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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定洙
1932년 2월 9일 - 2003년 3월 24일
1932년 2월 9일 경상북도 김천군에서 태어났다.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학년이던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58년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5년에는 부인 이범준과 함께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1968년 무임소장관 보좌관을, 1973년 국민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천시-금릉군-상주군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공화당의 백남억 후보를 누르는 한편 무소속 정휘동 후보와 동반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참고로 부인 이범준은 1973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되어 남편 박정수보다 일찍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9년 6월 이후락, 최치환, 김진만, 변정일, 김수, 박용기, 함종빈, 윤재명, 정휘동, 임호, 임영득, 한갑수, 홍성우, 권오태 등과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고 나서도 정치규제를 당하지 않아서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천시-금릉군-상주군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정휘동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정의당 김상구 후보와 신한민주당 이재옥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의 공천을 받아 김천시-금릉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역시 김천시-금릉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국제의원연맹 집행위원에 임명된 이듬해인 1996년, 월드컵 유치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신한국당 전국구 의원직을 요구했다가 신한국당 수뇌부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이 상황에서 외교전문가 영입에 몰두하던 새정치국민회의에 전국구 의원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입당해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의원이 되고 부총재를 역임한다.[1]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의 초대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5월의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문화 개방 및 천황의 방한을 원하신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원의 강제추방 사건에 맞대응해 서울 주재 러시아대사관원인 올레그 아브람킨 참사관을 강제추방한 것이 화근이 되어 5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경질된다. 이후 1998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에 복귀했다.
2003년 3월 24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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