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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왕가.
- 前 프랑스 왕가 (1589 ~ 1830)
- 前 나바르 왕가[1] (1572 ~ 1792)
- 前 파르마 공작가 (1731 ~ 1860)
- 前 양 시칠리아 왕가 (1734 ~ 1860)
- 現 스페인 왕가 (1700 ~ 현재)
- 現
룩셈부르크 대공가 (1964 ~현재)
1 역사
1.1 시초
프랑스 카페 왕조의 한 갈래로 성 루이 9세의 막내 아들(육남)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가 시조다. 유럽 최대의 가문인 카페 왕조의 방계로 몇 안되는 샤를마뉴 때부터 족보를 추적할 수 있는 대가문이다. 근세의 경쟁자인 합스부르크 가문도 정통성면에서는 밀린다.[2] '부르봉'이라는 어원은 부르봉 라르샹보시(市). 원래는 소영주 가문이었으나 부르봉 가문의 베아트리스가 카페 가의 로베르와 결혼함으로써 왕족의 일원이 되었다.
로베르와 베아트리스 사이에서 나온 자식인 루이 1세가 공작이 되었고, 이후 1488년 장 2세가 죽음으로써 그의 동생 피에르 2세가 영지를 계승하여 루이 11세의 왕녀 안느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의 딸인 수잔은 1505년 몽팡시 가문의 샤를과 양자(養子) 결혼을 했으며, 이 샤를은 원수(元帥)로서 프랑수아 1세의 휘하에서 이탈리아 전쟁 때에 활약을 하였다.
1.2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
프랑스 부르봉 왕조(1589~1792) | 프랑스 왕정복고(부르봉 왕조,1814~1815,1815~1830) |
샤를 이후 직계가 단절이 되었다가 그의 일족인 방돔 공작 앙투안이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마르그리트의 딸 나바르 여왕 잔느와 결혼하여 위그노 교도들과 연합해 발루아 왕조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나바르의 잔느 또한 카페 왕조의 방계인 알브레 왕가 출신으로, 독실한 신교도에다 당대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위그노 전쟁에서 발루아 왕조의 섭정 태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와 프랑스의 차기 국왕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무능한 아들들을 대신하여 위그노 전쟁 당시의 프랑스를 다스리던 카트린은, 발루아 왕조의 직계가 끊어지면 가장 가까운 왕족 가문인 부르봉 가문이 왕위를 잇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잔느와 그 아들을 증오했다. 잔느 또한 아들의 왕권을 주장하며 카트린을 음험한 이탈리아 여자라고 비난했다. 어찌나 사이가 나빴던지 잔느가 병으로 급사했을 때 카트린이 그녀를 암살했다는 말이 정설로 믿어졌을 정도. 그러나 아들을 프랑스 왕위에 앉히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은 결국 사후에 결실을 맺게 된다.
잔느의 자식인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은 결국 앙리 4세가 되었다. 카트린은 앙숙의 아들인 앙리를 미워했으나, 그녀가 낳은 아들들이 후사를 볼 가망이 없자 극단적인 조치로 막내딸 마르그리트를 앙리와 결혼시켜 핏줄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둘 간의 자식은 없었기 때문에 발루아 왕조의 피는 결국 단절되고,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3] 이후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 왕의 정식 명칭은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이다.
14세기 초반에 잠시 프랑스와 나바르가 동군연합을 이룬 적이 있었지만 곧 해체되었던 선례가 있었는데[4],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한 앙리 4세가 나바르의 왕이기도 했기 때문에 프랑스 왕의 칭호에 나바르 왕이 다시 한번 덧붙게 되었다. 이후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에서는 샤를 10세까지 이어지다가 7월 혁명 때 퇴출되었다. 샤를 10세의 장남 앙굴렘 백작 루이(루이 19세)는 자손이 없었고 샤를 10세의 차남 샤를 페르디낭의 외아들이자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앙리 5세) 역시 자손이 없어서 직계는 여기서 단절되었다.
이후 방계로 넘어가서 루이 13세의 차남[5] 필리프의 가문인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에게 넘어가 루이 13세의 6대손 루이 필리프 1세가 이어받았으나, 2월 혁명 때 퇴출되었고 현재 프랑스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의 수장은 루이 필리프 1세의 6대손인 파리 백작 앙리 도를레앙(일명 앙리 7세)[6]이다.
하지만 부르봉 직계(정통주의자)의 루이 알퐁스 드 부르봉(일명 루이 20세) 역시 명목상 프랑스 왕위 계승권자다. 루이 알퐁스는 알폰소 13세의 증손자며, 어머니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의 외손녀로 현재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의 육촌에 해당하며, 앙주 공작 직함을 갖고 있다. 부모님이 나중에 헤어졌고, 생모는 그 후 두 번이나 더 재혼해서 모자관계가 썩 좋지 못하다고 한다. 게다가 1987년 후안 카를로스 국왕의 발표로 아버지의 직함인 카디즈 공작을 세습하지 못했기에, 스페인 부르봉 왕실과의 사이 또한 좋지 못한 상황이다. 2003년 베네수엘라 여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고 있지만, 혼인식 때 스페인 왕족은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아 부르봉 직계와 스페인 부르봉 간의 불화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1987–1989년 파리 백작 앙리는 라이벌인 앙주 공작 루이를 상대로 프랑스 왕실 수장 직함 사용 금지를 청원하며 법정 공방을 벌였으나 패소했다.
1.3 에스파냐의 부르봉(보르본)[7] 왕조
에스파냐의 부르봉 왕조 (1700~1808, 1813~1868, 1874~1931, 1975~현재) |
17세기 말 스페인 왕위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그리고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조와 경쟁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는 원래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가 스페인 국토를 분할할 비밀조약을 맺은 것이 들통나 격노하여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를 왕위계승자로 지목했다. 루이 14세는 이어 필리프를 프랑스 왕가의 후계자로 지명, 궁극적으로 스페인을 합병하려고 했으나,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패배해서 부르봉 왕가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가로 분할되었다. 다만 왕위만 나눴을 뿐이지, 나폴레옹 전쟁 이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은 끈끈한 동맹으로 맺어져 있었다.
18세기 초반에는 결혼동맹으로 재미를 본 합스부르크 가문의 선례와도 비슷하게 이탈리아 국가들과 결혼동맹을 추진하여 파르마 공작과 양 시칠리아 왕국 왕위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 국가들은 1860년 이탈리아 통합 과정에서 사르데냐 왕국[8]에 병합되었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는 전쟁 직후 사정을 수습하고 여러 개혁을 단행해 한 세기 간의 평화를 가져왔으나, 나폴레옹 전쟁을 겪고 다시 쇠약해졌다. 이후 19세기와 20세기 두 번이나 왕위에서 밀려났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의해 왕정이 복고되어 후안 카를로스 1세[9]가 즉위했고 2016년 현재 그의 아들 펠리페 6세가 재위중이다.
사실 혈통을 부계 기준으로 적용할 경우, 현재의 스페인 왕실은 엄밀히 말해 부르봉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왕(혁명으로 폐위당했지만) 이사벨 2세(1830~1904)의 후손이기 때문. 그녀는 형식적으로 사촌오빠인 부르봉 가문의 카디즈 공작 프란시스코와 결혼했으나, 정략결혼인 탓에 부부관계는 좋지 않았고 결국 여왕은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엄한 남자[10]에게서 아들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아들이 훗날 알폰소 12세로 왕위까지 올랐다(…). 물론 공식상으로는 부르봉 가문을 계승했기 때문에 여전히 부르봉 왕조로 불린다. 애초에 알폰소 12세의 아빠가 누군지 알 방법도 없고
사실 이 혈통 문제는 당시에도 꽤나 민감한 문제였던지라, 여왕의 삼촌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자칭 카를로스 5세)는 살리카법을 내세워 여자인 이사벨 2세 및 사생아인 알폰소 2세보다는 직계인 자신이 적법한 후계자라며 본인, 아들, 손자 3대가 무려 3번에 걸쳐 내전을 주도한 일도 있었다. 이 카를로스 백작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스페인에서는 까를리스타, 즉 카를로스파라고 한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지금도 왕위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왕위 계승 문제로 100년 동안 저런건 아니고, 까를리스타 자체가 단순히 왕위 계승 문제를 넘어 종교적 보수주의, 지역별 자치 문제 등을 둘러 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성장했기에 그랬다. 실제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말년에 입헌군주제를 구상할 당시 그가 새로운 왕으로 누구의 혈통을 지명하느냐가 당시 스페인 정가의 최대 관심사였는데[11], 결국 그는 카를로스 5세의 후손 카를로스 우고 대신 이사벨 2세의 후손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손을 들어주어 지금과 같이 왕위에 오르게 했다. 여기서 카를로스 우고를 배제하게 된 사정이 상당히 아이러니한데, 카를로스 우고와 까를리스타 세력이 프랑코에게 접근해도 대답이 영 미덕지근하자, 본인의 성향과 친하게 지냈던 주변의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의 영향과 맞물려 아예 대놓고 이전까지는 골수 카톨릭 전통주의를 유지했던 까를리스따 운동의 반을 끌고 나가 아예 대놓고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 정당으로 바꾸어버렸다. 사실 스페인 내전 당시 까지만 하더라도 까를리스트 운동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극우파 중에서도 극우에 속했지만, 종교적 전통주의 만큼 까를리스타들에게 중요한게 자기들의 안방 거점인 바스크 지방-나바라 일대의 지방 자치, 즉 정치적 전통주의였으며, 이들이 원했던 전통적 자치주의는 가치관적인 면에서도 전통 사회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좌파들 못지 않게 미워했다 [12].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파의 승리에는 전쟁 발발 이전 부터 스페인 우익들 중에 가장 조직화 되어 있고, 무장 봉기의 전통이 깊었던 까를리스타들의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코는 지방 자치 전통을 뭉개버리고, 외부 자본들을 끌여들여 스페인 북부의 전통 공동체를 해체 시켰으며, 게다가 말년에 가면 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하여 심지어 카톨릭 교회와도 충돌하기 시작하니 더이상 프랑코와 같은 배를 타고 있다가는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아예 말라 죽어버리겠다고 판단한 카를로스 우고 쪽에서 아예 좌향좌를 선택한 것이다. 현재 까를리스타 정당은 이 카를로스 우고가 세웠으며 자생적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스페인 제 2의 좌파 정당인 연합 좌파 (Izquierda Unida)가 세워질 당시 스페인 공산당, 생태주의 정당들과 함께 합당의 주축 중 하나였던 까를리스타 당(Partido Carlista)과 이 좌빨 왕족 형님(...)을 보고 복장이 뒤집어 진 나머지 가족들이 또 분열하여 새운 극우파 까를리스타 전통주의 교단 (Comunión Tradicionalista Carlista)가 있다. 그런데 둘 다 실질적인 정책적인 측면에서는 지방 자치주의 좌파에 가깝다.
인간의 유전자는 근친혼이 아닌 이상 세대를 거듭하면서 Y염색체를 제외하고 전부 흩어지게 마련이므로, 이미 Y염색체가 바뀐 이상 세대가 더 지나면 아무리 부르봉 왕조라 한들 스페인 왕이 "나는 루이 14세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하기는 좀 뻘쭘할 듯. 공교롭게도 펠리페 6세로 즉위한 아직까지 딸밖에 없는 관계로(사실상 이쯤되면 더 이상의 자녀계획이 없다고 봐야한다), 스페인의 다다음 왕은 어쩌면 또 여왕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돈 카를로스계의 후손이 왕위를 넘겨받지 않는 한 왕조명도 바뀔 듯 원칙상이라면 왕조명이 바뀌겠지만 20세기 이후 유럽 왕조에서는 모계로 계승되는 경우에도 왕조명을 유지하는 원칙을 세운 경우가 많으므로 부르봉 왕가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는 거의 부계로 계승됐을 뿐더러, 귀천상혼이 존재해서 모계계승시에도 무조건 부계성을 따르더라도 어쨌든 어느 왕가의 성이였던데 비해 절대적장자상속제 원칙이 보편화된 요즘같은 경우엔 무조건 부계성을 따를경우 왕조명이 몇대 걸러 한 번씩 바뀔뿐더러 어디서 갑툭튀한 왕조명들이 계속 나올 수 있어 그런듯하다 현재 여왕을 거쳐 계승된 네덜란드의 경우에도 왕조명은 암스베르크 家가 아니라 나사우 왕조며, 엘리자베스 2세 사후 영국 왕가도 그대로 윈저 왕가로 계승될 예정이다.
현재 펠리페 6세가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수장이다.
1.4 룩셈부르크의 부르봉 왕조
룩셈부르크는 현 앙리 대공의 할아버지인 펠릭스 공작이 샤를로트 여대공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 쟝 대공이 대공위를 이어받은 1964년부터 부르봉 왕가의 일원으로 봤으나[13]................
1987년 당시 룩셈부르크 대공이던 장 대공이 부르봉 왕가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이유는 당시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수장이(부르봉-파르마 家는 부르봉 家의 방계며 룩셈부르크 부르봉 왕조는 부르봉-파르마家의 방계다. 즉 방계의 방계) 장 대공들의 아들들이 평민과 결혼하자 이를 귀천상혼으로 취급하려 한 것. 비통치 왕가들은 오히려 지금까지도 귀천상혼을 엄격히 지키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현재 군주제를 유지하는 나라의 왕족들은 법적으로 귀천상혼을 규정하기가 쉽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분쟁일 수도. 고로 현재 룩셈부르크 왕조는 나사우 家. 그러나 왕족들은 원래 대공가에서 가지고 있던 HGDH(저하 정도?) 칭호가 아니라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후손 자격으로 가지게 된 HRH(전하)칭호는 그대로 유지한다. 한 마디로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적으로 남겼다!
2 기타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통치기가 프랑스의 여러 소설이나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경우가 많다. 왕가에 배출한 왕들이 하나같이 특별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 또한 프랑스 혁명같은 드라마틱한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
앙리 4세 이래로 왕들이 어쩐지 대대로 호색한이었던 전통이 있다.(...)
왕가의 상징은 위 그림에 나오듯 백합. 왕들의 초상화에 보면 모피에 노란 백합이 수놓아져 있다.
여담으로 버번 위스키의 버번과는 철자가 같은데 이 버번이 그 부르봉이 맞다. 켄터키주의 "버번" 카운티는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를 기념하여 붙여진 도시 이름이기 때문.- ↑ 프랑스어로 에스파냐의 나바라(Navarra)지역은 나바르(Navarre)다. 때문에 프랑스와 관련해서는 나바르라고 읽혀야 한다.
- ↑ 그럴수 밖에 없는게 합스부르크는 원래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의 듣보잡 백작가문이었다.
- ↑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자 앙리 4세의 부인이 되는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다룬 영화가 여왕 마고이다. 마르그리트(별명이 마고Margot)의 배우는 이자벨 아자니. 복잡한 과정을 통해 앙리 드 부르봉이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인 앙리 4세가 되고,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여왕인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가 된다.
- ↑ 다만 나바르 왕위는 계속 카페 왕조의 방계로 계승되었다.
- ↑ 루이 14세는 장남이다.
- ↑ 앙리 6세는 그의 아버지 앙리다.
- ↑ 에스파냐어로는 Borbón 이다.
- ↑ 전 사보이 대공국.
- ↑ 스페인 제2공화국에 의해 퇴위된 알폰소 13세의 손자.
- ↑ 프란시스코 세라노이다 공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설일 뿐이다.
- ↑ 심지어 과거 스페인을 지배한 적이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까지 거론되었다.
- ↑ 내전 전후로 해서 나온 까를리스타 단체들의 선전물들을 보면 '성 베드로의 가장 충실한 아들인 스페인을 어지럽히는 유대 볼셰비키 자본주의자들을 척결하여...'라는 식의 주장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떻게 유대인이 자본가이면서도 볼셰비키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언제부터 군중심리와 선동이 논리적인 사실 관계를 따졌던가?
- ↑ 공식적인 가문은 부르봉 파르마家며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방계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