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ame de Pompadour
1 개요
마담 드 퐁파두르, 1750년경, 프랑수아 부셰 |
퐁파두르 부인이라는 것은 퐁파두르 공작 부인인 그녀의 작위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명은 잔 푸아송.
루이 15세의 애첩 중 한 명. 1744년 루이 15세의 눈에 들어 왕의 정부가 된다. 죽을 때까지 20년동안 루이 15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치, 예술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신성로마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 러시아 제국의 옐리자베타 여제와 함께 프로이센 왕국에 대항하는 3각 동맹을 구축하는 데 일정한 역할이 있었다. 이것을 동맹의 역전이라고 해서 프랑스 외교사에서 꽤 중요한 이야기이다.
2 평민 시절
집안은 부유했지만 평민 출신으로 원래의 성은 푸아송(Poisson: 프랑스어로 물고기)이다. 아버지는 다소 무능력한 사람이었는데 횡령 혐의를 받고 국외로 도주하여 그녀가 어릴 때는 아버지가 부재 중인 가정이었다. 게다가 퐁파두르의 어머니는 상당히 미인이었는데 도덕 관념이 희박했는지 남편이 있는데도 매춘 행위를 해서 평이 매우 좋지 못했다.[1] 이 때문에 퐁파두르 부인은 생부가 어머니의 애인 중 한 명이라는 의심을 받는다.[2]
게다가 그 성씨인 푸아송도 생선이라는 뜻으로 베르사유에 들어갔을 때 이 출신 성분으로 귀족들에게 조롱을 당하곤 했다. 게다가 왕의 애첩이란 자리는 아무리 정실 부인이 아니어도 거의 대부분이 귀족이었던데 반해 그녀는 평민 출신이었던 탓에 귀족 작위는 얻었어도 은근히 차별을 받았다.[3]
후에 그녀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어머니의 애인이었던 데투알의 조카인 르 노르망 테티올과 혼인했는데 루이 15세가 사냥을 하러 왔을 때 다이아나 여신으로 코스프레분장을 하고 접근을 해서 그의 애첩이 되었다.[4]
원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왕의 애첩이 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5] 그녀의 가족들도 그걸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전부터 여러 차례 루이 15세에게 접근하려고 했으나 그때는 왕의 다른 애첩 마담 드 샤토루가 있었기 때문에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그녀가 죽은 후에야 작업에 성공한 것이다. 어쨌든 유부녀인 것을 밝혔을 때 이미 퐁파두르 부인에게 빠져버린 까닭에 남편인 테티올은 거의 강제로 이혼을 당하고 대신에 귀족의 작위를 얻었다. 테티올은 아내를 바치고 얻은 귀족의 작위를 평생 쓰지 않고 시골에 은거하며 살았다고 한다.[6]
3 왕의 애첩이 되다
왕의 애첩이 된 후, 그녀의 살롱은 당대의 사상가와 문학가가 모이는 지적 향연의 장이 되었고, 이때 나중에 혁명 사상을 퍼트리게 되는 명망 높은 사상가들이 많이 드나드는 바람에 프랑스 혁명의 숨은 후원가로 불리기도 한다.(…) 심지어 당시 사상이 불순하다며 판매가 금지되어 있던 백과전서를 판매 가능하도록 한 것만 봐도 퐁파두르 부인이 프랑스 혁명을 어느정도 앞당긴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당시 그녀의 살롱에는 볼테르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외적인 아름다움도 있긴 했지만, 상당수 왕의 정부들이 20대만 지나도 총애가 위험해졌던 것과는 달리 퐁파두르 부인은 높은 교양과 지적 매력을 무기삼아 왕을 매혹시켰다. 지금도 남아 있는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초상화를 보면 높은 확률로 책이나 악보를 보고 있거나 장소가 서재이기까지 하다. 본인도 자신의 교양미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실제로 그녀가 남긴 그림을 보면 대단히 실력이 뛰어난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고 본인도 탁월한 연기력과 성악 실력을 가져서 왕을 위한 연극을 여러 차례 공연하고 그 노래실력으로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를 무안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패션 감각도 대단해서, 퐁파두르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착 붙여 땋은 소박한 머리스타일과 세련된 머리장식은 온 유럽의 귀족 여성들이 다 따라했을 정도다. 황태자비 시절의 마리 앙투아네트도 퐁파두르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있다.[7]
국왕은 이런 그녀에게서 헤어나지를 못했는데,[8] 심지어 나이 들어 자신의 아름다움이 쇠하고 심한 냉[9]으로 불감증에 걸리자 왕을 위해 미녀들을 모은 녹원(鹿苑)을 만들어 왕 전용 하렘을 제공, 감탄한 왕이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퐁파두르 부인 뿐이다"라며 죽을 때까지 총애를 거두지 않았다. 이를 두고 프랑스 국민들은 "뚜쟁이"라고 부르며 까댔지만 어쨌건 프랑스 역사 최초로 하렘을 만드는 업적을 세운 것.(…)
심지어 루이 15세의 왕비 레슈친스카의 호의를 얻기까지 했다.[10] 왕비가 여행갈 때 숙소의 관리를 자청한 다음, 당대의 패션 리더였던 감각을 살려 왕비의 숙소를 정갈하고 아름답게 꾸며, 돌아온 왕비는 크게 만족한 나머지 "국왕 폐하에게 정 첩이 있어야 한다면 퐁파두르가 좋다." 라는 발언까지 한 것. 이쯤 되면 최종병기 그녀같은 느낌이지만 프랑스 국민과 사제들은 그녀를 죽도록 미워했다.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에서 국민들은 원래 왕의 애첩을 미워했고, 사제들은 그녀가 진보적인 살롱까지 운영하는 것을 더더욱 눈엣가시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적이 많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해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궁중 암투와 정략의 달인이기도 하다.
4 7년 전쟁에 개입하다
단, 외교적 성과는 그만 못해서, 반 프로이센 동맹에 참여하며 7년 전쟁에 개입했지만 하필 이때 프로이센 국왕은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불리는 프리드리히 2세. 푸아송(Poisson)이라는 원래 성을 가지고 생선집 아가씨라고 비웃은 게 프랑스에 퍼졌고 비호감이 되었다고 하더라... 애초에 외교적으로 프랑스와의 동맹을 주도한건 오스트리아 대사 카우니츠였고, 프랑스에서는 방어동맹 정도만 관심이었지만 현재의 벨기에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11]를 동맹의 댓가로 조공 바친다는 꾐에 빠져 공격 동맹까지 덜컥 맺어 버린다. 이 결과 당시 프랑스의 동맹 세력은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손을 잡은 사실상의 누님연방이다.(…)[12] 단, 최종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루이 15세가 한 것이 맞다. 군국 대사를 왕의 허락없이 또 사회 경제적 이유 없이 단지 친하다거나 누가 싫다고 해서 하던 시대는 분명히 아니었기 때문에... 퐁파두르도 정부 관료도 고위 귀족도 아니고 왕의 비호로 권세가 조금 있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왕의 창녀' 였기 때문이다.
7년 전쟁은 초반부터 안습의 연속이었다. 처음부터 로이텐 전투에서 프로이센에 박살난 오스트리아를 구하려다 로스바흐에서 같이 개발살이 나면서 유럽전역에선 사실상 거의 이탈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 영국과의 싸움이 주 전쟁터... 프랑스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루이 14세때 유럽 최강이던 군대가 한번에 박살난 건 퐁파두르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자거나 다른 이가 제공한 뇌물을 받아챙기고 무능한 똥별을 기용한 탓이 컸다.
전쟁 후반에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이어 즉위한 외조카이자 독일 출신(정확히는 덴마크와의 접경지대인 슐레스비히 - 홀슈타인 지방)인 표트르 3세[13]가 구제불능의 프리드리히 2세 빠돌이라서 중요 동맹인 러시아가 빠지는 바람에 전세가 급변, 전쟁 막바지에 다시 한번 기회를 틈타 영국과 동군 연합인 하노버에 찝적거려 봤지만 영국 하노버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7년전쟁 유럽 전역은 아무 소득 없이 자원 낭비만 하고 끝난다. 오스트리아에 대가로 받기로 한 벨기에도 못 받았다...
한편 이 전쟁의 여파가 어느 정도였냐면, 유럽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아메리카에서 프랑스가 영영 패권을 잃은 계기가 된다. 해외 식민지를 날린 것은 물론 얄밉기 그지없는 영국이 아메리카까지 꿀꺽하는 결과가 되니, 이 사태를 당한 국민들이 퐁파두르 까가 된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 독한 프리드리히 2세를 한때 자살 생각[14]까지 할 정도로 몰아붙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엘리자베타 여제가 몇년만 더 살아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이겼더라도 프랑스가 얻을 이익은 미미했을 것이다. 유럽 전역에서 지상전에선 활약이 없어서 오스트리아에서 당초 대가로 주는 것도 철회했기 때문에... 그리고 인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패퇴는 유럽전역 결과와 달리 이미 쳐발리는게 기정사실이라서 유럽전 승리로 대가를 조금 챙겼더라도 밑지는 장사였을 것이다.
그래도 리슐리외 추기경 이후 계속 오스트리아에 적대 노선을 걷던 프랑스의 방향을 선회, 오스트리아와의 평화 노선을 추구하고 덕분에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의 긴장 상태를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이 평화노선의 결실로 그녀 사후 그 유명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 동맹이 성사되었다.
5 업적
현재의 콩코드 광장을 건설하고 프랑스 사관학교를 후원한 적도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설립자를 후원한 쪽인데 그의 돈줄이 어디에서 나왔나 생각하면 업적이라고 하긴 뭣하다. 사관학교 개혁도 루이 15세가 7년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추태에 충격을 받아 귀족들의 반발을 물리치고 평소 국사에는 무관심했던 그가 끝까지 강행한 거의 몇 안되는 업적이었다... 프랑스 도자기 사업(세브르) 또한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새로운 색상을 개발하여 거기에 자신과 루이 15세에게서 딴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핑크색 중 그녀의 이름을 붙여 '퐁파두르 핑크'로 불리는 색이 있다.
6 사망
어쨌건 계속 권력을 잃지 않던 그녀도 결국 43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뜬다. 그녀의 병에 대해서는 왕에게서 옮은 성병이라는 견해부터 폐렴이라는 견해까지 있지만 어쨌건 일세를 풍미한 여걸의 죽음인 것만은 틀림없었다.[15] 야사에 의하면 그 순간 루이 15세가 흘린 눈물은 단 두 방울 뿐이었다고 카더라...고는 하지만 또다른 이야기에서는 그녀가 죽던 날 루이 15세는 몇몇 친한 친구만 데리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녀의 시체가 궁을 나가는 것을 보면서 '짐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눈물뿐이다.'라고 탄식했다고도 하고.[16] 어쨌든 왕족이 아니기에 원래는 궁전에서 죽을 수 없었던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궁전에서 죽을 수 있도록 머무르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고 그녀가 고해성사를 하기 직전까지 같이 있었다는 것을 봐서는 그녀에 대해서 왕도 상당히 애정을 가졌던 듯.
7 고된 궁궐생활
사실 퐁파두르 부인 입장에서는 정부 관료나 정치가가 하는 일을 겸하는 중노동의 와중에서 왕의 성욕이란 성욕은 모두 감당하면서 만찬[17]이나, 무도회에 빠짐없이 나가고 그 시간을 쪼개서 미모를 유지하기 위한 운동까지 해야 했다.[18]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살면 병이 나지 않을 수가... 게다가 여자도 너무 힘들어서 성관계를 하기 싫은 날이 적지 않은데 그런 날도 예외 없이 왕의 상대가 되어주어야 했다.
나중에 뚜쟁이(...)로도 악명을 날렸는데 왕이 요구하는 어린 처녀를 그녀가 대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걸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왕이 요구하니까 응해주는 거지. 심지어 이렇게 대준 여자들이 왕의 정부 자리를 노리고 그녀를 모함하기도 했기 때문에 한시도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사실 딱히 퐁파두르 부인만 감수해야 했던 것은 아니다. 역대 왕의 정부들은 다들 저렇게 살았다. 뚜쟁이 노릇까지 한 건 퐁파두르 부인이 거의 최초지만. 그리고 이러한 온갖 고행에 대해서 부인 스스로 "나는 그를 사랑했다.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의 옆에 있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못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가 왕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를 절대로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친구에게 쓰는 편지에 글을 적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그녀가 낳았던 유일한 자식인 알렉산드린[19]이 죽고 외손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친정 아버지도 연달아 죽었는데 그녀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화장을 하고 왕을 위해 웃고 떠들면서 연회에 참석해야 했는데 그런 그녀를 지켜본 주변의 몇몇 귀족들이 그녀를 동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왕과 오랜 동안 연인관계를 유지했는데도 한번도 왕의 아이를 낳지 못했다.[20] 전 남편과 사이에서 딸을 낳았고 왕도 많은 적자녀와 서출들이 있었던 만큼 양자 모두 문제는 없었던 것 같지만 끝내 그녀는 왕의 자식을 낳지 못했고 이것은 그녀를 심적으로 상당히 괴롭혔다. 그녀의 말년에 왕의 애첩 자리를 노리고 그녀를 모함했던 한 귀족 여인이 루이 15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쫓겨난 일이 있었다. 그 귀족여인이 아이를 낳고 공원에 산책을 나가는 일이 많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퐁파두르 부인이 변장을 하고 그 모자의 모습을 멀리서 말없이 지켜보는 일도 있었다. 자신이 낳지 못한 왕의 아이를 낳은 그녀를 상당히 부러워했던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항상 왕에게 순종적인 자세를 유지했는데 그녀가 화를 낸 적은 딱 두 번 있었고 두 번 다 왕의 공식 정부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하나는 친척이었고, 다른 하나는 13살짜리 어린애... 어린애라곤 하지만 왕의 총애를 노리고 루이 15세를 유혹했고 결국 성공했을 뿐 아니라 퐁파두르 부인을 쫓아내겠다는 왕의 각서까지 얻어냈다. 문제는 이 성공에 기뻐한 그 소녀가 그 각서를 친척에게 자랑했는데 그 친척이 하필이면 퐁파두르파였다. 결국 그 각서는 퐁파두르 부인의 손에 들어갔고 그걸 저녁에 찾아온 왕의 면전에 보여주면서 격분했다. 루이 15세는 그 길로 그 소녀를 궁중에서 추방했고 그 소녀를 부추겼던 반 퐁파두르 부인 일파도 얼마 뒤 쫓겨났다. 그리고 퐁파두르 부인에게는 사과의 뜻으로 작위를 한 단계 높여서 공작 부인으로 만들어주었다. [21] 그리고 퐁파두르는 그 각서를 보여 준 사람에게 외교에 대한 중직에 자리를 내준 것으로 섭섭잖게 보상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 하면 퐁파두르 부인이 왕을 치마폭에 휘어잡았다고 생각하고 실제 앙시앵 레짐 시대의 선전물은 그렇게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정부는 엄연히 정부였다.[22] 왕이 정신적으로 약해져서 의논 상대는 될 수 있을 지언정 실제 정치에 간섭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적었다. 실제로 모든 판단은 루이 15세가 담당했으며, 그녀는 처음 만나는 사람을 불편해 했던 왕의 비서 역할,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 수 있는 도우미 정도로 일해야 했다.(그녀의 바쁜 삶의 또 다른 과중한 업무였을 것이다. 왕이 하루에 만나는 사람이 한 둘도 아니고...)
8 예술품 수집 덕후
사후 소장하고 있던 예술품을 정리하는 데에만 1년이 걸렸을 정도로 예술광이기도 했다.[23] 여담으로 대부분의 재산을 루이 15세 앞으로 남겼다고 한다.
9 자식
자식으로는 남편 데티올과 사이에서 낳았던 알렉산드린이 유일하다. 이혼 후, 친정 아버지에게 맡겼고 이 딸을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기 위해 퐁파두르 부인은 굉장히 애를 썼다. 처음에 그녀가 희망한 상대는 루이 15세가 다른 애인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루이 15세가 난색을 표하여 무산되었고 다른 상대들도 퐁파두르 부인의 신분을 탐탁찮게 여겨 쉽게 진척되지 않았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귀족가문 후계자와 약혼시키는 데에 성공하긴 했으나 정작 알렉산드린이 어린 나이에 죽어버린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자손이 없으며 생전에 그녀가 기거했던 엘리제궁은 루이 15세에게 상속되었다가 현재 프랑스 대통령 관저가 되었다.
10 대중매체 에서
10.1 닥터후
닥터후 뉴 시즌 2 에피소드 4 "벽난로 속의 여인"에서 등장
어릴 때의 이름은 '르넷'으로, 7살 때 벽난로 벽을 지나온 닥터와 만나게 된다. 방 안에 태엽로봇이 있었지만 닥터가 격퇴한다.
1745년에도 태엽로봇이 공격하지만 10대 닥터, 로즈, 미키가 나타나 구해준다.
1753년에 로즈가 나타나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5년 후 태엽로봇의 습격을 알린다.
1758년 37번째 생일 때 베르사이유 궁전은 태엽로봇 무리의 공격을 받게 되나, 백마 아서를 타고, 거울을 깨트리며 나타난 닥터가 태엽로봇을 격퇴하고 마담 드 퐁파두르를 구한다.
닥터는 그녀를 우주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닥터가 베르사이유로 되돌아 갔을 땐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결국 그녀는 닥터를 다시 보지 못하고 1764년에 사망한다.
태엽인간들이 그녀의 뇌를 원한 원인은 아마 태엽인간들이 있었던 우주선 이름이 'SS 마담 드 퐁파두르'였기 때문인 듯.
닥터가 드로이드들이 왜 그녀의 뇌를 노리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마담 드 퐁파두르의 정신과 교감(스캔)하는데 이 때 닥터의 기억과 접선하게 된다. 이후 닥터에 대한 마음이 점차 사랑의 감정으로 짙어지는데 이 때부터 닥터를 '나의 외로운 천사'라고 부른다.
닥터도 그녀에 대해서 묘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 같다. 특히 닥터가 가지는 인생의 고독함을 느끼고 그에 대해 연모와 모성애적 감성을 퐁파두르가 보였다는 점에서 끌린 것으로 보인다.
덤으로 상당히 똑똑하다. 닥터가 마담 드 퐁파두르의 머릿속을 스캔할 때 그 과정을 문이 열린 방을 드나드는 것으로 묘사했는데, 그녀의 기억을 살펴보느라 닥터가 정신이 팔린 사이 그녀도 닥터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는 닥터의 본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보았다. 깜짝 놀란 닥터에게 "한 번 열린 문은 양쪽으로 드나들 수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하며 "닥터...닥터 누구? 진짜 이름은 숨겨져 있군요."라고 말한다. 이때 닥터가 "뭘 본거지?"라고 묻는데, 어물쩡 넘어가는것으로 봐서 절대 알아서는 안 될 닥터의 본명을 알게된것 같다.
또한 태엽로봇이 장차 다시 나타날 것을 경고하러 온 로즈가 닥터와 르넷의 시간축을 설명할 때 "하늘을 나는 배가 있고, 그 배의 안에는 당신의 인생이 벽에 걸려 있다."며 금방 이해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하자 "배 한 척이 있고 그 안에는 내 인생의 나날들이 책의 페이지처럼 정리되어 있어서, 닥터는 그 페이지를 자유로이 넘나들어도 나이를 먹지 않지만 외롭고 지친 여행자인 나는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닥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로군."라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닥터의 머릿 속을 이미 본 상태라 자기도 다른 별로 시간여행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벽난로의 연결이 느슨해서 결국 닥터와는 인연이 닿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어도 이미 시간여행을 했다. 걸개 그림을 사이에 두고 51세기의 우주선에 잠시 발을 들여놓은 것이 바로 그것.
이 에피소드를 썼던 작가 스티븐 모팻(!)이때부터 잘도 닥터의 이름이라는 떡밥을!이 컨피덴셜에서 마담 드 퐁파두르를 가리켜 "아름답고 우아하며 교양과 지성을 갖춘 근대적인 여인"이라며 "닥터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르넷과 같은 여인과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그럼 리버송은…? 재생성했짆아. 취향이 바꼈나보지. 하지만 정작 결혼은 엘리자베스 1세와 했다. 닥터마저도 같은 10대 닥터인 데이비드이며, 게다가 10대 닥터이자 역대 닥터 중 가장 연애감정에 근접한 사람은 정작 캠페니언인 로즈 타일러이다.
- ↑ 애초에 그녀가 결혼을 한 것은 쓸데없는 스캔들과 혹시나 낳을 사생아를 처리하기 위해서였고, 남편 또한 이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고위층 사람들과 연줄을 맺어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긍정적이었다고.
부창부수(...)사실 이런 식의 결혼이 은근히 흔하던 시절이긴 했다. - ↑ 역사학계에서도 상당히 강력하게 의심하는 사항이다.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이라는 인물인데 부유한 사람으로 아버지가 가출해 생활이 어려운 푸아송 일가를 강력히 후원하고 어린 잔의 공부에 많은 돈을 들였다. 그에겐 자식이 없었는데 잔이 성장한 후에는 자신의 조카와 그녀를 결혼시키고 재산을 물려주기로 약속하고 나중에 그녀가 왕의 정부가 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으며 아내가 왕의 정부가 되는데 분개했던 자신의 조카를 설득해서 아내를 포기하게 하기도 했다. 이러니 다들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라는 작위와 문장(紋章)은 가문이 단절되어 왕가 소유로 넘어온 것을 루이 15세가 그녀를 애첩으로 맞으면서 하사한 것이다.
- ↑ 하지만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도팽의 결혼을 축하하는 무도회에서였다고 한다. 이때 루이 15세가 나무(…)로 분장하고 지나가는데, 퐁파두르 부인이 떨어트린 손수건을 왕이 주워 준 것에서 세기의 연애가 시작되었다고. 한편 그녀가 루이 15세를 직접 본 것은 아직 그녀가 아주 어릴 때 그의 결혼식 행렬이 집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지켜봤을 때라고 한다.
- ↑ 일설에는 그녀가 어릴 때 점쟁이가 그녀는 왕의 애첩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그래서 가족들이 그녀를 '작은 왕비'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 ↑ 그렇다고 뭐 아주 희생자라고 하긴 뭣한 것이 미인 여배우를 애인으로 두고 살다가 나중에 그녀와 재혼했다. 게다가 그는 뭔가 비뚤어진 성향이 있었던 모양인지 요새로 치면 어린 여자아이에게 외설적인 행위를 한 혐의로 피소되기도 했다.
- ↑ 요즘도 앞 머리에 힘을 주어 부풀린 머리를 퐁파두르 스타일이라고 하며, 여기서 살짝 변형하면 리젠트다. 즉, 퐁파두르는 수많은 남성
양키들이 했던 그 스타일의 원조였다. - ↑ 왕이 바라면 언제 어디서나 성관계에 응해줘야 했다. 루이 15세는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심하게 의존하는 부분이 많았고(...) 심지어 살롱이나 방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는 퐁파두르 부인을 찾아서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방 안에서 성관계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 ↑ 이것 때문에 그녀는 비데를 발명했다.
- ↑ 그런데 사실은 이 레슈친스카 왕비가 역대 왕비와 비교했을 때 남편의 정부에게 관대한 편이긴 했다. 퐁파두르 부인이 궁에 들어와 처음 왕비에게 인사했을 때도 상당한 호의를 베풀었다. 물론 그녀도 질투심이 없지는 않아서 이따금 퐁파두르 부인을 괴롭히긴 했는데 그래도 그 정도는 꽤 약했다.
- ↑ 산업혁명 이전 벨기에 지역은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중 하나였다. 루이 14세가 자연국경선 드립치면서 계속 침략했지만 현재 프랑스의 릴지방의 코딱지만큼만 정복했을 정도로 탐을 냈음.
- ↑ 당시에도 3부인동맹이라고 불렸을 정도다.
- ↑ 이 짓을 해서 전쟁을 말아먹고 6개월 뒤 부인에게 왕위를 뺏겼다.(…)
- ↑ 프리드리히 2세는 훗날 이 당시 자신은 독약이 든 로켓을 늘 목에 걸고 다녔다고 술회한 적 있다.
- ↑ 가래나 기침 등의 증세 정황으로 볼때에 가장 신빙성 있는 것으로는 폐결핵이 꼽힌다.
- ↑ 비가 왔던지라 '공작 부인의 여행길에 날씨가 썩 좋지 않군'이라 안타까워 했다고도 한다.
- ↑ 무도회 뿐 아니라 만찬도 많았는데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부인이 항상 자기 근처에서 식사하기를 요구했다. 그녀는 그녀의 위에 허용하는 양에 관계없이 먹어야만 했다. 왕이 그것을 요구했으니까. 기름지고 고기 위주의 식단은 그녀에게는 꽤나 괴로운 것이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만찬 자리에서는 억지로 다 먹어 치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먹은 음식이 살로 가지 않도록 운동도 빡세게 해야 했다.
- ↑ 왕을 위해서(왕의 총애를 위해서가 아니다!) 미모를 유지해야 했고 그 때문에 살이 쪄서는 안되니까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승마를 해야 했다.
- ↑ 전 남편 데티올과의 자식인데 이혼 후 그녀가 친정 아버지에게 맡겼다. 루이 15세가 팡팡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후원해줬다고 한다.
- ↑ 정확히는 1746년과 1749년에 임신을 했으나 모두 유산했다.
- ↑ 그 전에는 후작 부인이었다.
- ↑ 왕의 정부가 되어서 부귀영화 누린 거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글쎄... 이미 왕의 공식 정부 자리 자체는 원래가 비공식적인 데다가 워낙 말이 많은 자리고 보장이 되지 않는 자리기도 했다. 좀 난감하긴 하지만 이런 왕의 공식 정부 자리는 그냥 왕에게 여성이 봉사하는 관료적인 관점의 일부였고 성관계는 남-여라고 하는 특수한 공직관계의 부수적 업무에 일환이기도 했다. 고소득, 고위험의 비정규직이라고 이해한다면 쉬울 것이다.
- ↑ 보통 문화-예술 후원에 대해 오해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녀의 사비를 털어서 이루어 졌다고 한다. 워낙 자선사업을 많이 하기도 했고...그 덕에 그녀가 죽었을 때 남겨진 전재산은 오페라좌의 고급 좌석을 예매하는데 드는 비용만도 못했다고 한다. 뭐 왕의 정부니가 이런저런 이권도 많이 챙길 수 있었고 사업에서도 비교도 되지 않은 신용과 유리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사업들 자체도 그녀가 챙기지 않을 수 없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