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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شعب يريد إسقاط النظام시민들은 정권 타도를 원한다[1]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혁명 이후에 폭발하여 2011년에 절정, 그리고 2015년 현재까지도 여파가 미치고 있는 아랍권의 민주화 시위, 이른바 "아랍의 봄"을 다루는 항목.[2]
아랍의 정의는 다양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1945년 설립된 아랍 연맹에 속해있는 국가를 말한다. 자세한 건 아랍 항목 참조.(시위와 직접적으로는 상관없지만 아랍 연맹의 옵저버로는 아랍어가 공용어 중 하나인 에리트레아와 아랍 커뮤니티가 커지고 있는 브라질, 베네수엘라, 그리고 인도 공화국이 있다.)
그리고 2010년 10월 10일 101010 리비아에서 있었던 아랍-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선 다음 멤버들이 참가했다.
드림팀 (1번)벤 알리(튀니지―망명), (2번) 알리 압둘라 살레(예멘―정권이양), (3번)카다피[3](리비아―사살), (4번)무바라크(이집트―축출).존나좋군?#
1 개요
2010년 ~ 2011년, Arab spring Timeline(아랍의 봄) |
아랍권 국가들이 장기 독재 중인 정부의 부패, 인권의 유린, 빈곤 등의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결정적으로는 빈곤과 식량난. 2007년~2008년 사이에 있었던 경제 위기와 원인 불명의 식량 가격 폭등 현상이 영향을 미쳤다.
2009년 이후 세계 금융위기가 본격화 하면서 식량 가격이 떨어지긴 했지만, 2010년에 러시아가 흉작으로 식량 수출을 막기 시작하면서 금융 위기 이후 다시 잠시 내려가던 국제 식량 가격은 다시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고 여기에 달러화 약세 크리 까지 겹쳤다. 이는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아랍권의 경제와 식량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고 민중들은 정부에 곡물 가격 문제 해결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각지에서 소규모 시위, 분신 시도 등이 벌어졌고 이것이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상기의 이유로는 설명하기 힘들 만큼 시위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너무도 큰 규모로 일어났다는게 문제. 초기에 안정적으로 보였던 국가들조차도 어이없이 무너져내렸으며, 약발이 잘 먹혔던 오일 달러 분배 정책도 효과를 잃었다.[4]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면 정보화다. 줄리언 어산지의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튀니지 벤 알리 일가의 부패상이 "튀니리크스"라는 사이트로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도 벤 알리가 축출된 한 원인으로 분석되었다. 당시 튀니지 뿐 아니라 다른 아랍권 국가들의 부패상도 위키리크스를 통해 어느 정도 까발려졌기 때문에 아랍권 정계는 유례 없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더욱이 튀니지에서 국민들이 벤 알리를 축출하는데 성공하자 다른 나라 시위대에게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은 격이 되었기 때문에 시위는 점점 격화되었다. 이렇게 정치 지도층의 적나라한 부패가 아랍권의 트위터 등으로 퍼지며 혁명이 시발하는데 상당부분 일조하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위키피디아# 경향신문 기사
2 혁명의 특징
가장 기본적인 것은 빈곤 철폐다. 이와 연관된 고실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컸다. 일차적인 경제적 빈곤이 정치적 요구로 연결되고 있으며 부패한 정권의 교체나 인권 보장, 민주주의 확립 등의 요구가 나왔다. 물론 이런 목소리가 모두 일치한 것은 아니다. 2011 이집트 혁명의 영상에서도 볼 수 있지만 요구사항은 정말 다양했다.
IT의 발전이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시위대는 트위터와 휴대 전화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직적인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또한 카타르의 알 자지라가 아랍권 방송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혁명에 대해서 상세한 보도하였기 때문에 점점 더 주가가 올랐다.
또한 아랍권 내부에서 그동안 묻혀져 있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여성들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여성 지위 향상,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소수 민족들이나 정치적으로 약세인 종파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다.
결국 시위의 불길은 문화권이 다른 나라들에도 번져서 시아파가 주도 세력인 이란이나 사하라 사막으로 떨어져 있는 중부 아프리카 일대는 물론 지중해를 사이에 둔 서유럽, 심지어 저 멀리 떨어진 중국에까지 시위가 번져나갔다.
아랍권의 민주화 운동은 권역별, 국가별로 주된 이유가 달랐다. 그러나 종파, 민족, 정치 부패 등의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귀결되는 문제는 삶의 질의 문제다. 아랍권 전역에 뿌리 깊게 퍼져있는 계급적 사회 구조와 그에 따른 부의 분배의 불평등과 참정권의 불평등이 핵심. 그래서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와 같은 비교적 부의 분배와 참정권의 평등을 점진적으로 진행해 가고 있는 국가의 소요 사태는 극히 미미하거나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대체로 혁명 이후 들어선 신 정부들의 기본적인 성패가 이와 동일함을 볼 때 이러한 주장은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아랍 권역의 특수한 사회적 현상이자 중심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의 종파간 갈등과 그에 따른 역학 관계, 그리고 이집트 케이스와 같은 군부의 정권 장악 역시 혁명의 진행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따라 혁명의 본래 정신과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음은 그간의 중동의 현대사에서 반증되었다. 결국 시리아와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위는 2012년이 되면서 잦아들었다. # 분석기사 - 멀어저 간 봄날
여담으로, 2009년-2010년, 아랍의 봄이 일어나기 직전, 이란에서 이란 민주화 운동(녹색운동 또는 녹색혁명이라고도 부른다)이 일어났는데,
비록 이란에서는 미완성, 정권퇴진 실패로 끝났지만 나중에 2010년 12월 아랍의 봄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5]
3 시위의 이해
각국의 대부분의 기성 언론들은 사실을 외면했으며 정부는 알 자지라나 CNN, BBC, NYT와 같은 해외 언론의 취재를 저지하였다. 이집트에서 알 자지라의 등록을 취소하고 수 명의 스탭을 강제 억류했던 것이 그 예. 기자에게 대놓고 사격을 하기도 했고, 이집트의 경우에는 저격수에게 사망한 기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바레인의 경우 헬기가 기자를 향해 사격하기도 하였다.
대신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를 통해서 현재의 상황과 관련 사진 및 영상이 전해졌다. 시위의 뇌관이 되는 영상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전해졌고 페이스북 그룹이나 트위터를 통해 시위의 일정이 전파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튀니지, 이집트, 바레인이 그렇듯이 시위가 격화되면 정부는 SNS의 접속을 차단하며 아예 인터넷을 차단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를 우회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이 강구되었다. 구글에서는 이집트의 인터넷 차단을 우회하기 위해 휴일임에도 개발자들이 모여서 Speak2Tweet 서비스를 만들어서 정해진 전화번호로 음성 메시지를 남기면 #egypt의 꼬리표를 달고 트위터로 글에 올라가는 서비스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구글은 이집트 외에도 리비아와 같은 인터넷이 차단된 국가로 Speak2Tweet 서비스를 확대하였다.
대규모 시위는 금요일에 많이 열렸다. 이슬람 신자는 금요일에 반드시 예배를 봐야 하며 이로 인해 금요일은 사실상의 휴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5대 의무 중 하나인 صلاة(Salah)의 일부분인 جمعة(Jumu'ah)이며 꾸란에 규정되어있기에 정부가 모스크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는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아랍권의 시위는 금요일 모스크에 모인 사람들이 시위대로 자연히 바뀌는 패턴을 보여왔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역시 금요 예배 직후에 있었던 시위에 탱크와 헬기를 동원한 발포로 수천 명이 사망한 '검은 금요일' 사건이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금요예배를 주관하는 성직자들의 성향에 따라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결정되기도 한다. 이집트의 경우는 성직자들이 반무바라크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위가 더 격화되기도 했지만, 2009년 이란의 경우 금요예배를 하메네이가 직접 주관하면서 반정부 시위대를 비난하여 동력을 꺾기도 하였다.
2011년 8월에 이슬람권이 라마단 기간에 들어서면서 민주화 운동은 새로운 기로에 들어섰다. 대부분의 나라는 시위가 잦아들었으나 이를 뛰어넘은 나라들은 갈등이 더욱 격화되었다.
4 아랍권 시위
카툰과 같이 전형적인 도미노 효과가 예상되었다.
각국의 순서는 첫번째 시위 발생 날짜를 기준으로 하였다.
4.1 튀니지
2010년 12월 18일 첫 시위 발생, 2011년 1월 정부가 타도되고 3월 정권 교체 완료. 튀니지 혁명 항목 참조.
4.2 알제리
2010년 12월 28일 시위 첫 발생. 큰 규모의 시위. 최소 8명 사망, 수백명 부상.[6] 부패, 장기독재, 빈곤 등으로 이집트의 상황과 비슷한 알제리가 다음 타자가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알 자지라에서도 알제리에 대해 특집 페이지를 만들면서 주목하고 있다. 튀니지의 시위 직후 시위가 발생했으며 부아지지와 같은 분신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011년 2월 12일, 수도 알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출처. 2천명의 시위대가 수도 알제의 '5월 1일 광장' 에서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했으나 3만명의 경찰들이 진압하고 말았다. 알제리 민주화 연합 단체는 2월 18일 다시 시위를 하기로 예정하였다. 미국은 당국의 시위 진압에 우려를 표했다.
알제리 당국은 2월 14일, 19년 동안 계속 된 비상사태를 '머지않은 시간 내에(within days)' 해제하기로 하였다. 19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모였지만 강력한 경찰의 압박으로 중심부에 모이려는 행동을 저지하였다. 25일 계속 되는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알제리 정부가 그동안 계속 유지해오던 비상 상태를 해제하였다. 이후 잦아들었다.
4.3 리비아
정권 교체 완료.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리비아 내전 항목 참조. 하지만 카다피 축출 이후 들어선 반군 정부가 이슬람주의 세력과 세속주의 파벌간의 대립으로 인해 이슬람주의 세력의 트리폴리 정부와 세속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토브룩 정부로 분열되면서 내전이 재발하였고 다시 재발발한 내전으로 인해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안샤르 알 샤리아와 다에쉬들이 세력을 키우면서 혼란한 상황이지만 최근 다에쉬와 안샤르 알 샤리아등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을 제외한 토브룩 정부와 트리폴리 정부가 아프리카 국가들과 유엔, 서방국가의 중재하에 통합 연립 정부 구성에 합의하였다.
4.4 요르단
2011년 1월 14일 시위 첫 발생. 리파이 내각이 개편되었다.
1월 28일 금요기도 이후 수천명의 시위대가 고물가와 실업 문제 등 경제난에 대한 불만으로 시위를 벌였다. 정권 퇴진 구호는 이 상황에선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았다. 그러자 재빠르게 압둘라 2세 국왕은 2월 1일 사미르 리파이 총리 내각을 해산하고 군 장성 출신인 마루프 알 바히트(바키트) 전 총리를 재기용하고 이슬람 지도자를 만나 개혁 방안을 논의하는 행보를 보였다. 또한 쌀과 설탕, 연료 등의 주요 생필품 가격을 억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무슬림 형제단 등의 야권 정파가 입헌군주인 압둘라 2세의 축출까지는 목표로 삼고 있지 않기에 이 정도로 마무리 될 것 같다는 예상이 나왔다.
2월 9일 마루프 알 바히트 총리는 좌파 노조주의자와 무슬림 형제단의 전 회원, 여권 운동가 등의 야권 인사를 등용한 통합 내각을 구성함으로서 야권의 불만을 어느정도 해소했다.
야당격인 무슬림 형제단은 직접적인 내각 참여는 거부했지만 개혁을 지켜보겠다고 하면서 한 발 물러섰다.
2월 18일 이런 조처에도 수도 암만에서 2천여명의 왕의 권력 제한을 외치는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시위대-경찰과의 충돌로 부상자가 나왔다.
20일 압둘라 2세 국왕은 조속하고도 실효성 있는 개혁을 약속하면서 보수적인 관료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25일 금요기도 후 주민들과 이슬람 행동전선을 비롯한 20개 야당의 야권 지도자, 노동조합원들이 모여서 6천 ~ 1만명 가량이 모여 6주 연속 금요일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하지만 약속된 개혁이 더딘 모습이 보이자 계속해서 불만이 제기되었으며, 몇달 후 국왕 압둘라 2세는 정당들의 불만에 바히트 총리와 바히트 내각을 해산시켰다. 국왕은 다시 아운 카스완네 국제사법재판소(ICJ) 재판관을 새 총리로 임명했다. 총리는 다시 파예즈 타라우네흐로 교체되었으며, 2012년 10월 10일 타라우네흐의 뒤를 이은 압둘라 엔수르 총리까지 요르단의 부패 척결, 개혁행보는 현재 진행형이다.#
4.5 수단
2011년 1월 17일 시위 첫 발생. 작은 규모의 시위. 식료품 가격 안정과 인권 문제 해결 등을 촉구하다가 튀니지와 이집트의 시위에 고무되어 요구사항을 정권 퇴진으로 확대시켰다고 한다.
2월에 접어들어선 시위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쪽은 아무래도 남부 수단의 분리 독립이 더 중요한 문제였던지라...1993년 이후 계속 권좌에 있는 오마르 하산 알 바시르 대통령은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2010년 대통령 선거가 가장 최근 선거였으며 수단 헌법상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다.
4.6 모리타니
2011년 1월 17일 분신을 통한 항의가 있었으나 이후 시위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
4.7 예멘
예멘 민주화 운동 항목 참조.
4.8 사우디아라비아
2011년 1월 21일 시위 첫 발생. 분신이 있었다고 하며 1월 28일에는 두번째로 큰 도시이며 최근 홍수를 겪은 제다에서 사회 기반 시설 건설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다. 시위 15분만에 경찰이 중단시켰다고 하며 30~50명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23일 허리디스크 수술로 인해 몇 달 동안 사우디를 떠나있던 압둘라 국왕이 사우디로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리기도 전에 15% 가량의 임금 인상, 학비와 실업자 지원 등으로 40조를 내놓기로 하였고 2014년 말엔 교육-SOC-의료 개선을 위해 450조원을 내놓겠다는 공약도 내걸었다. 항상 그러하였듯이 오일 달러로 불만을 무마하려고 하고 있다. 시위가 발생하지 않고 있는 사우디이며 대부분의 전문가도 사우디는 이번의 반대 물결을 비껴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하고 있지만 주변 국들의 변화에 내심 걱정을 하는 듯.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을 둘러싼 국가들이 전부 난리를 겪고 있는 데다가 수니파-시아파 관계가 비슷한 바레인의 시위 상황이나 수니파 강국인 이집트가 정권이 바뀌었으니.
28일까지 직접적인 시위는 일어나진 않고 있지만 대신 각 계층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한이나 탄원서가 계속 올라오고 있고 유화책 발표 이후에도 불만을 가진 국민들이 많기 때문에 언제 또 한순간 폭발할지는 모르는 상황이다.
이번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향후 진행 상황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두 가지다. 그 중 하나는 과연 사우디에서 반대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나는지이다.
3월 11일 사우디에서 대규모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 인터넷상으로 시위 언급이 금지되어있으나 시위 관련 페이스북의 팔로워 수는 시위 하루 전인 3월 10일 현재 3만 3천명 가량으로 꽤 많은 상황. 요구는 입헌군주제, 여성 인권 보호, 정치범 석방 등이다. 주소는 [1]이지만 아랍어 크리.
그리고 11일 시위가 일어났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경찰 등의 강경 대응으로 해산되었다.
14일 사우디는 계속 되는 반정부 움직임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바레인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국 군대를 파병하였다.
현재 아랍권의 다른 중요한 축이였던 이집트가 혁명으로 무너진 만큼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페르시아 만 일대 독재 국가들이 시위로 무너지지 않도록 지원해주는 스폰서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와 동시에 부랴부랴 불만을 다독이고자 무려 5천억 리얄(150조원!)이라는 거액을 쏟아부으면서 공무원 및 군인들에게 엄청난 월급 및 수당, 여러가지 복지 혜택을 준다고 압둘라 국왕이 직접 발표했다.# 그러나 공무원직에만 혜택이 돌아간다고 민간기업 근무자들의 불만이 되려 더 커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도 공무원은 철밥통인 듯.#
6월 28일에는 사우디 의회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현지시각 9월 25일 드디어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4.9 이집트
정권 교체 완료. 2011 이집트 혁명 참조.
4.10 시리아
가장 최후에 벌어진, 그리고 가장 장기화 되고 있는 혁명(내전).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 항목 참조.
4.11 모로코
2011년 1월 30일 작은 규모의 시위가 발생하였고 분신을 통한 항의가 있었으나 금세 가라앉았다. 페이스북을 통해 2월 20일의 시위가 조직되었다.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서 3~5천여명의 시위대가 모여서 국왕(무함마드 6세)의 권한 축소, 총리 퇴진, 경제 평등 확보 등을 외치면서 튀니지와 이집트 국기도 흔들었다고 한다. 최대도시 카사블랑카에서는 4천여 명이, 마라케시 등 20개 장소에서 시위가 열렸다고 한다.
21일 시위가 끝난 후 불탄 시체 5구가 발견되었다. 백여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왕정에서 이를 의식한 듯 6월 19일에 왕권을 상당 부분 축소하는 입헌군주국 개헌안을 발표했고 7월 국민 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권력 축소가 안 되면서 시위가 계속 되었으나 잦아들은 편이었다. [2]
2013년 8월 모로코 국왕이 스페인 국적의 아동성범죄자를 사면하여 출국시키면서 2년만에 시위가 격화되었다. 스페인은 옛 모로코의 종주국 가운데 하나. 국왕은 철회했다.#
4.12 지부티
2011년 2월 1일 시위 첫 발생. 큰 규모의 시위로 최소 두 명 사망[7]. 같은 날 약 300여 명의 시위대가 수도인 지부티 시티에서 오마르 구엘레 대통령의 다음 선거 미출마와 자유 보장, 정치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의 시위는 별 충돌 없이 평화롭게 끝났다.
18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기장을 차지하고 시위를 벌이다가 시위가 격화되면서 몽둥이와 최루탄으로 진압하는 경찰과 투석전을 하는 시위대가 충돌을 빚었다.
19일 충돌은 점점 심해지고 있고 최소한 한 명의 경찰과 한 명의 시위대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 21일에도 시위는 계속 이어졌으나 이후 잦아들었다.
4.13 바레인
2011년 2월 4일 시위 첫 발생.
시위의 원인은 국민의 70%를 차지하는 시아파에 대한 지배층 수니파의 차별이다. 바레인이 석유 자원은 미미하지만 미 5함대 사령부가 위치해 있기에 정치적으로 민감하다. 중간의 강력 진압에는 사우디가 뒤에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사우디도 수니파-시아파의 관계가 바레인과 비슷한 상황이라. 주된 요구사항은 시아파에 대한 차별 철폐.
2월 4일에는 이집트의 시위대에 대한 연대 성격의 시위였다. 14일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예정되자 가구마다 1000디나르(약 30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11일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점차 큰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분노의 날' 로 규정된 14일 바레인의 수도인 마나마에서 수천명의 시위대가 정치 개혁과 차별 철폐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최루가스와 고무탄으로 진압을 하였고 수십 명이 부상하고 20대 청년 Ali Abdul Hadi Mushaimai가 숨졌다. 내무장관은 이에 대한 진상조사 지시를 내리고 군대의 책임자가 조의를 표했다. 600~700명의 시위자들은 14일 밤 다른 장소로 옮겨서 저녁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15일 전날 사망한 청년에 대한 장례 행렬 및 반대 시위가 계속되던 중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진압 중 수십명의 부상자가 나오고 최소한 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천명의 시위대는 수도 마나마 중심의 펄 교차로 광장을 점유하였다. 하원 내에서 1당의 자리를 차지[8]한 시아파 야당 Al Wefaq는 국회 참여를 중단하고 시위대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였다.
16일, 15일에 사망한 시위자의 장례식이 열렸다. 펄 광장에 모인 시위대의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17일 현지시간 새벽 3시, 수천 명의 시위대가 자고 있던 펄 광장을 경고 없이 기습적으로 경찰이 습격했다. 최루탄, 고무탄환, 곤봉 등으로 무차별 공격을 가했으며 시위대 축출 직후에 광장 주변에 철조망을 설치하여 출입을 통제했다. 수시간 후에 바레인 국가안보위원회는 계엄령을 선언하고 마나마 시내에 군의 탱크와 장갑차가 투입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군대가 사격을 가했다는 말도 있다. 내무부 대변인은 "시위대에 대화의 기회를 주었지만 시위대는 기회를 모두 잃었다. 광장을 무력으로 비울 수밖에 없었다"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최소 5명이 숨지고 230여명이 다쳤다. 현지에 있는 뉴욕타임즈의 니컬러스 D. 크리스토프가 들은 말에 의하면 24세의 청년이 수갑이 채워진 채로 경찰에게 구타당한 후 처형당했다고 한다. 부상자를 치료하면서 의사임을 밝혔음에도 경찰에게 구타당했고 의식을 잃은 경우도 있다. 부상자를 옮기는 의료진과 취재 중인 기자에게 대놓고 실탄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즈의 취재진도 군 헬기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경찰은 진압하면서 시아파에 대한 욕설을 내뱉은 것으로 알려졌다.
군의 실탄 사격으로 인해 가득 찬 바레인 병원의 모습.
Salmaniya 병원이 부상자로 가득 찼지만 내무부는 앰뷸런스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인터넷도 차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아파 야당의원 18명은 항의의 표시로 의회에 사퇴서를 냈으며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리비아, 바레인, 예멘의 현 상태에 우려를 표하면서 평화 시위의 폭력 사용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18일, 바레인 남부 도시인 시트라 이슬람 사원에서는 수천 명이 참여한 가운데 시위 중 숨진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열렸다. 진압은 이뤄지지 않았다. 수도인 마나마는 헬기와 탱크를 포함한 군대가 요소요소를 점유하고 있는 중이며 수백 명이 참여하여 친정부 시위도 열렸다. 국왕은 충돌을 해결하자는 말을 하면서 모든 정당과의 대화를 제안했다. 현재 시위대의 구호도 정치 개혁을 외치던 것에서 바레인 국왕 하마드 빈 이사 알-칼리파의 하야를 요구[9]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일부 노동조합은 20일부터 폭력 진압에 항의하여 파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19일, 시아파 야당인 알 웨파크는 국왕의 대화 제안을 거부했다. 군대가 거리에 있는 상태는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게 이유이며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현재의 내무장관-국방장관을 제외한 새 임시 정부 구성을 요구했다. 캐서린 애슈턴 EU 외무담당 최고위원 또한 폭력 진압에 대한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펄 광장에 오전까지만 해도 진주해있던 군대는 왕세자의 명령으로 떠났다. 경찰의 진압은 미약하게나마 계속되었지만 결국 물러났고 수천 명의 시위대가 펄 광장을 다시 점유하고 있다. 경찰은 물러갔다고. 왕세자가 야권과의 신뢰 회복과 폭력 진압에 대한 미국의 강한 거부감을 감안하여 군경을 물러나게 한 것. 왕세자가 국영 TV에 나와서 지체된 개혁이 혼란상을 빚었다고 밝힌 것을 볼 때 야권과의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20일, 시위대는 펄 광장을 점유하면서 시위를 하고 있으며 폭력 진압 재발의 가능성은 희박해보이는 상황이다. 국왕과 야당과의 대화는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는 듯.
21일, 만여 명의 시위대가 펄 광장에서 시위를 계속 하고 있다. 이집트의 타흐리흐 광장처럼 유치원과 숙소, 식량 보급 공간 등이 생기면서 장기화 될 조짐이 보인다. 영국에 망명 중인 급진 성향의 시아파 야당 지도자가 22일 귀국하기로 하였다. S&P는 정정 불안을 이유로 신용등급을 한 단계 내렸다. F1 바레인 대회는 취소되었다.
22일, 10만여 명이 넘는 시위가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대가 모여 수상의 사임을 넘어서서 왕정 자체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수습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사우디로 떠났다.
23일, 바레인 정부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정치범 23명을 석방했다.
24일, 시위대는 여전히 거리를 메우고 있다.
25일, 정부는 지난 폭력 진압에서 희생된 시위대에 대한 추도의 날을 선언하였다.
26일, 시아파 재야 지도자인 하산 마샤이마가 귀국하고 시위대 전면에 나서면서 민주화 시위가 격렬해졌다. 그는 펄 광장에서 거짓말만 늘어놓는 국왕을 믿을 수 없으며 지금이 바레인을 민주화할 기회라면서 '왕정을 타파하고 민주 정부를 세우자'고 연설하였다. 일단 민주화 세력은 총리를 선거로 선출하는 등의 입헌군주제를 바라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일 국왕은 장관 5명을 교체하는 개각을 단행했지만 노동장관을 주택장관으로, 석유장관을 에너지장관으로, 외무장관을 보건복지장관으로, 노동차관을 노동장관으로 승진시키는 등 하나마나한 회전문 인사였다. 추가로 주택 융자를 25%를 깎아주는 조치를 취했다.
27일, 바레인에서는 500여명의 시위대가 인간띠로 의회 출입문을 봉쇄하여 회의 속개가 지연되기도 하였다.
3월 14일 바레인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언했으며 걸프 협력 기구(GCC)의 회원국들에게 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즉각 바레인에 군을 파병했으며 아랍에미리트도 곧 군대를 파병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시위의 규모가 바레인 정부 단독으로는 막기 어려운 수준이며 사우디와 걸프 지역 다른 국가들이 시아파의 세력 확산에 그만큼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17일 총격으로 6명이 사망했으며 바레인 보안군이 병원에 난입해 의료진을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7일 정부가 사우디 군까지 끌어들인 강경 진압을 펼치자 시위 동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어 야당은 다시 타협안을 제시한 상황이다. 아직 바레인 정부의 응답은 없다.
4월 들어서도 바레인 정부는 이란의 세력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로 걸프군 철수는 없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시아파 정당에 대한 탄압이나 해산 명령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위 자체는 과거에 비하면 약해진 편이라고는 하나 시리아에서 시위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동력을 되찾은 상황이라고 한다.
바레인의 시위는 좁게 보면 정부와 국민들의 다툼이지만 국제적인 시각으로 보면 사우디와 이란의 패권 다툼이라고 볼 수 있다. 바레인은 시아파인 이란과 수니파인 사우디의 경계에 위치한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위치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군대 파병과 이란의 비난 성명도 이를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6월 들어 바레인의 시위는 해제되었고, 6월 28일 바레인에 주둔한 사우디군이 철수하였다.
7월에는 정부와 시위대가 협상을 진행했다. 이후로도 2년째 산발적인 시위와 협상이 반복되었다. 2012년 9월(10월 시위/집회 전면 금지령), 2013년 2월 중순#, 8월#, 10월 중순#의 시위가 대표적이다. 시아파를 주축으로 하는 야권은 수니파 왕정에 대해 선출직 총리제를 요구했다.
2014년은 물론 2015년 현재까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사우디군까지 투입되었던 2011년에 비하면 지금은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반정부시위는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4.14 이라크
2011년 2월 10일. 작은 규모로 첫 시위가 발생.
2월 12일. 공공 서비스에 대한 접근과 사법 시스템의 부정부패 척결 등을 외치며 바그다드와 카르발라 도시 지역에서 수백 명의 시위가 있었다. 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해 누리 알 말리키 총리는 2014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하고 월급을 자진 삭감하여 절반만 받기로 하였다.
16일, 이라크 동부 도시인 쿠트에서 주지사의 사임과 공공 서비스의 확충을 이유로 2천여 명의 시위대가 시위를 벌였다. 진압 과정에서 3명이 숨지고 30여명이 다쳤다.
17일, 이라크 북부 도시인 쿠르디스탄의 술라이마니야에서 수백 명의 시위대가 부패와 고실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숨지고 40여명이 다쳤다.
18일, 이라크 남부 도시인 바스라에서 천여 명의 시위대가 주지사의 사임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25일 대규모의 시위가 발생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바그다드 거리를 메웠으며 다른 도시들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이 날 보안군의 발포로 최소 15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다쳤다. 시아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라크는 바레인 시위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걸프 국가들이 반발하고 있다.
2012년, 2013년, 2014년 1월에 걸쳐서 부패한 총리의 불만에 대한 반정부시위/항쟁이 연달아 일어났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그 시위 이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중에 막장인 ISIL이 본격적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결국 2014년 이후 최악의 사태로 연결되고 말았다 이라크 내전 참조
4.15 소말리아
2011년 2월 13일 작은 규모로 시위가 발생. 너무 헬게이트라 되려 시위가 없을 것만 같던 소말리아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수도 모가디슈의 임시 정부 청사 앞에서 청년 수백여 명이 모여 정권 퇴진과 생활 안정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소말리아는 정부가 있긴 해도 정부가 정부가 아닌지라(...) 중국 통일 때처럼 일단 군벌들부터 토벌해야지
4.16 쿠웨이트
2011년 2월 18일 작은 규모로 첫 시위 발생. 2월 8일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숨진 상인의 치사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국회의사당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 계획이었으나 정부가 내무장관을 긴급 경질하면서 집회 일정을 1달 미루었다.
18일, 북서부의 자흐라과 술라이비야에서 유목민의 후손이며 무국적자인 비둔인 1천여 명이 모여 국적 및 혜택 부여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최루가스와 고무총탄 등을 사용해 강제 해산을 하였으며 최소 7명이 다치고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4.17 오만
2011년 2월 19일 시위 첫 발생. 큰 규모의 시위. 오만은 술탄 카부스 빈 사이드 국왕이 40년째 재위하면서 아랍 동맹 국왕에서 최장 기간 집권했다. 그러나 카부스 국왕은 독신으로 자녀가 없으며 후계자도 없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인척들조차 정부 요직에 기용하지 않은 상황으로서 국왕 이후가 불안정한 상황. 정세가 비교적 안정적이던 오만에서도 결국 시위가 벌어졌다!
26일, 국왕은 개각을 단행하면서 일자리 5만개 창출과 구직자에 매달 390달러(45만원 가량)의 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는 유화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 되었다.
2월 19일, 수도 무스카트에서 작가와 교수 등 800여 명의 시위대가 의회에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할 것을 촉구하는 거리 행진이 벌어졌으며 26일, 소하르에서 진행된 시위에는 1천여 명이 참가했다. 이 시위 진압 과정에 2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당하면서 시위 열기가 차츰 늘어갔다.
27일, 소하르 등지에서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가 열렸다. 도로를 막고 슈퍼마켓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며 경찰이 고무탄을 발포해 시위 참가자 6명이 숨졌다.
28일, 소하르에서 소하르항의 접근 도로를 트럭으로 막고 700여명이 '오일 달러의 공평 분배'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초, 정부가 개각과 "슈라 위원회" 역할 확대로 시위대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시위는 상당히 잦아들었다. 6월에도 시위가 있었으나 시위자 30명이 구속되는 등 소요는 말끔히 해결되버렸다(...).
이는 오만 국왕이 "르네상스"에 비견 할만한 개방과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파 출신으로 1970년 아버지를 무혈 쿠데타로 몰아낸 후 무스카트·오만 왕국에서 오만 왕국으로 국호를 바꾼 것도 국왕. 즉위 직후 국제연합에 가입하고, 1996년 기본법(헌법)을 만들었고, 2003년 전 국민에 참정권을 부여했으며, 매년 초 2∼3개월 간 각료들을 대동하고 각 지방을 돌며 민의를 살피고 이를 국정에 반영한 것도 국왕이다. 이슬람 극단주의 역시 이러한 특성 때문에 막았다.# 결국 오만 시위의 원인은 정치 개혁과 민생 해결이지, 반국왕이 애초에 아니었다.
일흔을 훌쩍 넘긴(1940년생) 오만 국왕의 후계 문제는 왕권 유고(사망)시 3일 이내에 왕가 회의인 통치가문위원회가 선출하도록 되어있는 상태이다.
4.18 레바논
2011년 10월 7일 금요예배 후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바샤르 알 아사드의 인형을 불태우는 등의 시위를 벌였다. 이 이전에도 시위가 있었다면 추가바람.
4.19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에 대한 자료 유출의 책임을 지고 협상 대표가 사임한 것도 연관하여 내각을 개편하기로 하였다. 추가로 6년 만에 지방의회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일단은 선거제로 열리기에 그다지 큰 시위는 없을 듯 했는데...
요르단강 서안의 파타와 가자지구의 하마스로 나뉘어있는 분열을 해소하고[10] 함께 공동의 적(=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자는 것을 기치로 하여 시위가 조직되고 있다. 전에 시도가 있었으나 가자지구에서는 하마스에 의해,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서는 파타와 이스라엘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집트 연대시위 또한 이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다시 인터넷상에서 3월 15일 날을 거행일로 시위가 조직되고 있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뿐 아니라 요르단과 레바논의 난민 캠프에서도 이루어질 예정이며 이미 수천 명의 지지자가 생겼다.
파타와 하마스는 단합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카이로와 같은 것을 원한다면 허가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등 시위에 대한 거부감을 밝혔다. 여기에 '팔레스타인인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도 있다.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향방을 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과연 팔레스타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지였으나, 이는 압바스 행정 수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다.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2차 가자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확실한 반 이스라엘 + 국가 인정의 방향으로 이어졌다.
4.20 시위 미발생 국가
4.20.1 카타르
카타르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지지도가 높은 상황이라 반정부 시위의 물결에 별 여파가 없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는 반국왕파가 쓴 것으로 보이는 칼리파 알-타니 국왕에 대한 퇴진을 촉구하는 글이 나왔으나 도리어 씹히고 역관광 당했다.
4.20.2 아랍 에미리트
카타르처럼 일단은 왕가에 대한 지지도도 높은 편이며 무엇보다 7개의 토후국으로 이뤄져 왕이 7명이나 되는 점으로 각 지역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기에 대규모 시위로 갈 가능성은 그리 없었다.
게다가 UAE는 오일 머니로 인해 충성도가 높고 경제적으로 1인당 GDP가 5만 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풍요롭다. 고실업률이나 빈부격차의 문제도 드러나지 않는 편. 바레인 시위를 촉발시킨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갈등도 별다른 차별 대우가 없는 상황이다. 야당이 뚜렷하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바레인이 무너지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는 있는지 바레인의 파병 요청을 검토했으며, 이후 자국의 경찰 500여 명을 바레인에 파병하였다. 그러면서 리비아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투기를 파병했다. 카다피는 싫었나보다
5 비아랍권 시위
5.1 이란
이란은 아랍 국가는 아니지만 어쨌든 2011년 2월 15일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수십만명이 테헤란 도심에서 경찰과 충돌함. 경찰이 최루탄을 시위대에 발표했고 시위대는 쓰레기통에 불을 지르며 방어하는 와중에 최소 3명이 총상을 입었다. 공식 확인된 사망자 수는 2명. 이집트의 혁명을 보면서 좋아하던 이란 지도부들은 시위 발생으로 순식간에 당황하게 되었다. 사실 2009년 6월에서 2010년 2월까지 부정선거로 인해 시민들이 분개하면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이란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녹색혁명(Iranian Green Revolutio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름과는 달리 정권을 타도하지 못했고, 오히려 유혈진압으로 인해 2011년 전까지는 물론 그 이후에도 이 사건을 언급하기 어려웠다. 이란판 천안문사태로 비유되기도 한다.
야권 지도자인 무샤비가 실종되면서 시위대의 분노는 더 타올랐으나, 2월 21일 야권 인사인 메흐디 카루비 전 의회 의장의 아들 부부가 체포되었다. 3월 1일 테헤란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들이 곤봉 등을 휘두르며 강경 진압해 2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하메네이가 반정부 시위를 비판하는 설교에 나서면서 점차 잦아들었고, 다만 2013년 6월 온건파인 하산 로우하니가 재선으로 임기가 끝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어느정도 개혁의 숨통이 티워졌다.
한편 이란 집권 세력들은 시아파 세력의 확대를 꾀했다. 2월 22일에는 1979년 혁명 이후 처음으로 이란 군함 2척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했으며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혈 진압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3월 말엽부터 영향권이라 볼 수 있는 시리아의 반정부 시위가 커저버리면서 바레인 시위를 계기로 세력권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무너졌다.
5.2 중부 아프리카 국가들
몇몇 아프리카 나라들에도 변혁의 불길이 사하라 사막의 험난함을 넘어서 번졌다. 부르키나파소는 시민들의 시위와 군인들의 반란으로 소요 사태가 벌어진 바 있고 가봉의 경우 야당 후보가 대선 결과가 조작되었다며 스스로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많은 시위대가 야당 후보를 지지했다.
그 외 차드, 우간다,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카메룬 등 중부 아프리카 대부분 국가들이 얄궂게도 2011년에 주요 선거가 몰려있었다. 각국 선거들을 합쳐서 약 30여 건의 선거가 치뤄졌다.# 여기도 국민들의 불만이 많은 만큼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큰 의미의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5.3 터키, 쿠르드족
아랍 민주화 열풍을 타고 쿠르드족의 오랜 염원인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시위가 벌어졌다. 쿠르드인이 다수 거주하는 이라크에서도 쿠르드족이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쿠르드족의 상황은 아랍 민주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을 점치기는 어려웠다. 이들의 거주지역 및 분포는 애초에 터키 외에도 시리아와 이란, 이라크 그리고 아르메니아[11]와 연관이 커서 실현 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시리아 시위 이후 터키 정부는 시리아 시위대의 편을 들어주었다.
뒤늦게 터키에서도 2013년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나 결국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6 세계의 반응
아랍권의 정치적 변동은 다른 나라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나 테러와의 전쟁, 이스라엘의 안전 문제 등 전 세계가 관심을 가질 사안이기 때문인데,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잠시 관심을 쏠리기는 했지만 리비아 내전 이후 다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여기에 아랍권 시위에 영향을 받은 미국과 유럽의 시위대가 월가 점령 시위를 시작으로 반 세계화 시위를 벌이고 있고 시위는 점점 확대되었다.
그러나 결국 2012년 이후 혁명에 성공한 나라들이 혼란을 지속하면서 "아랍의 봄"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다. 시리아 내전의 경우 현재 진행형.
6.1 미국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전전긍긍이었다. 이집트, 사우디, 예멘 등의 친미 정권이 흔들리면 중동에서의 입지가 현저하게 약화되기 때문. 그렇다고 해서 효과적인 개입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며 민주화를 들고 나온 이상 직접적으로 반대하고 나설 수는 없었다.
다만 유일한 예외는 2011년 2월 15일 이란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을 때였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 장관은 재빨리 "이란 곳곳의 도시의 길거리에 나온 용감한 이란의 반정부 시민들이 지난 주 이집트 시민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라며 이란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중동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유가 상승으로 이어져 미국 경제를 죄어왔고, 지속되는 무정부사태는 아랍에 대한 미국의 기본 외교 정책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과 맞먹는, 아니 어떻게 보면 오히려 이 둘보다 훨씬 중대한 역사적 변혁의 시기를 맞이했으나 아랍권 전역에 개입할 명분도 힘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리비아의 경우에는 카다피가 스스로 개입할 명분을 만들어줬지만 다른 나라들은 그런 정도까지 치닫지는 않았고, 다른 나라에 군사 개입이 필요해진다 해도 현재 미국의 악화된 경제 상황으로는 전쟁 비용을 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결국 미국은 시리아 내전에서도 개입을 포기하고 협상으로 나아갔으며, 석유 문제에 대해서는 자국 내의 셰일 오일 등을 탐사하는 등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재선하면서, 오바마는 흑인판 지미 카터가 되는 악몽에서 벗어났다.
6.2 유럽 국가들
북아프리카에 지분이 많은 프랑스 역시 전전긍긍했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불안은 옛 종주국으로 이 지역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경제난으로 북아프리카 이민자가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라서 이들이 영향을 받기라도 하면 프랑스 내부도 시끌시끌해질 판이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극우파가 득세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리비아 내전에 적극 개입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는 실패했고 프랑스 사회당의 올랑드 후보가 당선되었다. 올랑드 역시 유럽의 경제위기(유로화 사태)가 계속 되는 상태에서 말리 내전에 개입한 것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정권의 지지도가 다시 떨어지는 등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했다.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국가들도 영향을 받아 시위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고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도 영향을 받아 정권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하야하여 마리오 몬티 총리의 중도 내각이 들어섰고, 뒤이은 선거에서 이탈리아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 비록 상원 과반에 실패하여 구 집권당과의 연정은 불가피했으나, 베를루스코니는 그동안 저지른 불법행위로 확실하게 제명되었다. 비바!
한편 이탈리아의 경우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이후에 람페두사섬[12]에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었다.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이후에는 베를루스코니 정권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는 보트 피플들을 강제 송환시키던 리비아군이 손을 떼자 아프리카 난민까지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영국과 독일은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6.3 이스라엘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국이었다. 아랍권에서 그나마 말이 통하던 이집트의 무바라크는 쫓겨났고 다른 정권들도 어찌 될 지 알 수가 없다. 수틀리면 중동전쟁 시즌 5를 찍게 될 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2011년 6월 7일, 시리아 시위대가 골란 고원에 쳐진 철조망을 넘어 시위를 벌이자 국경 수비대가 발포를 해 23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안 그래도 아랍의 혁명의 불씨가 불타면서 불안한 이스라엘로서는 자살골을 넣는 행위나 마찬가지인 만큼 다시 중동이 전쟁의 불바다가 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내부 불만이 많은 아랍 독재 국가들이 그 불만을 공공의 적 이스라엘로 돌리려는 시도를 한다면 남은 건 새로운 중동전쟁 뿐이었다.
2011년 8월 20일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남쪽 도시들을 로켓으로 폭격해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가하면서 다시 평화가 흔들릴 위기에 처해있다. 아랍 연맹은 다시 회의를 열어 이번 사태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으며 이 공격으로 자국 군인 3명이 사망한 이집트에 대해 이스라엘은 이례적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혁명이 잦아들고 이집트의 이슬람 정권이 군부에 의해 무너지면서 다시 이스라엘은 살판이 난 상황이 되었다. 이는 총선을 앞둔 시기에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국제적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 내 합리적인 세력들이 성장했다. 결국 국가의 위기는 넘겼으나 예전과 같은 과격한 행보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2014년에 하마스를 멸망시키겠다며 대규모 공격을 했지만 사상자와 피해만 커지고 지루한 소모전으로 이어져 지친 나머지 휴전했다.
6.4 알 카에다 등의 테러 집단
얼핏 혼란상을 좋아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전혀 반대였다. 오히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 등의 사태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가끔 성명 비슷한 것만 내보내는 정도였다.
반정부 운동 대부분은 알 카에다가 신봉하는 무자비한 폭력과 종교 광신주의를 기피하고 있으며 이슬람을 무조건적인 우선가치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알 카에다 등의 이슬람 광신 테러 집단이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테러 활동보다 민주주의를 위한 민주화 운동이 더 큰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이 입지를 좁혔다. 알 카에다의 2인자인 아이만 알 자와히리가 20년 동안 자행했던 테러와 폭력으로는 무바라크를 사임시키지 못했지만 불과 몇 주 간의 비폭력-비종교의 시민들의 저항으로 무바라크가 끝장났다. 당시 자와히리는 무바라크의 사임과 관련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충격을 받아버렸다고.
혼란상이 계속 된다면 테러 집단이 활동할 여지는 넓어질 수 있으나 지하드를 주창하는 폭력 테러리즘은 전략적으로 패배했으며, 무엇보다 오사마 빈 라덴이 2011년 5월에 미국에 의해 사살당했다. 아프가니스탄을 목표로 하는 원래의 전선에는 큰 변화는 없으나 아랍 혁명으로 이득을 본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랍의 봄 : 민주주의 | 아랍의 겨울 : 반서방 이슬람주의 당선 |
그리고 2014년 다에쉬가 서서히 본격적으로 중동을 침략한다.
6.5 북한
아랍권 혁명의 불길이 자국으로까지 건너올까봐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방송 보도는 철저히 통제했지만 고위직들은 이미 이번 시위에 대해 논의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무바라크 시절 이집트가 북한에 투자한 게 많았는데 무바라크가 쫓겨나서 경제적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카다피의 방북 이후 리비아에 대한 정보가 북한인들 모두에게 널리 알려졌던 것도 문제였다. 그 후 리비아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이 가져오는 소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리비아는 잘 사는 나라"라는 의식을 북한인들에게 심어주었다.(심지어 북한에서 리비아는 남한을 의미하는 은어로도 쓰인다.) 이들이 퍼나르는 정보는 북한의 상황과 비교되어 "왜 리비아 같이 잘 사는 나라도 혁명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지?"라는 생각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2011년 김정일이 불행히도 천수를 누리면서 숨을 거두었고, 김정은이 집권한 뒤에도 리영호와 장성택이 차례로 숙청되는 등 권력 불안 속에서도 큰 틀에서의 불안 요인은 사라졌다. 결국 "진달래 혁명(평양의 봄)"[13]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14]
6.6 중국
중동에 친미 국가들의 정권이 바뀌거나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싫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반면 대외적으로는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자국민들이 이집트 혁명을 보고 반정부 시위를 벌일까봐 우려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의 아프리카 투자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새 정권이 반중 성향일 경우 중국도 경제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도 고려 대상이었다.
중국은 이집트 혁명에 관한 뉴스들을 전면 보고 통제했으며, 후진타오는 인터넷 관리 감독을 강조하고 나섰다.
과연 중국에서도 시위는 있었다! 3월 20일 베이징 왕푸징 거리 맥도널드 앞에서 수백 명이 모여서 시위를 했지만 시작되자마자 공안이 싸그리 잡아갔다. 이는 이전에 중국 인터넷상에서 재스민 혁명을 재현하자는 취지의 글이 돌았던 것과 연관된 사건이었다. 27일 재시도되었으나 공안 당국의 감시와 탄압으로 KFC로 다시 옮겼고, 결국 당일 시위는 좌절되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친정부 시위밖에 없었던 중국에서 이례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소규모로라도 일어났다는 점이 중국 정부와 세계의 이목을 끌었으나 중국 정부는 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며 인터넷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3달 후인 6월 들어서서 중국에서 다시 시위가 일어났다. 다만 주체는 위의 민주화 세력이 아닌 농촌 이주민, 운송업계 노동자들로 중국 내 빈부격차가 극심한 데다 정부가 내놓은 중재안을 기업들이 편법을 써가면서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불만이 폭발했던 것. 중국 남부 주요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중이며 규모는 크지 않지만 비슷한 처지의 중국인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강경 진압과 임금 현실화 정책 등을 병행하면서 시위의 확산을 저지하였다.
이후 2013년 시진핑 정권이 들어서고 지지가 나쁘지 않으면서 중국의 민주화 가능성은 다시 잦아들었다.
일단 중국정부는 점점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이 사회불안요소가 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해결책에 부심하고 있다.
6.7 한국
언론 보도 자체는 활발했다. KBS가 리비아 현지에 취재 기자를 급파했다가 폭격을 맞는 등[15] 르포르타쥬도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초기에 보수 언론들은 대개 이집트외 튀니지의 친미 독재자들 몰락을 우려했다. 이란처럼 북한과의 연계가 강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요지. 반면 그와 같이 북한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했던 듯.
이집트와 튀니지, 리비아가 경제적인 투자에 연루된 게 많은지라 기업들은 당장 우거지상이 되었다. 국제 유가도 이 요인으로 요동쳤으며 리비아에선 현지 건설현장이 습격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011년 말 현재는 외려 중동보다는 그리스발 악재(유로존 위기) 때문에 더 곤욕을 치루는 게 한국을 비롯한 모든 서방 세계 경제권의 현실.
다만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은 시민 혁명 자체에 대해선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기는 하다. 수십 년간 장기 독재 체제를 시민들이 아래로부터 타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민주화운동을 새기고 있는 한국의 민중들도 남의 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란과는 다르게 미국이 내심 비호해주던 독재 정권이 시민들이 직접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들은 미국 위주의 외신 보도에 의존했는데, 연합뉴스가 이집트 민주화 운동을 소요 사태로 기술했다가 피 흘리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한국 네티즌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또 리비아 민주화 운동이 한참인 요즘은 SBS가 리비아 시위대를 폭도라고 하면서 대차게 까였다.[16] 그 뒤로 SBS는 리비아 반정부군을 계속 '시민군'이라고 칭했다.
이집트 민주화 운동 중에는 이집트 대사관 앞에 수백명의 이집트 노동자들과 한국 진보 단체(다함께)들이 연대 시위가 두 차례 열렸고 21일 광화문에서 리비아 지지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는 경찰들에게 해산당했는데 광화문광장에선 시위나 집회가 금지되었기 때문이지 리비아 정부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다. 2월 25일 주한 리비아인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신자와 한국 시민단체 회원 150여명은 금요예배가 끝난 후에 이태원동 이슬람 성원에서 리비아 대사관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주 한국 리비아 대사의 사임을 요구하며 숨진 리비아인들의 사진과 서한을 전했다고. 이는 이미 집회 신고가 된 상황이었기에 별 문제 없이 끝났다.
7 관련항목
7.1 관련인물
7.1.1 튀니지
7.1.2 이집트
7.1.3 리비아
7.1.4 예멘
7.1.5 시리아
8 평가
아랍의 겨울 또는 아랍의 여름[17]
서방에서는 아랍의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보았으나,[18] 실상은 아랍판 신해혁명/러시아 혁명이었을 뿐. [19]
2016년 시점으로 보면, 아랍에서는 광범위한 혼란과 폭력과 사회불안정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서방의 오판으로 인한 섣부른 개입이 왜 상태를 더 악화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
혁명 후 세속적 민주주의가 그럭저럭 굴러가는 곳은 튀니지뿐이다. 이전 버젼에서는 튀니지도 사정이 굉장히 나쁘다는 식의 글이 있었으나 적어도 아랍의 봄 이후 내전과 다에쉬등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들의 창궐로 개판이 되어버린 시리아와 이라크나 군부 쿠데타로 독재 체제가 들어선 이집트보다는 나은 편이다. 그 외 국가들은 이슬람 원리주의를 지향하는 정권을 뒤엎고 군부 독재 정권이 들어서거나 (이집트[20]) 종파 갈등 내전이 일어나거나 (예멘), 최악의 경우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창궐하는 사태가 벌어져 (시리아, 리비아[21]) 인권이 억압되고 있다. "이슬람주의의 겨울(Islamist Winter)"이라는 표현 또한 사용된다.
내전이나 테러는 없고 이들보다 상황이 나은 바레인조차 지금 시민들의 시위와 경찰&군인들의 진압[22] 이곳역시 종파 갈등이 간접적으로 보인다.[23] 이라크는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고, 다에쉬가 나타났던 곳인 만큼 이들에게 시달리거나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개선 중이지만 여전히 다에쉬 세력들의 테러가 없는 것도 아닌데다가, 모술이나 바그다드 근처에는 그 잔당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해결해야 할 점이 많다. 게다가 아사드 같이 살아남은 독재자들은 테러리스트에 맞서는 영웅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막기위한 중러의 지원속에 더욱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결국 아랍의 민주화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을 불러오는 결과가 되었다. 특히 혁명으로 축출되기 이전 호스니 무바라크나 벤 알리 같은 아랍권 독재자들은 이슬람 사회를 어느 정도는 근대화하려던 세속주의자들이었으며, 이슬람 근본주의를 억눌렀다. 바샤르 알 아사드의 배경인 알라위파도 생존과 권력을 위해 좋든 싫든 서방식 마인드를 지니고 토착 기독교 등의 소수종교들과 연합해 수니파에 맞섰다. 중동의 독재 정치와 중동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이슬람 근본주의는 별개의 문제다. 중동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너무나 큰 사회적 영향력과 보편적 국민 정서로서 박혀 있기에, '민주화 → 다수결 민주주의 →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의 집권→ 인권 탄압'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나올 수 있다. 혁명 직후의 이집트가 이 테크를 타다가 군부에 의해 쫓겨났다. (군부에 의해 좌절되긴 했지만, 이집트 국민들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미국 대중들도 테러와의 전쟁, 및 아랍의 봄에서 치른 큰 댓가를 통해 "독재자는 그대로 두는게 낫다", "미국도 만능은 아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이미 2016년 대권가도에 나섰던 도널드 트럼프나 테드 크루즈와 같은 공화당계 주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혁명이나 개혁이 성공된 나라는 튀니지, 모로코, 요르단 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24]
8.1 왜 동구권처럼 성공할 수 없었는가?(과연 아랍판 동유럽 혁명으로 비유할 수 있는가?)[25]
우선 아랍의 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26]
하지만 언론에서 꽤 비교대상이 되는 1989년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던 동유럽과는 달리 혁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선거나 부정부패, 독재로의 회귀나 권위주의 유지, 내전이 계속 일어나는지 의문인 사람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통점은 있으나 배경이 달랐다
대표적인 이유를 뽑자면 혁명 이전의 분쟁과 내전, 그리고 내전으로 혁명을 일으킨 방법이 있다. 중동은 이미 2011년 이전부터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간 전쟁과 내전,분쟁등이 끓이지 않았으며, 특히 리비아의 경우는 진짜 내전으로 혁명이 일어났다. 동유럽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국가간 전쟁이나 내전, 군부 쿠데타와 같은 정정 불안이 없이 조금씩 평화를 유지했고[27] 1989년 동유럽 혁명 과정에서 적어도 내전으로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다. [28]
또한 동구권의 경우는 왕조나 군주정 체제의 독재 국가가 없었는데 공산화 이전에도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같은 경우 왕이 지배하는 군주국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반나치 게릴라,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던 티토와 디미트로프, 지프코프, 게오르기우데지 같은 공산당 좌익 지도자들이 전후 주도권을 장악하여 왕정이 폐지되어 공산당 1당 체제의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왕정이 지배하던 시절과는 아예 다른 나라가 되었고 이들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당 정권 역시 자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합리성이 있는 통치를 펼쳤었다.. 하지만 중동의 경우는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바레인 등의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는 진짜 군주정 국가가 있었고, 해당하는 나라들의 시민들은 소규모 시위 및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9]
단순히 내전 뿐 아니라 이미 중동 지역은 여러 부족들의 대립이나 지역감정이 있었는데다가 내전이후로 그것이 더 심화된 나라들도 있었다. 게다가 예멘, 바레인, 이라크, 시리아처럼 종파분쟁까지 섞이면서 점점 종파 분쟁으로 변화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이나 아시리아인, 투아레그족처럼 분리독립을 윈하는 소수민족들의 분쟁까지 나타나면서 일은 더 꼬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다른 동구권들[30]은 적어도 나라없는 소수민족들과의 분쟁은 없었다.[31][32][33]
게다가 동구권은 경제도 어느 정도 나아졌고, 정교분리가 저절로 된 상태였지만, 이슬람권에 속하는 중동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엮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이것이 세속주의자와 근본주의자들의 대립 및 내전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혁명 이후에는 알카에다 등의 극단주의자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에게 갈라진 일부는 무시무시한 단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아랍 지역의 토착 악습(명예살인, 여성할례 등)과 같은 잔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민주주의가 오기도 어렵고, 오히려 역효과일 가능성이 더 높다. 동유럽은 이미 사회주의 정권 이전부터 잘못된 악습이 폐지되었으며, 이러한 역사가 이미 길었기 때문에 인권이나 삶의 질이 나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랍 세계의 생활은 서양 세계의 생활과 너무 다르다. 그래서 서구식 민주주의는 더욱 더 안맞는 점도 이런 점이 있기 때문이다.[34]
그리고 동유럽은 노동이 어느 정도 발전되었고, 덕분에 경제력조차 꽤 존재했다. 하지만 아랍은 동유럽과 비교할 때 노동이나 경제 등이 동유럽에 비해 아직도 덜 발전되었다.
제일 중요한 점이라면, 동구권은 냉전 종말이 다가오고 있어서 강대국들이 이곳에 패권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랍의 봄은 강대국들이 중동의 자원 때문에 이곳에 패권을 잡으려 했고, 이들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게 만들었다. [35]
결국 튀니지처럼 세속적이거나, 요르단, 모로코처럼 근본주의가 심하지 않는데다 치안이 좋은 나라들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들은 구 유고슬라비아보다 더 심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물론 혁명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변함이 없고, 성공이 될지 진짜 실패가 될지는 미래가 아닌 이상 알 수 없을 것이다.- ↑ 아랍의 봄 당시에 쓰였던 구호. 위키백과에서는 인민은 정권 타도(정치 타도)를 원한다로 표기되어 있다.
- ↑ 이는 새뮤엘 헌딩턴의 기준에 따르면 "제4민주화 물결"이 된다고 한다. 제1민주화 물결이 유럽과 미국의 보편선거권 운동이고 제2민주화물결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의 독립이라면 제3민주화 물결은 1980년대 한국의 6월 항쟁을 포함한 많은 피플 파워 혁명이고 제4의 민주화 물결은 이 아랍의 봄이라는 것.
- ↑ 화려한 복장만큼 마지막 길도 가장 버라이어티하고 특별했다.
- ↑ 예컨데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7년 신년 연설에서 "팔레비 국왕의 이란은 불안한 중동 속의 안정된 섬"이라고 말했지만 그 후 불과 2년 만에 팔레비 왕조는 무너졌다. 1979년의 이란 이슬람 혁명은 앞 각주에서 설명한 80년대 제3민주화물결의 시발로 평가되는 케이스이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요소를 가진 혁명이기도 하다(혁명이 아니더라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탈레반의 집권도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제4민주화물결이 1979년을 선례로 만들 것인가, 반례로 만들 것인가는 앞으로도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는데, 결과는 이슬람 혁명도 민주정부도 아닌 군부인 것 같다(...).
- ↑ 실제로 이란 민주화 운동도 아랍의 봄처럼 트위터나 유튜브로 통해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 ↑ 2월 13일 알 자지라 보도.
- ↑ 2월 19일 스카이뉴스 보도.
- ↑ 총 40석 중 18석. 상원 40명을 국왕이 지명하기 때문에 1당이라고 해서 여당이 아니다.
- ↑ 'Down Down Hamad!'와 같은.
- ↑ 양측의 정부 전복은 목표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 ↑ 여러 나라로 나뉘어지면서 쿠르드인들도 서로 갈등이 큰 점도 있으며 터키만 해도 친터키 쿠르드 조직과 정당까지 있다. 아르메니아는 쿠르드의 독립 요구 지역이 바로 자신들의 성지 아라랏산을 비롯한 곳이 대거 들어가서 독립을 결사반대하고 있다.
- ↑ 튀니지에서 15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 ↑ 북한의 민주화 혁명. 비슷한 단어로는 목란(함박꽃) 혁명도 있다
- ↑ 물론 김정은 등 독재 정권들이 차우셰스쿠나 카다피처럼 민중들에게 살해당하고 혁명이 이루어진다고 치더라도,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없는게, 그렇게 되어도 여전히 가난해지거나 더 심할 경우, 내분을 해결하지 못한채 내전으로 갈 수도 있다. 제 2의 후삼국시대가 될 가능성도 적지 않게 된다
- ↑ 시민군 근처를 따라가다 근처에 한 발만 떨어졌다. 다친 사람도 없고 취재진 입장에선 오히려 특종을 잡은 셈.
- ↑ 다만 실제로 시위대 일부의 무차별적 약탈 행위는 여러 경로로 확인되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해야 할 듯. 실제로 국제 정치/국제법 연구자들 사이에서 시민군과 시위대의 구분법은 기준이 있다고 한다.
- ↑ 아랍지역의 여름철 날씨를 고려해 보면 겨울보다는 여름에 비유하는 게 더 이치에 맞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 ↑ 도미노식 및 나비현상으로 무너지는 현상이 공통적이다. 서방은 중동에서도 세속화되고 민주화된 후속 정권을 기대했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헛된 꿈에 불과했다.
- ↑ 청나라를 뒤엎은 후에 중국은 군벌이 할거하여 민중은 더욱 고통을 겪었다. 특히 리비아, 예멘이 이와 비슷한 현상을 띈다. 시리아는 (리비아, 예멘보다 더 안 좋은 상태로) 진행 중이지만 성공할 확률이 낮고 성공하더라도 치안문제, 도시재건이 힘들 것이다. 러시아는 1918년 혁명 이후 소련이 되었지만 스탈린을 포함한 여러 독재자들이 나타나면서 혁명이 의미없어져갔다. 이집트 역시 혁명으로 과도 정부가 나타났으나 군부들에 의해 다시 독재로 돌아가버렸다
- ↑ 게다가 현재 이집트의 엘시시 군부 정권은 무바라크 정권이나 이전 사다트 정권의 독재 체제 저리가라 할 정도로 억압적이라고 한다.
- ↑ 그래도 이 쪽은 시리아보다는 낫다.. IS에 맞서 답없이 다투던 각 정파 세력들이 통합 정부 구성에 합의했고 최근 IS와의 전쟁에서 IS를 거의 박멸해나가고 있는 중.
- ↑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지면서 맞서고, 경찰이나 군인들은 최루탄으로 제압하고 있다. 2011년에 비하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시위는 계속 진행 중이고, 바레인 왕정들의 독재는 더 심해졌다.
- ↑ 다수의 주민들은 시아파지만, 왕정 등 정치계는 수니파가 집권중이다
- ↑ 튀니지는 설명했듯이 치안은 살짝 좋지 않아졌으나 남부 국경일부만 제외하면 현재상황으로서는 거의 좋아졌으며, 모로코와 요르단은 혁명은 아니었으나 대신 정부들이 개혁을 하겠다고 주장함으로서 국민들과의 약속을 절반은 지켰다.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독재자는 없지만 대통령이 좀 무능하다... 게다가 가자지구의 경우는 하마스가 사실상 독점함으로서 하마스의 준독재가 나타나고 있다.
- ↑ 경우에 따라 프랑스 혁명이나 1848년 혁명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 ↑ 서유럽의 경우도, 프랑스 혁명이나 1848년 혁명 이후 주변 국가들(독일, 헝가리 등) 역시 민주주의 혁명이나 시위, 봉기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100년 혹은 그 이상이 지날 때까지 민주주의가 완벽히 정착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후술한 동유럽도 1989년 이전인 1956년 헝가리 혁명과 1968년 프라하의 봄 등 대규모 반소항쟁이 있었지만 동유럽의 민주주의는 1989년까지 몇년이 걸렸다. 한국도 4.19 혁명 이후 여전히 민주주의는 꽃피지 못했으나 199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민주주의가 되지 않았던가?
- ↑ 냉전 몰락후 내전으로 분열,해체되어버린 유고슬라비아는 제외
- ↑ 루마니아의 경우는 예외였지만 루마니아 역시 적어도 내전으로 변질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루마니아 역시 소규모의 유혈사태가 어느 정도 있되,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 ↑ 특히 바레인은 비참한 유혈사태로 종식된 적이 있었다.
- ↑ 유고슬라비아의 경우도 민주화를 원했지만 다른나라와 비교할 때 적어도 민주주의보다는 소수민족들이나 차별받는 지역들의 분리독립 및 종교, 종파적 이유로 독립되는 것을 원했다.
- ↑ 유고슬라비아도 상황이 심했지만 중동처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 ↑ 물론 불가리아 같은 경우 다수의 불가리아계가 소수 터키계를 탄압한 사례가 있긴 했지만 냉전 종식 후 공산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 혁명으로 새로 들어선 신 정부가 이들 터키계에 대한 탄압정책을 철폐하면서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내전 양상의 분리주의 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 ↑ 루마니아 등에도 집시가 있었지만 이들이 독립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집시들은 독립보다는 집시차별폐지를 더 원한다.
- ↑ 알바니아는 그래도 잔인한 복수에 속하는 풍습이 있긴 한데, 중동과 비교할 때 그나마 상황이 많이 해결되었다.
- ↑ 바레인은 이란vs사우디를 포함한 아라비아 반도의 왕정국가들의 대립이 있었으며, 바레인보다 상황이 심각한 시리아도 미국과 서유럽vs러시아 및 중국까지 참전하면서 상황이 심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