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역사

수원시 행정구역 변천사
수원군 수원면
(水原郡 水原面, 1914)
수원군 수원읍
(水原郡 水原邑, 1931)
수원부
(水原府, 1949)
경기도 수원시
(水原市, 1949)

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마한의 54소국 중의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이었다. 이후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서 몰아낸 이후 매홀군(買忽郡)으로 개칭되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었다.

2 고려

태조 때인 940년 수주군(水州郡)으로 개칭하였다.

3 조선

1413년(태종 13년)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개편되어, 현재의 수원이란 명칭이 확립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수원은 정조(正祖)가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華山/花山)으로 이전하여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있던 수원부 치소와 시가지를 현재의 수원화성으로 옮겨버리고, 그 자리에 현륭원을 조성한 것. 그 때문에 연구가들이 옛 수원의 연구에 애를 먹고 있다.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안녕동, 송산동 일대) 지역이 바로 옛 수원의 중심지였다.[1] 그 와중인 1789년 광주유수부의 일용면[2] 과 송동면[3]을 편입하였다.[4]

이원(移園)과 함께 도시 방어를 위한 수원 화성과 왕의 능행차 시 묵었던 화성행궁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자신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수원에도 배치시키고, 상업을 발전시켰다. 수원 역시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어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종2품을 두던 유수부였지만, 수원유수는 정2품으로 한성부판윤과 동급이었다.[5] 그러나 정조의 죽음으로 수원은 쇠퇴하고, 정조가 수원에 베풀던 특권 역시 폐지되었다. 다만 유수부라는 지위는 박탈당하진 않았다...만 이마저도 1895년 행정구역 최악의 흑역사 23부제 시행으로 인해 인천부 수원군으로 강등된다(...)

4 일제강점기

500px
1914년 당시 수원시 일대

1914년의 극적인 변화로 현재의 수원 생활권이 확정되었다. 남쪽의 크고 아름다운 지역[6]진위군에 내주고, 남양군의 육지 지역[7]안산군 일부, 광주군 일부를 가져왔다. 대충 의왕시와 안산시 서남부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 이 시기에 옛 수원군과 남양군 시절 면들의 통폐합이 이루어져, 남부면·북부면이 수원면으로, 태촌면·장주면이 태장면으로, 안녕면·용복면이 안용면으로, 일용면·형석면이 일형면으로, 음덕리면·둔지곶면·화척지면이 음덕면(해방 이후 남양면으로 개칭, 현 화성시 남양읍) 등으로 통합되었다. 이 중 현재의 수원시 영역은 1914년 당시 수원면(팔달구 매산동, 매교동, 행궁동 일대), 일형면(장안구 전역 및 권선구 구운동, 서둔동, 팔달구 고등동, 화서동 일대), 안용면 일부(권선구 서남부), 태장면 일부(권선구 권선동, 팔달구 동부 및 영통구 일대) 등의 영역에 해당된다.

1931년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었고, 1936년 일형면, 안용면, 태장면의 각 일부를 수원읍에 편입하였다.[8]

5 대한민국

500px
1949년 8월 14일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면서(바로 다음날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시로 개칭), 수원군의 잔여지역이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500px
1963년 화성군 태장면, 안용면, 일왕면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시역(市域)이 대폭 확장되었다.[9] 1967년 서울특별시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되었다[10].

500px

1983년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 하리를, 1987년 화성군 매송면 금곡리, 호매실리(현 금호동 지역)를 편입[11]하면서 시역을 계속 넓혀 갔다. 영토회복

1988년 구제가 실시되어 장안구권선구로 분구되었다. 1993년 장안구와 권선구의 일부를 팔달구로 분구하였다.

1995년 화성군 반월면 입북리, 당수리, 태안읍 영통리, 신리, 망포리 및 용인군 기흥읍 영덕리 일부를 편입하여 현재의 수원시 경계가 확정되었다.

2003년 팔달구 일부를 영통구로 분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되고, 해방 이후 6.25 전쟁으로 화성마저 총탄과 포격 등으로 심한 피해를 입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현재는 화성과 화성행궁의 대부분이 복원된 상태이다.
  1. 즉, 정조의 수원화성 축조 이전까지 오리지널 수원의 중심지는 현 수원시가 아닌 화성시 화산동 일대였다. 거꾸로 수원화성은 화성시에 없고 수원시에 있다. 마침 오리지널 수원의 중심지 근처인 화성시 봉담읍에 수원대학교가 있다. 통합을 해야하는건가
  2. 현재의 장안구 영화동, 조원동, 상광교동, 하광교동, 송죽동, 정자동, 파장동
  3. 현재의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송라리, 원리
  4. 견아상입지여서 성남시광주시서울특별시 강남구강동구 등 성남/광주권 지역이나 서울 강동권 지역과는 연계성이 거의 없다. 당시 송동면은 광주군 북방면, 성곶면, 월곡면과 접했고, 일용면은 의곡면, 왕륜면에 접했으며, 이 지역들은 모두 인접한 타 군으로 편입되었다.
  5.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수원광역시를 사실상 수원특별시로 승격, 취급한 셈이다.
  6. 현재 평택시 안중읍·포승읍·오성면·청북면·현덕면의 거의 전부와 고덕면의 일부, 서탄면 황구지리에 해당하는 지역.
  7. 제부도와 국화도 일대를 제외한 도서 지역(대부도, 영흥도 등)은 통째로 부천군에 이관되었다.
  8. 이 때 일형면의 잔여지역은 북쪽의 의왕면과 통합하여 일왕면으로 개칭되었다.
  9. 이 때 태장면, 안용면의 잔여지역은 통합되어 태안면(훗날의 태안읍, 현재의 병점 일대)이 되었으며, 일왕면은 옛 의왕면 영역만 남게 되어 다시 의왕면으로 명칭을 회복하고 시흥군으로 넘어가 버렸다.
  10. 당대의 지역구 국회의원 이병희가 삭발시위까지 하여 유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1. 사실 금곡동이나 호매실동은 매송면과는 별로 연관이 없다. 칠보산을 넘어가야 매송면사무소가 있는 어천리가 나오기 때문에 오히려 구운동지역과 더 연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