결은 아니었지만.
  11. 골스가 무서운 것은 이런 무시무시한 공격력에도 리그 탑 수준의 수비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2016년에 올해의 수비수상 후보로 꼽히기도 했던 그린과 보거트가 이끄는 프런트코트의 위용은 상당하며, 벤치에서 나오는 이궈달라도 32세 노장치고 뛰어난 운동능력을 활용해 에이스 스타퍼로 톡톡히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에이스 커리를 제치고 2015년 파이널 MVP를 탈 정도.
  12. 스티브 커 감독은 모든 코치들과 함께 동등한 위치에서 움직인다. 상하관계보다는 평행관계를 지향하기 때문에 골든스테이트에서 코치직으로 있으면 누가 빠지든 서로의 역할을 채워줄수가 있다. 그리고 루크 월튼 코치와 적극적으로 연락을 하며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자신이 육체적으로는 없지만 코칭스태프, 선수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보다 사실 워낙 15/16골스가 강하기 때문에 이런 우스갯소리도 나오는 듯하다.
  13. 또한 커가 이끄는 워리어즈나 월튼이 이끌던 워리어즈는 차이가 분명히 있는게 선수단, 특히 벤치의 활용도였다. 월튼 대행 시절에는 시즌 초반이라 체력 여유가 있었고 벤치보다 주전활용도가 더 높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팀 운영을 하면 후반으로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지고, 심지어 정규시즌에 잘하고도 정작 중요한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할 수 있다는 함정이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한때 70승 깨냐마냐 얘기 나왔던 06시즌 피스톤즈. 그러나 워리어즈가 73승을 거둘 수 있었던 건 시의적절하게 커가 돌아오면서 월튼이 하지 못했던 벤치의 폭넓은 활용으로 한번도 슬럼프를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파이널 1차전에서는 1,2옵션인 커리, 톰슨이 비교적 잘하지 못했음에도 벤치 덕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런 식의 폭넓은 활용을 보면 커가 일천한 경험에도 경기를 읽는 눈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 커는 오클라호마와의 단두대 매치 막판에서 커리를 무리하게 기요하지 않는 도박을 벌이기도 했는데,이 때 탈락했으면 본인 커리어에 큰 오점이 남을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강단을 엿볼 수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던, 그의 스승격이었던 그렉 포포비치나 필 잭슨이 연상되는 부분.
  14. 농구 칼럼니스트 손대범의 글에 따르면 당시 조던은 아버지의 강도에 의한 사망으로 인해 상당기간 방황하기도 했었는데 이후 복귀해서 팀메이트와 연습하던 중 커가 작은 덩치에도 깡다구도 대단해서 딸리는 수비력에도 적극적으로 덤벼들고 너무 거칠게 수비해서 시비가 걸려 벌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커의 아버지가 레바논에서 테러단체에 의해 살해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출전을 강행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커에게 연락하여 사과하였다고 하며 이후로 사석에서는 상당히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15. 항상 객관적이고 깔끔한 평가를 내리던 커가 저런 반전입담을 선보여 당시 같이 있던 바클리나 케니 스미스, 샤킬 오닐은 전부 뒤로 넘어지면서 웃었다.
  16. 스티브 커가 데뷔한 1980년대까지만 해도 NBA에서 싸움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2010년대 같으면 난리가 나겠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벤치 클리어링이 숱하게 벌어지고 병원에 실려가는 선수가 가끔씩 나오기도 했다.
  17. 다만 스티브 커는 스스로를 디스하는 유머감각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실제로 쫄았다기보단 재밌게 포장했을 가능성도 크다.
  18. 다소 유약한 성격이었던 그랜트는 강압적인 조던과는 잘 맞지 않았다. 거기다, 조던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찰스 오클리 트레이드로 그 자리를 차지한 실질적인 위너다보니 빌 카트라이트 못지 않게 조던의 갈굼을 무지하게 당했다. 이때의 트라우마때문에 3회 우승한 이후 빨리 불스를 떠났다는 설이 있을 정도.
  19. 이렇게 질투섞인 반응을 보였지만 피펜 역시 90년대 불스 왕조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엄청나다. 가끔 벌어지는 트위터의 설전을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불스 왕조는 자랑스럽지만 하필 역대최고선수랑 같이 뛰다보니 은근히 폄훼를 많이 당해 (심지어 샤킬 오닐은 설전 중에 나온 멘트긴 하지만 론 하퍼나 스티브 커보다 기여도가 못하다고 깠다!) 자신의 지분을 인정해달라는 투로 디스하는 것.
  20. 사실 농구란 스포츠가 키가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그 외에 팔 길이, 어께넓이, 머리크기와 목길이(농담같지만 진짜 중요한게 머리가 작고 목이 짧을 수록 어께가 높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키에 비해 높은 곳까지 손이 닿을 수 있다.) 등 여러 가지가 중요하다. 근데 커는 팔도 짧고 어께도 좁은데다가 머리도 NBA선수치고 살짝 긴 편이고 목도 길어서 191임에도 실질적으로는 183~5인 선수들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는 피지컬이었다. 게다가 운동능력 차이까지 있으니...
  21. 그래서 커는 레바논 출생이며 중고등학교 시절을 카이로, 베이루트, LA에서 다녔다.
  22. 삼점슛 199개를 던져 114개를 성공시키며 57.3%를 기록했는데 지금까지도 NCAA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때 경기당 성공갯수는 3개로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많은 편인데, 당시는 삼점슛 자체가 도입된지 초기라 82경기를 소화하는 NBA에서도 100개 넘게 쏘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해당 시즌 NBA에선 148개를 성공시킨 대니 에인지가 삼점슛 성공갯수 1위에 올랐는데, 경기수가 두배가 넘는 걸 생각하면 커가 엄청나게 많이 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