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drik Hamel(1630년 8월 20일 ~ 1692년 2월 12일)
1 소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 1652년부터 1666년까지 조선에 살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써낸 것으로 유명하다. '하멜'로 알려져 있지만 네덜란드어로는 '하멀'에 가깝다.
2 조선에서의 삶
건축가의 아들이고, 그의 대부가 시장님이었으며, 300굴덴짜리 집을 살 정도로 부유했던 인물이다.
1652년 상선 스페르버르호 (Sperwer)[1]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 제주도에서 몇개월간 압류되어 있다가 [2] 일행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방인을 외부로 보내지 않는다'는 쇄국정책에 따라 억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이방인에게도 은덕을 베푸는 것이 일종의 선전거리였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단적으로 하멜보다 80여년전에 표류해왔던 서양인을 명나라를 통해 송환한 적이 있고 정조 때에는 영국함선 프로비던스호가 부산항에 왔을 때 물자와 식량까지 챙겨서 돌려보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조선과 먼 나라의 표류인은 명나라 조정에 보내 송환을 위탁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당시의 중국 정세상 그것이 불가능했다.
이에 앞서 제주도에 머물 시에 먼저 조선에 표류해 정착한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를 만나 이야기도 했으나 "한번 여기 들어오게 되면 나갈 수가 없으니까 포기하렴"이란 말만 듣게 되었다. 하멜이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알려졌기도 하지만 하멜이 탈출을 시도한 것은 한 번뿐이다. 먼젓번에 있었던 두 차례의 탈출 시도 중 첫 번째 탈출은 제주도에 표류한지 얼마 안되어 어부들의 배를 탈취하여 시도한 것인데 하멜은 포함되지 않았었고 탈출을 시도한 자도 다섯명 정도였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조선 배는 타본 적이 없어 기술 미숙으로 결국 잡히고 말았다. 청나라 사신 일행에게 뛰어드는 일도 하멜은 직접 가담은 하지 않았고 그가 직접적으로 가담한 탈출 시도는 최후에 일본으로 탈출한 것 뿐이다. 다만 제주도에서 전라도로 이송되던 중에 군졸들이 죄다 배멀미로 골골거리자(...) 이 맥주병들을 바다에 처넣고 배를 탈취할까?라고 고민했으나 조선 배를 다룰줄도 모르고 물자도 부족하여 그만두었다.
하멜 일행은 한양으로 이송되었고 그 과정에서 하멜은 자신이 들른 조선의 고을들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기며 자신이 상륙한 이 신세계에 대해 큰 흥미를 보였다. 한달여 간의 여정 끝에 한양에 도달한 하멜은 효종을 알현하였고 효종에게도 일본으로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역시 기각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대외적으로 북벌을 (실현가능성은 없었지만)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하멜 일행은 서양의 군사기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총을 개량하는 등 조선에서 공밀레로 살게 되었다는 설이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기술자들은 표류 과정에서 익사해 다 죽었고 이들에겐 별다른 기술이 없었다. (하멜은 항해사였다.) 그럼 그들이 무얼 했느냐? 처음에 이들을 써먹으려던 조정은 별 수 없이 이들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서 효종의 친위대로 쓰게 했다. 조선인들에 비해 체격이 우람하여 왕의 권위를 높여주는 좋은 볼거리가 되었다.
하멜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그들의 외모가 조선인들의 외모보다 낫다고 판단했다고 주장된다. 그들의 외모가 조선인들에게 아름답다고 받아들여졌을지 추하다고 받아들여졌을 지는 취향의 문제겠지만 적어도 매우 신기한 생김새에 우람한 체구를 가진 그들이 효종을 호위하는 것 자체가 효종의 권위를 치켜세울 수 있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3]
그외에 그들은 대갓집에 불려다니며 네덜란드 노래와 춤을 보이는 일 따위를 했고 이들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는지 대갓집 하인들이 주인의 명이랍시고 속여서 이들을 불러내는 일도 있었다 한다.
그러던 중 그의 동료 두 명이 군졸로 있다가 청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때 지나가는 길에 무단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청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들은 헨드릭 얀스[4]와 헨드릭 얀스 보스라는 자들로 각각 남이안과 남북산이라는 조선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헨드릭 얀스 보스가 호소하는데도 네덜란드 말을 모르는 청나라 사신들이 멀뚱히 있자 사태가 이상함을 느낀 헨드릭 얀스는 잽싸게 튀어버렸으나 곧 체포된다.청나라 사신: x발 저놈들은 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깜짝 놀랐잖아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명의 범행이라고 기록되어있지만 승정원 일기에 한놈은 현장에서 잡히고 한놈은 달아났지만 체포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 사신들에 대해 하멜은 타르타르(혹은 타타르)[5] 사신들이 네덜란드인들을 보고 스페르베르 호가 표류한 후 조선에서 취한 30만냥에 달하는 재물을 청에서 요구할까봐 조정이 불안해했으며 무엇보다 화란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조선에서 조직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청에서 의심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고 저술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조정에서 사신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먹여 이 일이 무마시키고 이들은 투옥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낙심한 나머지 음식을 거부하다 곧 죽었다고 하고 하멜은 이들이 참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리만 남겨놓았다.
어쨌든 탈출 소동은 조정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하멜 일행을 몹시 불순하고 위험한 놈들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서른셋[6]에게 전부 곤장 50대를 선고하여 매운맛을 보여주려 했지만 효종이 이들은 도둑질을 하러 우리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여 태형은 피했지만 곧이어 그해 8월에 청나라 사신이 또 오게 되면서 조정엔 비상이 걸렸다.
이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하여 조선말을 잘하는 세명에게 또 남만인들이 상륙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전라도 해안으로 보내 인질로 삼고 청나라 사신들과의 대화 매개체를 박탈했다. 청나라 사신들은 곧 돌아갔지만 조정에선 이들을 마땅히 죽여야한다는 논의가 매우 거셌다. 그들의 직속 상관인 이완은 이들을 조선 병사들과의 결투를 붙여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면 외국인들을 무고하게 죽였다는 말은 듣지 않을 거라고 하는 등 아예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방법을 주장하며 이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했고 대다수의 조신들도 그들을 죽일 것을 청했다. 이때의 상황이 심각하여 벨테브레는 하멜에게 당신들이 만약 앞으로 3일만 더 살 수 있으면 살것이라 전했을 정도. 그 말은 앞으로 3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위기의식을 느낀 하멜 일행은 때마침 그들 숙소를 지나는 인평대군(효종의 동생)에게 그들의 사정을 호소하며 살려줄 것을 간청했고 동정심이 든 인평대군과 효종은 그들을 강력히 변호하며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벌을 마무리지었다. 하멜도 기록에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고 저술해놨다.
이 때 일행 중 일부는 조선인 처까지 구해 자식까지 낳았다.[7][8] 처음엔 전라병영에서 7년 가량 지냈으나 현종 때 찾아온 극심한 흉년으로 나주, 순천 등으로 그룹을 나누어 이배했는데 하멜은 여수의 전라 좌수영으로 가게 되었다. 그를 인계받은 전라 좌수사 이도빈은 네덜란드 인들을 후히 대접해주며 한달에 2번씩 있는 점호를 빼곤 모든 노역을 면해주었으며 자주 연회를 베풀며 "그냥 확 일본으로 배타고 달아나는게 어떻겠냐"(!)고 그들에게(술김에 한 농담이겠지만서도.) 탈출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멜도 그의 말에 영감을 얻었다 한다. 하멜은 "좋은 사람(이도빈 좌수사)을 부임시켜 주신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도빈은 후일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전라 병영에서 지내는 동안 근처의 스님들과 아주 잘 지냈다고. 유교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스님들이 이역만리에서 괴물 취급 당하는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과 동병상련을 느껴서 자주 교류하고 화란의 얘기도 듣고 했다 한다. (출처 필요)
그러던 중 좌수사는 총 네번 교체되어 하멜은 다섯명의 수사를 겪게 되는데 앞서 언급한 이도빈과 정영이라는 자를 빼고는 네덜란드 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도빈이 물러난 이후 부임한 자는 네덜란드인들을 부려먹으려고 작정을 했는데 심장마비로 급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후임으로 온 사람도 네덜란드 인들을 착취하려는 생각은 마찬가지라서 새끼줄을 꼬아내라는 등 요구를 해댔다. 하멜 일행은 우리는 새끼줄을 꼴 줄 모른다고 하여 수사가 부여한 노역을 회피하는 한편, 저 자는 우리를 톡톡 털어먹으려고 작정한 자이며 우릴 못살게 굴 것이 틀림없다며 탈출을 확심하게 된다[9]. 1666년에 그동안 조정에서 내려주던 몇 푼 안되는 급료를 모아 동네 어부의 어선을 산 후 8명의 일행들과 극적으로 탈출해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했다.
여기서 조선 조정이 그들의 탈출을 방조했다는 의견도 있다. 사실 일본은 이들을 송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정보라도 더 얻어내려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심문하는 한편, 조선에는 그들을 송환해주는 대가로 통상에 관한 이익을 더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애초에 조선 조정에서는 하멜 일행이 특별히 군사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고 별로 쓸모도 없는데 밥만 축낸다고 하는 의견이 많았었다고. 게다가 이 즈음이 되면 북벌 따위는 잊혀진지 오래. 조선은 하멜일행을 돌려줘도 안받는다 니들에게 갔으니 우리는 이제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해서 일본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결국 하멜 일행은 1년간 일본에 머물러 있다가 나머지 일행들까지 송환받아[10] 1668년 겨우겨우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3 하멜 표류기
귀국한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로 써서 낸 게 바로 '하멜 표류기'와 '조선왕국기'다. 하멜표류기는 조선에서 그의 체험을 적은 체류일지이고 조선왕국기는 조선에 대한 지형, 날씨, 특산물, 환경 그리고 민족성 등등을 간략하게 기술한 보고서이다. 그 후로도 선원 일을 계속해 서인도 제도에 갔다왔다는 기록과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세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는 불명이다. 청구했던 임금이 어찌되었는고 하면 처음에 신청한 그룹에게는 배가 침몰하면 일 안한걸로 간주한다. 라면서 2년치의 봉급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주고 씹어버렸지만 하멜 등 7명의 2차 그룹에게는 13년 치의 봉급을 지급했는데 하멜 표류기가 너무 뜨면서[11] 동인도 회사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서 그랬다고.
이후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대한 지리, 언어, 풍속 등을 유럽에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 서양인들은 조선이라는 나라는 악어나 괴조가 사는 아프리카같은 신비한 곳이라고 알려져있었으나 이 책을 통해 조선의 실상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되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는 하멜의 표류기를보고 일본과의 교역보다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여[12] "코리아 호"라는 배까지 만들어 직접 무역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 이익을 남기기위해 "네덜란드가 직접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시도할경우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류는 더이상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압박하여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을 포기하게 된다.
우리에겐 다소 비우호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편인데,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라는 걸 회사에 강조해야 임금이나 보험금을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 의도적으로 노린 감도 있다.[13] 솔직히 말해서 창창한 22세부터 36세 중년이 되도록 10년 넘게 나라에 못 돌아가게 강제로 막고 감금시켜 각종 부역에 동원하고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한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표류 직후 우리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도로써 무색해질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저술하는 등 호의적인 내용도 많다. 더불어 평생 미혼이었다는 점이라든가를 볼때 나름대로 조선인 처와 자식에 대한 생각이 있지는 않았을까 추측 할수도 있다. 특히 하멜 표류기에서 이상하게 감정이 실려있는 부분이 있는데 전라도 유배 시에 순천, 나주 등으로 이배할 것을 명받은 직후다. "어떻게 우리가 기반을 마련했는데 떠나라니!" 하면서 흑백화나 요금 청구서같은 메마른 내용이라 평하는 하멜 표류기에서 유일하게 격한 감정을 실어 저술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미루어 볼때 하멜이 처자식을 두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4 조선과 일본의 외교분쟁
조선에선 십수년간 하멜을 데리고 있었으면서도 하멜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조차 관심이 없었으나, 당시 일본은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식 행정을 배웠기에[14] 하멜이 조선을 탈출해서 건너오자 그날로 조사를 통해 하멜의 국적과 소속은 말할 것도 없고 하멜이 조선에서 보고 들은 모든 정보를 죄다 캐냈다.(...) 어쨌든 일본은 조선에다 "하멜 등은 화란인으로[15][16] 일본의 속국민들인데 어찌하여 일본에 인도하지 않고 멋대로 억류하고 재물을 강탈했느냐"고 항의하여 외교적 문제로 번지게 되는데 이는 조선과의 교류에서 좀더 이득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하멜은 단순한 핑계. 근데 언제부터 네덜란드가 일본의 속국이었지 네덜란드 의문의 1패 교역국이 속국이면 타서양국과의 교역은 왜 끊었냐
조선에서는 "이 자들이 기리시단(크리스천)이라 너희나라에 갔다가 죽을 것 같아 인도적인 차원에서 데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게 사실 하멜을 억류한 원인으로 없잖아 작용하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인 기독교도의 반란에 놀라 일본의 기독교도들을 전멸시켜버린 일은 조선에서도 제법 유명하였고 조선에서 일본으로 인도한 청나라나 대만인 등이 기독교도라고 참수되는 일도 제법 있었다 한다.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는 문명국 조선 오오 실제로, 벨테브레가 처음 조선에 왔을 당시, 조선에서 왜관을 통해 네덜란드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일본에서는 벨테브레가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거부했던 사실이 있다.
일본은 집요하게 조목조목 항의했으나, 조선에서 웬일로 벨테브레가 표류했을 때 왜관에 인도했더니 일본이 필요없으니 도로 데려가라고 했던 과거의 사례를 찾아내서 "그 때는 필요없다 해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 하지 말라"고 일축하면서 외교 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5 매체에서
- ↑ 네덜란드어로 '새매'를 의미한다.
- ↑ 이때 머무른 집이 광해군이 유배되었던 집이라 한다.
- ↑ 하멜이 네덜란드인이라는 점을 상기해보자.
- ↑ 스페르버르호의 1등 항해사로 선장이 표류 중 사망했기 때문에 생존한 인원들 중 최선임자였다.
- ↑ 하멜은 청을 이렇게 불렀다. 아시아에서는 유목민족들과 교류가 잦은 편이라 비교적 정확하게 구분해서 거란, 말갈, 여진족, 몽골 등으로 다르게 불렀지만, 유럽은 유목민족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서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유럽 동부에서 주로 활동하는 유목민족들을 그냥 싸잡아서 (심지어는 러시아까지) 타타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청나라는 유목민족인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유럽인의 시점에서 딱히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 ↑ 애초에 포류한 사람은 서른 여섯인데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배를 타고 전라도에 상륙한 지 얼마 안되어서 파울루스란 사람이 죽어 서른 다섯이 되었다.
- ↑ 사학자들은 그들의 배우자가 무당이나 과부같은 소외된 여자들일 것이라 추측한다.
- ↑ 남만인이라고 모두 남(南)씨 성을 받았다. 하멜의 조선 이름은 남하면. 일행 중에는 자식이 있었다고 하며 병영남씨라고 해서 현재도 그 후손들이 남아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의령남씨에 별보로 편입된 상태라는 얘기도 있으며 남일도 병영남씨라는 얘기가 있다. 다만 후자의 경우네는 신빙성이 있는 얘기인지는 다소 의문.
- ↑ 수사들이 딱히 인종차별을 했다는 언급은 없다. 하멜 일행에게 잘 대해준 이도빈과 정영은 맡은 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하고, 하멜 일행을 괴롭힌 자들은 전형적인 탐관오리라 조선백성들도 싫어했다.
- ↑ 다만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 요리사 얀 클라에천(Jan Claeszen)으로 추정됨-은 돌아오지 않고 계속 조선에 남았다.
- ↑ 불티나게 팔려 순식간에 불역본, 독역본, 영역본이 나왔으며 17세기에 나온 책이 1885년까지 계속 판을 찍어냈다.
- ↑ 일본은 네덜란드에서 사온 물건을 조선에 팔면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 ↑ "조선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었다"라는 행복한 이야기도 제외하였다, 다른 선원이 다른 곳과 인터뷰한 내용에서는 있었다
- ↑ 외국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면서 스페인, 영국과의 교류는 중단했지만서도.
- ↑ 조선은 "아, 걔들이 화란이란 나라 애들이었어? 근데 거긴 어디?" 하는 반응이었다고....
- ↑ 4,50년을 데리고 있었으면서 하멜의 국적이 밝혀진 후에야 역시 국적이 밝혀진 벨테브레의 사연 따위야 아무도 관심없다. 지못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