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호(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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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湖
1920년 00월 00일 ~ 1988년 ?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1920년 충청남도 대전(현 대전광역시)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다.

한중경제문화협회 상임이사, 흥아타이어공업 전무이사, 세계통신사 부사장, 국민대학교 재단 상무이사 등을 지냈다.

한편 1950년대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국민회 충청남도지부 부회장, 자유당 중앙당 총무부 차장 등을 지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하려 하였으나 공천에서 원용석에 밀렸다. 1969년 민주공화당 충청남도 대전시 지구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박병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초 민주공화당을 탈당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여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해서 처음 개표에서는 민주공화당 김용태 후보와 동반 당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민주통일당 박병배 후보가 재검표 소송을 제기하여 당락이 뒤집혔고 같은 해 말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여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용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6월 이후락, 최치환, 김진만, 변정일, 김수, 박용기, 함종빈, 윤재명, 박정수, 정휘동, 권오태, 임영득, 한갑수, 홍성우 등과 민주공화당에 복당하였다. 그러나 10.26 사건 이후 김종필 총재 체제 하에서 남재희, 오유방, 정동성, 박찬종, 김수 등 초선 국회의원과 민주공화당 내에서 정풍 운동을 펼쳤다가 제명 처분을 받았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대전시 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남재두 후보와 민주한국당 박완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8년 3월 목포시-제주시 간 카페리 선박에서 실종되어서 두 달 뒤인 5월 시신 없이 장례식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