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image/105/2009/03/05/EdgarAllanPoe1.jpg
Edgar Allan Poe[1]
1809년 1월 19일 ~ 1849년 10월 7일
1 소개
미국 문학의 독자적 형성을 따질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자 시인
한국에서는 추리소설의 시초라 불리는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을 집필한 추리 소설가, 혹은 《어셔 가의 몰락》이나 《검은 고양이》 같은 공포 소설을 쓴 걸로 알려진 유명한 미국의 문학가. 그러나 영미권에서는 추리 소설가 보다는 순수 문학 작가 또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시와 단편의 미학적 문장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포의 공포소설은 영어 원문을 읽어보면 내용 뿐 아니라 그 문체 스타일 자체가 음울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발산한다. 소설에서 문체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대표작 《갈가마귀[2](The Raven)》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시들 중 하나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이 시에 등장하는 "Quoth the raven", "Nevermore" 등 어구는 미국의 유치원생들도 안다. 이 시가 미국에서 받는 스포트라이트의 정도는 대한민국 내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그것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 아니, 어찌 보면 그 이상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아예 '대중문화에서의 갈가마귀' 항목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항목을 보면 문학,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게임, 웹 코믹 등등 다양한 부분에서 갈가마귀가 패러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포의 일생은 불운하였는데, 이유는 그의 모난 성격과 가난 때문이었다. 19세기는 작가들이 출판 계약을 따내도 100달러 선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시기란 걸 감안해도, 포가 쓴 글들 중에서 그나마 제일 성공했던 《The Raven》도 쓰고 나서 달랑 9달러 받았고, 당시 명확하지 않았던 저작권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다른 잡지나 매체에 실려도 돈 한 푼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포는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전에 양아버지의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었고 사관학교에 입교하기도 했으나 양아버지와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서 금방 일을 그만두었고 군대 문화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오직 글로만 먹고 산다는 신념하에, 낮에는 편집자로 일하면서 밤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편집자로 일할 당시에도 겨우 10달러의 주급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생전에 포는 편집자 혹은 비평가로만 조금 알려졌을 뿐[3] 작가로는 알려지지 못했고, 포의 사후(死後)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그의 글을 우연히 보고 [4] 포의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전집을 출판, 이 전집이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게 된다.[5]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의 재발견은 영국과 다른 유럽으로 퍼졌고, 비로소 미국이 작가로서 에드거 앨런 포를 다시 보게 되면서 미국 내에서도 유명해졌다.
2 생애
불쌍하게도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포가 1살 때 집을 나가고, 어머니는 포가 2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서 포는 어릴 적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부유한 담배상인인 존 앨런 아래에서 자랐지만 워낙 모난 성격탓에 수양아버지랑 자주 싸워 사이가 안좋다보니 입양도 무산되어, 유산을 단 한 푼도 상속받지 못하였다.[6] 14살에 수양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하였고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성적이 좋아 미래가 기대되나 동시에 항상 공상에 잠겨있는 학생이었다고 되어 있다. [7] 또한 그는 시를 좋아하는 형 윌리엄 헨리와 오랫동안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으며[8] 다른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대필해서 누이동생인 로잘리를 통해 전달하기도 하는 등, 글쓰기에 소질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즈음 타국에서 사춘기를 보내던 포를 유일하게 친절히 대해주었던 친구의 어머니 제인 스태넛 부인을 연모하지만, 이듬해 스태넛 부인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큰 상심을 받고 시를 처음 쓰게 된다. 이때 부인을 간호하던 소녀 중 한명이었으며 동향 리치먼드 출신이었던 사라 엘미러 로이스터와 친해지고, 두 사람이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정식으로 약혼까지 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17살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포는 당시 부유한 상인 자녀들이 들어갔던 버지니아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학교 분위기가 자신과 맞지 않아 적응을 못했다. 성격도 굉장히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한데다가, 수양아버지인 존 앨런이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기 시작하면서 집안일에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포의 학비 또한 보내주지 않자[9] 대학교육을 마치고 싶었던 포는[10] 과외교사를 하기도 했지만, 급료가 시원치 않자 학비도 벌고, 무엇보다 대학동기들과 잘 지내보기 위해 당시 버지니아 대학교내에서 유행했던 도박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도박으로 인해 오히려 술에 빠지고 빚까지 지게 되면서, 1년 만에 퇴학당한다. 설상가상으로 포와 약혼했던 엘미라 로이스터가 양가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좌절하여, 그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버리자 포는 완전히 절망에 빠진다. 그녀와의 연애는 포의 첫 시집 《태머레인(Tamerlane)》과 두 번째 시집 《알 아라프(Al Aaraaf)》의 소재가 된다.
이후 생활고 때문에 이름과 나이를 속여 군대에도 들어가는데, 입대하고 5개월 만에 설리반 섬으로 배치 받은 포는 맡은 임무를 잘 처리하여, 1829년 1월 사병으로서는 최고 지위인 특무상사에 올라가기까지 한다. 설리반 섬에서 포는 자연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설리반 섬의 생태를 관찰하기도 하였다.[11] 이 시점에서 포는 이왕 군인으로 살아가야한다면 차라리 장교가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양아버지의 추천장으로[12]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교한다.
하지만 입교 직후 전해들은 형 윌리엄 핸리의 갑작스러운 요절에 대한 충격과, 독서조차 할 수 없는 강압적인 사관학교의 분위기, 예민한 성격으로 인하여 발생한 상관 및 동료들과의 갈등, 장교로서의 삶에 대한 전망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포는 근무를 소홀히 하기 시작하고, 또 술에 빠져들고 만다. 이러다보니 사관학교에서 제대로 찍혀 결국 불명예 전역하게 된다. 이때문에 양부와의 관계는 완벽하게 파탄나서 포한테 빡칠대로 빡친 양부는 포와 의절을 선언하고 호적에서 파버렸다. 이미 군복무 중 2권의 시집을 자비 출판한 경력이 있었던 포는, 군에서 쫓겨난 직후인 1831년, 사관학교 친구들의 출자로 3번째 시집을 출판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831년 사관학교를 나오면서 집에서까지 쫓겨나게 된 포는 형의 소개로 알게 된 고모 마리아 클램의 집에서 살게 된다. 여기에서 그의 평생의 사랑이었던 버지니아 클램을 만나게 된다. 포가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었냐 하면, 안 그래도 가난한 고모의 집에 포까지 얹혀 살다보니 부담이 되어서 고모가 다른 사촌집에 버지니아를 보내려 했더니 객식구인 포를 두고 친딸을 다른 집에 보내는 대인배 고모? 포가 식겁했기 때문에 끝까지 같이 살았다고... 소녀 버지니아 역시 빛나는 문학청년인 포를 가슴 깊이 숭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1836년, 27세의 포는 13살(!)인 사촌동생인 버지니아 클램과 결혼한다. 물론 그 당시에도 눈총을 받는 일이었기에, 결혼 문서에는 버지니아 나이를 21세로 허위 신고했다.
다만 이에 관해서는, 당시 미국 남부 사회에서는 집안 내 결혼은 흔한 것이었고, 사춘기에 막 접어든 소녀들의 결혼도 결코 드물지 않았기 때문에, 에드거 앨런 포를 폄하하기 위해 퍼뜨린 루머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이 견해가 설득력이 높은 것이, '애드거 앨런 포는 소아성애자'라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포와 사이가 안 좋은 평론가인 루퍼스 윌모트 그리스월드가 편찬한 전집에서였고, 그리스월드는 생전 포와 대립하던 뉴잉글랜드 문단의 문학가들의 증언을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리아 클램의 집은 할머니, 고모, 버지니아로 구성된 대가족이었는데, 이것은 19세기 남부의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였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마리아 클램의 숙박업과 포의 할머니가 독립유공자 배우자로서 받고 있는 작은 연금에 의존하여 살고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포와 버지니아가 결혼한 1836년은 포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가족의 생계가 곤란해진 시기였고, 포는 경제적 압박 때문에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친혈육인 클램의 가문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며 무척 불안해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포가 처음으로 편집 일을 했던 잡지의 편집장 화이트의 증언에 따르면, 포와 버지니아는 부부라기보다 남매 같은 사이였다고 한다.
1835년 단편소설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가 볼티모어 지역의 신문사가 주최한 공모전에 당선되어 상금을 받자, 에드거 앨런 포는 돈을 벌기 위해 본격적으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유명하지 않다보니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포는 이에 절망해서 술을 가까이 하게 된다. 당시 손님이 집에 들렀다 목격한 증언에 의하면, 아파 누워있는 버지니아는 고양이를 껴안고 이불을 덮고 누워서 자고 있고, 곁에는 포와 장모가 각각 버니지아의 차가운 손을 잡아줘야 체온이 유지될 정도였으며, 겨울에는 난로를 땔 돈이 없어 원고지를 연료삼아 불을 지펴야 했다고 한다.
한편 10대 시절부터 '북부의 뉴잉글랜드 문단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남부에도 문학적인 기반이 탄탄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부러워하면서, 당시 미국 문학계의 주류인 뉴잉글랜드 보스턴 중심의 문학계[13]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포는 편집자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이후, 이러한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서 미국의 국민문학에 기반이 되어 줄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하는 수준 높은 문학잡지를 만들기로 결심했고[14] 마침내 1841년 그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처음으로 뉴욕에서 자신의 잡지 《Pen Magazine》을 창간한다. 이 시기에 포의 역량은 절정기에 접어드는데, 훗날 포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여러 작품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그러나 포는 잡지 창단과정에서 특유의 예민하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기존 문학잡지의 사주들과 끊임없이 충돌하여, 편집자 직을 그만두고 새로 구직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특히 직설적인 면모 때문에 귀족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여,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글을 쓰고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출판기회마저 독차지하던, 기존의 뉴잉글랜드 문인들과도 관계가 편치 못했다.[15] 결국 잡지는 재정적으로 실패하여 1846년 폐간되고 만다. 포는 잡지 폐간에 대한 충격과 그 동안의 과로가 겹쳐 실신하여, 7주 동안 침대에 드러눕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건강이 좋아졌다 악화되었다를 반복하던 아내 버지니아가 1847년 24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16] 포 생전에 어찌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평생 그리워했다고 하며, '애너벨 리'라는 명시(名詩)를 남겼다. 이 둘은 부부보다는 사이좋은 남매 같은 사이였다고 한다.
'갈가마귀'에서도 주인공이 레노어라는 죽은 연인에 대해서 그리워하는 대목이 나오며, 이 시의 레노어가 실제 포의 아내 버지니아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반대로 두 인물이 서로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시 '갈가마귀'가 버지니아의 죽음 2년 전인 1845년에 공개된 시이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묘사된 레노어가 당시 살아 있었던 버지니아를 묘사한 것일 수 없다"라는 것인데, 물론 '갈가마귀'가 1845년에 세상에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의 연인이었던 레노어가 버지니아라는 주장은 학계에서 꾸준히 타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몇 가지 근거를 대자면, 버지니아는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병치레하는 일이 잦았으며, 포 자신 또한 '엘레오노라(Eleonora)' (1842), '직사각형 상자(The Oblong Box)' (1842), '레노어(Lenore)' (1843) 등 이전 작품에서도 버지니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그녀와 흡사한 인물을 아프거나 죽은 것으로 그리는 등, 버지니아의 완연한 병색에 대한 본인의 슬픔을 꾸준히 작품 속에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잡지의 폐간과 버지니아의 죽음 후 포는 절망에 빠져 아편으로 자살 시도를 하고, 자살 시도 직후 여류 시인 세라 휘트먼이 보낸 발렌타인 카드[17]를 보고 우발적으로 프로포즈를 하는 등 정신적으로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라 휘트먼에게 차인 후에는[18] 예전의 약혼자였으며 당시 과부가 되어있었던 사라 엘머러 로이스터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재결합 하려고 했다. 사라는 포를 잊지않고 사랑하여 그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으나 생활고와 지독한 음주에 피폐해진 모습을 보고는 안타까워하며 술을 끊고 의사를 만나 건강을 회복하여 새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는 그녀의 뜻대로 금주회에 가입하고 의사를 만나러 여행길에 오른다.
그러나 포는 의사를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클램 숙모를 결혼식에 초대하기 위해 볼티모어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되고 행방불명된다. 9월 28일 볼티모어의 한 병원에서 빈사상태로 목격되나 역시 의사를 만나지 못했고, 이후의 행적은 의문에 싸인 채 10월 3일 볼티모어의 한 술집 앞(또는 길바닥, 또는 바닷가 근처라는 기록 및 글도 있다고 한다)[19]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 혼수상태와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이 상태에서 절규하면서 "누구든 나를 생각하면 제발 내 머리를 총으로 쏴다오!" 라고 외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발견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몸 상태가 너무나도 허약해진 상태에 과음으로역시 알코올 중독은 못고친다 이미 늦었다는 진단이 내려져, 입원 상태에서 10월 7일 일요일 새벽 다섯 시에 40세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유언은 "모든 것이 끝났다 에디는 더 이상 없다, 라고 묘비에 적어주게. 신이시여, 내 불쌍한 영혼을 돌보소서!"라고 한다. 덧붙이자면 이때는 버지니아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의 장례는 약혼녀였던 사라가 치루어주었다. 하지만 무연고 병자로 쓸쓸히 숨을 거둔 포는 당시 유일한 유족이었던 사촌이 대중들에게 죽음을 알리지않아 사라를 포함한 몇명의 추모객만 참여한 채 서둘러 장례식을 마쳤고 볼티모어의 공동묘지에 비석도 없이 매장했다. 이후에 그의 작품을 알게된 팬들의 도움으로 볼티모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묘지에 묻혀 제대로 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포의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있는데, 당시 해당 병원에 남겨진 포에 대한 의료진단서나 자료들이 모조리 사라져서, 포가 유명해진 다음에 이걸 분석하려던 이들은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참고로 13살과 결혼했다는 널리 퍼진 이야기 때문에, 후에 나보코프의 걸작 롤리타의 직접적인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 작중에서 험버트 험버트가 직접 언급한다. 로리를 사랑했던 남성 중 하나로서. 험버트의 첫사랑이 애너벨이기도 하고.
불행히도 평생 결핵에 시달렸는데, 포 자신은 한 번도 안 걸렸지만 주변의 사랑했던 사람들이 전부다 결핵에 쓸려나갔었다. 참고로 결핵으로 죽은 주변 사람은 자신의 친어머니, 아내 버지니아 등등. 붉은 죽음의 가면에 나오는 30분 만에 사망하는 병도 결핵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2.1 포의 생애와 술
주당을 넘어서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술 때문에 망가진 문학인으로서도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대학교와 사관학교 시절부터 늘 술을 곁에 두고 다니다가 들켜서 퇴학당했고, 취업해도 일을 소홀히 하고 늘 술만 마시고 있으니 직장에서 좋아할리가 없어 번번이 쫓겨나기 일쑤였다. 아내 버지니아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다가[20] 버지니아가 갑자기 토혈을 하며 결핵의 증상을 보였을 때도 정신 못차리고 술을 마셨다. 이런 포를 두고 같은 시대의 작가이자 라이벌인 롱펠로는[21] '술로 인생이 몰락한다면 그대의 이름은 에드거'라는 비아냥거림까지 했었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기록에 의하면 포는 한잔을 마시면 온 몸이 붉어지고, 석 잔을 넘기면 말이 많아지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다, 채 한 병을 다 마시기 전에 그 자리에서 뻗었을 정도로 술에 약한 체질이었다고 한다. 다만 술을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연속해서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고.[22] 평소 포는 다른 사람들과 편하게 말을 섞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상대방이 술을 권하면 거절하지 않고 술을 마시거나, 때때로는 스스로 술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의 불행 대부분이 주벽에 의한 것이므로 그가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하나, 또 그만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될 만큼 절망적인 상황들이 계속 되었다. 청년 시절에는 대학성적도 좋고 미래가 기대되는 전형적인 미국남부 중산층 청년이었으나, 대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결혼마저 결렬되었고, 그 직후 생활고에 쫓겨 군대에 들어갔으나,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기서도 쫓겨나며 방황하였다. 작가로 데뷔한 이후로는, 무명작가의 설움과 먹고 살기 위해 과로로 앓아누울 정도로 잡지 편집 일에 시달리는 이중고를 겪었다. 뉴욕에서 편집자로 명성을 얻은 이후로는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버지니아의 건강도 좋아지자, 포는 술도 끊고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잡지도 소유하게 되고, 《갈가마귀》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명성도 얻게 되었으나, 갑작스레 버지니아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고 결국 2년 뒤 아내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런 식으로 번번이 포는 희망에서 절망으로 한순간에 떨어지곤 했다. 또한 그럴 때마다 병에 걸리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등 매우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가는곳마다 다른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게 하였고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포가 평생 빈곤에 시달리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2.2 사망에 관한 의혹
사실 포의 사망 경위는 아직도 정확하지 않다. 그가 죽은 원인 및 죽기 며칠 전의 행적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던 시기라서, 정치판에 연루된 조폭들이 흔히 저지르던 일에 휘말렸으리라는 주장도 꽤 설득력이 있다. 술주정뱅이들에게 여러 가지 옷을 입히고 분장을 대충 시켜, 다른 사람처럼 꾸미고 여러 선거장에 가서 특정후보에 몰표를 행사하는 일이었는데, 주정뱅이가 이걸 문제 삼는 일을 막거나 뒷말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주정뱅이를 구타하거나 약물을 먹여 죽게 하는 일도 번번했다고 한다. 약물까진 몰라도, 싸구려 술에 온갖 첨가물을 넣고 마시게 하여 길바닥에서 얼어 죽게 하는 일도 꽤 있었다고 한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포가 죽기 전에 보인 증상은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콜레라의 증상과 유사하다고 한다. 즉 포는 고모를 결혼식에 초대하기 위해 볼티모어로 가는 여행길에서 갑자기 행방불명되어 길가를 떠돌아다니다가, 안 그래도 쇠약해져 있던 몸에,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 이렇다고 해도 의혹은 여전히 남아있다. 왜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나타났는지(당시 탔던 배에 문제가 있었다면 관련 기사 등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왜 사망 후 의료기록은 사라진 것인지.
평소 포를 좋게 보지 않았던 언론(다른 언론들은 좋게 보았다)인 매거진 필라델피아의 편집 기자이자 시인인 루퍼스 윌모트 그리스월드(Rufus Wilmot Griswold/1815~1857)는 포가 과거에 자신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포를 증오하게 되었고. 그가 죽어서도 그를 미치광이 알콜 중독자였다는 식으로 폄하했다. 불행하게도 포의 전집을 처음 편집한 사람이 그리스월드였으며, 포가 이상성애자이며 알콜 중독자라는 소문 역시 그가 편찬한 전집에서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월드도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으며, 3번의 이혼 및 경제적 문제, 포에 대한 비난으로 인한 문학계 인사들의 반발과 그에 대한 비난으로 고생하다가, 역시 42살 나이로 갑자기 병으로 죽는다. 그리고 참 특이한 점은 그리스월드가 죽어서 공개된 그의 방에는 포의 초상화가 그대로, 전혀 상처 없이 걸려있어서, 그리스월드가 포를 동족혐오와 동질감이 교차하는 애증(愛憎)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일생과 갑작스런 죽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모든 작품과 비평[23]들은 문학적으로 아주 높은 작품성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포에게는 '최고의 서정시인', '전설적인 비평가'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은 당연하다.
3 작품의 특징
데뷔작은 시집이었으나 많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고, 이후 시집을 두 편 더 냈으나, 마찬가지로 인기를 끌지 못했으며, 그 즈음부터 시보다 소설을 주로 쓰기 시작한다. 소설의 경우에는 단편 소설을 즐겨 써서, 장편은 단 하나밖에 없다. 포가 단편을 즐겨 쓴 이유는 평상시 소설을 창작하는 것 이외에 잡지를 편집하는 일로 바빴던 탓도 있지만, 포 스스로도 단편이 장편보다 미학적인 가치가 높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포의 시들이 갖는 중요한 특징은, 감성적(感性的)인 분위기를 시의 운율이 가진 음악성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의 시는 사실상 번역이 불가능하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을 영어로 번역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는 포가 자신의 시인 《갈가마귀(The Raven)》의 집필 과정을 묘사하면서 음악과 운문 문학의 관계와, 음악적인 요소가 어떻게 시의 운율(rhyme)을 형성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한 《시작(詩作)의 철학(The Philosophy of Composition, 1846)》과, 죽기 직전 시에 대해 강연한 강의록을 모아 동료 문학가들이 포 사후에 출판한 《시의 원리(The Poetic Principle, 1850)》에 잘 나타나있다. 포의 시는, 유럽의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현대에도 문학적 가치로는 최고의 시라 평가받고 있다.
반면, 소설가로서의 포는, 비현실적인 환상을 이성적(理性的)이면서 현실적인 문체로 묘사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소설은 SF의 방법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24] 포는 뛰어난 비평가이자 이론가이기도 했는데, "단편 소설은 한가지의 테마로 작성되어야 하며, 모든 문장들은 소설의 전체 테마와 일맥상통 해야한다. 그러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 작가는 소설의 정서와 사건을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 는 나름대로의 단편 소설 작법을 체계화하고 자신의 소설을 통해 그 효과를 증명한 최초의 작가였다.
특히 추리소설 분야에서는 현대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꼽히며, 19세기 이후 추리소설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서술방식이나 트릭, 규칙 등의 상당수가 포로부터 나왔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1인칭 관찰자 시점 주인공인 "나"와, 경찰은 아니지만 명석한 판단력과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어거스트 뒤팽 두 명이 등장한다.
- 범죄자가 범죄사실을 숨기는 트릭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도둑맞은 편지 항목 참조.
-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모든 선택 가능한 답안을 지우고, 마지막으로 남은 답은 그것이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도 진실일 확률이 높다.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 참조.
몽상적이고 어두운 문체 떄문에 호러 문학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기도 한데, 특히 때이른 생매장이라던가 까마귀, 원혼에 서린 검은 고양이 같은 소재들을 워낙 인상깊게 써 지금도 포우만의 인장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포는 암호학에도 높은 관심을 가져서, 암호학에 대한 소설 《황금충(The Gold-Bug)》을 쓰기도 하였다. 이 소설의 창작배경을 보면, 에드거 앨런 포의 대단한 분석력을 알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 미국의 여러 신문에 독자들이 보낸 암호문들을 모두 풀어서 해당 신문들에 보냈고 예상대로 그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이를 못마땅해 한 당시 미국의 유명한 암호학자들은 ‘이거 독자들이랑 짜고 치는 거 아냐?’ 라고 포에게 항의편지를 보냈고, '당신들이 못 믿겠으면 내가 암호문들을 푼 방법을 직접 내 신작 소설 안에 제시하겠습니다"해서 나온 소설이 바로 황금충이다. 황금충은 《Philadelphia Dollar Newspaper》가 주최한 공모전에서 당선되어 100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이 금액은 포가 받은 원고료 중 가장 많은 원고료였다고 한다.
말년에는 당시 아직 미개척 분야였던 우주에도 관심을 보여, 1848년 천문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론을 설명하고자, 《유레카》라는 강의록을 출판하기도 한다. 여기서 그는 당대 천문학자들이 풀 수 없는 난제라고 여겼던 올베르스의 역설의 해를 제시하였고, 블랙홀의 존재를 예견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중들의 반응은 '이 사람 정말 미친 거 아냐?' 실제로 현대 학자들은 유레카의 내용 중 에드거 앨런 포가 평소 존경하던 철학자들을 비꼬는 듯한 어조로 묘사하고, '과학과 문학은 동일한 방법론, 즉 치밀한 사고의 흐름으로 만들어진다' 라는 평소의 주장을 뒤바꿔서, ‘문학은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다른 학문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 것, 해당 강연이 (유레카는 강연 원고를 목적으로 써진 책이다.) 버지니아의 사망 1주기 직후 작성되었다는 점 등을 들어, 말년에 포가 정신착란을 일으킨 증거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듯 에드거 앨런 포는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인물이지만, 독립한 지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신생국이었던 미국에서는 미국인의 진취적인 정신,[25] 혹은 청교도적 도덕관념이 내용에 들어있지 않은 작품은 다 불쏘시개 취급했기에[26], 에드거 앨런 포는 생전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소수의 동료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작가 취급조차 받지 못하였다.[27] 한 마디로 나라와 시대를 제대로 잘못 타고난 천재 어째 역사속의 천재 예술가들은 이런 경우가 많다
4 대표 작품들
4.1 시
- 애너벨 리 [28] [29] - 영 시 중에 가장 널리 애송되는 시 중의 하나.
- 엘 도라도 (El Dorado)
- 갈가마귀 (The Raven)
- 해저도시
- 울랄륨
- 테머레인
- 꿈 속의 꿈
- 종 (The Bells)
4.2 소설
- 어셔 가의 몰락(1839)
-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가 오페라로 작곡했다.
- 윌리엄 윌슨 (1839)
-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뒤팽 시리즈, 1841)
- 함정과 진자(1842)
- 붉은 죽음의 가면(적사병의 가면이라고도 한다. 1842)
- 마리 로제의 비밀(뒤팽 시리즈, 1842)
- 검은 고양이(1843)
- 황금충(황금풍뎅이 혹은 황금벌레로 출판되기도 했다. 1843)
- 고자질하는 심장(1843)
- 도둑맞은 편지(뒤팽 시리즈, 1844)
- 아몬틸라도의 술통(1846)
- 소용돌이 속으로의 추락
-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가 극음악으로 작곡했다.
4.3 《유레카(Eureka)》[30]
상술(上述)된 《유레카》를 기이(奇異)한 책 정도로 보는 것은, 포의 문학가, 작가로서의 천재성이 뛰어난 탓에 이 책은 거의 주목받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유심히 살펴보면, 포의 천재성, 혹은 불가사의한 직관을 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1840년대의 미국에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존 돌턴(John Dalton)의 원자론이 나온 지 50년도 채 되지 않았고, 원자란 작고 딱딱한 공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포는 《유레카》에서, 물질은 인력과 반발력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이런 견해는 1900년대 가까이 가서야, 어네스트 러더퍼드[31] 등이 원자 구조를 해명하면서 확립된 것인데, 포는 50년 정도나 앞선 것이다.
위대한 학자로 인정받던 라플라스(P. S. Laplace)[32]는 태양계가 상자 속에 들어있는 큰 시계처럼, 아주 안정되어 있다고 강조했었다. 그리고 포의 사상에 영향을 줬다는 알렉산더 훔볼트(Alexander Humboldt: 1769~1859)도 저서 《우주(Kosmos)》에서 라플라스와 같은 견해를 피력했었다.
그러나 《유레카》에서 포의 견해는 이러했다.
"우주는 하나의 공과 같은 물체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이 폭발해 퍼짐으로써 별들이 생겼다. 그리고 언젠가 우주는 다시 중심을 향해 붕괴되어 결국엔 소멸된다."
포는 상술(上述)했듯이, 블랙 홀의 존재 역시 서술했다. 폭발과 수축, 그리고 블랙 홀? 바로 현대인들은 한 번쯤 들어봤을 빅 뱅(Big Bang) 이론이다. 포의 주장은, 빌헬름 드 지터(Wilhelm de Sitter)의 팽창 우주론이 발표된 1917년보다 70년이나 앞선,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포는 우주는 무(無)로 돌아갔다가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한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천문학 이론에 따르면, 블랙 홀은 무한히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극한에 이르러 다시 폭발한다고 하여, 포의 말이 옳다는 것을 현대 과학이 증명해주고 있다.
포는 또한 공간과 시간을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는 포가 미쳤다는 인식을 부채질한 셈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개념은 아인슈타인(Einstein)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생소한 것이기도 했고, 과학자도 아닌 문학가가 이런 소리를 하니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포는 우리가 보는 은하계(銀河系)는 수많은 은하계들 중 하나에 불과하고, 그것은 단순히 별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섬 우주’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역시 20세기에 와서야 확립된 견해이다. 안드로메다 같은 나선은하가 우리 은하수 은하 내의 성운이냐 우리은하와는 별도의 외부의 천체이냐 하는 것이 1920년대의 천문학의 대논쟁이었다. 포는 난다 긴다 하는 학자들보다 족히 반(半)세기는 앞선 것이다.
하지만 문학가로서의 포의 천재성은 인정해도, 《유레카》에서 보여준, 문학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인 포의 천재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학자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이는 포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레카》는 1847년, 겨울에 포가 신들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몰두하여 집필했다고 한다. 완성하고 출판사에 넘기면서, 포는 이 책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역설하면서, 초판을 5만 부나 찍으라고 권했다. 현대적으로 보면 초판을 50~100만 부 찍으라는 거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포는 《유레카》가 그 자신에게 부(富)는 물론, 당대 최고의 사상가라는 명예를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레카》는 1848년 3월에 5백 부만 출판되었고, 이 책에 대한 부정적인 비평은, 당시 《리터러리 월드(Literary World)》 지(誌)에 실린 익명의 비평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기원을 해명했다는 포의 주장은 ‘증거가 조금도 없는 뻔뻔스러운 독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뿌리도 잎도 없는 헛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라플라스의 이론을 도용한 것일 뿐이라는 비난도 이어졌는데, 이에 대해 포의 항변은 다음과 같았다.
"내 이론에 비하면, 그 프랑스 천문학자의 이론은 한낱 대양(大洋)의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유레카》를 포의 최고 걸작이라고 보는 비평가도 소수 있다. 하지만 위에 서술한, 놀라운 통찰력과 시대를 앞선 이론은 《유레카》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다. 포는 《유레카》가 물리학적‧형이상학적‧수학적‧물질적‧정신적 우주를 설명하려는 웅대한 시도로 시작되었다고 했지만,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너무 과장되어 있다. 무엇보다 탁월한 문학가의 저서라는 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문체나 글의 흐름이 어지럽다.
더러 추론(推論)을 정리하거나 공리(公理)를 설정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의 훌륭한 업적을 전지전능한 신에게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나의 이 천재적인 업적이 신의 은총 덕분이라고? 아니야, 내가 잘나서 그래는 것을 과장되고 유치한 방식으로 거듭 강조하고 있다.
포는 《유레카》의 서문에서, "내가 이 책에 쓴 것은 진실이다"라고 강조했는데, 저서 전체에서 그는 과대망상이라고 할 정도의 고집과 집념으로 이 확신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포는 그렇게 믿었다.
포의 전기를 쓴 작가들이나 비평가들 중 대다수는 《유레카》를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천재가 절망 끝에 시도한 자기 기만적 작품"이라고 평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유레카》를 문학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뿐, 그 책에서 포가 보여준 통찰은 근본적으로는 옳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반론도 분명 있다. 당시에는 비웃음과 비난만 샀던, 《유레카》에서 포가 주장한 우주에 대한 이론들은, 포가 《유레카》를 저술한 후,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이 넘은 후, 현대 과학에 의해 정립된 것들과 일치하거나 그 근본 개념이 통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니까. 그러나 그런 결론이나 확신을 뒷밤침할 근거나 증거자료 등을 거의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면 문제였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가끔 보이는 천재적 예술가의 직관이라는 게 그나마 적절할 듯.
그러나 《유레카》에 대한 이 사족(蛇足)을 통해, 한 가지만은 보다 더 분명해진 것 같다. 굳이 문학에서뿐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포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불운한 천재라는 것.
5 트리비아
-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포의 전집으로는 하늘연못에서 출판한 <우울과 몽상>과 코너스톤에서 출판한 전집이 있다. 하늘연못판은 1부 환상, 2부 풍자, 3부 추리, 4부 공포로 구성되어있고, 코너스톤판은 1부 미스터리, 2부 공포, 3부 환상, 4부 풍자, 5부 모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늘연못판은 프랑스판 중역(重譯)인데다가[33][34] 번역자가 원문에 없는 문장을 만들면서까지 모든 소설의 문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등 번역이 엉망이라 책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특히 앞부분에 실린 환상이나 풍자 쪽이 발번역이 심하다. 1부 환상 부분에서 가장 처음으로 수록되어 있는 《The Thousand-and-Second Tale of Scheherazade 》에서는 소설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세라자드가 19세기 과학 기술을 묘사하는 부분을 완전히 엉망으로 번역하였고 두번째로 수록된《The Unparalleled Adventure of One Hans Pfaall》에서는 중간 애피소드 하나를 통째로 빼먹었다. 이 밖에도 《Some Words with a Mummy》에서 주인공의 가난을 암시하는 토스트 요리인 Welsh rabbit을 토끼 고기 요리로 번역하는 등 세세한 오역도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자 후기에 의하면 자신이 포 전집을 번역한 의도는 그 동안 일반 대중들에게 추리나 공포 소설작가로만 알려진 포가 안타까워서였다고 한다. 학자들이 언급하길, 포는 생전 자신의 작품을 끊임없이 개고(改稿)하고 다듬은 것으로도 유명하고 포의 문체나 서술방식은 그 작품에 포가 가장 알맞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각 작품마다 현란하게 변화하기 때문에, 번역자가 어설피 달려들었다간 좋은 결과물을 남기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번역자부터가 여러 한국어 문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얘기이니까. 한편 코너스톤 판본은 원전 번역이여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역시 오역이 발견된다고 한다.
- 한국에 나온 번역본 중 가장 뛰어나단 평을 받는건 문학과지성사에서 내놓은 김진경 번역인데 이게 하늘연못이나 코너스톤처럼 전집을 내놓은게 아니라 문지 스펙트럼이란 문고 시리즈에 들어있는 단편집이라 도둑맞은 편지 포함해 단편 5개가 전부다.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광기의 산맥》에서 나오는 쇼거스의 울음소리인 테켈리 리를 가장 먼저 쓴 사람으로, 이 울음소리는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아서 고든 핌의 모험(The Narrative of Arthur Gordon Pym of Nantucket)》에서 나온다. 덧붙여서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은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이 열린 결말이었기 때문에, 현대 SF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작가 쥘 베른도 작가 생활 극 초기에 그 작품의 후속작 성격을 띈 《빙원의 스핑크스》를 썼다. 참고로 이 작품은 쥘 베른의 작품 중 지뢰 취급을 받는 작품이다. 원작의 설정을 뒤바꾼 건 예사고, 플롯도 완벽하게 구성되어있지 않다.
- 일본의 유명한 추리 소설가인 에도가와 란포는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지은 필명으로 활동했다
- 포의 이름을 딴 The Edgar Allan Poe Awards라는 상이 있다. 흔히 Edgar Awards로 불리며 미국 추리작가 협회상(MWA: Mystery Writers of America)이라고도 한다. 매년 4월에 개최하여 전년도에 출판한 전미 미스터리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상으로, 매년 최고의 미스터리 작품, 논픽션, TV, 영화, 극본 부문 등을 시상한다. 작품 선정은 현역작가와 추리작가협회 회원들이 한다. 신인상 부문(Best First Novel by An American Author)이 1946년부터 시작되어 유명하다. 또 수상자에게 포의 조상을 수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 ↑ 앨런은 양아버지 존 앨런의 성을 딴 미들네임인데, 평소에 양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에드거는 자신을 앨런이라 부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포 가문은 하나뿐이라서 누군가의 성이 '포'라면 그는 에드거 앨런 포의 친척이다. 포의 직계는 없기 때문에 전부 방계 후손. 미국에서의 발음은 '포우'에 가깝지만, 외래어 표기법상으로 '포'라고 한다. 이중모음 'ou'에 해당되는 발음인데, 'ou'를 'ㅗ'로 쓰도록 했기 때문.
- ↑ 가마귀는 까마귀의 방언이지만, 국내 출판 당시 《갈가마귀》로 번역되었으므로 통상적으로 그렇게 표기된다. 하지만 이는 오역으로 레이븐은 갈까마귀(Corvus dauuricus)가 아니라 큰까마귀(Corvus corax)이다.
- ↑ 포는 당시 미국의 유명 인사들을 자신의 잡지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소송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 ↑ "포의 글에는 내가 쓰고 싶은 모든 것이 쓰여 있다"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놀라워했다고 한다.
- ↑ 그래서 《악의 꽃》을 출판하기 전까지 보들레르는 프랑스 내에서 미술 비평가 혹은 포 전집 번역가로 인식되고 있었다.
- ↑ 차라리 술 안마시고 알뜰하며 정상적인 직장 생활을 하려고만 했어도 양부와 파탄은 안났었지만 그런게 없다보니 양부와의 관계가 좋을수가 없었다.
- ↑ 포는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는데, 그의 멀리뛰기 기록이 21피트 6인치(약 6.5~6m)였다고 한다.
- ↑ 윌리엄 헨리 역시 1831년 알코올중독으로 요절하는데, 에드거는 이후 형의 못 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반드시 작가로 대성하겠다면서, 더욱 문학에 열정을 쏟게 된다.
- ↑ 근데 이것은 양부가 보내주는 학비를 술과 도박에 써버린 포가 잘못한거다. 존 앨런은 이것을 싫어하여 항상 도박을 하지말라고 질책했지만 충고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양부와 사이가 제대로 벌어져 존 앨런은 포의 학비를 끊어버렸다.
- ↑ 그의 대학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 ↑ 설리반 섬의 경험은 황금충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 ↑ 당시 양어머니의 유언과 포의 금주 약속으로 포와 존 앨런은 일시적으로 화해한 상태였다고 한다.
- ↑ 주로 신생독립국인 미국에 대한 찬가와 청교도적인 내용의 문학작품을 집필했다. 또한 이들은 모두 귀족자제들이거나 사회의 높으신 분들이 많았고, 인맥으로 출판기회도 독차지했다.
- ↑ 당시 미국의 주류 문학잡지는 신인작가를 발굴하기보다 영국의 소설을 소개하는 데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
- ↑ 특히 뉴잉글랜드 기성문단의 대표 격인 롱펠로를 심하게 공격해서, 북부 뉴잉글랜드 문단은 포를 작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는 포의 잡지사업이 실패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 ↑ 버지니아가 사망할 당시 그녀의 초상화 한 점 남겨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한 포는 버지니아의 시신을 관에 옮기기 직전, 화가를 불러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했다. 지금 남아있는 버지니아 포의 초상화는 바로 이 초상화이다. [1]
- ↑ 19세기에는 사람들끼리 카드에 짤막하게 시를 적어서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 ↑ 차인것보다는 세라 휘트먼은 포를 좋아해서 결혼하겠다고 했지만 세라의 부모님이 포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결혼을 결사반대하여 무산된것이다.
- ↑ 해변가 술집 앞의 길거리 라고 하면 말은 된다(...)
- ↑ 실제로 평상시의 에드거 앨런 포는 유머도 곧잘 하는 유쾌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 ↑ 포와 롱펠로는 신문지면 상에서 공개적으로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였다.
- ↑ 알코올 중독자들중에서 술에 약한 사람들도 많다.
- ↑ 대표적으로 찰스 디킨스에 대한 비평이 있다. 포는 디킨스가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를 만났는데, 당시 디킨스가 연재 중이던 《바나비 러지(Barnaby Rudge)》의 결말을 미리 예측해서 디킨스를 경탄시켰다고 한다.
- ↑ 현대 SF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작가 쥘 베른도 작가 생활 극 초기에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의 뒷부분을 상상해서 지은 후속작인 《빙원의 스핑크스》를 썼다. 참고로 이 작품은 쥘 베른의 작품 중 지뢰 취급을 받는 작품이다. 원작의 설정을 뒤바꾼 건 예사고, 플롯도 완벽하게 구성되어있지 않다.
- ↑ 랄프 왈도 에머슨 등으로 대표되는 초월주의 사조. 포는 이 초월주의를 정말 끔찍하게 싫어해서 심심하면 디스했다. 에머슨 등도 그런 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만무한지라 그를 천박한 광대라고 깠다.
- ↑ 특히 당시 미국의 주류 문단이었던 뉴잉글랜드 문단에서 그런 경향이 심했다.
- ↑ 물론 포가 사후, 유명해진 이후로는 전부 땅을치고 후회했다.
꼴좋다, 자업자득인거지. - ↑ 많은 영어 낭송이 있지만 짐 리브스의 고전적 낭송이 유명하다.
- ↑ 인디 싱어 어른아이가 애너벨 리의 시구들을 가사로 차용해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 ↑ 영어식 발음은 유어뤼이커에 가깝지만, 우리나라에 익숙한 그리이스어 방식으로 유레카로 표기했다.
- ↑ 방사성 물질의 α‧β‧γ선을 발견한 영국의 물리학자, 1908년의 노벨 화학상 수상자이다.
- ↑ 《세계계도설》에서 칸트(I. Kant)의 성운설(星雲說)을 기초로 하여 태양계 기원에 대한 새로운 성운설을 주장한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그의 저서는 뉴튼의 《프린키피아》 이래, 천체 역학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 ↑ 번역 텍스트로 불어판 Oevers Completes - Poe Edgar Allen (LA Front Robert)과 영어판 COMPLETE STORIES OF EDGAR ALLAN POE(Doubleday 출판사)을 비교 대조해서 썼다고 한다.
- ↑ 아마 보들레르의 포 번역이 유럽의 포 정본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리 그래도 굳이 중역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