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343년 전기와 손빈이 이끄는 제나라#s-1.3군이 마릉에서 위나라#s-2.2 방연의 군대를 대파한 전투
1 배경
1.1 위혜왕의 확장정책
전국시대 초창기 패권국은 위나라였다. 위문후는 자하를 스승으로 섬기며 많은 인재를 등용했고 그렇게 등용된 이극, 서문표 등이 입법, 행정 체계를 공고히 해 전국시대에 맞춰 새롭게 개편했고 오기#s-4, 악양 등의 장수는 정복활동을 펼쳐 위나라의 강역을 넓혔다. 그후 뒤를 이은 무후 역시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 받아 훌륭한 정치를 펼쳐 위나라의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렸다. 당시 위나라는 전국 7웅 중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고 가장 부유한 나라였으며 가장 강한 보병을 가진 국가였다. 그러나 문후 말기에 들어서 국가 재정의 투자에 비해 손해가 커지는 등 패권국가의 위상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후의 뒤를 이은 위혜왕이 즉위하자 그동안 축적되어왔던 모순들이 표면화되어 혜왕은 즉위초반부터 많은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위나라가 가졌던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영토가 중원 한가운데 위치하여 방어가 매우 불리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위문후, 무후 치세에 걸쳐 위나라가 발전하고 강대국이 된 계기였다. 중앙이 위치하여 진출이 쉽고 물자가 모인다는 점을 적극 활영한 결과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국들을 상대적으로 쉽게 제압하여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혜왕 대에 이르러 주변에 강대국만 남아 확장이 어렵게 되자 이미 확장한 영토를 관리하고 방어하는 문제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위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했던 위나라의 입지가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서쪽의 진나라와는 하서지방을 두고 교전이 끊기질 않았으며 남방의 초나라의 북상은 전투의 승리로 일시적으로 막았으나 분쟁의 씨앗은 남아있었다. 동쪽의 제나라#s-1.3 역시 위나라의 확장을 크게 경계하고 있었고 인접한 조나라와 한나라와의 사이도 벌어지기 시작했다.[1][2]
- 국경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거점간의 연결에 문제가 있었다. 역시 삼진이 원래 진나라의 가신이었다 분리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그 와중에 가장 세력이 강했던 지백의 영토까지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월경지가 많았다. 당장 위나라의 두 중심지였던 안읍과 대량만 해도 중간에 한나라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3] [4]
- 문후와 문후 시절 국정을 이끌던 신료들의 후손들이 보수세력화 되어 개혁을 가로막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며 그로 인해 위나라에서 출세에 한계를 느끼고 떠나는 인재들이 많아 인재 유출이 심각했다. 진나라의 개혁정치를 이끌었던 위앙도 본래 위나라에서 출세에 한계를 느껴 떠난 사람이고 초나라의 개혁을 이끌었던 오기도 위나라 서하태수였다 그 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는 무후에 실망하여 초나라로 건너간 사람이었다. 물론 혜왕도 인재를 사랑하여 많은 인재를 끌어안으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위나라에 빠져나간 인재들의 능력치와 보수세력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만 등용되었던 위나라의 인재들간의 능력치 차이는 크다.
- 주변국들의 국력이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위나라에서 실시했던 법가적 제도와 군제개혁이 효과가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진나라와 초나라에서도 위나라 출신 인재들을 끌어가 같은 개혁을 시도하여 급격히 국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특히 인접국인 한나라는 신불해를 등용해 강한 법치정책을 추진하고 정나라를 병합해 요충지인 신정을 수도로 삼아 점점 강해졌기 때문에 가뜩이나 한나라 영토 사이에 월경지가 많았던 위나라에 큰 위협을 주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위혜왕은 이와 같은 위나라의 문제점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 계속해서 인재를 등용하고 계속 영역을 확장함으로서 위나라의 패권을 지키려고 했다.[5] 그래서 방연 등을 등용하여 인접국이자 비교적 국력이 약했던 조나라와 한나라를 신나게 털며 세력을 계속 확장했고 표면적으로 위나라의 위세는 전보다 더 강해 보였다.[6]
조나라와 한나라는 이러한 위나라의 침공을 받아 대항하지만 연달아 싸움에 패해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길밖에 없었다. 위나라 승상인 공숙좌나 대장군 방연 같은 인물들이 나름 유능한 인물들이었고 위나라의 국력이 그만큼 강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1.2 제나라의 참전
한편 당시 제나라의 왕은 위왕이었다. 제위왕은 즉위 후 9년 동안 이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에 열중했는데 순우곤이 간하는 말을 듣고 이를 멈추고 정사에 열정을 다하여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7]
아무튼 제위왕은 학문을 사랑하여 제나라 수도 임치의 남문인 직문 주변에 학교를 세우고 여러 인재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이들을 연구 결과를 정책에 반영했으며 많은 인재들을 영입하여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있었다. 그러한 인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상국 추기, 외교관 순우곤, 장군 전기와 손빈이다.
특히나 손빈은 원래 위나라의 대장군 방연과 동문수학한 사이였으나 손빈의 재주를 시기한 방연 때문에 무릎을 잘리고 앉은뱅이가 되어 미친척을 하여 겨우 목숨을 보존하다 제나라 사신 손에 목숨을 구해 제나라의 군사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방연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손빈 항목 참조. 기록상으로나 결과가 보여지는 점이나 방연을 압도했던 손빈이 제나라의 군권을 잡은 만큼 제나라의 병력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주 위나라의 침공에 시달리던 조나라와 한나라가 의지할 곳은 제나라밖에 없었고 제나라의 입장에서도 위나라의 확장은 위협적인 일이었기에 참전하여 위나라의 세력을 꺾어야만 했다.
결국 위나라가 방연을 대장군으로 삼아 조나라 한단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게 되고 제위왕에 이에 응해 전기를 장군으로 삼고 손빈은 군사로 삼아 출전시키면서 제, 위 두 나라는 본격적으로 패권을 위한 전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전기는 조나라로 진격하여 구원하려고 했지만 손빈은 지금 위군의 정예병이 모두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빠져있으니 위군의 의표를 찔러 위나라 본토로 곧장 진격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전기는 손빈의 헌책을 받아들여 위나라 본토로 진입했다.
한편 조나라를 치고 있던 방연은 크게 승리했지만 제군이 위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회군했는데 손빈은 방연의 이러한 행위를 미리 예상하고 계릉 땅에서 병사들을 충분히 휴식시켜주며 위군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고 결국 피로한 상태였던 위군은 제군의 복병과 포위전술에 말려들어 크게 패하고 말았다. 계릉전투.
방연 대패했지만 위혜왕은 그동안의 전공과 조나라에서의 대승했던 공로를 인정하여 계릉에서의 패배를 용서해 줬다고 한다. 그리고 서쪽에서 기회를 보던 진나라는 패전 소식을 듣자 하서지방을 공격하기 위해 함곡관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위나라는 여전히 강국이라 패배를 만회할 저력은 지니고 있었고 결국은 진나라를 다시 함곡관 안으로 몰아붙여 위세를 과시했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위나라의 주력 전선이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제나라를 비롯한 동쪽 전선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며 그렇게 13년이 지났다.[8][9]
2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
2.1 위나라의 한나라 침공
진나라의 침공을 물리치고 끝끝내 서부전선을 안정시킨 위혜왕은 다시 세력 세력확장을 위한 공세에 들어가는데 그 표적이 된 곳이 한나라였다. 당시 한나라의 군주는 한소공으로 유명한 법가학자인 신불해를 등용하여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그렇게 확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신정으로 옮겼는데 위혜왕은 이를 위협적으로 받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나라 역시 위나라에 패한 것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어 한나라와 비밀리에 동맹을 맻고 침공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하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가까운 한나라를 제압할 필요성도 있었다.
혜왕은 태자 신을 총대장으로 하고 방연을 장군으로 삼아 병거 500승[10]을 이끌고 한나라를 쳤다. 태자 신이 한나라의 경계에 왔을 때 위나라의 한 선비가 찾아와 대략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위나라는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고 이 세상에 왕보다 높은 지위는 없습니다. 태자께서는 장차 그 나라의 왕이 되실 몸입니다. 태자께서 한나라 정벌을 성공하시더라도 더 높게 올라갈 지위는 없습니다. 지금 위군은 오랫 동안 전쟁에 시달려서 피로한 상태입니다. 태자께서 위군을 이끌고 힘들게 성을 함락시켜 승리하더라도 왕이 되실 뿐이고 핑계를 대고 그냥 돌아가셔도 왕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싸우다 진다면 좀처럼 왕이 되길 어려우실 겁니다."
태자 신은 그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회군을 결심했지만 선비는 안타깝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태자께서 그리 생각하셔도 그리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위나라에는 태자님이 끓이는 국을 먹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태자께서 끓은 국을 먹기만 기다리는 승냥이들이 있는데 태자께서 국을 그만 끓이겠다고 한다고 고이 넘어가려 하겠습니까?"
선비의 예상은 정확했다. 태자가 핑계를 대어 회군 하려고 하자 방연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이 결사반대한 것이다. 결국 태자는 회군을 뜻을 굽히고 한나라 정벌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태자 신의 결단력 부족이라는 측면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혜왕이 잘못된 정책에도 기인한 것이었다. 내부적으로 구세력을 정리하지 않고 인재들만 불러 들여 영토를 확장하여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정책을 폈기에 방연을 비롯한 신진세력들은 어떻게든 핑계를 대어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울 기회만을 노리는데만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런데 정작 전투가 시작되자 공을 세우는데 혈안이 된 위나라 장수들은 한나라군을 쉽게 제압하고 한나라 수도인 신정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비의 걱정은 기우인 것처럼 보였다.
2.2 제군의 참전과 손빈의 작전
한나라는 위군을 당해낼 수 없자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고 제나라 신료들은 한나라를 구원하지 말자는 의견과 당장 구원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려 첨예하게 대립했다. 손빈은 한쪽에 가담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이에 제위왕은 군사인 손빈에게 계책을 물었고 손빈은 단순히 양쪽의 의견을 절충한 것이 아니라 명료한 전략전 판단에 기초한 제 3의 방안을 내놓았다. 손빈은 계획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
한나라를 방치하여 멸망이라도 한다면 위나라는 반드시 제나라와 싸움을 걸어 계릉 전투의 치욕을 씻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한나라를 구원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구하러 가면 한나라 군사는 손해를 보지 않고 우리가 생생한 위나라 군사와 싸우는 꼴이 되기 때문에 구원을 간다는 약속만 하고 실제 출진은 늦추어야 한다. 한나라의 수도는 신정은 지형이 험준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간다는 약속만 하면 한군은 필사적으로 위군과 싸울 것이고 결국 위군은 신정을 함락 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둘다 팔시적으로 싸워 지쳤을 때 출진한다면 위나라 군대를 쉽게 제압할 수 있고 힘이 약해진 한나라로부터 얻어낼 것도 많다.
제위왕은 손빈의 탁월한 식견을 높이사 그 제안에 따랐다. 한나라를 지원하겠다고 사자를 보내놓고 떠들석하게 각지에 동원령을 내리는 척 했지만 실제로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자 과연 손빈의 예상대로 한군은 목숨을 걸고 싸워 위군을 막아냈다. 방연은 일년 동안 다섯 번이나 한군과 큰 싸움을 벌여 모두 다 크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목표인 한성을 함락시키는 일은 지지부진해졌다.
이를 확인한 제위왕은 곧 전기를 주장 손빈은 부장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지난 계릉 전투 때의 전략을 사용하여 한나라 수도인 신정을 직접 구원하는 대신 위나라의 동쪽 중심지인 대량을 공격하여 한나라의 포위를 풀고 회군하는 위군을 상대하는 전략을 짠다.
2.3 방연의 반격
방연은 13년 전 패배로부터 교훈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와 싸우는 와중에도 제나라의 상황에 대해 시시각각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으며 결국은 제나라를 제압하는 것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방연은 제군이 참전한다면 신정을 직접 구원하기 보다는 제나라에서 가까운 대량 지역을 공격하리라 예상하여 미리 이 자리에 태자 신의 부대 이끄는 별동대를 배치하여 제군을 견제하고 있었고 실제로 제군이 침공해 온다면 빠른 시간에 한나라에서 철수하여 대량에서 제군과 맞서 싸울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리고 제군의 움직임은 방연의 예상과 들이맞았다. 태자 신은 대량에서 제군과 싸워 결국 대량을 지켜내는데 성공했고 방연은 재빠르게 회군하여 교착 상태에 빠진 제군을 엄습한 것이다. 제군은 이러한 방연의 움직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군은 결국 방연을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군을 추적하던 방연에게 또 다시 희소식이 전해졌다.
제군의 기강이 완전히 무너져 이미 10만이 넘는 제군 중 절반이 넘는 5만 명 이상이 도주하였고 남은 병사들도 계속해서 도망치는데 제군의 지휘부는 이를 수습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제군의 일종의 모랄빵을 얻어 맞은 듯 보였고 이러한 제군을 추적하여 전멸시키거나 대장을 사로잡는다면 13년 전 계릉의 싸움을 완벽하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승기를 확신한 방연은 태자 신과 함께 조를 나누어 강행군을 하며 제군이 도주한 마릉 방연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