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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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侯

1 개요

중국 주나라에서 천자[2]이 각 지역을 친척 또는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나눠줬고, 이 지역을 받은 사람을 제후라고 한다. 봉건제의 시작이었으나, 점차 힘을 키워나가게 되고 천자의 권위가 점차 실추됨에 따라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기도 했다.

'제후'라는 용어는 천자가 임명한 지방의 통치자들의 작위(오등작) 중에 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등장했다. 글자 그대로 풀어 쓰면 '여러 후(侯)들'이라는 뜻이지만, 그냥 편하게 의미를 확대해 다른 작위를 가지고 있어도 제후로 간주된다.

한나라 이후에는 중국과 형식적으로 조공책봉관계를 맺은, 즉, 동아시아 국제체제에서의 조선, 류큐 등 외국의 왕을 제후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나라 이후 중국에서는 실제 영지를 다스리는 의미보다는 유교적 예법에 따른 타이틀에 가까웠으므로, 중세 유럽의 봉건제마냥 동아시아 국제체제를 무슨 중국의 지방 정권이나 식민지마냥 해석하는 것은 좀 곤란하다.

엄밀히 말하면 진나라 때 철후(徹侯)라는 20등급 작위 중 제일 높은 관직이 있었는데 한나라 때 한무제 유철의 피휘를 위해 뜻이 비슷한 통후(通侯), 또는 음이 비슷한 열후(列侯)라고 부르던 것이 이후 보편적으로 열후=제후로 불리게 되었다. 통후의 통은 공적이 커 왕실에 내왕할 수 있음을 뜻한다고 하며, 유래와 무관하게 열후의 列에는 諸와 마찬가지로 '여러'라는 의미가 있어서 서로 통한다.

2 역사

주나라의 무왕이 상(商)을 멸망시키고 각 지역을 왕족, 전쟁 공신, 상나라의 주요 인물 등에게 나눠주었고[3] 이들을 번병(藩屛)으로 삼았다. 이 제후들은 천자에게 공물을 바치거나, 군사를 파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중앙의 천자는 회맹이라는 절차를 통해 제후들의 군사력을 소집할 수 있었다. 무왕이 죽고 상나라 왕족 무경록부, 주나라의 관숙의 '삼감의 난'이라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주공, 소공의 활약과 회맹을 통해 빠르게 군사를 소집하며 난을 빠르게 진압할 수 있었고 주의 통치는 더욱 강력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제후와 천자 간의 사이는 멀어졌고, 거기다 유왕과 포사의 봉화 낚시라는 희대의 뻘짓이 터지자 제후들과 천자 간의 관계는 완전히 멀어졌다. 견융족이 쳐들어와서 긴급하게 봉화를 올렸음에도 제후들은 또 포사의 낚시일 것이라 여기고 군사를 소집하지 않았을 정도. 결국 수도 호경은 초토화되었고 주나라는 수도를 낙읍으로 천도해야 했다. 주공과 소공이 황허강 유역에 핵심 제후국 50개국을 봉한 뒤 그 제후국들이 800여 개의 제후국을 지배하는 체제를 구축했으나, 천자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며 제후들의 권위만 높아졌다. 춘추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명분적으로나마 춘추오패가 주나라 왕실을 받들긴 했다. 당시 천자의 말을 듣기 싫은 제후들은 힘이 센 한 명의 제후가 천자를 대신해 회맹을 소집하기도 했는데, 이 힘이 센 제후를 패자라고 불렀다.

전국시대 들어서는 나라고 제후고 뭐고 그냥 전부 왕임을 자처하는 혼란의 시기가 되었다. 당연히 주나라는 완벽하게 개판이 되었고, 끝내 소양왕, 진시황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이후 천하를 통일하고 을 세운 진시황은 주나라 멸망의 원인이 된 봉건제를 폐지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 제도인 군현제를 전국적으로 실시[4]하였는데, 군공이 없는 종실의 작위를 박탈하고 군공이 있는 종실의 작위를 후(侯)로 제한하고 실권을 박탈하여 조세 징수권만을 갖도록 하였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중앙정부가 임명한 관리(현령 등)에 의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때 전통적 의미의 제후는 폐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시황의 가혹한 통치와 여러 가지 병크로 인하여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18개의 왕국을 분봉하면서 다시 봉건제로 회귀하여 제후가 부활하...는 듯하였으나, 유방에 의하여 한나라가 세워지면서 군현제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가 실시되었다. 이때는 다시 실권을 가진 제후[5]가 임명되었으나, 오초칠국의 난으로 인하여 군국제가 폐지되면서 드디어 군현제가 전면적으로 자리잡고, 제후는 다시 실권이 없는 존재가 된다.[6] 그러나 이후에도 황족을 왕이나 공으로 봉하고, 공신들을 후로 봉하여 식읍을 주는 제후 제도 자체는 계속 유지되었다.

3 특징

봉건제에서, 유럽은 쌍무적 계약관계를 바탕으로 왕과 영주의 관계를 맺었다면 주나라는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왕과 제후의 관계를 규정하였다. 그 결과, 주나라 초기의 제후는 71명이었는데 53명이 희씨를 사용하는 동성제후였다.[7] 나머지는 전쟁공신이다.

4 관련 인물

《삼국지》에 나오는 원소, 조조 등의 군주들도 후한의 제후들이다.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와 같은 다이묘들도 제후의 일종이다

5 기타

  • 위략》에는 기원전 4세기, 고조선이 주나라를 따르기 위해 왕을 칭하였다고 되어 있다. 물론 표면상으로만 그렇지 실제로는 연나라와 맞서기 위함이다. 《사기》나 《한서》 등에는 준왕을 조선후라고 불렀다.

6 관련 문서

아래는 중국의 봉건제와 관련됨.

  1. 둘 다 이 문서로 들어오기 전에 필독하는 것이 좋다.
  2. 황제라는 칭호가 생기기 전에는 왕이 천자였다. 하지만 황제의 칭호가 생긴 뒤 왕도 제후의 일종이 된다.
  3. 초기 제후국은 총 71개였고, 이 중 53개가 친척들에게 돌아갔다.
  4. 군현제 자체는 통일 이전에 이미 상앙의 개혁을 통해 실시되었으며, 통일 이후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어 본격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5. 초기에는 한신 등 공신을 왕으로 임명하였으나 이후 이들을 숙청하고 황족인 유씨만 왕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6. 물론 나중에는 조조 등 실권이 있다 못해 넘쳐나는 제후들이 출현하였으나, 이는 왕조 말기의 혼란에 따른 결과이지 전통적 의미의 제후가 부활한 것은 아니다.
  7. 성별이 같다는 게 아니고 주나라 왕실과 성씨가 같다는 것
  8. 이들의 직위는 대부분 태수, 자사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제후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방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제후로 볼 수 있다.
  9. 명시적으로 제후의 작위를 가지고 있던 인물은 오정후(烏程侯) 손견. 다른 인물의 작위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추가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