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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59년에서 1870년 사이 분열되었던 이탈리아가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된 사건.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1]라고도 한다. 이 문서는 그 과정을 다루고 있다.
2 전개
2.1 분열기
로마가 무너지고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약 10세기에 걸쳐 교황령, 베네치아, 제노바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로 분립하였다. 이런 상태의 이탈리아 반도에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 5세가 눈독을 들였고, 그의 적극적인 흡수합병 정책을 통해 이탈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 쇠락해감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는 주변국의 알력 다툼이 심해진다. 이러는 와중에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고 1814년 이루어진 빈 회의의 결과 빈 체제가 성립하면서 여러 군소국가로 분열되었으나, 실상은 오스트리아에 예속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전파된 자유주의 사상에 힘입어 빈 체제에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오스트리아의 군사 개입과 나폴레옹 3세의 무력 간섭으로 모두 실패하였다.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났으나 이마저도 실패하였다. 2월 혁명의 실패로 인해, 앞서 주장되었던 세 가지 통일 방안 중 다음 두 가지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첫째, 교황을 의장으로 하는 연방체 구성 방안은 지오베르티(V. Gioverti)가 주장하였는데, 그는 자유주의 교황으로 알려진 비오 9세(Pius IX)에게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848년 11월 로마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교황은 나폴리 왕국으로 도피하였고, 프랑스 군대의 로마 입성으로 인해 교황은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교황은 20년간 프랑스 주둔군에 의해 그 지위가 유지되었는데, 이 상태에서 교황 중심의 연방 국가가 수립되면 프랑스의 간섭을 받을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따라서 이 방안은 무산되었다.
둘째는 첫째 방안과는 정반대인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의 공화국 건설 방안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시에 폭동을 일으켜 이를 통해 이탈리아 공화국을 창설해야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의 공화국론이 이상적이었다고 하나, 당시 이탈리아를 둘러싼 국제 정치의 현실과 이탈리아 국민의 의식 수준으로 보아 실현 가능성은 전무하였다.
위의 두가지 방안이 무산되자 가장 현실성 있는 이탈리아 통일 방안은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들 중 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국가는 사르데냐 뿐이었다.
2.2 국제 정세
- 영국
- 카보우르가 북부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위해선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필수적이었다. 카보우르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동맹국이 필수적이었는데, 그러한 동맹국으로는 영국과 프랑스 뿐이었다. 당시 러시아나 프로이센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감수할 만한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영국의 수상이던 파머스턴은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통일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 그러나 영국의 여론이 호의적이었다 하더라도 영국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면서까지 사르데냐를 지원할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영국은 1856년 체결한 파리 조약에 의한 유럽의 외교질서에 만족하고 있었고 대신 프랑스의 강대화를 견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 이탈리아가 통일되어 프랑스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는 것도 영국에 있어서는 꽤나 큰 리스크였다. 따라서 영국은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가 없었고, 이러한 태도는 파머스턴 내각을 이은 더비(E. S. Derby) 내각에서 두드러졌다.
- 프랑스
-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영국이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소극적이자 카보우르는 프랑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폴레옹 3세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프랑스 국내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폴레옹 3세가 이탈리아 통일에 관심을 가졌던 들 공적으로 지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그러는 와중에 1858년 1월 14일 오르시니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인 오르시니(F. Orsini)가 나폴레옹 3세와 황후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오르시니는 황제가 젊던 시절 이탈리아 통일에 적극적이었던 데에 비해 황제로 즉위한 이후 태도일변한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도리어 오르시니를 영웅시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탈리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 나폴레옹 3세는 코노(H. Conneau)를 보내 사르데냐 국왕과 카보우르를 만나도록 하였고, 이 자리에서 비밀회동을 가질 것을 합의하였다. 1858년 7월 20일 카보우르와 코노는 플롱비에르(Plombières)의 한 호텔에서 극비리에 회담을 가졌다. 이 때 맺어진 합의를 '플롱비에르 협약'이라고 하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사르데냐가 도발하고 이 전쟁으로 인한 국제 관계와 전쟁의 국지화 노력은 주로 프랑스가 담당한다.
- 전후 이탈리아를 다음과 같은 4개의 정치단위로 구성한다.
- 이들 4개의 정치단위는 연방으로 구성되며 교황이 그 의장이 되나 실제로는 사르데냐가 지배한다.
- 프랑스는 사르데냐 영토인 사보이를 합병한다.
- 엠마누엘 국왕의 장녀인 15세의 클로틸드(Clotide) 공주는 나폴레옹 3세의 조카인 36세의 제롬(Jerome) 공과 결혼한다.
-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 나폴레옹 3세가 두려워한 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로서는 양국의 동맹 체결을 저지하거나 적어도 프로이센의 중립을 이끌어내야 했다. 당시 프로이센 국왕이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건강이 1857년 들어 극도로 악화되었고 11월에는 그의 동생 빌헬름 1세가 섭정하기 시작했다. 빌헬름은 영국과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와는 친선을 도모하였다.
- 따라서 나폴레옹 3세는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다. 그는 러시아의 병력을 오스트리아 동부 국경에 집결시켜 프로이센의 발을 잡는 한편 오스트리아의 모든 병력이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리하여 1858년 9월, 제롬 공이 나폴레옹 3세의 특사 자격으로 당시 바르샤바에 와 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를 알현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롬 공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경우 러시아가 프랑스 편에 서서 참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국경에 7만의 군사만 주둔시키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제롬 공은 귀국 후에도 몇 차례 러시아에게 교섭을 제의하였으나 지지부진했다. 이후 제롬 공의 러시아 접촉을 알아챈 발레브스키 프랑스 외상은 제롬 공을 정치 일선에서 몰아내고 다시 러시아와 교섭을 재개하였고, 이듬해 3월 비밀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에서는 프랑스는 장차 흑해 비무장 조항의 철폐를 위해 노력하고, 러시아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기로 합의하였다.
2.3 전쟁의 시작
프랑스는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적어도 러시아의 우호적 중립은 얻어내었다. 그리고 1859년 1월 1일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짐은 우리 프랑스와 귀국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과거처럼 우호적이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 발언으로 인해 양국간에 전운이 감돌고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국제회의를 소집해 이탈리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제의하였다. 전술한 것처럼 영국은 현상 유지를 원했기에, 1859년 2월 코울리(H. W. Cowley)를 빈에 파견하여 '오스트리아는 중부 이탈리아 국가들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사르데냐를 중립화한다.'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나 사르데냐는 평화를 원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또한 이탈리아에 대한 권익을 포기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 중재안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의 영향권 안에 있던 롬바르디아의 청년들이 사르데냐로 밀입국해 사르데냐 군인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들을 롬바르디아로 귀환시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4월 초에 군대 동원령을 내리고 4월 23일 사르데냐에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물론 카보우르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드몬트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했지만 프랑스군이 도착하기 전에 완벽한 승리를 잡을 수 없었다. 프랑스와 사르데냐 연합군은 마젠타(Magenta) 전투와 솔페리노(Solferino) 전투[2]에서 승리하며 오스트리아군을 4각 지대의 요새지까지 물리친다.[3] 당시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 파견한 군대는 대부분 헝가리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군기가 문란하고 전의(戰意)가 없어 탈영과 항복이 비일비재했기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솔페리노 전투를 계기로 나폴레옹 3세의 태도가 급변하였다. 그는 카보우르와의 협의 없이 7월 11일 오스트리아 황제와 직접 만나 휴전에 합의하였다. 나폴레옹 3세의 의중이 이렇게 갑자기 변한데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제기되었다.
- 1859년 5월 투스카니, 모데나, 파르마 등지에서 혁명이 일어나 기존의 지배자들이 축출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그 배후에 카보우르가 연결되어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반도가 그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 프랑스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 오스트리아가 전투에서 패퇴하자 프랑스 내에서는 프로이센 문제가 제기되었다. 4월 오스트리아의 대공(大公) 알베르트(Albert)가 베를린을 방문해 프로이센에 연합전선을 제의했다. 프로이센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6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프랑스를 자극하였다. 프랑스가 남북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상대해야 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 오스트리아가 4각 지대의 요새지로 후퇴하며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는 빌라프랑카(Villafranca) 조약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오스트리아는 만투아와 페스키에라 요새를 제외한 롬바르디아 지방을 프랑스에 할양하고 프랑스는 이 지역을 다시 사르데냐에게 할양할 수 있다.
-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를 계속 보유한다.
- 이탈리아의 구지배자들을 다시 복귀시킨다. 그러나 혁명지도자들은 사면한다.
휴전협정은 11월 10일 취리히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카보우르는 빌라프랑카 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의 배신에 격분하며 재상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후 프랑스가 롬바르디아를 사르데냐에 양도하면서 프랑스의 지원은 끝났다.
2.4 통일의 진전
- 프랑스로부터 롬바르디아를 받은 후 통일 운동은 열강의 개입없이 이탈리아인의 힘만으로 진행되었다. 1859년 가을 파르마, 모데나, 투스카니와 교황령에서 혁명지도자들이 모여 구 지배자들의 축출과 사르데냐와의 병합을 결의하였다. 사르데냐는 열강의 개입을 두려워해 주춤하다가 1860년 1월 카부르가 복귀하여, 위 지방들의 국민투표를 거쳐 사르데냐와의 병합을 결정하자, 이를 수락하였다. 사르데냐는 곧이어 프랑스와 튜린(Turin)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에 사보이와 니스 지방을 할양하였다.
- 1860년 4월 시칠리아에서는 부르봉 왕가에 대한 마치니 파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5월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군(軍) 1,000여명이 시칠리아 섬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의 군대는 실패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팔레르모(Palermo)를 점령하였다. 그는 9월에 나폴리에 입성하였고 곧 로마와 베네치아로 진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는 프랑스군이, 베네치아에는 오스트리아군이 주둔하고 있었기에 만일 가리발디가 로마와 베네치아로 진격한다면 두 나라의 개입은 불가피했다. 카부르는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어 했다.
- 이 즈음 교황령에서 소요가 일어났고 이를 사르데냐군이 진압하였다. 사르데냐군은 남하하여 나폴리 왕국으로 들어가 붉은 셔츠단과 대치하였다. 이 때 가리발디는 자신이 점령한 지역을 모두 사르데냐 국왕에게 헌납하였고, 이로써 이탈리아는 로마와 베네치아를 제외하고 거의 통일되었고,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이 선포되었다. 초대 국왕으로는 사르데냐 왕국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추대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헌법을 채택하고 의회를 구성하여 국민 주권적 원칙과 군주적인 전통을 융합시켰다. 이후 1866년 가리발디는 이탈리아군을 이끌고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으며, 1870년에는 교황령도 새로운 이탈리아 국민군 앞에 항복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통일은 완수되었다.
3 미수복 영토
- 이탈리아 이레덴타(Italia irredenta)라고도 하며, 이와 같은 주장을 이레덴티즈모(Irredentismo)라고 한다. 1861년 성립한 이탈리아 왕국이 1866년에 베네치아를, 1870년에 로마를 합병하며 통일의 꿈을 이루었지만, 트렌티노, 알토아디제, 줄리아 등 지역이 아직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남아있었다. 이 영토의 수복을 위해 1877년 '미수복 이탈리아 협회'가 설립되었다. 이 운동은 국가통일운동의 흐름을 이어 받은 민족주의 운동이었으나, 20세기 들어서는 제국주의적 팽창정책과 결합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4 부작용
북쪽의 샤르데냐 주도하의 무력에 의한 통일이었기 때문에 남이탈리아 지방 사람들은 강제로 병합된 관계로 애국심을 갖기 힘들어졌다. 덕분에 현재 남북이탈리아 갈등의 주요원인이 되기도.[4]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솔리니의 독단에 의해 참전한 것이 주요원인이긴 하지만 애국심의 부재도 한 몫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