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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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히 착각하는 사안이지만, 이 항목에 있는 박연과 개성 박연 폭포와는 일절 관계 없다. 다만 박씨 성을 가진 선비 등과 관련된 민담만 남아 있다.

1 조선 초기의 음악가

朴堧, 1378~1458

세종대왕 시기에 활동한 음악가. 호는 난계(蘭溪). 충청북도 영동군 출신[1]이며, 본관은 밀양. 정간보 제작 등에 관여하여 조선의 궁중음악을 아악(雅樂) 중심으로 정비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러한 공로 덕분에 왕산악우륵을 잇는 한국 역사상 3대 악성으로도 불린다.

1423년에 의영고 부사였다가 제생원의 의녀 중에 총명한 자를 골라 글을 가르치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1425년에는 음악에 대한 책을 편찬하기 시작했고, 1426년에는 봉상판관을 지내면서 명나라에서 보낸 악기인 소관을 사용하기를 왕께 요청하거나, 음악에 대한 상소를 왕께 올렸다.

1427년에는 아악기 중 하나인 석경을 제작하여 왕께 올리기도 했다. 1427년에는 사직단의 신위를 고쳐 만드는 것에 대해 백관들이 논의할 때 악기에 대해서는 박연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1430년에는 봉상소윤을 지내면서 아악을 쓰고 향악을 쓰지 말자고 건의하였고,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자 이를 위해 힘을 쓰다가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1433년에 그가 건의한 아악이 처음으로 궁중에서 사용되었고, 이후에도 음악에 관련된 여러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은 매우 뛰어나지만, 실록에 남겨진 그의 인성과 관련된 기록들은 그가 인성이 좀 바르지 못한 인물이였음을 알게한다. 그는 궁의 악공들을 데리고 사사롭게 영업 행위를 하는가 하면, 누이가 죽은 뒤에 바쁘다는 핑계로 유산만 챙겨서 얼른 돌아오는 등의 행동을 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 일로 1448년에는 잠시 파직을 당하였으며, 이후 단종 대까지 음악 일을 맡다가 아들인 박계우가 세조에게 숙청당하고, 박연 본인 또한 이에 연관되어 낙향한 뒤 곧 사망했다.

2 조선으로 귀화네덜란드

파일:Attachment/박연/Weltevree.jpg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더레이프(The Rape De Rijp)에 세워져 있는 벨테브레이의 동상 융복을 표현한 것이다.

파일:Attachment/박연/Wolfswinkel.jpg

1996년 KBS 다큐멘터리 중세 '조선의 비밀-하멜 표류기'에서 벨테브레이를 연기한, 전 주한 네덜란드 대사 요스트 볼프스빙컬(Joost Wolfswinkel). 이 다큐멘터리에는 네덜란드 대사 뿐만 아니라 대사관 농무관이었던 프레데릭 보스나 씨가 헨드릭 하멜 역을 맡은 등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적극적으로 참여, 협력하였다.

朴淵 / 朴燕, 1595년 ~ ?

본명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Jan Janesz Weltevree). 화란[2] 출생으로 조선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이기도 하다[3]. 이름은 '벨테브레', '얀'과 비슷한 발음을 따서 지은 것이다.

1627년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표착해 제주도에 상륙했으나 곧바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조선시대 전반의 관례로는 조선과 통교하고 있는 국가 중에 접경 국가 출신의 표류자는 직접 송환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무조건 명나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정세가 좋지 않았기에(명청교체기) 부산의 일본 왜관에 의뢰해서 일본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려했으나, 일본은 이것으로 뭔가 거래를 해볼 속셈으로 박연의 일행이 절리지단(切利支丹 - 크리스챤)[4]이란 핑계로 거절했다. 그러자 네덜란드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선 조정은 쿨하게 송환을 포기했다.네덜란드 표류자들: 안 돼... 결국 그는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며 결혼해서 귀화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박연과 그의 동료 2명이 참전했으나 박연을 제외한 두 명(Direk Gijsbertz - 디렉 헤이스베르츠, Jan Pierterz - 얀 페에테르츠)은 전사했다. 그 후 항복해온 일본인 및 국인을 감시하는 일, 청이 싫어 조선으로 귀화해 온 명나라인을 비롯한 외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조선판 외인부대)의 지휘관 자리, 대포를 개량하는 일 등을 맡았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헨드릭 하멜조선으로 표류했을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갓 쓰고 한복 입은 백인이 와서 하멜이나 동료들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26년이나 지나서 조선에 적응이 다 되었고 반대로 네덜란드어를 같이 나눌 사람도 병자호란 때 죽어서 도통 말을 나누지 못해서인지 통역을 꽤 낯설어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나와있다.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네덜란드 말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서툴렀다고 한다. 다만 며칠동안 같이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다시 능숙해졌다고. 조선인들은 하멜에게 벨테브레이를 가리키며 "이 자가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아는가?"라고 물었고 하멜이 "우리 네덜란드 사람이 틀림없다"고 대답하자 조선인들은 웃으면서 "틀렸다. 이자는 조선인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을 보아 조선인들에게는 인종은 달라도 같은 조선인으로 대우받은 모양이다.

하멜 표류기에서는 별 다른 얘기가 없이 사무적인 얘기만 나눈 것처럼 되어 있지만 조선측의 기록에는 벨테브레이가 하멜 일행을 처음으로 만난 이후 숙소로 돌아와서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상으로는 조선 여자와 결혼해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당연히 혼혈이라 네덜란드 얼굴과 조선 얼굴이 반반 섞여 있다고 놀랍다는 기록이 있다. 하멜은 자신이 탈출하던 1668년까지만 해도 벨테브레이가 살아있었다고 했는데 하멜이 일본으로 탈출하는 시점이면 이미 70이 넘은 나이로 고령이었으나, 언제 죽은지는 정확하지 않다.

성을 바꾼 것으로 보아 본관도 새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외국 귀화인으로는 매우 드물게 본관을 하사받은 기록이 없다. 정말 안받은건지 받았는데 딱히 신경을 안쓴건지... 그의 후손을 자처하는 박씨 문파도 없는 상태. 한국경제에서는 원산 박씨가 그의 후예라는 기사를 냈으나 원산 박씨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네덜란드에 가족이 있었고, 그 후손이 한국에 있는 박연의 후손을 찾으러 왔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김충선과는 정반대인 경우.

그는 무기 기술에 해박하고,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거친 환경에서도 적응을 잘 했던 것(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장했다고 한다)으로 보아 군인 혹은 해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 건축가의 아들이고, 그의 대부가 시장님이었으며, 300굴덴짜리 집을 살 정도로 부유했던그렇지만 억류에 질려서 도둑질을 해가며 귀국하려고 몸부림쳤던, 끝내 귀국해 조선 억류시기를 부정적으로 서술한 하멜과는 처지가 많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5]

그러다가 당시 네덜란드 기록을 추적한 결과 벨테브레이의 신분이 밝혀졌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사략선 아우베르케르크 호의 장교였다고.[6] 그러니까 추측대로 군인과 해적, 둘 다였던 셈이다. 제주도에 오게 된 것은 아우베르케르크 호가 나포한 중국 상선을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7]로 몰고 가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중국 상선에 옮겨 탔다가 태풍을 만나 아우베르케르크 호와 떨어지고 식수가 떨어지자 마침 가까이 보이던 제주도에 부하 두 명을 거느리고 상륙했는데 그 때 중국 상선의 원래 선원들이 배를 탈환하고 가버리는 바람에 제주도에 남겨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더레이프는 암스테르담 북쪽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8]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하멜과 달리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상경한 뒤 동인도회사에 입사해 산전수전 다 겪은 30대 초반의 청년이라 추정해볼수 있을 것이다.

하멜과 달리 탈출하지 않고 조선에 귀화해 살아간 이유도, 혼란스러운 중국 상황과 효종의 북진 정책, 일본의 거부 같은 국제 정세로 송환 가능성이 차단된데다 생각보다 후한 조선쪽의 대접에 돌아갈 의지가 약해져셔라고 추측해볼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뱃일이라는게 상당히 고된 일인데다가 그 중에서도 사략선 장교가 안정된 직업이라 할 수 없기에 [9], '이렇게 된 거 전혀 모르는 낯선 나라이긴 해도 안정적으로 대해주니 여기 눌러사는게 낫겠다.', 라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실제로 조선 정부는 박연을 훈련도감에서 근무하게 해주고 외인부대(...)의 지휘관으로 삼는가 하면 병장기를 개량하는 사업을 맡겼다.[10] 연고없는 외국인 치고는 상당히 비중있는 일을 맡게 되었고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기도 했으니 박연의 선택은 현명했던 셈이다. 기술을 안다고 국방부 육본 정책과장에 중령 계급주고 일하라 한 셈이다.

탐나는 도다》에서 하일이 연기하기도 했으며, 소설 《천년의 왕국》에서 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3 천재(...) 번역가

박련 항목 참고.
  1. 지금도 영동군 심천면에는 난계 사당이 남아 있으며, 근처에는 난계 국악기 체험장이 있다. 이 외에도 영동군에서는 난계 박연과 국악과 관련된 시설 및 행사가 많다.
  2. 네덜란드는 '홀란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어서 동아시아에서는 홀란드를 한자로 치환한 화란으로 불렀다.
  3. 정착이 아닌 서양인의 최초 조선 상륙 기록은 1582년 제주도에 표착한 마리이(馬里伊)라는 사람이다. 그는 명나라 사행길을 통해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4. 일본식 표현으로는 키리시탄(キリシタン)이다.
  5. 사실 하멜이 표류기에서 조선을 비하하는 투로 묘사한건 이 표류기가 쓰이게 된 배경을 고려해보면 어쩔 수 없는 조치이긴 했다. 자세한건 하멜 표류기 항목 참고.
  6. 장교인걸 어찌 아냐면 같이 표류한 부하 2명이 벨테브레이를 '호탄만'이라고 불렀다는 조선 기록이 있는데 호탄만은 네덜란드어 Hoofdman=영어의 Captain 으로 추정된다.
  7. 현재의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
  8. 2005년 기준으로 4000명이다. 우리로 치면 파주시나 연천군에 속한 면읍 같은 곳.
  9. 당시 선원이 되었다가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간 네덜란드인이 1/3 밖에 안 되며 그나마도 평균 수명이 40세로 매우 짧았다. 일본에서도 소문이 돌 정도. 게다가 당시 사략선 승급 과정을 보면 벨테브레이 역시 어린 나이에 배에 올라타 고생 깨나 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사략선이 아니더라도 선원 일은 꽤나 고된 일이기도 했다.
  10. 이때 조선에 플린트락이 전래되었지만 당시엔 비싸고 불발율이 높은데다 무엇보다 수요가 없던 관계로 양산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