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파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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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바오로
개신교: 바울
공동번역성서: 바울로[1]
성공회 세례명: 바우로 [2]
그리스어: Ο Απόστολος Παύλος (o Apostolos Pávlos),[3] Ο Άγιος Παύλος (o ayios pavlos)
라틴어: Apostolus Paulus, Sanctus Paulus
독일어: Apostel Paulus, Heiliger Paulus
이탈리아어: Apostolo Paolo, San paolo
영어: Paul the Apostle, Saint Paul
프랑스어: Apôtre Paul, Saint Paul
에스파냐어: Apóstol Pablo, San Pablo
포르투갈어: Apóstolo Paulo, São Paulo


1 개요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 : 35-39

성서에서 신약 최초로 극단적인 박해자로 시작해서, 회개한뒤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살아오며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순교한 인물
또한 사도들 중 최초로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에도 복음을 전하는데 영향을 미친 인물.[4]

그리스도교 초기에 교리를 전파했던 사도 중 하나. 사울(שאול, 샤울)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식이고, 파울로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식 이름이다. 히브리어 이름을 그리스어로 옮겨 쓰는 과정에서 사울로스(Σαῦλος)로 표기한 것이 파울로스(Παῦλος)로 변하게 된 것이다. 영미권 남자 이름 중 하나인 폴(Paul)의 어원이다.[5]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있게 한 장본인이다. 예수가 던진 이야기들을 신학적인 바탕 아래 정리하여, 로마 제국을 비롯한 각지에 전파한 사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서간(편지글)인데 이 중 대다수가 바울이 쓴 것으로, 신약성경 지면의 1/3이 이 사람이 직접 작성한 글이고 신약성경의 다른 저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위의 그림에서 보이듯 전통적으로 머리숱이 적고 체구가 작은 인물로 묘사되는데, 성경에서도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먼 외모였던 것으로 서술된다.

한국어식 표기가 바울[6], 바오로[7], 바울로[8], 바우로[9] 4가지나 된다. 따라서 위키방 합의에 따라, 중립성을 위해 본 문서의 제목은 그리스어 원어 발음을 그대로 따라서 사도 파울로스로 표기한다. 사실 전부 다 써도 된다.

원래 이름은 사울이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에 이름을 바오로로 바꾸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유대식 이름인 사울 이외에 로마 제국에서 통용될 수 있는 로마식 이름인 바오로를 함께 사용한 것이다. 그는 유대인인 동시에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는 로마 시민이었다. 이런 식으로 개명했다는 식의 해석은 사울을 거인, 큰 사람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개종 후 겸양의 의미로 작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바오로라는 이름을 썼다는 식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는데 현재 개신교의 정설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개종 이후에도 사울이라는 이름을 쓰고, 바오로라는 이름은 본격적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쓴다. 즉 원래 그는 유대계 로마 시민으로서 이름이 둘 있었고, 해외로 나가면서 편의에 따라 그리스/로마식 이름을 더 많이 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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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의 무덤은 로마에서 오스티아 항구로 가는 옛 도로인 ‘비아 오스티엔제’(Via Ostiense) 길가에 있었다. 4세기 초, 박해가 끝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으로 이 무덤 위에 성당이 세워졌다. 성당이 당시 로마를 둘러싸고 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 성벽 밖에 있었기 때문에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 즉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Basilca di San Paolo Fuori le Mura)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오랫동안 전승에서만 대성당 지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던 바오로 사도의 무덤이 수년 동안의 고고학적 발굴 작업 끝에 2010년 대성전 지하 주 제단 아래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바오로의 무덤은 대성당 주 제단 아래 거칠게 다듬은 대리석 관의 형태로 발견됐으며, 그 위에는 "순교자 바오로 사도"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앞 조각상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앞 조각상

성인으로서의 축일은 베드로와 같은 6월 29일. 개종 축일은 1월 25일로 따로 지내는데, 이 날은 바오로에게 세례를 준 성 아나니아스의 축일이기도 하다. 상징물은 서한집과 큰 .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베드로와 함께 세워진 조각상이나 그의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앞에 세워진 조각상 모두 책과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평생 자신을 괴롭히는 가시'가 있다고 하는데 대다수 학자들은 이를 시각장애[10] 간질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전해지는 설에 따르면 못생긴 얼굴이었다고. 바오로의 외모에 대해서 언급한 몇 안 되는 저작물로 사도행전 외경인 테클라행전이 있는데, 여기서는 키가 작고 대머리에 안짱다리이며 눈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고 나와 있다.

또 갈라티아서 6:17-18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낙인은 그리스어 스티그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중세수도자들처럼 예수라고 새긴 달군 쇠 인장이라는 해석까지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선교 과정에서의 갖은 박해에 따라 몸에 생긴 깊은 상처를 통해 생긴 살아있는 증거들을 의미했다는 견해가 훨씬 많다.


2 생애

성경에 의하면 타르수스의 바울라고 하는 걸로 볼 때,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베냐민 지파 소속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인 것은 분명하다[11].

또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12] [13]이로 볼 때 그는 유대인 혈통이었으나, 조부가 헬라인이라 유대적인 소양은 물론 그리스어와 고대 그리스의 학문적 소양들을 익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바오로가 언제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제자격인 루카가 쓴 사도행전에서는 유대교에서 5대 랍비로 손꼽히는 가말리엘[14]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바오로는 당시 진보했던 헬라 철학은 물론, 정통 유대교의 율법학에도 능통할 수 있었다. 실제로 로마서를 읽어보면 바울의 철학과 율법학이 상당히 뛰어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활동했던 바오로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박해하는데 선봉에 섰던 사람이다. 그 박해 중 하나는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순교 당시 유대인 측의 증인으로 선 것이다. 그의 열성적인 박해로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각처로 뿔뿔이 흩어지자, 바오로는 흩어진 그들까지 열정적으로 추격해서 잡아들이려 할 정도였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생전의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은 없는 것 같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예수의 사도들을 잡으러 다메섹로 가던 길에 갑자기 번쩍이며 하늘에서 환한 빛이 바오로를 둘러 비추었고, 바오로는 자연스레 엎어졌다. 그리고 빛 가운데서 음성이 들려왔는데,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너가 나를 핍박(=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이었다. 그래서 바오로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그 음성이 말하기를 "나는 너가 핍박(=박해)하는 예수이니라." 라고 들렸고 이에 바오로는 매우 떨면서 두려워하며 말하길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라고 하자, 그 음성은 "일어나서 시내(도시)로 들어가라. 너가 무엇을 해야할지 일러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너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듣게되리라."라고 하였다. 사울과 함께 동행하던 사람들은 그 음성은 들었지만 그 음성만 듣고 아무것도 보이지않아 어안이 벙벙해서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서있기만 하였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같이 동행하던 주변 사람들이 사울의 손을 잡고 인도하여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인도하였다. 그 후 사울은 앞을 보지도 못한 채 다메섹으로 오다가 겪은 경험이 놀랍고 충격적이라 사흘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자 환상 중에 나타난 예수의 인도로 그리스도교 신자 아나니아의 기도로 눈을 뜨게 되었고, 그 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까지 바꾸며, 다마스쿠스의 유대교 회당에서 예수를 적극 전파할 정도였다. 워낙에 극적인 변화라서 그의 변화에 대해 오늘날까지도 수없이 많이 회자될 정도이다.

어쨌든, 이 변화로 바오로는 정통 유대교인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게 되고,(그들 나름의 입장에서는 바울이 배신자이므로)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넘어 다마스쿠스를 탈출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연도를 짐작할 수 있는데,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다마스쿠스 통치권을 이양 받은 서기 37년에서 아레타스가 죽은 서기 40년 사이로 좁혀진다. 이후의 행적은 확실치 않지만, 아라비아로 가서 지냈다고 하는 갈라티아서의 내용으로 봐서 그곳에서 은둔하면서 자신을 가다듬었던 걸로 보인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아라비아를 아라비아 반도가 아니라 요르단 강 동편의 아라비아로 해석할 경우에는, 바오로가 요르단 강 동편에서 지내면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후,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전적을 생각해 그를 믿지 못하여 만나기를 꺼렸지만, 바르나바가 중재하여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서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곳의 교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바르나바와 바울를 선택하여 선교사로 파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바오로는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된다. 초기에는 키프로스와 소아시아 일대를 돌아다니며 우선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예수를 전했고, 그 다음에 그리스인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바오로의 노력으로 그리스인(헬라인)들도 그리스도교에 귀의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교 내부의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도 할례 등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논란이 일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렸고, 바울은 그리스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회의는 그리스인들에게 유대인들과의 친교를 위해 음식과 할례 문제에 조심하자는 차원에서 마무리되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다시 선교 여행을 가지만, 바르나바의 조카인 마르코의 문제로 두 사람 사이에 언쟁이 생겼다. 직선적이고 불같은 성격이었던 바오로는 결국 바르나바와 갈라서고 말았다. 다만 마르코도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걸로 보아, 아마도 나중에는 받아들였다.

이후, 바오로는 그리스로 건너가서 선교를 계속했다. 고린도, 에베소, 데살로니가 등을 거쳐 고대 문화의 중심지인 아테네로 가, 그곳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스토아 학파 등 쟁쟁한 그리스 학자들 앞에서 한 연설에는 바오로의 학문적 배경이 드러난다. 다만 이 논쟁에서 완패한 바오로는 자신이 패배한 원인이 종교를 철학적으로 논증하고자 했다는 데 있다고 판단했고, 이후로는 오로지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종교를 논증하였다.[15]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교회들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내놓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간 바오로는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죽을 뻔했다가, 로마군에 넘겨져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초 예루살렘에 헌금을 전달한 뒤에 로마 제국으로 가서 선교할 예정이었던 바오로를 그의 로마 제국 시민권을 알려서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황제(=네로)에게 직접 항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로마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에 따라 바오로는 로마로 가게 된다.[16][17]

로마 제국으로 압송된 후 행적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대체로 바오로가 1차 석방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바오로는 로마 제국에서 선교하다가 로마 대화재 이후에 다시 붙잡혔고, 그 주범으로 몰려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화형이 아닌 이유는, 로마 제국 시민권을 보유했기 때문이라 전해진다.[18]

그의 마지막 말은 “예수”로 알려져 있다. 처형된 시기에 대한 주장은 학자마다 다르긴 하지만, 서기 62년에서 68년 사이라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바오로가 참수된 후 그의 목이 떨어진 자리에 팻말이 세워져 전해지고 있으며 산 파올로 알레 트레 폰타네 성당(Chiesa di San Paolo alle Tre Fontane)이 이를 기념하는 성당으로 5세기에 세워진 후 16세기에 재건축되었다.

평생을 복음 전파에 바쳤다는 이미지와 달리, 그의 선교 여행 기간은 48~60년으로 12년 남짓하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선교 운동이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3 사상

예수 그리스도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된 야고보와 예수의 직계 제자들인 12사도들은, 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당대의 코스모폴리탄적인 분위기에서 그리스 등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 전역에 선교하여, 그리스도교가 세계 종교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사실 야고보와 베드로 등의 12명의 사도들과 달리 바오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고, 유대교 쪽으로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학을 수학하며 외웠고, 로마 제국 시민권자로서 당시 그리스(헬라) 철학에도 상당히 능통하였다. 한마디로 타고난 천재. 이렇게 체계적인 학문을 달달달 외우고 익힌 인물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당연히 예수에 대한 사상을 정리하는 방식도 달랐다.

무엇보다도 바오로가 다른 제자들과 달랐던 부분은, 유대인이 아닌 자들도 예수를 믿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바오로는 여기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바오로는 믿음 이외의 다른 것들, 특히 유대인들이 중시했던 '혈통'과 '율법'을 중시보다는 믿음을 강조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유대교와의 연속성 속에 있으려고 했던 야고보나 베드로 등의 사도들과도 다를뿐더러, 일반적인 유대인들로서는 선뜻 받아드리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실제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회당에서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들어오니 당황하며 이리저리 변명을 한 일이 나중에 바울에게 질타당한 적이 있다. 그만큼 바오로의 사상이 혁명적이었고, 베드로 등의 사도들도 혈통주의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화이다.

그의 신학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을 통해 의인의 신분을 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19]이다. 그는 믿음을 통해 의인이 되어 '믿음의 조상'으로 선포된 아브라함의 사례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의로움에 이르기 위한 그 어떤 인간의 노력에도 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축복임을 들어 이를 입증하였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수행, 공덕과 같은 의로운 행위를 통한 구원의 완성을 주장하는 다른 여타 종교와 구분된다고 주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교리 중 하나이다. 외치고 다니는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도, 바울의 이러한 주장에 사상적 배경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스도교의 이신칭의론으로 이어지는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사상적 배경은 모르고 그냥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만 아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욕을 먹는 빌미를 제공했다. "천국 가는 티케팅을 미리 해놨으니 누릴 것 좀 누리고 살아볼까?" 내지는 "이렇게 살다가 죽을 때 믿고 회개해야지!!" 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고 있을 리 없다. 사실 원문(로마서 1장 17절 참고)에 더 근접한 해석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 아니라 오로지 그 믿음으로이며, 바오로는 오히려 로마서 군데군데에서 율법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서 항목 참고.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바오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대교의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해 율법 논쟁을 일으켰다. 바오로는 유대교의 율법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지, 외면적인 율법 행위의 시행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역설했다. 예를 들면 할례를 시행한다거나, 안식일과 정결규정을 지키는 것 등. (이는 예수가 율법의 핵심으로서 말한 바이다.)

이는 예수가 생전에도 바리새인 등 기성 유대인을 대상으로 비판한 바이기도 하다. 유대교 관점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유대인이고 선민의 표시였기 때문에, 바오로는 유대교의 정체성을 흔드는 자로 간주되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오로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당시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율법 행위들을 중요시하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오로의 입장에서는 율법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반대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율법주의를 고수해온 유대인 입장에서 곱게 보일 리는 없었을 것이다.


4 바오로에게 예수는 상징적 아나그램?

사도 바오로가 역사적 예수를 배제하고 예수의 신화적 상징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학문적 주장이 있다. 이를 신화론(Mythicism)이라 부르며, 많은 학자들의 사이에서 논의되어 왔다. 연원을 따지면 1927년 J.M.Robertson의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신화론자라고 딱히 무신론자인 것도 아니고, 반대론자라고 다 신자인 것도 아니다. 일례로 바트 어만(B.D.Erhman)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복음서에 비판적이고 신자도 아니지만 신화론에 반대한다.

출전은 제목과 페이지, 가능하면, 원문까지 실어서 원 저자의 '맥락' 확인이 가능해야 한다. 이글을 찬, 반으로 나눈다


4.1 신화론

신화론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성경에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한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심은 전적으로 신비한 가르침에 중점을 두는데, 바오로는 스스로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고 분명히 밝힌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20].

바오로는 예수를 어떤 역사적 시대나 장소와 전혀 관련시키지 않는다. 디모데서에서는 본시오 빌라도를 언급하지만, 데살로니가 1서 2장에서는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고만 말할 뿐이다.

바오로는 나사렛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으며, 나사렛 예수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세례 종교로 묘사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전혀 언급치 않는다.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 특정 산에서 설교하는 예수, 그의 비유, 바리사이인들과의 논쟁, 로마 제국 관헌과의 충돌에 대해서도 그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만일 바오로의 예수가 신화적인 아나그램으로서의 상징이 아니라, 바울이 예수의 생애를 잘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바오로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정식으로 인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생애를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단 한 번만 예수의 말을 인용한다. 그 인용문은 현재 가톨릭과 성공회 미사에서 영성체 때 사용하는 공식 문구이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고린토1서 11장 24~25절 (공동번역성서)

바오로가 이 구절을 인용할 때 그는 예수가 '잡히시던/배반당한 밤에' 그런 말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쪽 번역이든, 그런 번역은 '예수의' 역사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스어 원문을 왜곡한 것이다. 원래의 그리스어로는 '넘겨지는(delevered up)' 때에 그런 말을 했다. 넘겨진다는 것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려고 죽음으로 넘겨지는 자, 곧 파르마코스의 운명을 언급할 때 사용되던 말이다.

자신의 가르침을 뒷받침하고 싶을 때는 4복음서의 예수의 말이 아닌 구약을 인용한다. 예수의 말을 인용해도 효과가 마찬가지이거나 훨씬 더 예수의 말이 효과적이었을 상황에도, 구약만을 인용한다. 천국을 위해 결혼을 포기한 자를 예수가 칭찬한 구절이 있지만, 바울은 자신의 독신 생활을 변호하기 위해 그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다. 또한 부활할 때 사람의 육체가 변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마르코 복음서 12장 25절).'[21]

또 다른 주장으로는 바오로의 가르침은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와 상충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여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권력자와 세상에 대한 태도이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서 16장 33절)'고 언급하고 있어, 세상의 권력자나 집권층에 굴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 자신도 공회나 사제 카야파, 대사제 안나스의 뜰 안에서 그들의 권세에 굽힌 바가 없다.

물론 바오로가 예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예수의 생애까지 세세하게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고 사도들의 구전과 서간을 통해 접하였으니, 쉽게 언급할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말을 한다든지, 아예 자신이 익숙했을 구약에만 의존하는 것은 그냥 넘어가기에는 문제가 많다. 예수의 일생을 자세히 모른다고 그가 일생을 바쳐 전파하려 했던 가르침까지 모르지는 않을 것이며, 예수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그를 언급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논리적 비약을 하자면 그가 예수에 관해 많이 알고 있지 않았으며, 자신의 뜻을 전파하는데 예수의 이름을 도용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주류 문헌 비평가들과 성서 연구가들은 이쪽을 지지하고 있다.

예수를 실존한 하나의 윤리적 인간으로 파악하는 역사적 예수를 다루는 관점에서 보자면, 바오로는 철저하게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바트 어만은 <예수 왜곡의 역사>에서, 바오로는 분명히 예수를 실존했던 인물로 믿는다고 말한다. 사실 이건 '신화론'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바트 어만은 바오로가 예수를 실존인물인가 허구의 인물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이미지만을 중시하고 진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예수 왜곡의 역사>에서도 왜 사도 바울이 '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온다'고 주장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나와 있다.

이상이 신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4.2 반대론

위의 신화론은 그 근거를 사도 바울의 전체 행적이 아니라, 그의 서간에만 한정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에 대한 자료가 사도행전과 그가 쓴 2가지의 서간뿐인 게 현실인데, 서신만을 근거로 한다면 그 결과는 '바오로' 자체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그의 편지 쓰는 스타일에 대한 분석이 되어버린다.

위의 신화론에서 문헌 연구가들과 성서 비평학자들의 예로서 언급된 바트 어만(B.D. Ehrman)도 그의 저서 〈예수는 실존했는가?(Did Jesus Exist?)〉 제4장에서 사도행전에 실린 바오로의 발언들을 중요한 자료로 취급하고 있으며,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p.109-113)

위의 신화론에서는 갈라디아 서간과 사도행전에 모순이 '장난이 아니다'란 이유로 사도행전을 불신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위에서 '바오로의 저작인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절대로 가지 않았다고 하지만'이라고 썼는데, 바로 다음 줄인 갈라디아서 1장 18절에 분명히 "그리고 3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하고 예루살렘 방문 사실이 적혀있다. 사도행전에도 바오로가 회심 후 일정 기간 활동을 하고 그 후에 예루살렘을 방한 것으로 나와 있다. 모순이란 한 소스에서 두 주장이 나왔는데, 그중의 하나가 사실이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거짓이 되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며,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에서의 "서술 관점의 차이" 정도를 모순이라 할 수 없다.

사도신경 및 바오로의 편지의 일부에 따르면, 바오로는 이방인 및 유대인들과 활발히 토의하는 과정에서 나사렛 예수[22], 예루살렘[23], 본시오 빌라도[24], 세례 요한[25]을 모두 언급한다.

바오로가 주님의 기도를 직접 인용한 적이 없는 점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서 토의의 대상이었다.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26], 로마서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라는 고백이 '주님의 기도도 모른다'에 바로 연결되기에는 비약이 심하다. 여기서 주장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는, 전체 문맥으로 볼 때 구원에 대한 내용이다. 반면 마태오복음 6장에 언급된 주님의 기도는 일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할 때 가져야 하는 자세와 함께 언급되었다. 자신을 경건하다고 드러내면서, 또는 마음이 담기지 않거나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오로의 편지에 4복음서의 내용이 거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반신화론적인 학설들이 존재한다.

  • 바오로의 활동시기에는 지금과 같은 복음서 체계가 완비되지 않았다. 가장 이른 마르코 복음서 작성 시기도 예루살렘 함락 시기인 70년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바울의 죽음 후에야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40~6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바오로가 복음서를 충분히 습득했을 가능성이 적다. 그리고 랍비 교육을 받은 바울에게는 구약 구절들이 당연히 더 익숙했을 것이다. 바울 활동 당시는 12명의 사도를 비롯하여 '예수를 직접 접했던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었던 시기였고, 이런 사람들의 증언이 후대의 '문서화된 복음서'를 대신하여 '살아있는 복음'으로 쓰였다.
  • 바오로가 예수의 말이라고 명시하지 않은 부분에서도 예수의 발언이 인용되었을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 바오로가 예수를 인용하지만, 정작 그 구절은 4복음서에서 누락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복음서에 누락된 예수의 몇몇 발언들을 '아그라파(Agrapha)'라고 부른다.
  • 예수의 실존을 가정했을 때, 예수를 생전에 본 적도 없고, 한동안 신자들을 박해했던 바오로가 지상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예수와 직접 만나고, 얘기했을 성도들이 있는 교회들에 편지를 보내며 예수 일화를 인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공생애를 함께한 것이 아니라 후에 영적 체험으로 예수를 접한 바울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활동이며, 그런 사실이 뻔히 다 알려져 있는데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도 않아 정확하게 알리가 없는 사건을 자세히 언급' 한다면 오히려 그의 설교가 당시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신뢰성을 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시기는 아직 예수와 공생애를 함께한 증인들이 남아 있는 시기였으므로 굳이 바오로가 예수의 생애를 언급할 필요성은 낮다. 그런 역할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었으니까!
  • 비 그리스도교 문서로 그리스도교가 언급된 예는 수에토니우스, 플리니, 타키투스, 요세푸스 4건인데, 그 중 타키투스의 글이 가장 자세하고 후세 삽입 시비도 없다. 타키투스는 네로 치하의 로마 제국에 퍼지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유대에서 본시오 빌라도에게 죽은 어떤 이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적고 있다. 그게 1세기 중후반 로마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 정도였다. 한편 요세푸스의 기록은 후대가필 시비가 있지만, 엄격한 문헌비판을 거치고 남은 부분만으로도 예수의 실존을 시사한다. 바트 어만도 이 부분을 인정했다(Did Jesus Exist, 60-61페이지). 예수/역사 문서 참조.

지배층에 대한 바오로의 가르침이 예수와 배치된다는 주장에도 반론이 있다. 당시 상황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시기였다. 이 상황에서의 처세는 최대한 윤리적인 모범을 보이면서 은신하는 것이 최선이며, 그 대표적인 예가 카타콤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전에 언급하는 말은 '선으로 악을 이길 것'을 전제로 주장하고 있다.

로마서 13장을 쭉 읽어보면 이후에는 예수의 말 중 하나인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르코 복음서 12장 17절)'와 유사한 '여러분은 그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국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국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로마서 13장 7절).'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지배층을 하느님의 사자로까지 묘사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또, 바오로가 예수의 언행을 인용한 코린토 11장 23-24절의 경우, 위의 신화론에서는 "잡히시던/배반당하시던" 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어휘가 "넘겨지다(handed over[27])"라는 추상적, 상징적 의미를 가지므로 역사적 사건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화적 상징이라면, 그 "넘겨짐" 사건이 발생한 게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1장23절은 예수가 '밤'에 성찬에 대해 언급했음을 분명히 한다. 이것은 바오로가최후의 만찬과 그 후의 '넘겨짐'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찬성론에 B.D.Ehrman이 전거로 언급된 것은 다소 의외인데, 이 양반은 단순히 '바오로가 예수의 실존을 믿었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고, 바오로의 편지들을 근거로 역사적 예수의 실존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기 때문. <예수는 실존했는가> 130 페이지를 보자.

"- 바오로의 발언들은, 그가 예수를 몇 년 전에 살았던 역사적 (historical) 인물로 믿고 있었음을 분명히 한다(makes it very clear). 바오로는 예수의 탄생,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다윗 왕에서 이어지는 가계, 형제의 존재(그 중 하나의 이름이 야고보인 것), 유대에서의 활동, 12명의 사도, 스승으로서의 역할, 죽음을 예지함, 최후의 만찬, 유대인에 획책된 죽음, 십자가형에 대해 언급했고, 가끔, 그 가르침도 언급했다."

어떤 사람 A가 자기가 본 적도 없는 다른 어떤 사람 B의 출생, 가계, 가족, 행적, 죽음에 대해 알고 있고 언급했는데, A가 B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논리적 무리가 따른다. 위의 신화론에서 "바트 어만은 바오로가 예수가 실존인물인가 허구의 인물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이미지만을 중시하고 진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출전을 밝히지 않아서 확인이 불가능하다.

바오로가 자신만의 사상 표출을 위해 예수를 이용했다고 하는 상당한 억지 주장이 만약 존재한다면,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거룩한 전승(Sancta Traditio)의 필터링에 걸렸을 것이기에 지금까지 성인으로 공경 받아오기에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28]

이상은 신화론에 대한 대략적인 반박이다.


5 평가와 오해

초기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기여하고 그리스도교의 체계적인 사상을 수립한 바오로였지만, 생전에도, 그리고 사후 수천 년이 이르도록 갖가지 논쟁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바오로는 사후에 그리스도교의 중요 인물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마르틴 루터종교개혁으로 인해 다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바오로와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는, 바오로 서간에서 이신득의와 같은 종교개혁 사상의 원천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믿음'과 함께 '행위'를 중시하는 가톨릭과 달리[29], 오로지 '믿음'을 강조하는 개신교에서는 바오로의 이신득의 사상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오래된 오해임을 다시 한 번 밝혀두는 바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러 개신교에서도 진실한 믿음에는 그 실천이 따른다는 선언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엉뚱하게도 이 말을 "온갖 악행을 다 해도 믿음만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상당히 미개한 인간이 있기 때문에 잡음이 있는 것.[30]

이로 인해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한때 바오로에 대한 연구를 제한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에서 바오로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바오로는 높은 (그리스적)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신학(특히 부활 신앙)을 정리한 최초의 인물이며, 성경에서의 비중에서 보듯 유대 폭동(유대 반란, 유대-로마 전쟁) 이후 살아남은 그리스도교 집단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여러 가지로 서양 사상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답게 갖가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당시 바오로의 사도성은 매우 크게 수용되었다. 서술되었듯이 바오로는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야고보 등을 만나서 그들에게 자신의 신적 권위를 인정받고, 때로는 그들의 잘못을 대담하게 훈계하기도 했으며, 그의 서신들은 여러 교회에서 읽혀지며 대량으로 필사하곤 했는데, 이는 바오로에 대한 인식이 매우 커나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오로가 쓴 편지(=서신, 서간)들에서, 유독 자신이 사도이며 사도로서 임명한 존재가 바로 예수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런 이유에서였다. 사도행전에서는 첫 머리에서 사도의 조건을 나름대로 정의하는데, 이 조건에 따르면 바오로는 도저히 사도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1세기 그리스도교 문서를 살펴보면, 넓은 의미에서 사도라 부르는 용법도 있었던 듯하다.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도그마) 상에서 예수는 부활했으며, 승천을 하여 지상에서 모습은 감추었지만 그 영향력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얼마든지 지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나타나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바오로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는 가능성을 그리스도교 교리 내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영적으로 예수를 직접 만나는 체험을 겪었다는 사람은 바오로 이후에도 셀 수 없이 많이 있어왔다.


바오로는 반유대주의자?
바오로의 생전에도 이런 시각이 지배적이어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난동에 휘말리기도 했고, 그를 반유대주의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이 오늘날에도 남아있어서, 유대교 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교와 대화해도 바오로에 대해선 논하기 싫다"고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바오로를 반유대주의자로 보는 건 턱없는 오해다. 바오로가 주장하는 건 유대인의 율법으로 하느님에게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오로가 말한 율법은 유대인들이 제 나름대로 뜯어 고친 율법, 즉, 정통 유대인들의 유전으로 알려진 그것들을 말한다. 바오로는 그것이 하느님에게 구원을 받는 필수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역설한 것일 뿐, 율법의 내면적인 모습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적극 찬성했다. 게다가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내 동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차라리 내가 지옥에 가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반유대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5.1 바오로는 여성차별주의자?

고린토1서에서 "여성은 교회에서 기도를 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에 머리에 수건을 쓰십시오. 남자의 머리는 예수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입니다."라고 한 것 때문에 주로 제기되는 문제이다.

고린토1서 14장 33~35절(공동번역):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질서가 아니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모든 교회가 하고 있는 대로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
디모테오1서 2장 11~15절(공동번역):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먼저 아담이 창조되었고 하와는 그 다음에 창조된 것입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 또한 있다. 당시는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해 있던 고대였으며, 고린토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 중 무질서하게 자신의 발언을 저마다 강력히 외치는 문제가 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이 나서서 발언을 하는 일은 그당시 교회 밖 사회에서 아직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자칫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새신자들이 충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서이다. 또는 당시 발언이 제한되었던 여성이 발언권을 얻자 갑자기 폭발하듯 여러 발언을 하려 해서 교회가 어수선해지자 '교통정리' 차원에서 이런 지적을 했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또한 바울이 자신의 여성 동료들을 존중하고 인정했다는 흔적이 그의 서신들에서 보인다. 로마서를 전달한 것으로 보이는 포이베[31]라는 여성의 예를 들면,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던 당시에, 바오로가 자신의 서간을 여성에게 맡겨 전달하게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또한 바울이 자신을 도운 동료들을 언급하면서 성녀 프리실라와 성 아퀼라 부부를 언급하는데, 통상 고대에서 부부를 언급할 때는 남편의 이름을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아내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일반적다. 하지만 바오로는 아내인 프리실라를 먼저 언급하고 남편인 아퀼라를 그 다음에 언급했다.[32] 이것 또한 바울을 여성차별주의자로만 비춰지기엔 무리가 있다고 제기 할 때 꼽히는 사례이다.

하지만 여성의 침묵을 명하고 있는 코린토1서 14장 34-35절의 경우에는, 후대의 필사가 고쳐 썼다는 입장보다는 바오로가 반론하기 위해 인용했다는 반박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한국어 번역 성경에서 생략되어 있지만, 여성에 대한 침묵을 명령한 35절과 이후의 36절 사이에는 이접적 접속사 e가 포함되어 있으며 36절의 비판 대상인 '유일한 자들(monous)'는 남성 복수형 대명사라는 것이 그 근거이다. 특히 반박설의 경우에는 34절-35절의 여성에 대한 침묵 명령을 교회 내의 남성 예언자 그룹의 권력 독점을 위한 주장으로, 36-38절의 예언의 독점에 대한 비판을 저러한 남성 예언자 그룹의 여성 탄압에 대한 바오로의 반론으로 해석하면 전개가 매우 자연스러워진다는 장점이 있다.

반박설을 수용한다면 바오로는 교회 내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 예언자 그룹의 억압을 비판하며, 여성들도 얼마든지 교회에서 예언을 할 수 있으며, 이를 억압하는 자들은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즉, 바오로는 오히려 교회 내에서 여성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인물이 된다.


6 매체에서

뮤지컬 - (이마고데이(Imago Dei) - 하느님의 모상): 한국 가톨릭에서 2008년 제작하였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사도 바울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공동번역성서는 성공회정교회에서 사용하지만, 막상 성공회에서 본 문서에서 다루는 인물에 대해 논의할 때는 다른 개신교 종파에서 사용하는 표현인 '바울'을 사용하기도 한다.
  2. 성공회에서 세례명을 본 인물의 이름을 따서 지을 때는 '바우로'라고 한다.
  3. 고대 그리스어 발음은 Paûlos(Παῦλος)이다. 하지만 히스패닉계의 이름인 파블로(Pablo)나 러시아파벨(Павел) 같은 이름은 중세 및 현대 그리스어 발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b나 v음을 갖게 된 것이다. 앞의 Ο는 정관사로, 그리스어에는 고유명사에도 정관사를 붙인다.
  4. 다른 사도들과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5. 여담으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사울과 공통점이 있자면 이름, 두 인물 모두 베냐민 지파인 것이다.
  6. 개역성경과 새번역 성경에서 사용한 표기법으로,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에서 사용하는 표현.
  7. 가톨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표기법으로, 이탈리아어식 표기인 Paolo에서 비롯되었다. 공동번역 성경을 썼을 때는 일시적으로 '바울로' 표기를 사용했으나 2005년 가톨릭 성경이 새롭게 나오면서 현재 한국 가톨릭에서는 세례명으로 쓰일 때든, 전례에서 성경을 낭독할 때든, 아니면 신학적인 이야기를 할 때든 100% '바오로'로 지칭한다.
  8. 공동번역성서에서 사용한 표기법. 그나마 가장 원어 발음에 가까운 표기이고, 실제로 리즈시절 한때 가톨릭에서 이 표기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공동번역성서가 현재는 가톨릭개신교 모두에서 투명라인 찬밥 취급을 받고 있는 관계로, 현재는 정교회에서만 사용하는 표현이 되었다.
  9. 성공회에서 교인들의 세례명으로 쓰일 때 사용하는 표기법. 물론 성공회에서 신학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성공회에서 사용하는 성경인 공동번역식 표기인 '바울로'를 사용하거나, 다른 개신교 종파에서처럼 '바울'을 사용한다.
  10. 사도행전에 회심 때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졌다고 하며 여러 서간에서 '이 서간은 대필자에게 구술한 것'이나 '특별히 큰 글자로 필사된 책을 가져와라' 등등 바오로의 시력이 좋지 않음을 보이고 있다. 다만, 대필자에게 구술한 경우는 감옥에 갇혔을 때 대필을 맡겼던 경우도 종종 있다.
  11. 자신이 필립보서 3장 5~6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12. 사도행전 22장 22~29절에 보인다. 「(전략) 군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자 바울은 거기에 서 있던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 있소?" 하고 항의하였다. (중략) 파견대장은 바울에게 가서 "당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이 사실이오?" 하고 물었고, 바울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파견대장은 "나는 많은 돈을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소." 하고 말하자, 바울이 "나로 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고 밝히니 바오로를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물러갔다.」(공동번역성서)
  13. 그가 로마 시민권을 얻은 것은 그의 할아버지가 로마의 용병으로서 군복무를 한 대가로서 그의 가문에 주어졌다고 한다-출처: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4. 예수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 진보주의 랍비인 힐렐의 손자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이 사람은 랍반 가말리엘 1세로 본다.
  15. 이와 반대로 이후 중세 시대의 교부들이나 스콜라 철학은 그리스 철학의 여러 이론들을 기반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다. 하지만 종교 개혁 시기에 와서 루터 등의 종교 개혁가들은 철학적인 논리를 사용하여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던 여러 시도들이 실패했다고 규정한 뒤 다시 바오로적 전통에서 기독교를 변증하려고 시도한다.
  16. 중간에 폭풍을 만나 배가 몰타 섬에 난파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7. 이 항해의 기록이 참 압권인대, 뜬금없이 시돈에 들리지를 않나, 크레테 섬 주변에서 죽어라고 빙빙 돌지를 않나, 나중에는 유라글로라는 광풍을 만나서 떠밀려 가질 않나, 최종적으론 배가 개발살나고 나서야 모두 구원을 었었답니다!란 식의 막장스런 엔딩이 튀어나온다.
  18. 그러나 초기 교회 역사에서 이상할 정도로 순교에 집착하는 것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 일단 스테판의 순교가 근원이긴 한데, 유난히 해당 지역, 곧 시리아가 이상하게 순교주의를 좋아해서 순교 타령을 늘어놓는 기록들이 집중되어있고, 성향이 비슷한 지역을 제외하면 신뢰할 수 있는 순교 기록이 그다지 많지 않다. 이상하다면 당장 위키백과라도 들러서 사도전승 기록들을 전부 뒤저보라. 그리고 이 시리아가 중세 말기까지 온갖 신흥종교...혹은 이단의 발생지였기도 하다는 점은 참 많은 의혹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바오로가 관제를 드릴 때가 되었다는 언급을 하는대, 관제는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제사를 의미하며, 순교와는 별 관계가 없다!
  19. 이 개념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입장에서 해석의 차이가 있다.
  20. 갈라디아서 1장 12절 (공동번역성서)
  21. 다만 신학자들은 예수 사후에 50년 즈음(약 서기 80년경)에 이르러 신약성서의 초본이 정리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바오로는 64년~67년 즈음에 죽었으므로 물론 '전승'으로서는 예수의 행적이 전해졌겠지만, 그것이 체계화된 서간의 형태로 정리되진 않았을 것이다. 이전 버전에서는 '예수의 사후 50년'과 'AD 50년'을 혼동하여 'AD 65년경 사망한 바오로는 신약을 접했을 것이다'는 서술이 있었다.
  22. 사도행전 26장 9절에서 아그리파에게 자기 과거를 회고하며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말한다.
  23. "그리고 3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갈라디아서 1장 18절)."
  24.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와 본시오 빌라도에게 당당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나는 그대에게 명령합니다(디모데오서 6장 13절)."
  25. 사도행전 19장 1절부터 4절에 걸쳐 에베소 사람들과 세례자 요한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도 세례자 요한과 예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강론한다.
  26.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작성된 마르코 복음서에는 기도와 전례에 대한 많은 내용이 있지만, 주님의 기도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27. <예수는 실존했는가> 122페이지
  28. 당장 교황 성 클레멘스 1세(97년경 순교)의 서간이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104년경 순교) 서간만 봐도 베드로 편지와 바오로 편지를 동시에 인용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베드로와 바오로룰 두 사람 모두를 자기가 직접 만났을 때의 이야기까지 한다.
  29. 행위구원론이나 (세미)펠라기우스주의가 절대 아니다. 행함과 믿음을 분리시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만 관련 문서에서 몇 번을 강조하는지(...)
  30. 실제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인답게 사십시오. 그러나 악을 행하는 구실로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입니다(베드로전서 2장 16절).",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로마서 6장 15절)."을 생각해 보길 권한다.
  31. 뵈뵈, 태양신을 뜻하는 포이보스의 여성형
  32. 고린토1서에서는 아퀼라가 먼저 언급되어 있다. 프리실라가 먼저 언급된 건 사도행전, 로마서, 티모테오 2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