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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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위치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 마포대로18길 43
종교정교회
지위주교좌성당(Cathedral)
건축 정보
축성1968년
설계자조창한
양식비잔티움 양식

1 개요

대한민국의 유이한 비잔티움 양식 성당[1]이자, 서울 유일의 비잔티움 양식 성당

1968년에 지어진 한국 정교회 대교구의 본산이며 주교좌성당 지위를 가진 대성당. 주보성인은 당연히 성당 이름을 따 니콜라스[2]이다. 이 대성당은 서울 시내 유일한 정교회 본당(...)이다.[3] 대교구청도 이 대성당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 내 정교회 본당 중 외국인 신부가 상주하여 슬라브권 신자들을 사목하는 공동체는 따로 대성당에 부속된 '성 막심 성당'에 다닌다.[4]

여담으로, 이 대성당은 아현동뉴타운 한복판에 있다. 성당은 종교부지라 뉴타운 자리에 편입되지는 않았고, 다만 바로 코앞에서 공사가 진행되었다. 예전에는 그냥 평범한 주택가 골목 언덕에 자리잡아 지나가다보면 확연히 눈에 띄었지만, 지금은 뉴타운 개발로 아파트와 빌딩이 많아지면서 이전보다는 조금 눈에 덜 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동네 사람들은 이 특이한 모양의 성당을 대머리 교회라는 애칭 아닌 애칭(?)으로 부르며 여전히 동네의 랜드마크로 기억한다.

2 역사

2.1 정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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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정교회는 주한 러시아 공사관 직원들을 위해 파견되었지만, 한국인 선교가 이뤄지고, 임시 예배소로 쓰이던 주한 러시아 공사관 관저가 협소해지자 1903년 한국 선교담당 주임 사제 흐리산프 솃콥스키가 고종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서울 중구 정동 부지에 임시 성당을 지었다. 이곳은 본래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는 정식명칭이 있었으나 이보다는 대개 '아라사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제국신문> 1900년 5월 18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짤막한 기사 하나가 남아 있다. "아라사 희랍교사가 대한에 나온 후에 전도할 처소가 없어서 아국 공관 안에 교당을 권설하고 전도하더니 새문고개에 희랍교당을 방장 건축한다더라." 당시 위치는 현재 경향신문 사옥이 있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22번지.

이 부지는 장차 정교회가 성장할 때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대성당으로 쓰일 부지였으며, 당시 정동 언덕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과 함께 러시아인들의 중심 지역으로, 동시에 그러한 러시아인들 중심지구가 가진 잠재력으로 정교회 선교의 중심지가 되기에 최적인 자리였다. 대성당 건축이 설계되고 지을 예정으로 있는 동안 성직자들이 머무를 사제관과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초중등학교인 보정학교 등이 지어지면서 이 부지는 정교회 선교 중심지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벌어진 러일전쟁으로 한국에서 정교회 선교가 채 꽃도 피기 전에 난항에 빠지면서 성당 건립을 추진하기는 커녕, 일제의 정교회에 대한 탄압과 감시로 한국에서 정교회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진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거대한 재앙이 닥쳐왔으니 바로 러시아 혁명으로 이 모든 선교사업을 지원해야 할 러시아 정교회가 그야말로 작살이 나버리면서 한국 정교회는 그야말로 제로베이스에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5] 이제 막 태동을 하던 정교회는 다른 열강들의 지원을 받은 가톨릭이나 개신교와 달리 그 시작부터 수난을 만났고, 이는 성당 건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잠시 동안 대성당 건축 전에 임시 성당으로 쓰고 있던 장방형 단층 '보정학교' 건물은 더이상 임시 성당이 되지 않게 되고 그 상태로 무려 60년 가까이 사용한다. 당시 정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개벽> 제48호 (1924년 6월)에 수록된 '재경성 각 교회의 본부를 역방하고'라는 글에 간략히 소개된 글이 남아 있어서 참고가 된다.

(76~77쪽) [백군(白軍) 피난소(避亂所)인 로국정교회(露國正敎會)]우리가 서대문(西大門) 안 정동(貞洞) 골목을 향해서 들어가노라면, 문득 길 우편에 노국정교회(露國正敎會)의 간판을 볼 것이다. 이 교회는 원 한국 시절(元 韓國時節) 로서아 공관(露西亞公)이 경성(京城)에 설립(設立)되었을 때에 공관 부속(公 附屬), 즉 공관 내(公 內)의 모든 의식을 위하야서 설립된 것이 후에 점차 확대되야, 재경 로서아인(在京 露西亞人) 또는 조선인(朝鮮人)을 상대로 포교를 행하게 되었는데, 이 정교회(正敎會)는 물론 노국(露國)의 국교(國敎)로서 국고금(國庫金)의 지출을 받아 경영을 했으나 구주대전(歐洲大戰) 후, 로서아(露西亞)에 무산자혁명(無産者革命)이 생기며 정교(政敎)를 분리하게 되매, 경비(經費)의 지출이 단절되야, 지금은 집세(집貰)를 놓아서 근근 현상(僅僅 現狀)을 유지하며, 근래에 망명의 백군(白軍)들이 몇 명 왔다갔다 한다고 한다. 신도(信徒)는 전조선(全朝鮮)을 통하야서 약 400여 명, 경성에만은 약 150명이며, 파주(坡州), 장단(長端), 고양(高陽)의 3지회(支會)가 있다. 현 교회장(現 敎會長)은 페오도 씨 대신부(大神父)인데, 혁명 전에는 해삼위교무원(海參威敎務院)의 지배를 받았으 작년부터는 임시로 일본(日本)에 있는 정교회 대교주(正敎會 大敎主, 물론 露人)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조선인 신부(朝鮮人 神父)로는 강한탁(姜漢倬) 씨 일인(一人)이 있을 뿐이라 한다. 그런데 이 노국 정교(露國 正敎)의 특색은 신도(信徒)가 죽으면 종교의 의식상(儀式上) 반드시 제사(祭祀)를 지낸다는 것이다. 같은 야소교 소속(耶蘇敎 所屬)으로는 크게 다른 점이다.
<동아일보> 1925년 9월 22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 로국 정교회는 일천구백년에 로국 공사관 안에 부설되어 예배를 보다가 그 후 현재 장소로 옮겨왔는데 교도는 전조선에 오백여명이 있다 하나 교당은 서울에 하나 밖에 없으며 혁명 후에 더욱 전도비가 오지 않아 없는 듯한 속에서 겨우 있는 존재를 지속하여 왔는데, 더욱 요사이에 이르러서는 교세가 날로 퇴화하여 토요일 저녁과 주일날 아침에 가는 향연이 보들보들 떠오르나 옛날에 장엄하던 자취는 이미 향연 속에 쓰러져버리고 '풰오도씨' 신부의 긴머리와 수염 속에서 오직 지나간 장엄을 찾아보는 듯할 뿐이다. 그런데 정교회 부속 가옥에는 빵 파는 백색 피난민의 세 가정이 침대도 없이 마루 위에서 새우잠을 우리는 모양인데 그래도 '사모왈'의 차 끓던 소리와 어린애들의 만돌린 소리는 그 속에서도 새어나온다.

원래 한국의 정교회가 러시아의 선교를 통해 들어온 만큼 처음 대성당을 지으려던 계획은 지금과 같은 둥근 돔 지붕에 벽면을 가득히 메운 비잔티움 방식의 이콘을 그린 건물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 정교회는 한국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러시아인 근대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6]에게 건물 설계를 의뢰하였고 실제로 두 차례에 걸친 설계도가 나왔다. 당시 나온 두 설계도는 세부적인 차이점은 있으나 기본적으로 비잔티움식 돔 지붕이 아닌, 러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파머리 모양의 돔 탑을 중앙에 둔 전형적인 러시아식 건축 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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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설계도에서는 종탑이 따로 있으며, 외벽에 거대한 성화를 정면에 그리고, 금색의 양파머리 탑을 가진 돔을 중앙에 놓았다. 외벽 색은 옅은 황토색이었으며, 양옥과 한옥의 조화를 많이 시도했던 사바틴의 성향이 반영되어, 성당에 한국식 기와 건축을 정문 문지붕과 건물지붕에 적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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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러일전쟁한일병합의 혼돈으로 성당 건축 사업이 어려워지자 2차 설계도가 1910년도에 나왔는데, 기본적인 구조는 같으나 성당 외벽을 화려하게 장식한 성화와 종탑이 없어지고 건물 규모도 전반적으로 축소되었으며, 돔 지붕도 이전과 다르게 조금 날씬한 형태로 바뀌었다. 외벽은 흰색으로 바뀌고 성당 정문 위에 성모 마리아, 예수 그리스도, 세례자 요한의 데이시스 이콘이 그려졌다. 하지만 역사의 혼란 속에 한국의 정교회 공동체가 생존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2차 설계마저 취소된다.[7]

한편, 성찬예배를 위해 쓰일 많은 성물들이 정동의 성 니콜라스 성당으로 전해지게 되는데, 거의 19세기의 오래된 러시아제 성물들이다. 지금도 그 유물들은 모두 대성당의 부속 성당인 '성 막심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데, 제대 지성소와 회중석을 나누는 '이코노스타시스'에서부터 각종 성화들, 성찬예배용 제구와 예식용 복음경 등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는 20세기의 러시아 성인 중 하나인 '크론시타트의 성 요한'이 생전에 보낸 제의도 있었다. 당시 성인은 한국에 봉직하고 싶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이뤄지지 못하자, 대신 자신의 제의 한 벌을 한국에 보내줬는데...훗날 크론시타트의 성 요한이 시성되면서 순식간에 한국에는 러시아 성인의 성 유물을 보관한 나라가 되었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이 작은 임시성당을 위해서 6개의 종을 보내주었는데, 이 종도 2개를 제외하고는 태평양 전쟁 시에 공출로 뺏기질 않나, 한국전쟁 때문에 유실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 속에 경기 북부 지역에 있던 많은 관할공소가 폐쇄되고, 서울 본당만이 남아 유일한 정교회 신자들의 안식처가 되었지만,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역사적으로도 러시아 그것도 공산주의자들의 나라 소련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었던 정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선교를 통한 교세 확장은 커녕 신자 유지도 힘든 상태였다. 그야말로 '성 니콜라스 성당 공동체=한국의 정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실상 러시아 교회의 선교 지원이 힘들어지자 그나마 생존해 있는 주교 중 한 명인 '일본의 대주교 세르기' 교구장이 선교를 맡게 된다. 그러면서 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의 등기는 당시 교구장 격인 세르기 일본의 대주교가 개인적으로 유지재단으로 설립한 '일본 정교회 재단' 쪽으로 넘어가는데, 이때가 1923년이었다. 그런데 이게 훗날 정교회에 날벼락을 몰고 온 불씨가 되었다.

해방 후, 정동의 성당은 포격으로 폐허가 되었고,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8] 그나마 유엔군 측으로 참전한 그리스군에서 종군사제 '안드레아스 할키오풀로스'의 노력으로 정교회가 다시 재건되고 폐허가 된 성당도 다시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23년의 성당의 등기를 일본 교구 재단 측으로 넘긴 것이 화근이 되어, 성당은 '적산'으로 분류되어 국가에 몰수가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정교회는 긴 소송전 끝에 정동 부지를 다시 되찾지만, 이미 소송 과정에서 소모된 경제적 문제로 인해 도심에서 성당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성당은 정교회 한국 선교 이래 영욕의 세월을 함께했고, 서울 중심부였던 정동을 떠나, 도심에서 어정쩡하게 떨어진 마포구 아현동으로 그 부지를 옮기게 된다. 이때가 1968년이었다.

2.2 아현동 시절

지금이야 한국의 다른 그리스도교회의 대표 건축물과 달리 작은 규모의 성당이지만, 당시로서는 한국 정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제대로 짓는 성당 건물이었다. 1956년, 신도 총회의 결의로 러시아 정교회 북미대관구 일본정교회 소속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남북미 대관구로 소속 변경을 한 상태였고, 게다가 정교회 공동체를 재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 것이 그리스 종군사제와 이후에 파견된 선교사제들이었던 만큼 건축 양식과 성당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19세기 러시아풍이 아닌 전형적인 그리스-비잔티움 양식으로 바뀌게 된다. 정방형 십자가와 거대한 중앙돔을 지닌 지금의 성당 건물도 바로 그런 흐름에서 나온 것이었다.

성당은 경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를 역임한 건축가 조창한의 설계로 1968년 완공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조창한 교수는 처음에는 밀워키에 있는 정교회 성당 건축을 참고하여 첫 설계도를 내었지만, 너무 현대적인 디자인이 당시 한국 유일의 정교회 성당인 성 니콜라스 성당이 가지는 대표 위상과 맞지 않다는 의견을 수용해, '펜던티브 돔'과 이를 지탱하는 4개의 아치를 중심으로하는 비잔티움 양식의 정석대로 건축을 한다. 다만 시간과 비용 문제로 전통적인 벽돌을 활용한 건축 대신 철근 콘크리트를 활용한 방식으로 건축을 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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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만들어진 대성당 내부는 지금의 내부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재정적인 여건과 선교가 이제 막 이뤄지던 공동체라 성찬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만을 확보하는게 먼저였고, 내부는 하얀 벽으로만 남은 채 이코노스타시스(성화상대)와 몇 점의 이콘만이 성당을 꾸미고 있었다. 지금 성 니콜라스 대성당의 돔과 벽면을 가득 채운 성화들은 1990년 소조스 야누디스 아테네대학교 미술대학 교수팀이 그린 것이었다. 이후로도 소조스 야누디스 교수는 국내 정교회 성당에 성화 봉사를 하고, 특강 및 성화 화법 전수 등을 한국에서 종종 하고 있다. 이때를 기점으로 우리가 아는 성 니콜라스 대성당의 모습이 완성이 된다.

현재 대성당은 크게 2개의 건물로 나뉘는데, 하나는 비잔티움 양식의 대성당 본 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대성당을 빙 둘러싼 교구청 및 (구) 신학원 건물이다. 이 부속 건물에는 주교 집무실, 교구청 사무실, 성물방, 식당 겸 강당이 있으며, 또한 동유럽권 신자 공동체이자 서울 대성당에서 평일 예식 및 일부 축일 예식을 주로 거행하는 성 막심 성당이 위치해 있다.

3 성당 주요 구조

  1. 18_3_300.jpg 나머지 하나는 울산 성 디오니시오스 성당이다.
  2. 산타클로스의 모티프가 된 미라의 대주교이다. 재밌게도 서울성공회성당의 주보성인 중 한 명도 성 니콜라스이다. 게다가 성당의 첫 위치도 정동이라는 점에서도 인연이 크다.
  3. 수도권 유일의 정교회 본당은 아닌 것이 인천 성 바울로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4. 평소 한국인그리스인, 미국인 등은 대성당에서,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 등 슬라브권 출신은 성 막심 성당에서 따로 성찬예배를 드린다. 단 러시아 성탄절 같은 경우에는 동유럽권 신자들만 대성당에 모여서 따로 성찬예배를 드리며, 주임사제가 부산 등 지방도시로 사목 순회할 경우 대성당에 한국인 등과 함께 모여 성찬예배를 드린다.
  5. 이때 일본 정교회 대주교 산하 공동체가 되는데, 정확히는 조선 선교회를 일본의 대주교 세르기가 양 쪽을 각각 관할하는 형태로 조선 선교회를 담당한 것이었다.
  6. 주한 러시아 공사관, 덕수궁의 양식 건물, 심지어 독립문 등 근대 한국 건축에서 빠지지 않는 주요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이다. 그리고 한국 근대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인 게, 바로 을미사변을 목격한 두 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을미사변일본이 저지른 만행이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언한 인물이다.
  7. 당시 선교사제 파벨 이바놉스키 신부는 전몰 러시아 장병 위령을 위해 2차 설계도가 나오기 전부터 성당 건립을 재추진하였다. 1908년 한성 주재 총영사 소모프가 파벨 신부의 의견에 동조하는 서한을 외무대신 이즈볼스키에게 보냈고,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윤허까지 받았지만, '두마'가 건축비 지출을 승인하지 않고,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장악당하고 러시아 국내 여론이 적국의 영역이 되어버린 한국에 전몰 장병의 유해를 안장하는 데에 격렬하게 반대해 성당 건축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8. 앞서 서울성공회성당과의 우연으로 맺어진 이웃으로 지낸 역사가 있지만, 한국의 정교회성공회가 더욱 서로 각별한 사이가 된 것은 위와 같은 우연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정교회를 당시 도와준 교회가 다름아닌 성공회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성공회 서울대성당은 건물이나마 온전히 남아 있었고, 성당 마저 잃어 예배처소도 없이 떠도는 정교회 신자들을 위해 임시성당을 지을 때까지 대성당 지하의 성 세례자 요한 성당과 그 제대를 빌려준 것이었다. 이후로도 대한성공회와 한국정교회 간의 유대관계는 계속 이어져 인천 성 바울로 성당을 만들때에도 성공회 내동성당의 제대를 한시적으로 빌려주고, 건축부지를 주선하는데 도움을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실 이때는 성공회도 여성 사제 서품이 이뤄지기 전이라, 전반적으로 당시 세계적으로 성공회-정교회 간의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도 한 몫을 했다. 또한 서울성공회대성당의 제대는 로마 가톨릭의 것에 비해서는 정교회에 더 호환되는 부분이기 있기도 하고...
  9. 돔의 경우 철골로 먼저 반구 형태의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철판을 덧댄 뒤 지붕에 올리고 그 위에 다시 동판을 덧씌웠다. 지금도 대성당을 상징하는 이 둥근 지붕 모양의 청록색은 바로 동판이 산화되면서 나온 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