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공국

폴란드의 역사
Historia Pol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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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왕국폴란드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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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폴란드 망명 정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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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공화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러시아령입헌왕국러시아령소비에트령


Księstwo Warszawskie (폴란드어)
Herzogtum Warschau (독일어)
Duché de Varsovie (프랑스어)

바르샤바 공국
Księstwo Warszawskie(폴란드어)
Herzogtum Warschau(독일어)
Duché de Varsovie(프랑스어)
프랑스 제1제국괴뢰국
국기국장
1807년 ~ 1815년
위치동유럽
수도바르샤바
정치체제입헌군주제
국가원수공작
언어폴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종교천주교
주요사건1807년 설립
1772년 1차 분할
1815년 멸망
통화즈워티
성립 이전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왕국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
멸망 이후폴란드 입헌왕국
크라쿠프 자유시

1 개요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만든 공국. 1807년에서 1815년 까지 존속했다.

2 역사

2.1 배경

1795년 3차 폴란드 분할폴란드가 멸망한 이후, 구 폴란드 영역은 분할된 상태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1806년 프로이센은 영국, 러시아 등과 함께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프랑스 군에 연패하게 된다. 폴란드 인에게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미 많은 폴란드 인들이 폴란드의 주권을 되찾아 줄 사람은 나폴레옹 밖에 없다고 믿고 프랑스로 탈출한 상태였고, 현지에 남아 있던 공화주의자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2.2 건국

프로이센의 대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된 1806년, 폴란드 지역에서는 징병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폭동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확대되어, 바르샤바 공국이 되는 지역은 프로이센의 지배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새롭게 구성된 정부는 동프로이센에서 프로이센을 지원하러 온 러시아 군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 군에 식량과 물자를 공급했다.

1807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러시아와 틸지트 조약을 맺고 강화하였다. 이 조약의 일부로서 바르샤바 공국의 건국이 승인되었다. 바르샤바 공국은 위성 국가로서 건국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언젠가 나라의 영토와 주권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고 있었다.

바르샤바 공국은 형식적으로는 독립 공국으로서, 하원(세임)이 존재하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형식적으로는 작센 왕국동군연합이 되어 있었다. 작센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3세의 손자에 해당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바르샤바 공국을 그 이상으로 발전시키는데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공국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인물은 수도 바르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프랑스 대사였으며, 공국은 해외 외교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2.3 오스트리아 전쟁

1809년,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동맹(제5차 대불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하면서, 프랑스와 동맹인 바르샤바 공국 역시 오스트리아와 전쟁에 돌입했다. 라신 전투에서 패배하여 오스트리아 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나, 폴란드 군 역시 선전하여 오스트리아에 병합되었던 지역을 많이 점령했다. 결국 이 전쟁의 결말로 맺어진 쇤브른 조약에서 남쪽으로 영토를 확대하여 과거 폴란드 령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2.4 러시아 원정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원정을 나서게 되자 폴란드 역시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여 적극적으로 이에 호응하였다. 이를 위해 폴란드에서는 무려 10만 대군을 편성[1]하여 60만에 이르는 나폴레옹의 대육군의 일익을 담당했다. 이 10만 대군이 러시아로 떠난 후의 바르샤바는 허허벌판만이 남아있었다고 이야기될 정도로.

그러나 익히 알려져있다시피 원정은 러시아의 지연전술과 혹독한 겨울로 인해 프랑스의 참패로 끝났고, 1813년 1월 바르샤바 공국은 대부분 러시아에, 나머지 부분은 프로이센에 점령되었다. 몇몇 요새는 1년 이상 버티기도 했지만 이 시점에서 사실상 공국은 이름만 남기고 멸망하였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바르샤바 임시최고위원회를 창설하고 장군들을 통하여 영토를 통치했다.

2.5 빈 회의

1815년 빈 회의에서 폴란드 지역의 재분할이 결정되었다.

  • 러시아 : 이전 3차 분할에서 얻은 영역을 모두 획득하고, 1807년에 얻은 주변 영역도 획득했다. 재병합한 지역은 "폴란드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다스렸으나 러시아 황제가 동군연합으로 지배했기 때문에 사실상 러시아의 식민지였다. 1831년 까지 명분상으로만 자치를 인정했다.
  • 프로이센 : 1차 분할에서 얻은 영역을 다시 회복하고, 2차 분할에서 얻은 영역의 일부도 "포센 대공국"으로 다시 회복했다. 포센 대공국은 1848년까지 존속했으나 폴란드 민족주의 봉기가 확산되자 진압과 억압을 당하면서 포센 주로 강등당했다.
  • 오스트리아 : 1차 분할시 얻은 갈리치아 지역을 회복했다.

3국 감시하에 크라쿠프 자유시가 있었으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온상(?)이 되었고 결국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 합병시켜버린다.

3 정치

헌법은 자유주의적이었다.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다. 농노는 폐지되었고 모든 계급은 법 앞에 평등했다. 가톨릭 교회가 국교였지만, 종교적 관용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4 군사

바르샤바 공국의 군사 분야에서는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주목을 받는다. 그는 바르샤바 공국의 전쟁장관 겸 바르샤바 주 방위 사령관이었으며, 동시에 프랑스 군에 임관하여 나폴레옹 휘하의 원수이기도 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그를 자신과 동등한 군주로서 대접하고 충성할 것을 나머지 원수들에게 지시하기까지했다. 폴란드의 전략적 가치를 염두에 둔 제스처일 수있지만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을 위해 전선에서 죽기살기로 싸워 그 용맹이 뮈라와 맞먹는다고 평가될 정도였다고.

전쟁장관이자 사령관인 포니아토프스키가 프랑스의 원수였을 정도로 위성국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공국군은 완전히 프랑스의 지휘하에 있었다.

초기에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정규군 4만 5천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1810년에는 그 수가 10만으로 증가, 1812년에는 20만이었다. 공국 인구 300만명에 비하면 상비군은 상당한 규모였다.

공국은 고도로 군사화되어 있었고, 이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대한 방어선이 되었으며, 나폴레옹에게는 상당한 전력이 되어 주었다.

5 경제

그런데, 바르샤바 공국의 국력에 비해서 지나치게 많이 늘어난 군사력은 노동력 부족을 야기했고 공국의 경제에 큰 압박을 주었다. 또한 곡물 수출이 감소하였다.

1808년에 프랑스 바욘(Bayonne)에서 공국과 프랑스 제국이 회의를 하여, 프랑스로부터 프로이센이 차입해간 채권을 공국이 프랑스에서 매입하게 되었다. 4300만 프랑 이상의 채권액을 2100만에 매입하였고, 공국은 4년 분할로 금액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공국에 채무를 상환하지 못해서, 이 손실은 공국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문제가 겹친 결과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세금은 늘어나서 압박이 심했다.
  1. 당대 공국의 인구가 300만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3%가 원정에 동원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