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 Triple Intervention
한자 : 三國干涉
독일어 : Tripel-Intervention
프랑스어 : L'intervention tripartite
러시아어 : Тройственная интервенция
다른 삽화에서는 영국이 여왕마녀으로 그려지고, 뒤에 손톱 긴 중국이 놀라는 장면이 추가되기도 한다.
1 개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에게서 요동(랴오둥) 반도를 할양받게 되자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3국이 일본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 사건.
2 전개 및 결과
만주로 남하하려는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는 그곳에서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칭따오와 산둥반도에 세력을 갖고 있던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와 영일동맹에 반대하는 프랑스 제3공화국을 끌어들여[1] 일본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청일전쟁이 끝난 직후인데다 그렇지 않아도 강국인 러시아의 압력에 부담을 느낀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데꿀멍 랴오둥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논의가 분분했는데 세가지가 논의 되었다. 하나는 지금 당장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자는 것. 하지만 청일전쟁으로 너무 소모가 컸기에 이 의견을 지지하는 쪽은 거의 없었다. 다른 두개가 바로 바로 반납하는 것과 회담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요동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냥 돌려주면 영 모양새가 안 서니 그냥 반납하는 형식보단 회담을 벌이는 형식으로 돌려주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하지만 외상 무쓰 무네미쓰가 "회담을 벌이면 다른 문제가 제기되어 얻은 것도 놓칠 수 있다."라며 현실적인 결론을 내리면서[2] 또한 청일전쟁에서 할양받은 대만, 팽호도랑 더불어 해남도를 랴오둥 반도 대신 받을려고 하였으나 너무 멀어서 결국 배상금을 3천만냥 더 받는 선에서 타협을 보게 된다.
이런 어찌보면 굴욕적인 결과에 일본군과 일본 국민의 러시아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반감과 분노를 지니게 되었으며, 특히 1898년에 러시아가 일본이 반환한 뤼순(여순)-다롄(다련)을 점령하여 군항으로 활용하게 되자 이러한 분노와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런 일본의 여론은 결국 러일전쟁의 계기로 귀착된다.
3 영향
이러한 일본의 승리에 멘붕+완전히 친일내각의 허수아비가 된 고종은 미국 공사관으로 달아나려다 실패(춘생문 사건)하고, 이후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러시아의 비호를 도모하나 이후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조선에서 손을 떼고 만다. 고종은 러시아 대신 독일, 영국, 미국 등을 대신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딱히 실효도 없었고, 그때는 이미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패권이 공고해진 상태라 설령 삼국간섭과 같은 사례가 다시 일어났다고 해도 위기를 반전할 결정적 계기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태에서 있었던 이 삼국들의 입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 vs 영국-프랑스-러시아 라인을 생각하면 이 라인은 비교적 변방인 아시아의 사건이라도 좀 신기한 사건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 제국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영국의 적극적인 견제를 받고 있었고, 프랑스 역시 영국의 식민지 팽창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3]
결과적으로 삼국간섭은 20세기 초 이후의 독일의 팽창주의가 부상하기 직전, 잘 나가는 일본(과 그에 후원한 영국)이 부담스러웠던 주변국들의 반발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이 독일에 상당기간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말은 실로 진리다.
4 오해와 진실: 구한말 역사 관련
가끔 민족주의 성향과 왕실빠심이 강한 이들은 삼국간섭이 곧 명성황후와 고종의 외교정책의 승리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앞뒤관계를 뒤바꿔 알고 있는 소리다. 삼국간섭 이전까지 조선은 러시아 쪽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삼국 간섭이 이후에야 고종과 명성황후가 러시아에 주목하게 된 것. 물론 그 전에도 러시아와 접촉하려고 시도는 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시까지 조선의 종주국 노릇을 했던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아거일 이전에 인아거청이 있었던 셈. (이 때 베베르 공사와 고종 명성황후간의 접촉을 도와준 것이 당시 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였는데 이 일로 이홍장의 노여움을 사 해임된다.) 삼국간섭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불러서 자주 접견하며 밀담을 나누었고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괄시하는 등 대놓고 친러 노선을 천명했으며, 이에 일본 정부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인아거일(引俄拒日)[4] 정책에 매우 경계하게 된다. 이후 친일파의 대명사로 알려진 박영효 역모사건(?)이 터져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고 일본이 후원하던 훈련대가 해산되자 자기네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워줬다고 철썩같이 믿던 네? 일본 대중도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원한을 품게 되고, 일본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킨다.(사실 이것은 일본의 치밀한 각본이었다. 박영효가 역모사건에 휘말려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갈 때 당시 일본 공사인 이노우에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사실 이노우에가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박영효를 도와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이노우에가 자신이 후임으로 미우라 고로를 대사로 내세우며 을미사변이 일어난 것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를 두고 친일세력인 박영효를 조선이 내친 꼴이 되어 일본에게 움직일 명분을 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미우라 고로를 전면에 세운 것은 미우라가 아무래도 군인 출신이기에 일이 틀어진다 하더라도 '한 무식한 군인이 감정에 치우쳐 저지른 짓'으로 덮을 생각이 어느 정도 있었지 않을까라고 예측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명성황후의 빛나는 외교력, 로비로 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이 일본을 압박했다'가 아니라, 그 반대로 '러시아 등 유럽 열강이 일본을 대꿀멍시키는 것을 본 명성황후와 조선 왕실이 러시아에 줄을 대려고 했지만, 이에 꼭지가 돈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켰다'가 실상인 것.
5 관련 항목
- ↑ 여기에서 러시아는 영국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당시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밀어주는 입장이었기에 거부한다. 참고로 1902년에 체결된 영일동맹 또한 러시아의 남하를 제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 ↑ 참고로 이때 그는 병으로 요양 중이어서 이토 히로부미가 찾아가서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 ↑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만주 지역의 적당한 이권에 만족하고 1907년부터 영국과의 동맹인 삼국협상에 뛰어들었고, 프랑스는 이미 대독문제에서는 영국과 항상 한편이었다. 반면 독일은 기존의 삼국 동맹(이탈리아도 포함되나, 사실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
- ↑ '아라사(俄羅斯:러시아)를 끌어들이고(引) 일본(日本)을 거부한다(拒)'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