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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Theodore John Kaczynski). 1942.5.22~
미국의 수학자. 그러나 테러리스트로 가장 유명한 인물. 본명보다 언론 등에서 붙여준 유나바머(Unabomber. 또는 유너바머) 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 약력
시카고의 폴란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소문나 있었다(IQ 167, sd15 로 추정. 한국에서나 sd24 통용. 영문 위키피디아에 sd 명시 않음.). 다만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교우 관계는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부터는 본격적으로 고등 수학에 심취해 미분방정식과 라플라스 변환 같은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면서 교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1958년 불과 열여섯 살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해 1962년에 수학 학사를, 이어 미시간 대학교에서 복소해석학과 기하함수이론에 관한 논문으로 수학 박사 학위를 땄다. 당시 카진스키의 재능은 지도교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특출났다고 하며, 박사를 딴 직후인 1967년 가을에는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개교 역사상 최연소 조교수로 부임했다. (사실 일찍 진학한것을 제외하고는 월반을 하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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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교수 시절의 카진스키. 1968년 촬영.)
하지만 교수 생활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불과 2년 뒤(1969년)에 갑자기 사임하고 강단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가족들에게 얹혀 살다가 서른 한 살이 된 1973년에 몬태나 주의 시골 야산에 이동식 오두막을 짓고 완전히 자급자족하는 야인으로 살기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천재로 불리던 이 청년은 점점 맛이 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인가 1978년에는 아버지와 동생이 운영하는 공장에 잠깐 취직하기도 했지만, 공장의 여성 관리인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해고당하자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갔다.
게다가 자신이 살던 오두막도 산업화와 산림 개발 등으로 인해 허물어질 위기에 처하자, 그 분노를 불특정 다수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카진스키는 오두막에서 계속 칩거하며 무정부주의나 사보타주에 대한 책을 탐독하면서 사회에 대한 분노를 계속 키워갔고, 1978년부터는 사제 폭발물 제조법을 독학으로 익혀 불특정 다수에게 우편물로 폭탄을 배달하면서 테러 행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 유나바머
더 테러 라이브를 현실에서 실행했다.
카진스키가 노린 주된 목표는 대학 교수나 박사 등 지식인 계층과 항공사였고, 위력은 약한 편이었지만 폭발물들이 계속 부상자를 내고 항공기 운항에도 차질을 주자 FBI에서도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우편물의 발신인 확인이 되지 않던 상황이어서 해당 인물의 인적 사항도 알 수 없었고, FBI는 해당 테러리스트가 주로 대학과 항공사에 폭발물을 보낸다는 것에 착안해 University와 Airline의 첫머리에 폭파범Bomber를 결합해서 '유나바머(Unabomber)' 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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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I가 1987년에 작성한 유나바머의 상상도)
수사가 지지부진한 와중에도 계속 미국 각지에서는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미확인 폭발물에 의한 사고가 잇따랐다. 게다가 폭발물의 위력도 점점 강해져 피해자들이 실명이나 수족 절단 등을 당하는 중상을 입었고, 1985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최초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1987년 솔트레이크시티 테러 이후 약 6년 동안은 유사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1993년부터 다시 폭탄 테러가 감행되기 시작했다.
카진스키는 이제 그냥 얌전히(?) 폭탄만 보내지 않고 테러 대상에 오른 이들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는 등 한층 대담한 테러 행각을 보이기 시작했고, 1994년과 1995년에는 각각 PR 업계의 중역과 캘리포니아 삼림 연맹의 회장이 폭발물 우편으로 잇따라 사망했다. 이렇게 해서 총 스물두 명의 중경상자와 세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테러가 일단 마무리 되었다. 물론 정말 끝난 건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폭탄 테러 후인 1995년 9월에는 50페이지에 달하는 선언문인 '산업 사회와 그 미래' 가 희생자의 가족들과 언론사에 익명으로 발송되었는데, 이것 역시 카진스키가 작성한 것이었다.한국어 번역본 카진스키는 이 글에서 무분별한 산업화에 반대하는 대규모 세계 혁명을 주창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경우 자신의 테러 행위도 중단될 것이라고 밝혔다. 동시에 FBI 국장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정치권 인사에 대한 테러 협박 편지가 도착하는 등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3 검거
유나바머의 테러 행위 후반기에 뭔가 결정적일 만한 단서를 제공한 인물이 나타났는데, 바로 동생인 데이비드 카진스키였다. 데이비드는 1978년 이래로 형이 가족들과 일체의 연락을 끊고 지내고 있어서 형이 유력한 용의자였는지 어쨌는지도 몰랐지만, 1995년에 발표된 선언문을 읽어보고는 형의 문체와 상당히 비슷하다며 FBI에 연락을 취했다.
FBI도 그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 동안 진보한 수사 기법을 총동원해 주요 테러 지역이 시카고(일리노이)-솔트레이크 시티(유타)-샌프란시스코(캘리포니아) 축선에 집중되어 있는 점을 들어 유나바머가 이 축선에 해당하는 지역 출신이거나 그 지역에 장기간 거주하고 있는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FBI는 데이비드가 제공한 형의 과거 논문이나 이런저런 글과 선언문을 언어학자까지 불러 정밀 대조한 결과,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유나바머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결론지었다.
카진스키가 유력한 용의자라고 단정한 FBI는 약 두 달 동안 해당 축선 상에서 그의 거처를 수색했고, 1996년 4월 3일에 몬태나 주 링컨에서 마침내 검거에 성공했다. 수사관들은 카진스키의 너저분한 이동식 오두막에서 폭발물 제작에 사용한 도구와 재료들, 발송 채비를 마친 완제품 폭발물 외에 선언문의 타이프 원문과 약 40000 페이지(..!!!)에 달하는 자필 원고를 유력한 증거물로 압수했다.
유나바머 검거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동생 데이비드는 FBI가 내건 현상금 100만 달러를 받았지만, 현상금 대부분은 유가족들에게 나눠주고 대신 형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사형만은 면해줄 것을 청하며 용서를 빌었다. 재판에서 카진스키의 변호인과 가족들은 그가 심각한 정신 질환에 걸려 있으므로 최대한 선처를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카진스키는 자신이 미쳤다는 변호인의 주장을 일축하고 선언문에 나온 것과 다를 바 없는 장광설을 재판 내내 쏟아냈다.
하지만 이러한 장광설은 오히려 그가 신념론적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입증해준 결과라 전혀 먹히지 않았으며 결국 그 대안으로 사법거래를 선택했고, 검찰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1998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016년 현재도 미국 내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수퍼맥스급 교도소 중 하나인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4 검거 이후
유나바머의 범죄 행각은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의한 테러가 아니었고 미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터지고 있던 터라 수사에 굉장한 어려움을 주었다. 게다가 지문은 물론이고 웬만한 증거물은 남기지도 않는 폭발물 테러였고, 불발 사례도 16건 중 단 두 건 뿐이었던 점에서 상당한 정확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협박 편지나 선언문 등의 글로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피력하는 등의 행각이 결국 덜미를 잡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결국 자기 동생의 제보로 검거당하는 지경까지 갔다. 유나바머의 수사와 체포 과정에서 FBI가 투입한 자금은 무려 5000만 달러에 달했고, 그 때까지 미국 역사상 최고액의 수사비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검거 과정 보다 더 논란이 된 것은 카진스키의 인생 역정과 테러 사이의 상관 관계였는데, 한 때 천재 수학자로 불리던 중산층 출신의 인재가 어떻게 해서 악질 테러범이 되었느냐에 대한 심리학 논문도 검거 전후로 엄청나게 발표되었다.
카진스키의 테러 행각은 '강력범죄자는 교육 수준이 낮고 가정 폭력이 빈번한 저소득층 가정에서 발생한다' 는 통념을 깬 사례가 되었고[1], 동시에 유아나 청소년 교육에 있어서 지식의 기계적인 전달보다 인성이나 심리학을 통한 접근이 더 세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교육계의 책임도 제기되었다.
그의 글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엔 매우 논리적인 짜임과 더불어 철저한 자기방어 기제로 구성되어 있다. 당장 그가 유명한 범죄자로 알려지기 전만 하더라도, 그의 글을 읽고 뛰어난 명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상당부분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어 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삐뚤어진 고지능자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지적받는다. 잘못된 길을 걷게 된 천재의 사례로도 인용된다. 이런 삐뚤어진 고지능자들은 일반인들의 사회적 통념과는 상당부분 어긋나는 면이 있어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할 때엔 가능한한 객관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카진스키는 복역 중에도 계속 저술 활동을 하고 있고, 심지어 책으로도 옥중 출판되고 있다. 다만 전공이었던 수학 관련 서적은 없고, 대부분 선언문에서 쓴 내용을 보족하거나 동어반복하는 정도다. 미국 연방 정부에서는 이러한 출판물 간행이 범죄자에게 이득을 가져다 준다고 출판 금지와 봉인을 전제로 한 국유화를 시도했지만, 2009년 연방 법원에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 는 이유로 패소했다. 대신 법원은 카진스키의 저작물 판매 수익은 전액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위한 보상금으로 활용하라고 판결했고, 카진스키도 여기에 이의는 없는지 2010년에 '기술의 노예' 라는 신간 서적을 간행하는 등 계속 글을 쓰고 있다.
유나바머 검거에 삘받은 범죄수사 전문가들이 조디악 킬러 같은 미제 살인 사건도 연이어 해결하는게 아니냐고 미국 언론들이 잠깐 설레기도 했지만, 조디악 킬러는 2016년 현재도 잡히지 않고 있다.
5 여담
카우보이 비밥의 범죄자 테드 보어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잔향의 테러에서는 주인공 테러범을 언급하는 단어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일본판 유나바머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분한 심리학자 맥과이어 교수가 수학자 램보 교수에게 얘기할 때 언급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지만, 성인 Kaczynski는 폴란드에서는 카'친'스키로 발음된다.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로 명을 달리한 전 폴란드 대통령 카친스키와는 'n' 한 글자가 다르다.
SBS 드라마 경찰특공대 4화에서 90년대 테러경향에 대해 설명하며 데오도르 칸딘스키라는 정체불명의 독음으로 언급된다.
조디악 킬러의 정체가 이 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사실 몽타주를 봐도 둘이 닮았고, 시대도 엇비슷하며 수법도 똑같이 경찰을 대놓고 농락하는 지능범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디악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복잡한 수학기호는 수학 교수가 직업인 인물의 짓이라는 강력한 물증이 되기도 한다.- ↑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Steven David Levitt)과 뉴욕 타임즈의 기자 스티븐 더브너(Stephen J. Dubner)가 함께 쓴 <괴짜경제학(Freakonomics)>은 에필로그 부분에서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간 두 사람을 비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 사람은 백인으로서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수학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이면서 하버드에 조기 입학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흑인으로서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으며, 10대 때 폭력조직에 소속되기도 하는등 불우한 삶을 살았다. 에필로그의 마지막에 가면 두 사람의 정체를 알려주는데, 전자는 바로 카진스키이고, 후자는 롤랜드 프라이어(Roland G. Fryer Jr.)로 그는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흑인 사회의 빈곤과 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2015년 존 클라크 메달 수상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