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요들

1 개요

이름Alfred Josef Ferdinand Jodl
(알프레트 요제프 페르디난트 요들)
출생1890년 5월 10일, 독일 제국 뷜츠부르크
사망1946년 10월 16일, 독일 뉘른베르크
복무독일 제국군(1910년 ~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군(1918년 ~ 1933년)
나치 독일군(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육군 상급대장(Generaloberst)
주요 참전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주요 서훈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1]

독일 국방군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상급대장.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실질적인 작전 담당자로서 폴란드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등 여러 군사 작전의 입안자였다. 나치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 지휘참모부장이며 사실상 3군의 총참모장격 임무를 수행하였다. 많은 국방군 출신 장성들이 회고록에서 증언하듯 명석하고 유능한 참모였고 그러한 실력을 인정 받아 OKW 소속 참모 중에서는 흔치 않게 OKH와 장교들이나 일선 육군 사령관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침착한 성품에 항상 조용한 어조로 1945년 4월의 작전 회의에서도 감히 히틀러에게 반대 의견을 말할 만큼 배짱을 갖고 있기도 했다. 요들은 프란츠 할더와 달리 1차 대전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졌고 일선 연대장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는 덕분에 이를 히틀러에게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의 패배가 다가왔을 때 연합국과의 항복 협상을 주도하였으며 첫 번째 항복 협상을 이끌고 서명하나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언도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2 생애

2.1 유년기 ~ 제1차 세계대전

1890년 5월 10일 뷜츠부르크에서 바이에른 육군 포병연대 중대장이던 아버지농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신분 차이로 인해 아버지는 군을 떠나야 했는데 그가 태어났을 땐 아버지는 퇴역한 후였다. 형제로는 여동생 두 명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일찍 사망했다.

1903년 바이에른 왕국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요들은 성적의 높을 때도 있다가 낮을 때가 있을 정도로 편차가 심했지만 1910년에는 수석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사관후보생으로 제4 바이에른 포병연대에 배속된 그는 1912년에 소위로 임관 후 1913년에 백작가의 딸과 결혼했다.[2]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서부전선에서 종군한 요들은 8월 24일에 팔에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는데 이런 참전 공적으로 그는 제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5년 3월에 다시 전선으로 복귀한 요들은 1916년에 중위로 승진해 동부전선에 파견되었다. 1917년 헝가리군 제72 포병연대 중대장으로 있다가 1918년 참모장교로 서부전선으로 배치된 그는 5월 3일에 제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2.2 전간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제22 경포병연대 중대장으로 있다가 다시 제21 포병연대에 배속된 요들은 1921년에 뮌헨에서 참모 교육을 받은 후 제21 포병연대로 다시 돌아왔다. 1923년 10월 1일, 베를린의 참모 교육 코스의 과장으로 취임한 요들은 이 때 아돌프 히틀러와 알게 되었다. 대위로 승진한 그는 1924년에 국방성에 배치되어 10월에 제7사단 참모로 부임했다. 이후 전술 교관 및 국방성 작전부장을 거친 요들은 대령으로 승진, 1938년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육군 원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가 면직되고 신설된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부장으로 취임했다.

2.3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4월 1일에 소장으로 승진한 요들은 폴란드 침공 후에 노르웨이 침공, 프랑스 침공에서 여러가지 작전을 입안했다. 7월 19일에 2계급 승진으로 포병대장이 된 요들은 12월 18일에 히틀러의 제 21호 지령을 바탕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을 입안했다. 1942년 히틀러의 뜻에 반한 군사령관을 요들이 변호하는 바람에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자리가 교체될 예정이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파울루스가 소련군에게 항복하였기에 이는 백지화되었다. 이 때 요들은 소련군 포로와 영국군 특수부대의 즉결 처형을 정당화한 "코미싸르 명령"과 "코만도 명령"의 작전부장으로 이에 서명하기도 했다.

1943년 11월 뮌헨에서 나치당 전국지도자 및 대관구 지도자들 앞에서 극비연설을 행한 요들은 독소전쟁의 패배가 명확해짐과 함께 서방 방위를 위해 점령지 주민을 강제 동원해서 요새 건설과 군수 공장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4년 1월 30일, 상급대장으로 승진하였고 동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당시에 부상을 입기도 한 요들은 히틀러의 위로를 받기도 했다. 1945년 3월 7일, 사망한 부인의 친구이자 육군총사령부에 근무하던 여성 비서관과 재혼한 요들은 5월 7일에 카를 되니츠 대통령의 정부 대표로 랑스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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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요들. 왼쪽은 전속부관인 옥세니우스 육군 소령, 오른쪽은 해군대장 바그너 제독이다.

2.4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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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레트 요들의 머그샷.

제3제국의 멸망 후 요들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요들은 어디까지나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범 재판 당시 프랑스판사는 요들의 사형 판결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판결 후 요들은 교수형이 아닌 총살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사형엔 연합국에서도 반대가 많았지만 코미싸르 명령의 책임자란 이유로 소련이 강하게 사형을 주장했다.

처형된 알프레드 요들. 혐짤 주의
1946년 10월 16일, 요들은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잘 있거라 나의 독일이여"였다. 그의 시체는 다른 전범들과 마찬가지로 뭔헨에서 화장된 후에 이지르 강에 뿌려졌다. 킴제 호수 부근의 요들 집안의 묘지에는 그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1953년 3월 2일, 요들의 미망인이 제기한 명예 회복 소송에서 서독 반나치 법원은 모든 기소 항목에 대해 무죄를 선언했으나, 며칠 뒤 미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번복되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월권 행위인지 서독 법원의 오심인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국내 행정부도 아닌 외국의 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에 개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해당 판결은 미국 정부의 뜻으로 번복된 채이다.

3 기타

  • 국방군의 고급 장교였던 만큼 영화 몰락에서 등장한다. 그 유명한 히틀러의 분노 장면에서 "슈타이너에겐 충분한 병력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여 히틀러의 멘붕을 야기하는 역할로 나온다. 배우는 크리스티안 레들(Christian Redl). 요들 레들 Jodl Redl
  1. 기사 철십자 훈장과 865번째 곡엽장을 1945년 5월 7일에 한꺼번에 받았다. 따라서 그가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착용한 모습은 오직 연합국 측에 항복하는 사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2. 아내와의 금슬은 좋았지만 아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