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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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Wiener Symphoniker, 영어: Vienna Symphony Orchestra, 프랑스어: Orchestre symphonique de Vienne

오스트리아의 수도 을 거점으로 하는 오케스트라. 홈페이지

1 연혁

1900년에 지휘자 페르디난트 뢰베가 빈 연주협회(Wiener Concertverein) 산하의 악단으로 창단한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뢰베는 1925년 사망할 때까지 악단의 수장으로 있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상주 공연장의 변경과 빈 톤퀸스틀러 관현악단과의 합병 절차가 진행되기도 했다.

뢰베 사후에는 빈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의 음악 감독이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사실상 상임 지휘자로서 악단을 이끌었고, 1933년에 명칭을 현재의 것으로 바꾸었다. 동시에 빈 시청으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기 시작해 시립 관현악단의 위치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악단 활동과 운영에도 제약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나치 총독은 악단을 각종 관제 행사나 군수공장 위문 공연에 수시로 동원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상임 지휘자였던 한스 바이스바흐도 나치 당원으로서 악단 활동에 정치색을 입혔다.

2차대전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악단도 폭격 등의 위험에 노출되었고, 결국 1944년 9월 괴벨스의 국가 총동원령에 따라 강제 해단되고 말았다. 단원들은 독일군에 징집되거나 군수공장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 했고, 1945년 9월에야 생존 단원들을 중심으로 재창단되었다.

이듬해인 1946년에는 한스 스바로프스키가 수석 지휘자로 부임했으며, 동시에 오스트리아 서부의 브레겐츠에서 열리는 여름 음악제인 브레겐츠 음악제의 상주 관현악단이 되었다. 1948년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빈 악우협회 음악 감독 자격으로 악단을 정기적으로 지휘하기 시작했고, 특히 자신의 이름을 딴 연속 공연인 '카라얀 치클루스' 로 두각을 나타냈다. 또 카라얀은 악단 최초로 해외순회 공연을 갖는 등 악단의 명성을 세계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카라얀이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에 취임하면서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다른 이전 직책과 마찬가지로 버림패가 되는 굴욕을 당했다. 악단 이사회는 그 동안 애매모호했던 지휘자 제도를 일신시켜 공식적으로 상임 지휘자 제도를 만들었고, 볼프강 자발리슈가 1960년에 상임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자발리슈는 1970년까지 악단을 이끌면서 미국일본 등지에서 순회 공연을 했고, 필립스에 정기적으로 녹음을 취입하는 등 악단의 명성과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자발리슈 퇴임 후에는 악단의 전후 최초 공연을 지휘했던 요제프 크립스가 예술 고문 자격으로 1973년까지 재임했고, 이탈리아 지휘자인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뒤이어 상임 지휘자로 1976년까지 재임했다.

줄리니 사임 후에는 약 네 시즌 정도 객원 지휘에 의존했고, 1980년에 소련 지휘자인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가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하지만 로제스트벤스키도 1982년까지 단기간 재임에 그쳤고, 이후 고국으로 돌아갔다. 악단 측은 역시 네 시즌 가량 객원 지휘에 의존하다가 1986년 프랑스 지휘자인 조르주 프레트르를 수석 객원 지휘자 자격으로 초빙했다.

프레트르의 후임으로는 스페인 출신 지휘자인 라파엘 프뤼베크 데 부르고스와 러시아 지휘자인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가 차례로 상임 지휘자를 맡았고, 2005년 부터는 이탈리아 출신의 파비오 루이시가 상임 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루이시는 2013-14년 시즌까지 재임할 예정이며, 후임으로는 스위스 출신의 필리프 조르당이 내정되어 예정대로 2014년 상반기에 자리를 이어받아 활동하고 있다.

2012년 5월에는 공석이었던 플루트 수석 주자를 뽑는 오디션에서 신시내티 교향악단 부수석 주자였던 재미교포 플루티스트인 최나경(미국 이름은 재스민 최)이 합격해 화제가 되었고, 2012-13년 시즌이 시작된 8월부터 활동했다. 하지만 불과 1년 여 만인 2013년 여름 수습기간이 끝난 후 재신임 투표에서 찬성 47표, 반대 66표로 재계약에 실패했다. 악단 측에서는 자신들과의 음악적 부조화가 원인이 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나경 측에서는 이것이 미국 출신에 아시아계인 자신에 대한 인종차별의 뉘앙스를 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서 논란을 야기했다.[1]

2 역대 상임 지휘자

빈 악우협회의 음악 감독이나 공연 감독, 예술 고문, 수석 객원 지휘자 자격으로 지휘한 이들과 부임 예정인 지휘자는 기울임체로 표기했다.

  • 페르디난트 뢰베 (Ferdinand Löwe, 재임 기간 1900-1925)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Wilhelm Furtwängler, 재임 기간 1927-1930. 빈 악우협회 음악 감독)
  • 오스발트 카바스타 (Oswald Kabasta, 재임 기간 1934-1938)
  • 한스 바이스바흐 (Hans Weisbach, 재임 기간 1939-1944)
  • 한스 스바로프스키 (Hans Swarowsky, 재임 기간 1945-1947)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재임 기간 1948-1964. 빈 악우협회 공연 감독)
  • 볼프강 자발리슈 (Wolfgang Sawallisch, 재임 기간 1960-1970. 퇴임 후 명예 지휘자 호칭 수여)
  • 요제프 크립스 (Josef Krips, 재임 기간 1970-1973. 예술 고문)
  •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Carlo Maria Giulini, 재임 기간 1973-1976)
  •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Геннадий Рождественский, Gennady Rozhdestvensky, 재임 기간 1980-1982)
  • 조르주 프레트르 (Georges Prêtre, 재임 기간 1986-1991. 수석 객원 지휘자. 퇴임 후 명예 지휘자 호칭 수여)
  • 라파엘 프뤼베크 데 부르고스 (Rafael Frühbeck de Burgos, 재임 기간 1991-1996)
  •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Владимир Федосеев, Vladimir Fedoseyev, 재임 기간 1997-2004)
  • 파비오 루이시 (Fabio Luisi, 재임 기간 2005-2014)
  • 필리프 조르당 (Philippe Jordan, 재임 기간 2014-)

이외에 야코프 크레이츠베르크가 2003-2009년 동안 제1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3 특징

같은 도시에 상주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워낙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어서 콩라인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빈이라는 한정된 도시의 음악적 자원을 빈 필에 빼앗겨서 피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빈 필의 버프를 받아 과대평가 받는 면도 있다.

빈 필이 너무 비대하여 빈의 많은 음악적 자원들을 독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상주 오케스트라 역할을 겸임하고 있는 빈 필은 예비 단원까지 합하면 200명 규모의 매머드급 악단으로, 심지어 세 개의 도시에서 동시에 개별적인 콘서트를 열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또한 빈 음대 출신들이 해외의 다른 도시, 특히 인근 독일 오케스트라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단원들의 수준은 생각만큼 뛰어나지는 않다. 실제로 빈 음대 출신의 우수한 자원들은 빈 필에 입단하지 못하면 빈 심포니에 취직하는 것보다 독일의 다른 유명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것을 선호하며, 빈 필 역시 독일 오케스트라 출신 단원을 뽑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빈 심포니 출신 단원을 뽑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악단의 기량도 명성에 비해 들쭉날쭉하다. 악단의 리즈 시절이라 불리던 1950년대 녹음들을 들어보아도 상당히 안습한데 음정이나 발음과 같은 오케스트라의 기본적인 기본적인 면에서도 미숙한 점을 보일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다른 악기와의 조화를 이루며 연주하는 습관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도 많다. 금관악기의 경우 표현이 매우 거칠고 비음악적일 때도 많으며 밸런스가 극단적으로 왔다갔다하는 아마추어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자주 관찰된다. 1950년대 빈 심포니가 해외 순회 공연을 했을 때 현지의 신랄한 리뷰에도 빈 심포니의 이런 결점이 지적되고 있다.

창단 초기부터 빈 연주 협회나 빈 악우 협회 같은 상부 단체의 입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악단 자체의 지휘자 제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악단의 리즈시절을 이끌었던 카라얀도 공식적으로 상임지휘자직을 맡지는 않았다.

전후 악우 협회를 둘러싼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의 대립은 빈 필과 빈 교향악단까지 끌어들여 진행한 대규모 병림픽이었고, 카라얀은 빈 필에 붙은 푸르트벵글러의 대항마로 빈 교향악단을 집중 육성해 나름대로 리즈시절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나중에 베를린 필로 옮겨가면서 결국 버림받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후새드.

이후 카라얀이 빈 교향악단을 지휘한 사례는 두 번 있는데, 첫번째는 1962년 9월 24~26일에 소련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녹음한 것이다. 당시 서방에서 연주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리흐테르가 중립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빈에 왔을 때 도이체 그라모폰이 급작스럽게 녹음을 성사시켰는데, 당시 빈 필은 데카와 전속계약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빈 교향악단이 어부지리로 동원되어 녹음 세션이 이루어졌다. 두 번째는 영상물 제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카라얀이 프랑스의 영화 감독 앙리-조르주 클루조와 1965년 11~12월에 빈 로젠휴겔 필름 아틀리에에서 시범적으로 촬영한 슈만교향곡 제4번 흑백 영상물. 안습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자발리슈 시대 부터는 악단의 독자성을 확고히 다지기 시작했는데, 상임 지휘자 목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 후에도 상임 지휘자가 제대로, 혹은 오래 재임한 이력이 없어서 악단 육성이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프뤼베크 데 부르고스 이후로는 큰 중단 없이 상임직 인계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1990년대에 들어서야 안정세를 찾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여러 모로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빈 필에 대해 좀 더 대중적인 이미지로 어필하려는 듯 보이는데, 실제로 1980~90년대에는 이나 음악들을 관현악용으로 편곡해 연주하는 프로젝트인 VSOP[2][3] 에 참가하기도 했다. 매년 영화음악 콘서트도 한다. 1981년에는 슈테판 솔테슈의 지휘로 토에이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인 '세계명작동화 백조의 호수' 의 OST를 녹음하기도 했다.

레퍼토리 편식이 지적되는 빈 필보다는 근현대음악에 대한 적응 능력도 비교적 괜찮은 편이며, 1988-89년에는 일본 작곡가인 단 이쿠마의 교향곡 전곡(6곡)을 데카에서 취입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스라엘 지휘자인 엘리아후 인발의 지휘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곡(15곡)을 일본 음반사 덴온에 녹음하는 등 일본과의 연계도 꽤 부각되고 있다.

일단 소속은 빈 시로 되어 있지만, 동시에 여름마다 참가하는 브레겐츠 음악제나 국영 방송국인 오스트리아 방송 협회(Österreichischer Rundfunk)에서도 해당 행사나 부서의 연주회 의무 개최를 전제로 한 지원금도 들어오고 있다. 단원 선발에 있어서도 빈 필과 달리 여성 연주자나 비유럽게 연주자도 별 거리낌 없이 영입하고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빈 필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는 모양.

관악 파트는 빈 필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빈(Wien)식 악기를 그대로 쓰는 보수적인 경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는 눈속임이다. 현재 빈 심포니는 19세기의 빈식 관악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래부터 19세기의 빈식 악기를 계속 사용해온 것은 아니다. 오보에는 빈식 악기를 계속 사용해 온 것 같지만, 호른은 현대적인 악기를 사용해오다가 최근에야 빈 호른을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클라리넷은 외관으로 빈 식 여부의 식별이 어렵고, 플룻은 최나경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른 악단과 같은 악기를 사용한다.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영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확인에는 한계가 있다. 최근 빈 호른을 재도입하고 나서, 빈 필처럼 빈의 전통을 고수한다는 점을 크게 어필하고 있는데, 어려운 빈 호른을 연주하면서 버벅거리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빈 필의 위엄을 느끼게 할때가 많다. 이건 빈 심포니의 호른 단원들이 못한다기 보다 빈 필 단원들이 먼치킨이라고 봐야 한다. 현재 빈 심포니 호른 수석 중 한명인 헥토 맥도널드는 베를린 필 출신이지만[4] 빈 필 단원들에 비해서 빈 호른을 연주하는데 훨씬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다른 호른 수석인 에릭 쿠쉬너는 빈 호른에 저항하면서 일반 호른을 사용할 때가 많다.

상주 공연장은 빈 콘체르트하우스로 되어 있지만, 옛 근거지였던 빈 음악협회 대강당에서도 종종 공연하고 있다. 브레겐츠 음악제 때는 축제극장이나 호숫가에 설치된 특설 야외 공연장인 슈필 아우프 뎀 제(Spiel auf dem See)에서 공연하며, 오스트리아 방송 협회 주최의 공연일 경우 방송국 대강당을 사용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애국가한국환상곡의 작곡자인 안익태도 2차대전 중 이 악단을 두 차례 지휘한 바 있다. 다만 관제 단체인 일본-독일 협회의 주선으로 이루어졌고 '에텐라쿠' 와 '만주국 환상곡', '일본 축전 음악' 같은 문제작이 같이 연주되었다는 점 때문에 흑역사로 여겨질 공산이 크다.

1942년 3월 12일 공연 기록
1943년 2월 11일 공연 기록

  1. 다만 빈 교향악단에는 이미 미국 출신 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 여타 아시아 출신 단원들까지 정단원으로 몇 년째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은 다소 비판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다.
  2. Vienna Symphonic Orchestra Project의 줄임말. 브랜디의 일종인 코냑 등급과 동음이의어이기도 하다.
  3. 이 프로젝트에 만들어진 곡으로 셀린 디온의 power of love와 배철수의 음악캠프 오프닝으로 유명한 롤링스톤즈의 Satisfaction가 있다
  4. 헥토 맥도널드는 사업을 한다고 베를린 필을 퇴단하고 11년 후 다시 연주자로 복귀하면서 빈 심포니 수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