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후반 포밍스 활동 당시 팬들에게 둘러싸인 반젤리스. 수염이 풍성하지 않다
70년대 초반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시절의 반젤리스. 수염이 길어졌다 아니 정리가 안 되어 있다
80년대 솔로 활동 및 전성기 시절의 반젤리스. 매의 눈 오오 반간지 오오 수염이 정갈하다
90년대 초반 솔로 활동 시절의 반젤리스. 수염이 꽤 하얗게 되었다 실제로 같은 시기에 찍은 사진은 마치 신처럼 나와있다.#
2000년대 말의 반젤리스. 음악의 거장의 면모를 풍긴다.
2012년 1월 22일, 알 자지라 방송 프로그램 중 하나인 'Talk to Al Jazeera'라는 인터뷰 프로그램에 등장한 반젤리스. 당시 '세계의 혼란과 위기의 시대에 대한 음악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1]
저 후덕한 미소를 보아라. 한때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팬들은 그의 풍채에 반했었다.오오 미노년 오오
그리스 출신의 작곡가/음악가. 에방겔로스 오디세아스 파파사나시우(Ευ άγγελος Οδυσσέας Παπαθανασίου). 1943년 3월 29일생.
목차
1 소개
반젤리스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리스 작곡가이자, 키보디스트이다.
반젤리스는 주로 연주곡과 영화음악을 작곡하고 직접 연주를 했다. 그의 기나긴 경력동안 많은 작곡을 뽐내왔기 때문에 반젤리스는 어느 장르에 속한 아티스트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꽤 까다로운 대답이 되었다.
반젤리스가 예술가로써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일렉트로닉의 장르인 신디사이저, 프로그레시브 록, 스페이스 뮤직, 앰비언트 뮤직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음악가중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전자음악의 선율 각각의 아름다움을 잘 터치하는 음악가로 유명하며 블레이드 러너와 1492, 불의 전차등의 영화음악 및 자신의 솔로 앨범에서 그 백미를 보여주었다.
반젤리스는 1943년 3월 29일에 그리스의 볼로스 근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작곡을 시작했고, 6살 때 대중들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음악을 선보였고, 키보드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7살 무렵, 그는 ‘포밍스’라고 불리는 그리스 밴드의 멤버로 그리스에서 엄청난 보이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25살 무렵, 파리에서 고향친구였던 데미스 루소스와 루카스 시데라스와 만나고 함께 ‘아프로디테스 차일드’를 결성하여 유럽에서 큰 히트를 달성하였다.
1972년에 접어들면서 그룹은 해산되었고, 이후로 반젤리스는 본격적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솔로 활동은 각각 1970년에 처음으로 개인 명의의 첫 앨범과 첫 사운드 트랙인 ‘Sex Power’의 발매와 본격적인 솔로 활동으로는 1973년 발매된 정규앨범 ‘Earth’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1974년에는 런던으로 떠나 그곳에서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황금기였던 ‘Nemo 스튜디오’를 설립하였다. ‘Nemo 스튜디오’기간 동안, 지금도 유명한 여러 앨범과 사운드트랙을 작곡했고, 특히 1982년 5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불의 전차가 아카데미 작품상, 아카데미 음악상, 아카데미 각본상,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하면서 반젤리스의 입지와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사운드 트랙과 영화 1492의 사운드 트랙도 그 인기와 명성을 피하지 못했다. 이후 1987년에 런던을 떠난 반젤리스는 아테네, 로마, 파리를 거치면서 작곡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외에도 NASA의 Mars odyssey 미션을 기념하기 위한 Mythodea 콘서트나, 카타르 도하 아시안 게임의 축하공연에 담당한다거나 여러 국제 행사에도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며, 고전 오페라의 연출이나 연주를 도맡아 각개의 싱글을 내놓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외에도 반젤리스는 음악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활동을 하였는데, 특히 미술, 조각 작품 등이 유명하다.
2 활동
2.1 밴드 활동
2.1.1 포밍스 활동기
그리스 포크락밴드 포밍스에 소속되있던 시절의 반젤리스 (맨 왼쪽)이때부터 수염이 크고 아름다웠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가 꿈을 키우던 십대 시절, 반젤리스는 자신들이 직접 작사 및 작곡을 한 음악으로 해외에서 히트를 친 학교 밴드에 합류하였다. 1960 년대 중반에, 밴드는 Forminx라는 이름으로 바꿨고, 북그리스의 한지방인 테살로니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들의 첫 앨범인 ‘예로니코 양카’는 1965년에 수십만장가량이 팔렸고 포밍스는 그리스에 자신들을 어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 팝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고, 비잔틴풍의 전통음악과 모던한 락사운드를 결합한 희귀한 밴드였기 때문에 그리스 락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러한 음악성 뿐만 아니라, 인기도 정비례하게 상승하여 그리스 십대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인기의 절정에서 밴드는 해체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큐 감독이 테살로니키에서 데뷔한 포밍스를 주제로 한 다큐를 만든답시고 김칫국을 엄청나게 들이마셨는데, 제작팀간의 불화로 다른 감독에게 위임이 되고 말았다.
결국 영화는 제작되지 못했고 발표 또한 되지 않았다. 영화의 본래 목적은 포밍스의 국내외의 성공을 홍보를 함으로써 해외투어까지 기획이 되어있었는데, 아 망했어요 이 사건으로 더이상 인기의 지속은 이어지지 않았고 마침내 1965년 인기와 성공의 절정에서 해체하게 된것이었다. 돈과 이권다툼으로 인해 아티스트들이 피해를 받게 된 한 사례.
포밍스 해체 이후로도, 반젤리스는 스튜디오에서 다른 아티스트들을 도와주는 작곡활동과 연주참여에 집중했는데, 1967 년 반젤리스는 여성 가수 조이(Zoe Kouroukli)와 가수 조지 로마노스(George Romanos)와 같은 여러 그리스인 예술가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연주곡을 주기도 했다.
포밍스의 짧은 성공은 그리스의 언더 그라운드 씬과 젊은 그리스의 아티스트들에게 뜨거운 열정과 서양의 로큰롤과 리듬앤블루스를 혼합한 독특한 스타일을 주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반젤리스의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시절 음악에 매우 잘 녹아들어 나온다. 그리고 기획사가 무섭다는 교훈도 얻게 되는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2.1.2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활동기
좌측부터 데미스 루소스, 루카스 시데라스, 반젤리스.
포밍스 해체 이후, 스튜디오에서 동료가수들의 일을 돕던 반젤리스는 1968년에 만난 음악적 동료 보컬 데미스 루소스, 드러머 루카스 시데라스와 함께 그리스 해외에서 성공을 해보기 위해 런던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파리에 남게 된 그들은 아프로디테스 차일드라는 록밴드를 결성하여 밴드의 키보드 주자로 음악생활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 밴드는 본국 그리스 외에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그외의 유럽국가들에서도 나름 인기를 얻은 인기밴드가 되었다. 그들의 음악적 성향은 그당시 인기있던 사이키델릭 록에 그리스의 민속 음악 스타일을 섞은뒤 다소 복잡한 구성의 드라마틱한 악곡 구조를 추구한, 유럽의 지역적 특색이 강한 프로그레시브 록에 속한다.
그들은 요한 파헬벨의 캐논변주곡을 이용해 싱글 Rain and Tears를 발표하여 큰 히트를 쳤다. 이는 유럽 각국의 차트에서 상위권에 랭크되기도 하는 큰 성공을 이뤘다. 이후로 그들은 총 세개의 앨범을 내놓았는데, 이 모두 유럽의 앨범차트에서도 성공을 했다. 이들의 음악은 국내에서도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 이나 It's 5 O'Clock 같은 애절한 발라드들이 올드팝 팬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도 반젤리스는 끊임없이 음악에서의 자신의 실험적인 방향을 계속해서 제시했는데, 이는 자신들의 컨셉 앨범인 666 앨범으로 유명해진다. 이 앨범 이후로 그룹이 와해되고 데미스 루소스가 1972년에 솔로 활동을 선언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지만 반젤리스와 데미스 루소스 모두 각자의 솔로활동을 하면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2]
2.1.2.1 아프로디테스 차일드/음반
자세한 내용은 아프로디테스 차일드/음반 목록을 참고.
2.2 솔로 활동
자세한 내용은 반젤리스/음반 목록
3 이모저모
3.1 이름
실제 본명은 Evangelos Odysseas Papathanassiou가 맞으며 약자로 Vangelis라고도 불린다. 외국 활동 초창기에는 Vangelis Papathanassiou였으나, 너무 길고 어려워서 Vangelis로 활동한다.
반젤리스의 이름은 네개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Evangelos'의 '-angelos'는 가져오는 자, 'Ev-'는 긍정적이며 무조건적으로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Papathanassiou또한 'Papa-'는 수도자, 사제를 의미하고, '-thanassiou'는 본래 희랍어인 'thanassis'로 불멸을 의미한다. 굳이 이름을 풀이하자면 '불멸의 사제, 행운을 불러오는 오디세이'
반젤리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에서 많이 쓰이는 이름인데, 'G' 철자는 'J'가 아닌 'G'로 발음이 되므로 반겔리스가 맞다. 참고로 강세는 'gel'에 있다.
앞서 서술했듯이, 아티스트, 과학자, 운동선수, 정치인 등등 유명인들도 '반겔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꽤 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아티스트들과 혼동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몇몇 아티스트들은 이를 악용하여 자신의 어그로이목을 끌고자 마케팅을 벌인 사람도 있었다.
3.2 유명인들의 인용
- 오스카 수상 영화 작곡가 한스 짐머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곡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
'전 스팅, 반젤리스, 나인인치네일스말고도 다른 아티스트도 좋아합니다.'
- 프랑스에 신디사이저 연주가 장 미셸 자르는 포르투갈 잡지 'Promusica'(1997)에 반젤리스에 대한 질문에 대답했다.
'전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좋아하고 언젠가 그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우리 둘다 라틴의 피를 가지고 있지만 그가 더 교향곡의 색깔를 갖고 있어요. 반면, 저의 새 앨범에서는 당신(인터뷰진행자)도 알아볼 수 있듯이 제가 미니멀리스트적이죠.' 견제보소
...(중략)...'그러나 위대한 신디사이저 연주자가 있고, 위대한 교향곡 연주자가 있지요. 우리(탠저린 드림)와는 별개로, 반젤리스와 (한스) 짐머 또한 두 가지 장르를 완벽히 소화하는 천재성을 보여주었습니다.'
- 그리스인 작곡가 야니는 'iO Page'와의 인터뷰(1996)에서 반젤리스를 언급했다.
'전 그 사람에 대한 큰 존경을 갖고 있었고, 이미 어렸을 때 그의 팬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합니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하나입니다. 그는 독창적이고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저 자신과 반젤리스 둘 다 그리스 출신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식 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서 유사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한번도 만난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서로 친구가 있지만 말이죠. 제가 듣기로, 반젤리스가 상당히 폐쇄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는 음악을 통해 말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 여성 신디사이저 아티스트인 수자느 시아니(Suzanne Ciani)는 스페인 라디오 방송국인 '3'에서 반젤리스에 대한 의견을 언급했다.
'반젤리스는 실제로 제 앨범인 'Velocity of Love'에서 몇몇 연주를 담당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입니다. 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왔어요. 그의 음악은 감성적인 부분이 많아서 제가 많이 좋아하죠.'
3.3 존 앤더슨과의 관계와 합작앨범
이미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시절부터 그의 키보드 연주력은 전세계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의 보컬이자 리더 존 앤더슨은 탈퇴한 릭 웨이크먼 대신 반젤리스를 키보디스트로 영입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것을 계기로 그들의 인연이 시작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반젤리스의 불후의 앨범인 'Heaven And Hell'의 중간 트랙의 보컬을 맡게 되었다. 이후 앤더슨이 예스 밴드 내에서의 분란으로 축출당하고. 반젤리스와 같이 활동하며 존 앤 반젤리스란 듀오그룹을 만들어 몇장의 앨범을 내었다.[3][4]
그래서 저 존 앤 반젤리스의 음악은 예스란 밴드의 굴레를 벗어던져서인지 예스 때의 음악보다 훨씬 더 청아하고 담백해지고 지금의 뉴에이지에 가까운 음악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게 반젤리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저 밑의 설명에서 반젤리스가 동방정교도이면서도 뉴에이지 스타일 음악의 대표주자가 된 건 이 때문일 것이다.
3.4 뉴에이지 음악가?
뉴에이지 음악가로 손꼽혀서인지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그의 음악을 문제시하는 곳도 꽤 된다. 물론 대다수 그리스 사람이 그러듯 동방정교회 신도로서 기독교인인 그는 이런 뉴에이지 운운거리는 말에 굉장히 불쾌하게 여긴다고 한다.
위 영상에서 보다시피, 데미스 루소스의 아들의 (동방정교회식)세례식에 반젤리스를 포함한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시절 멤버들과 루소스의 지인들이 모두 참석하여 아이를 축복해주고 있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5] 이래도 뉴에이지 운운할거냐
3.5 추상화가로서의 반젤리스
http://www.vangelismovements.com/vangelispaintings.htm
http://www.vangelishistory.com/paintings.html
그림실력이 비범하며 꽤 출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추상적인 음악적 사상에 기반된 추상화가 대다수인데, 이는 프랑스의 서정추학 화가인 조르주 마튜(George Mathiue)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1971년에 음악과 추상화를 조합한 공연을 다큐로 찍은 적이 있었다.
4 대표곡
본격 운동장으로 뛰어나가야할 것 같은 기분 2002 한일월드컵의 개막식 음악으로 선보이기도 했던 월드컵 공식 주제곡인 'Anthem'을 작곡하기도 했다. 특히 이 곡은 우리나라 사물놀이의 대가 김덕수가 연주에 참여하여 동서양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곡으로 평가받으나, 원곡 보다는 핀란드 뮤지션인 JS16에 의해 리믹스 된 JS Radio Edit 버젼이 우리 귀에 더 익숙 할 것이다.
가장 유명한 '불의 전차' 테마곡. 슬로모션으로 마라토너가 결승선을 향해 달려오는 느낌 그와중에 담배를 빨고 여유있는 모습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는 저 섹시한 모습!
'1492 콜럼버스' OST. 지금 당장 배를 타고 나가야할 것 같은 느낌 이 음악은 거대한 건축물 등을 보도할 때 배경음악으로도 많이 쓰이는데, 가끔 몇몇 다큐멘터리나 뉴스 등에서 바다나 큰 강 등에 송전탑이 줄줄히 늘어선 송전선로나 큰 철탑 등을 건설한 소식을 보도하면서 그 위용을 보여주는 씬에서 많이 사용하는 배경음악이 바로 이 음악이다(...) 그래서 큰 송전탑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이 나오면 자연스레 이 음악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블레이드 러너 엔딩 크레딧 BGM. 본격 미스테리함이 물밀듯 밀려오는 음악
그밖에 우리나라 주방냄비 광고 음악으로 유명한 휌(Hymn또는 Hymne)이나[6]
일본에서 만든 영화 '남극 이야기'(헐리우드에서 이 영화를 리메이크 한게 바로 '에이트 빌로우')의 메인 테마도 우리나라 라디오에서 자주 소개한 그의 명곡이다.
- ↑ 튀니지발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 ↑ 파바로티를 연상시키는 비대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살떨리는 바이브레이션이 가득한 특유의 목소리로 유명한 데미스 루소스는 이후 'Follow me'같은 인기곡을 히트시키며 솔로가수로도 꽤 성공했고, 해산 이후로도 자신의 과거 동료들과 음악적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재결성의 움직임도 있었는데, 1977년 데미스 루소스가 자신의 솔로앨범 'Magic'제작에 키보디스트로 참여하지않겠냐는 권유에 반젤리스는 혼쾌히 동의하였고 제작과정에서 아프로디테스 차일드결성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결국 없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 ↑ 존 앤더슨은 예스에서 심오하고 고상한 자신의 정신세계를 록음악으로 표출하기 위해 인도까지 직접 찾아가 요기들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사람이었고, 그렇게 탄생한 예스의 음악은 마이크 올드필드의 음악과 함께 뉴에이지 음악의 초창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 ↑ 물론 영향을 주었다는 것뿐이지 예스의 음악 = 뉴에이지 이건 절대 아니다. 예스의 음악은 프로그레시브 록이라고 할 수 있다.
- ↑ 참고로 데미스 루소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생의 집시계 그리스인이다. 부모 모두 역시 그리스 국적의 집시인인데 본래는 이집트 국적이었다고 한다. 이유는 수에즈 전쟁으로 살 곳을 잃자, 그리스로 피난을 간 것.
- ↑ 롯데 마가렛트광고음악 으로 쓰인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