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경제

< 소련

러시아어: Экономика СССР

1 개요

소련 경제는 역사적으로 오늘날까지 존재한 경제 중 유일하게 사회주의 경제이론에 바탕을 둔 경제였다.

소련 경제는 유럽에서 연구하던 사회주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칼 마르크스가 제시한 공산주의 이론을 소련 실정에 맞게 바꾸었기에(마르크스-레닌주의)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많았다.

2 들어가기에 앞서

소련 경제를 설명하기 앞서 사회주의가 운영되는 최소한의 원리를 간단하게나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가 오늘날 알고있는 자본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유자(자본가, 지주, 사업자)가 노동자를 고용해 생산품을 만들고, 노동에 대한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지불한다.
  • 소유자는 가격을 책정해 이를 시장에 판매해서 이윤을 얻는다.
  • 소유자는 생산품을 판매해 얻은 이윤으로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거나, 질을 향상시키는 등 자기 재량으로 처분한다.
  • 이렇게 소유자가 행하는 경제활동을 통해 각자 이윤을 추구하고, 여기에 추가적으로 규칙(법이나 규제 등)이나 지원이 필요할 경우 정부가 이를 중재한다.

여기서 사회주의가 제기한 문제는 '생산자는 물건을 생산했음에도, 생산품에서 얻는 보상을 결정할 수 없다'라는 문제였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소유자가 재량으로 생산품에서 얻는 수익이 소유자의 재량대로 쓰일 뿐, 실제 물건을 생산한 생산자에게 정당하게 돌아가지 않는 착취적인 현실을 지적했다.
또한 자본가들은 판매경쟁에서 노동에 들어가는 원가를 절감시키면서 원가 경쟁력을 확보, 노동자를 더욱 착취해 결국 물건을 소비할 노동자를 줄게 만들어 자본주의 경제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살던 19세기 영국은 정말 비참한 노동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문제의 핵심이 바로 당시 유행하던 극심한 빈부양극화와 1920년대를 강타한 경제대공황이였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타파되어 새로 거듭날 것이며,[1] 노동을 통해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자, 즉 노동자가 권력을 쥔 사회를 완성될 것이라고 서술했다.

여기서 사회주의의 기본 원리는 이론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논리를 핵심적으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자본가들이나 지주, 개인사업자가 소유하고 있던 생산수단(공장, 농장 등)을 개인이 아닌 사회(개인이 속한 집단, 예를 들면 조합 또는 국가)의 소유로 한다.[2]
  • 노동자들이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만들어 내면, 해당 생산수단을 보유하고 있는 사회(또는 국가)에서 가격을 책정해 생산물을 판매한다.
  • 해당 생산물이 누군가에게 거래되어 '수익'을 거두면, 해당 생산물을 통해 얻은 '수익'을 사회(또는 국가)에서 노동자들에게 분배한다.

즉, 자본주의에서는 해당 생산수단을 보유, 생산물의 가격을 책정 및 분배하는 역할을 '자본가'에서 '사회' 또는 '국가'가 맡는 것이 사회주의 경제 원리의 핵심이였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만약 학생들이 조별과제를 통해 각자 과제에서 맡은 역할을 수행(=노동)하고, 이를 최종적으로 제작(=생산), 발표해(=판매) 점수를(=수익) 받는다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학생들은 여기서 규칙에 따라 해당 과제에 부여된 점수를 평등하게 일괄적으로 부여받거나, 개별적으로 기여도를 평가해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오늘날 기업 중 협동조합(Cooperative)이 이와 가장 비슷하게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현실사회주의(Real Socialism)는 이런 생산수단의 사회화(Socialization)를 주로 '국유화(Nationalization)'를 통해 추구했고, 이렇게 국유화된 생산수단을 국가가 독점적으로 관리하면서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을 주도했다. 즉, 국가가 모든 경제활동을 결정했다. 이런 요소 때문에 현실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라고도 불렀다.[3]

3 전시공산주의

마르크스는 생전 공산주의 혁명이 독일과 프랑스같은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산업국가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지만, 정작 사회주의 국가가가장 먼저 성립된 곳은 다름아닌 유럽에서도 가장 후진적인 정치체제였던 러시아였다.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갈등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 이론에서 주장한 대로 정통적인 자본주의 과정을 완성한 뒤 사회주의를 추진하자는 온건파가 있었다. 반면 현재 러시아의 사정으로는 사회주의를 먼저 완성한 뒤 체제 내에서 자본주의 과정을 소화하면서 사회주의를 완성시키자는 혁명파는 급진적인 혁명을 추구했다. 사회민주당 온건파는 2월 혁명 이후 임시정부와 연합하면서 러시아 공화국 성립에 참여, 체제 내에서 사회주의 여론을 반향시키는 대중정당 노선으로 나갔고, 반대로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혁명파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혁명조직으로써 철저한 준비를 통해 10월 혁명과 적백 내전을 겪으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비록 레닌은 혁명에서 승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반대파가 한 둘이 아니었다. 우선 임시정부를 전복시키면서 왕정파, 우파 등의 세력과 척을 지게 되었고, 이후 다른 좌파정당이 주도하던 제헌의회 해산,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으로 인해 다른 좌파세력과도 대립하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신생 공산주의 정부는 내전 과정에서 농민들에게서 일방적으로 식량을 징발했고, 그결과 농민들은 저항하면서 이 때 일어난 탐보프 반란 등을 독가스를 사용할 만큼 저항이 극심했다.

4 신경제정책

1922년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는 러시아 내전에서 어렵게 승리했다. 하지만 적백내전 이후의 러시아는 독소전쟁 이후 소련보다도 엉망진창이었고, 소련 정부는 일단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어떻게 해서든 내전 전 수준으로 회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소련이 채택한 방법은 바로 자본주의 도입이었다.

1921년 3월, 제10차 러시아 공산당 대회에서는 기존의 일방적인 농산물 징발을 식량세로 교체했다. 1923년에는 단일 농업세가 도입되어 다양한 현물세를 화폐로 대신하게 되었다. 농업세는 농산물 징발보다 두 배 이하로 낮았고, 특히 주로 쿨락같은 부유농민에게 부담되어 가난한 농민은 좀 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 소련 농업은 협동조합 형태로 조합화되어 처음으로 기업화되었으며, 농가에서는 개별 생산 대신 협동 생산으로 바꾸어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28년 말 약 2,800만명이 협동조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농업 뿐만 아니라 공업, 상업에도 생산협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정부에서는 네프만(Нэпман)이라 불리는 사기업가들에게 중소 공업이나 상업 기관들을 임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비록 작업계획이나 구체적인 세부 사항은 정부기관들이 정했지만, 네프만들은 실제 기업에서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을 정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 개인에게 20명 이하의 고용을 가진 사업체 설립이 허용되었고, 그 결과 1920년대 중반에는 공업제품 20%에서 25%가 이런 사기업들에 의해 생산되었다.

소련 정부는 단지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외국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실감했고, 그 결과 1922년 이탈리아 라팔로에서 독일과 조약을 체결, 2천명 이상의 독일 공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초빙하는데 성공했다.[4] 1929년 중반 소련은 27개의 독일회사들과 15개의 독일회사들과 협정을 체결했고, 1929년 말에는 40개 이상의 미국회사들과 협력했다. 실제로 레닌이 실시한 이러한 정책은 실제로 큰 효과가 있어, 러시아 경제는 이 기간 내에 서서히 회복했고, 특히 농업부문은 1925년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비록 신경제정책은 1930년대부터 서서히 산업화 계획으로 대치되었지만, 훗날 1980년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중국의 경제 개혁, 개방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5 산업화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의 새로운 권력자로 집권한 스탈린은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스탈린은 당시 레닌의 유력한 후계자였던 트로츠키에 반대하는 당내 정치인들을 끌어모아 집권에 성공했지만, 언제라도 이들이 자신의 정적으로 돌아서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에는 10월 혁명에서 붉은 군대를 창설해 승리를 이끌어 낸 레프 트로츠키, 신경제정책에서 농업정책의 입안자였던 니콜라이 부하린과 10월 혁명 이전부터 레닌의 신임을 얻었던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등 정치, 경제적으로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스탈린은 이런 정치적 공로를 세운 인물들에 비해 줄곧 당 내 실무조직에서만 일했었기에 상대적으로 정치적 입지가 부족했었다. 이는 스탈린이 정치적으로 불리한 위치를 만회하기 위해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배경이 되었다.

당시 스탈린이 추진하려던 산업화 계획의 핵심은 산업화(Industrialization) 및 집단화(Collectivization)였다. 당시 소련 경제는 쿨락이나 소규모 자영농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이들 농업 경제만으로써는 자본주의 경제와 같이 발전하기 어려웠다. 스탈린이 새운 경제계획의 핵심은 집단농장을 통해 곡물을 저렴하게 공급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추어 얻은 이윤으로 다시 산업에 투자하는 식이었다. 이는 산업화를 단기간 내에 급격히 발전시킬 수 있지만, 이를 위해 곡물 가격을 일방적으로 낮추어 농민들을 희생해야 했다.

특히 쁘티브루주아라고까지 평가되던 자영농들은 스탈린이 추진하던 산업화 계획에 적대적인 존재였다. 이 무렵 쿨락이 받은 탄압은 정말 극심해서, 본인 뿐만이 아니라 가족이 쿨락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숙청 대상이 되거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당연히 자신들이 애써 가꾼 생산물을 그대로 뺏기게 생긴 농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내주지는 않았고, 자기 생산물을 불태우거나 먹어치우는 식으로 저항했다.

가축이 그레먀치 로크(Гремячий лог)에서 매일 밤 도살되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기 무섭게 약한 양의 외마디 울음소리, 돼지가 죽을 때 내는 가느다란 소리, 그리고 송아지의 음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콜호스에 참가한 농민들도, 개인농들도 모두 가축을 살해하였다. 종우[5]는 물론이고 황소, 양, 돼지, 심지어 암소까지도 도살되었다. 그레먀치의 뿔 있는 가축은 이틀 밤 사이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개들은 내장을 끌고 마을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땅광과 헛간은 고깃덩어리로 가득 찼다. 협동조합들은 18개월 동안이나 창고에 있던 약 200푸드의 소금을 이틀만에 팔아치웠다. '죽여라, 그것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죽여라, 그들은 어쨌든 그것을 고깃덩어리로 생각할 것이다', '죽여라, 콜호스에서 당신은 고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음험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농민들은 가축들을 죽였다. 그들은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어댔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모두 배앓이를 하였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삶고 구운 고깃덩어리로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칠을 하고, 마치 장례식 전날 밤처럼 딸꾹질을 해댔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먹는 것에 취해버린 듯, 올빼미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 미하일 숄로호프, 개척되는 처녀지 중

이렇듯 농민들의 저항이 극심했음에도, 소련 정부는 의도적으로 자영농을 박멸하기 위해 농산물 착취를 극대화했고, 그결과 홀로도모르같은 대규모 기근 사태가 벌어져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수십만 명이 굶어죽는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중공업 위주 산업화가 가장 큰 빛을 발휘한 때는 바로 2차대전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공업은 역사가들의 평처럼, 전선에 필요한 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하는데 최적화된 체제였다. 덕분에 소련군은 독일의 압도적인 기갑, 항공전력에 맞설 T-34같은 무기들을 빠르게 대량으로 투입해 독일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렇듯 스탈린이 단시기 내에 완성하려 했던 소련의 공업화는 전시체제에 최적화된 경제였다. 이는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반대로 이후 소련 정치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진 원인이 되었다.

6 해빙기

2차대전 이후 소련은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사실 당장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는 일이 시급했다. 우선 독일과 5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소련 주요산업이 완전히 초토화되어버렸고, 그 결과 전후 피폐해진 산업을 복구시켜야 했다. 1947년 소련은 배급제를 마치고 다시 기존의 화폐체제로 돌아가려 했다.

여기에 2차대전 이후부터 자본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본격적인 패권경쟁, 즉 냉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소련은 이념경쟁이나 세력경쟁에서 미국과 패권을 겨루기 위해 균등하거나 우월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당장 2차대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당장 자본주의 경제의 선두주자인 미국을 균형을 맞추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소련 지도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이 2차대전 이후 얻은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얻은 영향력을 팽창시키기 위해 미국과 경쟁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결과 소련은 군사력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러한 군사비 지출로 인해 국가예산이 부족해지자 소련은 1960년대 서방국가들에 자원을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부족한 수입을 충당, 해당 수익을 다시 군수산업과 국방력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무리 쉽게 비유해도, 도박사가 판을 유지하기 위해(=냉전) 밑천을 팔아서(=자원수출) 판돈(=군사력)을 유지하려 했고, 이로인해 점점 소홀히 한 자산(=경제)이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이 때부터 소련 경제는 군비 지출을 과도하게 늘리면서 조금씩 맛이 가기 시작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으면서 스탈린을 이어받은 말렌코프는 우선 소비재 위주의 경공업을 중심으로 소련 경제를 복구하려 했지만, 얼마 못 가 흐루쇼프 등 당권력을 장악했던 실력자들에게 실각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제1서기로 집권한 흐루쇼프는 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을 전면으로 비난했다. 이후 스탈린 시절 투옥된 정치범들을 복권시키고 체제 비판을 허용하면서 체제적으로 보다 온건해지려는 변화를 꾀했다.

흐루쇼프는 전후 피폐해진 경제 향상을 위해 공들였다. 이 시기 소련 전역에서는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의 아파트의 건축이 이루워졌으며,[6] 경제적으로도 경공업에 상당한 포커스가 맞추어졌다. 특히 흐루쇼프는 전후 피폐해진 민심을 살리기 위해 농업을 개선시키려고 애썼고, 미국에서 옥수수를 들여오거나 시베리아를 개간하려 하는 등[7]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특히 농업을 개선시키려고 했던 흐루쇼프의 노력은 트로핌 리센코라는 사이비 과학자를 만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파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 무렵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에 정치적으로 물러서는 모습을 본 당내 보수파는 이를 구실로 1964년 흐루쇼프를 축출시키고 브레즈네프를 앉혔다.

7 정체기

흐루쇼프 이후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경제개혁을 해결하기 위해 1965년 경제개혁을 단행했지만, 근본적인 경제 구조개편이 없는 상황에서 경제개혁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이런 상황에서 경제 구조 개편을 시도할 경우 무리한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한 흐루쇼프의 사례를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어떠한 개혁없이 현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패권을 그대로 유지하려 했다.

이 무렵에는 소련은 급격한 변화도 추구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였다. 당시 소련은 외적으로는 미국보다 더 많은 핵무기를 가진 거대한 강대국이었으며, 명실상부한 제2세계의 선두주자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소련은 점점 더 무리한 경쟁으로 병들어가는 경제를 그대로 놔둔채 단지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특히 이 무렵부터 소련의 경제성장은 사실상 한계를 맞이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소련 경제 전체가 지나치게 중공업 위주로만 짜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한국만 해도 농업국가였던 주력산업을 5, 60년대에는 경공업, 7, 80년대에는 중공업, 90년대부터 현재까지는 전자산업을 발전시키면서 각개 산업별 경제구조를 차근차근 갖춰왔다. 하다못해 소련보다 경제 개발이 늦었던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조차 개혁개방 시기 당시 기술력이 별로 필요하지 않고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한 경공업부터 시작해 중공업, 전자산업을 하나씩 차근히 발전시켜 왔다.

그에 반해 소련은 7,80년대까지도 자원생산으로 얻는 수익을 무기 산업 위주인 중공업에 거의 올인하다시피했고, 그 생산마저도 중앙결정식 의사구조 때문에 무척 경직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자동차만 해도 배급을 신청하면 위에서 대기명부에 올리고, 차가 생산되면 그 차를 먼저 신청자에게 주는 식이었으니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다. 소련의 핵국방력은 70년대 후반 미국을 초월했지만, 문제는 국방력에서 얻는 수익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동시대 소련 핵미사일이었던 R-36 미사일이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을 때, 비누, 치약같은 생필품이 자주 떨어지는가 하면, 1939년에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기는 했지만 1970년대가 되어서야 텔레비전이 대중화 되었을 정도였다.[8]

특히 소련은 사회간접자본 구축에 관심이 덜하여, 미국의 인터스테이트(Interstate highway system)같은 대규모 고속도로 체계나 항공 물류 체계를 적극적으로 갖추는데 소극적이었다.[9] 이 시기 소련은 바이칼 철도 건설등 인프라 투자를 아예 안한 건 아니었지만 그 속도는 지지부진하였고, 무엇보다도 전국적인 단위의 도로망 구축 및 관리가 상당히 부실했다. 그 결과 소련 내 물류 운송은 극도로 비효율적이 되었고, 이는 물자공급의 지연으로 이어져 경제사정을 악화시켰다.

또한 소련 정부는 1970년대와 80년대 당시 서방에서 훗날 컴퓨터로봇으로 이어질 자동기계와 정보산업에 투자하는 동안 산업 자동화나 정보산업같은 전자 산업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그결과 산업화 시절 지어진 인력 시스템을 그대로 활용하는 비효율이 이어져 1980년대 초에는 잉여직이 약 3,200만 명 정도 남게 되었다.[10]

게다가 소련 지도부에서 등한시한 취약한 소비재 산업이 국민들의 소비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암시장같은 지하경제가 점점 더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농업에서는 소련 전체 경작지의 3%에 불과한 텃밭(별장)에서 생산해 거래되는 작물이 소련 농업 전체 생산량의 25%를 차지할 지경이었다. 1980년대 중반 무렵 소련 내에서 약 1,50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암시장에 참여할 정도였다. 사실상 이미 이 때부터 소련 경제는 심각한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1982년에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에 집권한 유리 안드로포프는 이러한 소련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했다. 안드로포프는 원자재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고 저조한 생산성의 향상과 빈약한 경공업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규율 강화[11] 및 경제개혁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조치로 1983년에는 2%대로 정체되었던 경제성장률이 1985년 4% 가량으로 잠시동안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유리 안드로포프는 재임 2년만에 사망하였고 안드로포프의 후임인 체르넨코가 집권했지만 체르넨코도 별 다른 조치없이 1년 만에 고령으로 사망하여 추가적인 경제개혁조치가 진행되지 못하며 경제개혁은 지연되기만 하였다.

8 페레스트로이카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맞이한 침체기를 직시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1979년부터 지속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군비에 쓰이는 예산이 크게 늘어난 상태였고 추가적인 경제개혁은 성과없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경제개혁을 시행하려 한 순간부터 어려운 난관에 부딪쳤다. 1985년 사우디 아라비아가 유가를 두고 영미권 석유업체와 치킨게임을 벌이면서 석유 가격이 급락하여 세수가 급감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86년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면서 세수는 급속히 줄어드는데 반해 재정지출은 급속히 불어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재정적자가 심해지면서 이전부터 침체되던 경제는 더욱 침체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런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 개인사업체의 설립을 허용했다. 또한 기존의 소련 무역부(Министерство торговли СССР)가 독점하던 무역을 민간에도 조금씩 허용했다. 특히 1987년 6월에는 외국 투자자들로 하여금 소련 내 산업시설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합동사업법을 통과시켰다. 처음에 소련 내에서 외국인 투자지분은 49%로 제한되었으나, 이후 경제교류가 늘어나자 규제를 철폐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소련 내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진 첫번째 맥도날드 입주는 이러한 경제협력의 산물이었다.[12]

하지만 당시 고르바초프는 당시 공산당 기준으로도 젊은 신진인사에 속해 당 내 입지나 장악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이 점을 이용해 수슬로프, 로마노프같은 보수파들이 압박하자, 고르바초프는 보수파들을 견제하기 위해 개혁 속도를 가속(Ускорение, 우스코레니예)시켰고 이는 체제 유지에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이 무렵 민족주의가 분출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방정부가 연방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길 거부하거나, 중앙정부의 생산지시를 따르지 않으면서 소련 내 경제활동은 완전히 마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동유럽에서도 개혁이 시작되어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소련은 더 이상 냉전으로 대표되는 패권주의적 정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소련은 말그대로 낡은 정치, 경제 체제를 완전히 고쳐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기로에 도달하게 되었다.

9 종말

1990년 소련 경제는 한마디로 빈사 일보 직전이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동유럽 국가들이 이탈하면서 사회주의 경제는 붕괴되었고, 노동자들은 점차 돈이 안되는 직장 대신 각자 개인사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기 시작했다. 1990년 소련은 배급제를 부활시킬 정도로 심각한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발트 3국을 비롯한 각 공화국에서는 독립을 선포하는 등, 전반적으로 국가적인 해체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당시 소련 총리였던 발렌틴 파블로프는 급작스럽게 개혁을 시도, 지하경제를 다시 장악하고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지만, 이미 지하경제와 유탁한 공산당 고위간부들이나 기업가들은 전부 루블을 달러로 사재기해 재산을 축적한 상태였다.

이미 소련 중기부터 성장 조짐을 보이던 지하경제는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나라를 장악했고, 국영상점에서 물건을 살려면 긴줄을 서야했고 줄을 서기가 싫으면 암시장에서 비싼돈을 주고 물건을 사야했다. 이러한 오랜 경기침체에 질린 소련인들은 중앙정부의 무능에 불만을 토로했고, 이를 이용해 공화국 정부에서 독립을 부추기면서 소련 내 독립 여론은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현실을 뒤집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보리스 옐친과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등 공화국 지도자들과 협상, 신연방조약을 통해 소련을 독립국가연합과 비슷한 식의 연합체로 존속시키려 했다. 하지만 1991년 8월 19일 새벽, 고르바초프가 조약 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휴가를 간 틈을 타 모스크바에서 쿠데타가 벌어지면서 이러한 개혁 노력을 완전히 무산시켰다. 그 결과 소련은 70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10 뒷이야기

소련이 무너진 날은... 충분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날은 당연히 벨라베자 조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8월의 사태가 일어났던 날도 아니며, 그 날은 1985년 9월 13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사우디 아라비아 석유부 장관이었던 아흐메드 야마니가, 사우디 아라비아는 석유생산 억제전략을 중지하며, 석유 시장에 자국의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선포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다음 6개월 동안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 생산량은 3.5배나 증가하였습니다. 그 날 이후 (석유) 가격은 무너졌습니다. 그날 이후, 당연히도, 소련의 역사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예고르 가이다르, 에호 모스크바와 진행한 인터뷰, <제국의 붕괴> 중 출처

오늘날 많은 러시아인들은 복지가 보장되었던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빈약한 경제로 그들이 경쟁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와 맞서기에는 너무나 취약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경제 기반이 심각하게 무너졌다고 하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소련은 적어도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와도 비교했을 때 이미 나우루사우디 아라비아같은 심각한 자원 의존에 빠진 상태였다.

당장 소련 중기부터 소련의 주요 국가 수입원은 자원 수출에 기반하고 있었다. 사실 국제적으로 소련이 자랑할 만한 주생산품은 주로 군용 무기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다. 아니, 애초에 소련이 가장 주력한 산업이 기초과학, 전차, 우주, 항공 산업같은 군수산업과 밀접한 사업이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소련 경제는 2차대전 시절과 같은 전시체제에서 별반 나아진 것이 없었다. 냉전 시절 소련은 서방과의 대립을 위해 광풍을 올릴 때, 정작 인민의 안위와 연관된 경공업, 소비재 산업은 거의 등한시하다시피 했다.
이처럼 소련이 전통적으로 등한시해온 경공업 및 소비재 산업은 훗날 소련이 해체된 이후 재앙을 불러왔다. 그나마 오늘날 러시아는 소비재 산업이 뒤늦게 성장하면서 어느정도 회복했지만, 이를 바탕으로 국제시장까지 겨룰 정도의 경쟁력은 아직까지 많이 부족한 편이다.

한때 노동자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사회를 그토록 갈망했던 소련의 처참한 실패는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에 남아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11 참고 서적

  • 러시아 경제사, 타티야나 티모시나, 한길사, 2006년.
  • 소련경제사, 알렉 노브, 창작과비평사, 1992년.
  1. 여기서 (민주 국가의) 법치 제도에서 정한 민주선거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면 민주사회주의가 되고, 반대로 체제 자본주의 내에서 사회주의 요소를 도입하려는 사상을 사회민주주의가 된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 후자는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스웨덴을 운영한 사회민주당 정권이 있다.
  2. 이를 사회화(Socialization)라고 부른다.
  3. 나치가 스스로를 부른 이름인 민족사회주의와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
  4. 당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비가 제한되면서 우회수단을 찾기 위해 소련 내에서 생산하는 방법을 택했다. 즉 서로 이득인 셈.
  5. 농가에서 소를 키우기 위해 종자 소.
  6. 소련에서 아파트 건설은 3, 40년대부터 조금씩 있어왔지만 어디까지나 대도시 수준이었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성없는 고층의 '소련식 아파트'는 대부분 70년대, 80년대를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건설되었다. 아파트 항목 참조.
  7. 이 때 사회주의 노력영웅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고려인 김병화도 이 캠페인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8. 물론 이건 사실 소련당국에서 텔레비전을 중요한 대중매체로 인식하게 된 시기도 미국보다 늦은 편이었던데다가 소련의 국토가 너무 넒고 사람이 안 사는 지역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텔레비전 송출망의 확대가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9. 당장 한국이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 수출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던 시기에 왜 경부고속도로를 지었는지 생각해보자. 현대경제 활동에 있어 물류는 생산, 공급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다.
  10. 실제 소련에서 PC컴퓨터가 처음 출시된 것은 엘렉트로니카 BK가 나온 1984년이였지만, 가정용 컴퓨터가 활성화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IBM, HP와 기술교류가 활발해진 1989년 이후였다.
  11. 훗날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금주 캠페인도 이 시기 노동규율 강화에서 기초했다.
  12. 소련 내 첫 맥도날드 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