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왕후

文明王后(?~?)

신라의 왕후 문명하신 왕후가 아니다. 삼국유사에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사실은 訓帝가 아니라 燻製다. 이름은 문희(文姬)이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였다고 한다.[1] 일반적으로 본명인 '문희'가 잘 알려져 있다.

신라의 명장인 김유신의 둘째 누이이며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왕비, 문무왕 김법민의 모후이다. 아버지는 김서현, 어머니는 만명부인이다.

1 김춘추와의 만남

그녀가 김춘추의 아내가 된 일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이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버전.

어느 날 언니인 보희가 문희에게 자신이 꾼 꿈을 얘기했다. 즉 보희가 서라벌남산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았는데 그 소변이 서라벌 시내에 가득 찼다고 한다.산에 올라가는 동안 목이 많이 말라서 샘물을 있는 대로 퍼마신 모양 키루스 2세 하위호환문희는 그 얘기를 듣고 언니에게 비단 치마를 꿈값으로 주며 그 꿈을 샀다.

며칠 뒤에 오라비 김유신이 김춘추를 집에 데리고 와서 축구축국을 하다가 그의 옷을 밟는 바람에 솔기가 터졌다. 이에 유신은 보희를 불러 옷을 꿰매어 주라고 시켰는데 보희는 한번 튕기려고 그랬는지 눈치가 없었는지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2]로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문희에게 바느질 소임이 돌아갔는데 이후에도 김춘추가 올 때마다 김유신이 문희를 불러서 그에게 보였다는 것이다.

2 오빠의 꾀로 맺어진 인연

그래서 춘추가 문희와 정을 통하여 아이를 가졌는데 이를 김유신이 알고 노하여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문희를 기둥에 묶고 장작을 쌓은 채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훈제부인이 정말 훈제가 될 뻔 했다. 그런데 그날이 하필 선덕여왕이 산에 올라가서 서라벌을 관망하는 날이었다고.

이에 선덕여왕이 연기를 보고 그 연유를 물으니 주위에서는 김유신의 누이가 외간남자의 아이를 가졌으며 노한 김유신이 누이를 태워 죽이겠다고 훼이크 친다는 저런다는 얘기를 일러바쳤다. 선덕여왕이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자 옆에 있는 춘추공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자신이라고 자백했단다(...) 이에 여왕이 얼른 가서 여인을 구하라고 명하여 춘추가 뛰어가서 문희를 구하고 그녀에게 장가들었다는 것이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외숙부인 김유신에게 시집가서 지소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사랑과 전쟁스러운 요소가 많은 설화인데 사실상 역사적인 신빙성은 매우 낮으며 다만 금관가야계였던 김유신의 혈통 때문에 신라왕실의 성골에 가까운 진골인 김춘추에게 문희가 시집가는 과정이 매우 어려웠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이야기이다.

3 삼국사기에서의 기록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와 비슷하지만 좀 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의 개입이나 김유신의 불쇼(…)가 적혀 있지 않은 것이 포인트. 특히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이를 해결해 주지만, 문무대왕비에 기록된 수명을 토대로 역산한 문무왕의 생년은 626년인데 626년은 진평왕 재위기.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로,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며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언니가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가 앉고는 오줌을 누어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진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을 말하니, 동생은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고서 꿈 값을 치뤘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은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꿰맵시다."라 청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 (寶姬)를 불러서 바늘과 실을 가지고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언니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그 앞에서 꿰매어 주었다. 옅은 화장과 가벼운 옷차림을 하였는데, 빛이 곱게 사람을 비추는 모습이었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바로 혼인하자고 요청하고는 곧 예식을 치렀다.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법민(法敏)이다. -<삼국사기> 권6, 문무왕본기 문무왕 1년(661년) 여름 6월

4 후일담과 평가

어쨌든 그렇게 맺어진 후 김춘추와의 사이에서 일곱 아들을 두었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 3품 이상에게 명하여 송별 잔치를 열게 하여 우대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춘추가 아뢰기를,"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고명하신 폐하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진덕왕 2년(648년)

우선 장남은 모두가 잘 아는 신라 30대 국왕 문무왕 김법민이고 차남은 삼국통일에 일익을 담당했고 대당외교의 핵심인물이었던 김인문. 그 밑으로는 김문왕, 김노차, 김인태, 김지경, 김개원이 있다.[3]

또한 딸도 장녀는 대야성주 김품석에게 시집갔으나 대야성이 함락될 때 죽음을 당한 고타소였고[4] 차녀는 일길찬 김흠운에게 시집갔는데 둘 사이의 딸이 신문왕비 신목왕후로 효소왕성덕왕을 낳았으며, 삼녀는 김유신에게 시집가는 지소부인. 즉 지소부인은 외삼촌에게 시집간 것이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김춘추는 7남 5녀에 서자가 3명 있었다고 하는데 서자를 제외하면 이들이 모두 문희의 소생인지에 대해서는 이설도 있다.

어찌 보면 신분에 차이가 있는 상대와 사랑을 나눈 집안 내력(?)을 똑같이 따라한 여성이다. 당장에 아버지 김서현은 금관가야의 후손이면서 진흥왕의 조카딸인 어머니 만명부인과 야합해서 맺어진 사이였고, 큰오빠 김유신도 기녀인 천관녀를 사랑했던 경력이 있었던 것결국은 말목 자르고 비극으로 끝났지만을 생각하면 아버지와 오빠의 행동을 보고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국 그의 남편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 무열왕이 되었고 둘 사이에서 난 아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수하여 그 후손들이 신라의 왕위를 이어가게 되니 사실상 이 집안에서 가장 대박을 터뜨린 인물인 셈이다.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여담이지만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의 탄생 설화가 문희와 김춘추가 결혼한 이야기와 완전히 똑같다. 산에 올라 오줌을 쌌는데 사방이 은빛으로 변하더라는 꿈을 작제건의 어머니가 그 언니에게서 샀는데 당숙종이 집을 찾아와 옷을 꿰매달라고 청했고 언니가 코피가 난 탓에 작제건의 어머니가 옷을 꿰매주어 둘이 눈이 맞아 작제건을 낳았다고 한다.

  1. 언니 보희의 어릴 때 이름은 '아해(阿海)'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희와 문희의 아명은 오늘날의 '아기', '아이'와 비슷한 의미의 아명이었던 것 같다. 애기야~
  2. 일설에는 여자의 마법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다.
  3.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에는 김인태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삼국사기 태종 무열왕 2년조에서 김인태의 존재가 확인된다.
  4. 고타소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문희의 딸이 아니지만,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문희의 소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