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종(고려)

(민종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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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국왕
6대 성종 왕치7대 목종 왕송8대 현종 왕순
묘호민종(愍宗) → 목종(穆宗)
시호위혜극영정공선양대왕
(威惠克英定恭宣讓大王)
군호개령군(開寧君)
작위양국공(讓國公)
능묘의릉(義陵)
왕(王)
송(誦)
효신(孝伸)
절일장령절(長寧節)
배우자선정왕후(宣正王后)
아버지고려 경종
어머니헌애왕후(獻哀王后)[1]
생몰년도음력980년 5월 20일 ~ 1009년 2월 3일
양력980년 7월 5일 ~ 1009년 3월 2일 (30세)
재위기간음력997년 10월 27일 ~1009년 2월 3일
양력997년 11월 29일 ~ 1009년 3월 3 (12년)

1 소개

고려의 제7대 왕. 경종천추태후의 아들. 이름은 송(誦)이고 왕자 시절의 군호는 개령군(開寧君)이다.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신하에 의해 폐위된 군주이다. 동성애 의혹이 있는 왕으로 신라 혜공왕도 비슷한 의혹이 있긴 하다. 항목 참조.

태조 왕건 사후, 고려 광종에게서 이어진 광종계 왕통의 마지막 국왕이다.

2 일생

2.1 초기

불과 생후 13개월만에 부왕 경종이 붕어하면서 재위는 당숙이자 외삼촌인 성종이 이었다. 그러나 성종 역시 후사가 없었기에, 그 뒤를 이어 1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즉위 후 어머니에게 '천추태후'의 칭호를 올렸다.

초기에는 제법 의욕적인 면모로 정치를 해 나갔는데, 아버지 경종이 제정한 전시과를 손보고 학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줘 학문을 장려했으며, 지방을 순시하며 그 지방의 빈민 구제와 민생 안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서경을 '호경(鎬京)' 이라 이름을 바꾸고 여기에 자주 행차했다. 호경은 서주의 수도로 종주(宗周)라 불렸고 낙읍은 성주(成周)로 불리었다. 또한 개칭과 동시에 서경의 관부도 태조대의 낭관으로 환원시켰는데 이는 서경유수로 격하되었던 서경의 권위를 복구시키고 나아가 서경이 고려의 근원지라는 의식의 발호였다.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북방의 성들을 수축하고 군제를 개편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 목종의 업적을 섭정하던 어머니 천추태후의 업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종과 천추태후가 몰락하는 강조의 정변 때 처리를 보면 이 때 숙청된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가 40여명에 불과해 왕이 바뀐 정변치고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또한 당시 하공진이나 탁사정처럼 목종을 보위하는 무장들도 강조의 정변에 가담하기도 했다. 천추태후가 군제 개편을 해서 군부를 장악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때 목종을 보위한 무장들까지 강조에게 가담한 것을 보면 섭정을 했다고는 해도 천추태후에 대한 불만세력이 많았으며, 정변 때 숙청된 사람 수를 보면 이는 그녀의 국정 장악력이 생각보다는 대단치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치를 잘 해나가던 목종의 불행은 그의 어머니였던 천추태후가 초래했다. 천추태후는 권력욕에 불타 아들인 목종의 나이가 성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내세워 섭정하였다. 또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을 저지른 끝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은 후에 처벌받을 거라는 위기감과 목종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노려 이 아이로 하여금 다음 왕위를 잇게 할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이다. 목종 역시 저 둘의 사이를 알고 있었지만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라서 처벌하지 못했다.

때문에 목종의 뒤를 이을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였던 대량원군 왕순을 강제로 중으로 만들어서 삼각산의 신혈사로 보내버렸다. 왕순은 출가한 이후 신혈소군이라 불리었다. 고려시대엔 왕위계승권이 미약한 왕자를 소군이라 하여 출사시켜 그 계승권을 박탈시켰는데, 그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서 승려로 만든 것이지, 사실상 왕위에 오를 길을 막아버리기 위해 궁에서 몰아내버린 것이다. 이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계속 대량원군을 암살하려하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번번히 목종과 신혈사의 승려들이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한편 천추태후의 총애를 받던 김치양의 권세는 대단히 커져서 자신의 친족들을 제멋대로 요직에 앉혀 국정을 어지럽히는가 하면 재물을 긁어 모아서 초호화 저택을 짓는 등 그 사치와 낭비가 매우 극심했다. 이런 인물이 권세를 쥐고 있으니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2.2 말년

이처럼 천추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은 김치양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목종은 김치양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천추태후의 잇달은 훼방으로 실패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목종의 재위 초기에 보였던 의욕이 넘치던 모습은 사라져버렸으며, 신하 접견을 거부하거나 향락에 빠지는 등 갑자기 무기력한 군주로 변모해 버린다. 이 모습은 말년에 정치에 뜻을 잃고 항락에 빠져 소일했다는 아버지 경종과 비슷하다.

이 때에 유행간이라는 남자가 등장하여 목종의 동성 연인이 되었다. 유행간은 외모가 아름답고 신체가 뛰어나서 굉장한 미남이었다고 전한다. 이 덕분에 유행간은 목종의 총애를 받았고 별다른 공도 없이 벼슬과 재물을 얻었다. 이후로 유행간이 목종에게 발해 유민 출신인 유충정이라는 남자를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그 역시 미모가 수려하려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 때문인지 뒷날의 공민왕과 더불어 남색 경험이 있는 고려 국왕이 되어 버렸다. 단, 공민왕의 남색은 날조라는 설이 있다.

1009년 봄에 왕실 기름창고에서 불이 나서 천추태후가 거처하던 천추전이 불탔다. 이 화재사건을 목종을 시해하기 위한 김치양의 소행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고려사에는 이 때문에 왕이 근심이 심해져 병환이 나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등쌀에 떠밀려 의욕을 상실한 목종은 병환까지 얻어 정사조차 돌볼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로 유행간과 유충정은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많은 궁인을 부리며 조정의 신료들을 업신여기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면서도 병에 걸린 왕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당시 목종이 유행간과 유충정을 제외하고는 아무하고도 만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들은 유행간과 유충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어명과 같이 여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조정은 곧 천추태후의 세력을 등에 업은 김치양과 목종의 총애를 받는 유행간, 유충정 등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신세로 전락했다.

2.3 강조의 정변, 그리고 폐위

그러나 아무리 만사에 무관심해진 목종이라도 김치양의 득세는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목종은 양위를 결심한 뒤 몰래 중추원부사 채충순을 불러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을 불러 오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서북지역을 지키던 도순검사 강조에게 밀사를 보내어 '김치양 일파를 처단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라'는 지령을 보낸다.

이 밀지를 받은 강조는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출발했는데, 도중에 거짓왕명이라는 말에 속아 넘어가 돌아갔다. 그 후에 강조의 아버지가 빨리 개경으로 오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 내용 중에 '목종이 이미 죽었다'는, 당시 나라에 돌던 뜬소문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의 편지를 읽은 강조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해 목종의 명령에 따라 김치양 일파를 처단하고 목종의 후계자인 대량원군을 추대하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수도로 왔다. 그런데 막상 수도에 오니 목종은 살아 있어서 입장이 난처해졌고, 결국 수하들과 의논한 끝에 김치양 일파를 처단한 뒤 아예 목종을 폐위시켜 '나라를 양보한 공작'이라는 뜻의 존호(尊號)인 '양국공(讓國公)'으로 끌어내린 다음에 대량원군을 즉위시켰다.

2.4 최후

졸지에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목종은 몇몇 궁인들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자신의 외가가 있는 황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 궁인들은 폐위된 목종이 황주로 내려갈 때 유행간과 유충정도 같이 갔다는 말이 있는 걸로 보아, 불온세력으로 간주되어 함께 썰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목종은 자기를 망쳐버린 어머니의 말고삐를 직접 잡아 끌었고, 어머니가 배고프다고 하면 음식을 나눠먹을 정도로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웠던 강조는 부하인 김광보와 안패를 시켜 목종을 추격하게 하였다. 이들은 결국 후에 따로 충주로 향하던 목종을 뒤쫓아가서 임진강변의 적성에서 그를 시해하였다. 이렇게 목종은 향년 30세로 생을 마감했다.

목종을 시해한 후 강조는 현종에게 "목종이 자살했다"고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처음에 목종에게 올려진 묘호는 민종(愍宗)이었으나 훗날 목종으로 고쳐졌다.

3 평가

훗날 귀신이 되어 통주에서 요성종에게 대패하여 수세에 몰린 강조 앞에 나타나 "너도 이제 끝장이다!"라며 일갈하기도 한다. 이 목종의 혼령을 본 강조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데꿀멍했다는 기록이 정사인 고려사에 나온다. 사실 후대의 각색임이 분명하지만, 진짜 데꿀멍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목종 귀신 때문이 아니라 그도 장수였던만큼 자신의 패배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았기 때문에 목종을 떠올리고는 후회하며 털썩 주저앉았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여러 가지로 의욕이 넘치는 젊은 군주였지만 어머니와 김치양 때문(그를 죽인 건 강조였지만 일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이 둘이 제공했다)에 신세를 망쳐버린 불행한 군주. 어떤 의미에서는 본래 받은 묘호인 '민종'이 그에게 걸맞는 묘호라 하겠다. 또한 병에 걸려 정사를 포기했다는 기록때문에 병약한 군주로 여겨지기도 쉽겠지만 목종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명궁이었으며 말타기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귀양길에도 자신과 번번히 충돌했던 어머니 천추태후를 극진히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니 개인적으로는 성품이 올바르고 효심도 상당했던 것 같다. 어쩌면 강조의 정변을 당한 이후로 초탈하여 성격에 변화가 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4 동성애

고려 역사서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게이왕. 어린 나이에도 여자에겐 관심이 없어서 아내도 선정왕후(宣正王后) 유씨 1명 뿐이고 선정왕후와의 사이에 자식도 없었으며 이 때문 젊은 나이에 후사를 걱정하는 듯한 말을 하기도 했었다. 더욱이 그는 왕으로 있는 동안 아름다운 용모의 남자들을 곁에 끼고 살다시피 했다.

『고려사』 열전의 유행간 열전에서는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신하였던 유행간을 매우 아껴서 용양(龍陽)의 관계까지 맺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용양이란 것은 소위 말해 남색(男色), 즉 동성연애와 같은 의미이다. 이후 유행간은 목종의 측근이 되어 높은 벼슬에 올라 목종의 곁에서 정사를 좌지우지 했는데, 성품이 오만해서 신하들을 깔보며 고개와 눈짓으로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또한 발해 유민 출신인 유충정이라는 사람 또한 별다른 이유 없이 목종의 총애를 받아서, 유행간과 더불어 목종의 곁에 붙어다니면서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는데, 그 또한 목종의 동성연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은 있지만 유행간과는 달리 목종과 동성애를 했다는 집적적인 기록은 없다. 유행간은 강조가 정변을 일으켰을 당시에 살해당했으나 유충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불명.[2]

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천추태후(드라마)에는 주인공의 아들인만큼 비중있게 등장. 배우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광해군을 연기했고, 이후 근초고왕에서 아직기추노에서 봉림대군역을 맡은 이인. 그런데 본인의 업적을 모두 천추태후에게 빼앗겨 버리고 본인은 대단히 의욕 없는 왕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 편인데다 성종이 아기 때부터 그를 천추태후와 떼어놔 사실상 성종의 아들로 성장했기에, 한 달에 한 번 볼까말까인데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주변환경과 성향이 다른 친어머니를 어려워했다.

어쨌든 어머니를 싫어하지는 않으나 어머니 옆에 있는 김치양을 싫어해서, 그리고 왕의 자리가 싫어서 김치양과 왕위 관련해서는 어머니에게 매우 대든다. 사촌동생인 대량원군과는 친한 편. 처음에는 마치 고자처럼 등장하더니 결국 유행간과의 동성연애도 재현되었다. # 일단 부인이나 후반 갑툭튀한 김씨나 유행간과 할 수 있었던 걸로 봐서 고자는 아니니 다행. 그리고 김치양의 반란 즈음 해서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부인과 어머니를 극진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지만...팬들 사이에선 다중인격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야말로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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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추태후(千秋太后)
  2. 가끔 유충정이 신체가 뛰어난 탓에 유행간의 소개를 받아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으나 사실 사료적인 근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