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명
十八路諸侯.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후들의 연합. 후한말 190년 역적 동탁을 토벌하고 한나라 황실을 굳건히 받든다는 것을 대의 명분으로 떨쳐 일어났으며, 이른바 '반동탁 연합', 함곡관의 동쪽 지방인 관동에서 일어나서 관동군(關東軍)이라고도 한다.
그 당시에는 모두 고위직을 역임하고 있었으며 이름도 널리 알려진 시대의 네임드급 인물이나, 삼국지연의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 나올 때 능력치가 상당히 허접하게 배분되었기 때문인지, 현대에는 가끔 듣보잡 취급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반동탁 연합이라 칭하는 연합은 지방 관리들이 제멋대로 사병을 조직한 다음 연합하여 중앙 정부를 공격한 것으로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문 일이다. 역사상 이 정도의 항명은 보기가 힘든데 주로 종친간의 권력 암투로 인한 군사적 충돌 내지는 폭정을 견디다 못해 민중 반란 등이 대부분 나왔을 뿐이다.
훗날 당나라의 절도사의 난이 일견 비슷해 보이나, 절도사의 경우 애초에 지방에 거점을 잡은 군벌이었고, 반동탁 연합의 경우는 반대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어 부임한 관리들이 제멋대로 사병을 조직해 중앙정부를 공격한 것으로 꽤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형세가 불리하진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해 버렸다. 이로서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던 중앙 정부와 지방의 연결 관계가 완전히 분해돼버린다.
시작이 상당히 거나했던 것에 반해 각 군이 연합의 대의명분에 대해 상당히 온도차가 컸기 때문인지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용두사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황건적의 난이 당시 한나라의 상황을 각 군벌들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스스로 힘을 기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면, 이 18로 제후의 연합과 해산은 힘을 기른 군벌들이 그 힘으로 천하를 제패하는 공을 처음 울렸다고 할 수 있겠다.
18로 제후는 사실 삼국지연의에서 정해진 것으로, 정사 삼국지에도 반동탁 연합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연의의 명단과는 좀 차이가 있다. 또 전군이 연합해서 싸운 것도 아니고 정작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 건 손견, 조조 등 몇몇 제후뿐이다.
2 목록
※ 참고로 이 명단은 도착순이다... 는 주장이 있으나 가정본/모종강본 삼국지연의 원문에는 해당 언급이 없으며 국내 번역본의 자체적인 추가 설정으로 보인다. 당장 "도착순으로 작성된 거라면 조조의 순위는 왜 마지막이란 말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가정본에서는 제후들에게 립서비스 격의 거창한 수식어를 추가했으나, 모종강본에서는 엑스트라들에게 이런 타이틀을 추가하는게 의미없다고 생각했는지, 과감하게 삭제하였다. ■는 연의 외에 정사 삼국지, 후한서 등 실제 역사를 기록한 문헌에서 참전이 확인된 제후다.
- 1군 : 남양 태수, 후장군 원술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交遊豪俊,結納英雄, 영웅호걸들과 사귄다.
- 2군 : 기주목 한복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貫通諸子,博覽九經. 제자백가의 경서와 9경을 통달.
- 3군 : 예주 자사 공주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闊論高談,知今博古. 담론의 수준이 높고 옛날과 지금의 일들에 밝다.
- 4군 : 연주 자사 유대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孝悌仁慈,屈己待士.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애가 깊고 인자하며, 자신을 낮추어 선비를 대접한다.
- 5군 : 하내 태수 왕광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仗義疏財,揮金似土. 의리를 중시하고 재물을 경시하여 돈 쓰기를 아끼지 않는다.
- 6군 : 진류 태수 장막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賑窮救急,誌大心高. 가난하고 급한 사람들을 도우며 포부가 크다.
- 7군 : 동군 태수 교모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恩惠及人,聰敏有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총명하며 학식이 있다.
- 8군 : 산양 태수 원유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忠直元亮,秀氣文華. 충직하고 문장에 재주가 있다.
- 9군 : 제북상 포신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有謀多智,善武能文. 지혜와 꾀가 많고 문무에 능하다.
- 10군 : 북해상 공융 ■[1]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聖人宗派,好客禮賢. 성인의 후손으로 손님 대접이 융숭하고 어진 사람들에게 예우를 갖춘다.
- 11군 : 광릉 태수 장초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武藝超群,威儀出眾. 무예가 뛰어나고 위엄이 출중하다.
- 12군 : 서주 자사 도겸 ■[2]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仁人君子,德厚溫良. 인덕을 갖춘 군자로 성품이 온화하고 착하다.
- 13군 : 서량 태수 마등[3]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名鎮羌胡,聲聞夷夏. 이름이 강족에게 알려져 있으며 명성은 중원과 변방에 퍼졌다.
- 14군 : 북평 태수 공손찬[4]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聲如巨鐘,豐姿英偉. 목소리는 큰 종처럼 울리며 모습은 영준하고 장대하다.
- 15군 : 상당 태수 장양[5]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隨機應變,臨事勇為. 임기응변에 능하고 매사에 과단성 있다.
- 16군 : 오정후 장사 태수 손견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英雄冠世,剛勇絕倫. 영웅됨이 으뜸이요, 강직하고 용맹함이 절륜하다.
- 17군 : 발해 태수 원소 ■[6]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四世三公,門多故吏. 4대 째 삼공을 지낸 가문으로, 옛 부하들이 많다.
- 18군 : 전군교위 조조 ■ - 가정본에서 추가된 수식어는 없다(...). 사실 가정본이나 모종강본 모두 조조가 격문을 보내 다른 제후들을 끌어모은거라, "제 18군은 조조" 라는식의 언급이 없이 17군 제후인 원소까지만 언급되기 때문이다.
모종강이 수식어들을 삭제한 이유가 이해된다
3 거병
동탁이 마침내 태후와 홍농왕(소제)을 살해하였다. 태조가 진류에 이르자, 가산을 처분해 의병을 모아, 장차 동탁을 주살하려 했다. 겨울 12월, 비로서 기오(己吾)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주 :『세어』에 이르길「진류의 효렴(孝廉)인 위자(衛玆)가 가산을 태조에게 대어 주어 병사를 일으키게 하니, 그 무리가 5천 명이었다.」고 한다.) 이 해가 중평(中平) 6년(189)이다.(삼국지 무제기)
영제 말년, 유비는 일찍이 경사(京師-수도)에 있다가 그 뒤 조공(曹公-조조)과 함께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다. 때마침 영제가 붕어하자 천하에 대란이 일었는데, 유비 또한 군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하는데 종군했다.(삼국지 선주전 영웅기 주석)
동탁이 평소에 천하가 모두 환관이 충신과 어진이를 주살한 것을 미워한다고 듣고서 그것을 반영하여서 비록 무도하지만 스스로 본성을 참고 진심을 억누르고 뭇 선비를 발탁하였다. 그리하여 이부상서에 한양의 주비(周珌), 시중에 여남의 오경(伍瓊), 상서에 정(鄭)의 공업(公業), 장사의 하우(何顒) 등을 제수하였다. 처사 순상(荀爽)을 사공으로 삼았다. 당고의 화에 연루된 진기(陳紀), 한융(韓融)의 무리도 모두 공경의 반열에 올렸다. 숨은 선비도 많이 뽑았다. 상서 한복(韓馥)을 기주 자사로 삼고, 시중 유대(劉岱)를 연주 자사, 진류의 공해(孔骸)를 예주 자사, 영천의 장자(張咨)를 남양 태수로 삼았다. 동탁이 친애해서 벼슬을 높일 때 예외는 장교뿐이었다. 초평 원년(190)에 한복 등이 관청에 와서 원소의 무리 10여 인과 각기 의병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키로 동맹하고 오경, 주비 등은 안에서 주동하기로 하였다.(후한서 동탁열전)
원소가 탈출하고 나서는 마침내 기주(冀州)로 도망갔다. 시중(侍中) 주비(周毖), 성문교위(城門校尉) 오경(伍瓊), 의랑(議郞) 하옹(何顒)은 모두 다 명사로서 동탁이 그들을 신뢰했는데, 은밀히 원소를 위하여 이에 동탁에게 말하길 "무릇 폐립(廢立)은 대사로써 보통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원소는 대체(大體)에 통달하지 못하고 두려워했기에 도망간 것이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그를 급하게 잡아들이면 형세상 필히 변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원씨는 은혜를 4대 동안 베풀어, 그 가문과 인연있는 관리들이 천하에 많으니, 만약 호걸들을 거두어 무리들을 모으며, 영웅들이 이로 인하여 봉기하여, 산동(山東) 지역은 공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그를 사면하여 한개 군의 태수로 배수하면, 원소는 죄에서 벗어나게 된 것에 기뻐할 것이니, 반드시 우환거리가 없을 것입니다"라 했다. 동탁이 이 말을 그럴 듯 하게 여겨, 이에 원소를 발해태수로 배수하고, 항향후(邟鄕侯)에 봉했다.[8](삼국지 원소전)
동군태수 교모가 수도의 삼공이 주군(州郡)에다 서신을 보내왔다고 거짓으로 꾸민 뒤, 동탁의 죄상을 상세히 설명하며 이르기를,「핍박을 받아 스스로 구원할 길이 없으니,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환란을 풀어 주기를 희망하노라」고 했다.(삼국지 무제기)
동탁이 황제를 교체하고서 인심을 잡기 위해 명사들에게 관직을 뿌리자 오경, 주비는 반동탁파 인사를 관동의 지방관으로 임명했다. 그들 중 하나인 교모가 서신을 돌려 지방관들을 모아 동탁을 치게 되었다.
4 교전
처음, 동탁의 사위 중랑장(中郞將) 우보(牛輔)가 병사를 맡아 따로 섬(陝)현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교위(校尉) 이각, 곽사, 장제(張濟)를 보내 진류와 영천의 여러 현을 공략하게 했다.(삼국지 동탁전)
동탁이 중랑장(中郞將) 우보(牛輔)에게 섬(陝)현에 주둔하게 했는데 가후는 우보의 군대에 있었다.(삼국지 가후전)
이때 장사 태수 손견이 예주의 여러 군현의 병사를 이끌고 동탁을 토벌하려 했다. 동탁이 그 전에 장수 서영(徐榮)과 이몽(李蒙)을 네 번 출전시켜 노략질을 했다. 서영이 손견을 양에서 조우하여서 전투를 벌여서 손견을 격파하고 영천 태수 이민(李旻)을 사로잡아서 팽형에 처해 삶아죽였다. 동탁은 의병을 포로로 잡으면 모두 천으로 돌돌 말아서 땅에 엎어놓고서 뜨거운 기름을 부어서 죽였다. 이때 하내 태수 왕광(王匡)이 하양진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곧 동탁을 치려 했다. 동탁이 거짓 병사(疑兵, 적의 눈을 속이는 군사)를 보내어서 싸움을 걸고서 몰래 정예 병력을 소평진으로부터 하양진 북쪽에 보내어서 격파하니 왕광의 군사가 거의 다 죽었다. 다음해 손견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서 양현의 양인에 진격했다. 동탁이 장수 호진(胡軫)과 여포를 보내어 공격했으나 호진과 여포가 서로 불화하니 군중이 자절로 뒤숭숭해져서 사졸이 흩어지고 어지러워졌다. 손견이 추격하니 호진과 여포가 패주하였다. 동탁이 장수 이각을 보내어서 손견에게 화평을 구했으나 손견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대곡으로 진군하니 낙양에서 90리 거리였다. 동탁이 몸소 출전하여 손견과 제릉묘한에서 싸웠으나 동탁이 패주하고 민지에 다시 주둔한 뒤에 섬(陝) 지방에서 병사를 모았다. 손견이 낙양 선양성문에 진격하여서 다시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가 또 격파되어 패주하였다. 손견이 곧 종묘를 깨끗이 하고서 여러 능묘를 정비한 뒤에 군사를 나누어서 함곡관을 나와서 신안, 민지간까지 가서 이(涞) 강을 경계로 동탁과 맞섰다. 동탁이 장사 유애(劉艾)에게 말하였다. "관동의 여러 장수가 여러 번 패하니 무능한 것입니다. 오로지 손견만이 좁아터지고 고집불통이니 여러 장군은 마땅히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곧 동중랑장 동월(董越)을 민지에 주둔시키고, 중랑장 단외(段煨)는 화음에, 중랑장 우보는 안읍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중랑장과 교위를 여러 고을에 배치하여서 산동을 방어시켰다.(후한서 동탁열전)
손견이 양동(梁东)으로 옮겨 주둔하였다가, 동탁군에게 크게 공격을 받으니, 손견과 수십 기만이 포위를 뚫고 탈출했다. 손견은 항상 붉은 두건(幘)을 쓰고 있었는데, 이에 두건을 벗어 친한 주위 장수 조무(祖茂)에게 이를 쓰게 하였다. 동탁의 기병들이 다투어 조무를 추격하니, 그래서 손견은 샛길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조무는 (상황이) 곤박(困迫)해지자, 말에서 내려 두건을 무덤 사이에 씌어 놓고 기둥에 불을 놓아, 풀 속에 엎드렸다. 동탁의 기병들이 이것을 바라보고는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가까이 가서야 이것이 기둥임을 알고 이내 물러갔다. 손견이 다시 병사들을 수습해, 양인(阳人)성에서 전투를 벌여 동탁군을 크게 격파하고, 도독(都督)인 화웅(華雄) 등을 효수(梟首)했다. 이때, 혹자가 원술에게 손견을 이간질하니, 원술이 의심을 품고 군량을 운반해 주지 않았다. 양인성에서는 노양까지는 1백여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손견이 밤에 말을 달려 원술을 만나 땅에 그림을 그려가며 계획을 설명한 뒤 "출군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위로는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고 아래로는 장군 가문의 사사로운 원한을 위로하고자 함입니다. 손견과 동탁은 골육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장군이 참소하는 말을 받아들여 도리어 서로 미워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라 했다. 원술이 조심스러워 하며, 곧 군량을 조달해 보내주었다.[9] 손견이 둔영으로 돌아왔다. 동탁은 손견의 용맹하고 굳센 것을 꺼려하여, 이에 장군 이각(李傕) 등을 보내 가서 화친을 구하게 하면서 지금 손견의 자제들 중 자사나 군수로 임명할 만한 자를 나열해 상소하며, 그 표를 허락하고 등용하겠다고 했다. 손견이 말하길 "동탁은 하늘을 거슬러 무도하여, 왕실을 쓸어 뒤집어 엎었으니, 지금 너의 삼족을 주살하여 사해에 내걸어 보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눈을 감지 못하는데, 어찌 장차 같이 화친하겠는가?"라 했다. 다시 대곡(大谷)으로 진군하니, 낙읍(雒邑)과 90리 거리에서 대치했다. 동탁이 바로 도읍을 옮겨 서쪽으로 관중으로 들어가면서, 낙읍을 불태웠다. 손견이 앞장서 입성하여 낙읍에 이르러서, 여러 능묘를 수리하고, 동탁이 파헤쳐 놓은 요새를 바로해 두었다.[10](삼국지 손견전)
2월, 동탁은 병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천자를 옮겨 장안에 도읍하였다. 동탁이 낙양에 주둔하면서 마침내 궁실에 불을 질렀다. 이 때에 원소는 하내에 주둔하였는데, 장막, 유대, 교모, 원유는 산조(酸棗)에 주둔하였고, 원술은 남양에, 공주는 영천에, 한복은 업(鄴)에 있었다. 동탁의 병사가 강대하니 원소 등이 패배하여 감히 먼저 진군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말하길 "의병을 일으켜 폭란을 주살하려고 대군이 이미 모였는데, 제군들은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동탁이 산동(山東)의 병사들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왕실의 중엄함에 의지하여 이주(二周=낙양과 장안)의 험고함에 의지해 동쪽으로 향해 천하에 임하려 합니다. 비록 그가 무도함으로 행한다 해도 족히 우환이 될 것입니다. 지금 궁실을 불태우고, 천자를 협박해 옮겨서 해내가 진동하여 돌아갈 곳을 모르는데,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하는 때입니다. 한번 싸우면 천하가 안정될 것이니, 이를 놓쳐서는 안됩니다"라 했다.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장차 성고(成皐)를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장막이 위자를 보내 병사를 나누어 태조를 뒤쫓게 하였다. 형양(滎陽)의 변수(汴水)에 도착하여, 마침 동탁의 장수 서영(徐榮)을 만나 싸웠으나 불리하여, 병사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태조가 유시(流矢)에 맞고, 타던 말은 창에 찔렸다. 사촌동생 조홍(曹洪)이 태조에 말을 주어 밤에 달아날 수 있었다. 서영은 태조가 거느리는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힘을 다해 하루 동안 싸웠으나, 산조는 쉽게 공략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또한 병사를 거느리고 물러났다.(삼국지 무제기)
처음 동탁은 장사태수 손견, 하남태수 왕광을 격파하고 영천태수 이민을 붙잡으며 기세를 울렸다. 순욱전에 동탁이 이각(李傕) 등을 보내니 관동(關東)으로 나가 가는 곳마다 노략질하고 영천·진류(陳留)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고향사람들 중 머물러 있던 자들은 많이 살해되고 노략질 당했다.라는 기술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음해(190년) 손견이 공격해 호진과 여포의 군대를 격파하고 도독 화웅을 죽였다. 원술은 이 전과를 보고 군량을 끊었다가 손견의 설득으로 군량을 댔다. 동탁은 이에 이각을 보내 화평을 청하나 무시하고 낙양에서 90리 거리까지 진군했다. 2월, 동탁은 황제를 장안으로 옮기고 몸소 출진하나 크게 패해 낙양에서 도망친다.
조조는 이에 장막의 군대와 함께 추격하나 서영에게 크게 패했다. 여기서 조홍이 조조에게 말을 양보하는 일이 생긴다.[11]
5 해체
유대와 교모가 서로 미워하여, 유대가 교모를 죽이니, 왕굉(王肱)에게 동군태수직을 맡도록 하였다. 원소는 한복과 유주(幽州)목 유우(劉虞)를 세워 황제로 삼고자 모의하였으나, 태조가 거절하였다.(삼국지 무제기)
후에 한복의 군대가 안평(安平)에서 공손찬(公孫瓚)에게 패배하였다. 공손찬이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기주로 들어가 동탁토벌을 명분으로 삼아, 안에서 한복을 습격하고자 하니 한복이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품었다.(삼국지 원소전)
2년(191) 봄, 원소와 한복이 마침내 유우를 옹립해 황제로 세웠으나, 유우가 끝내 감당하지 않았다. 여름 4월, 동탁이 장안으로 환도했다. 가을 7월, 원소가 한복을 위협하여 기주를 취했다.(삼국지 무제기)
유우의 아들 유화가 장안에서 있었는데, 황제는 유화를 탈출시켜 유우가 군대를 이끌고 자신을 맞이하게 하려 하였다. 유화가 원술의 영지를 지날 때, 원술은 당시에 유우를 견제하고 있었다. 유화를 잡아서 유우에게 보내지 않았는데, 유화가 원술과 함께 서쪽으로 간다는 것을 승낙하고, 유우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유우는 유화의 편지를 받고, 수천명의 기병을 파견했다. 공손찬은 원술이 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파견을 하지 않았으며, 유우를 말렸으나, 유우는 군사를 일으켰다.
공손찬은 이 점을 원술이 듣고 원망할까 두려워서 그의 사촌동생 공손월에게 수천명의 기병을 주어 원술과 손을 잡게 하고, 유화를 잡아 병권을 뺏도록 했다. 이로부터 유우와 공손찬은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원술은 손견을 보내 양성에 주둔시켜 동탁에 대항토록 했는데, 원소는 주앙을 보내어서 공격하였다. 원술은 공손월과 손견을 보내어 싸웠는데, 패배하고, 공손월이 죽었다. 공손찬은 격노하여 말했다. "내 동생이 죽었으니, 이 재난은 원소로부터 시작되었다." 군대를 내보내 반하에 주둔시켜 원소에게 복수할 준비를 했다.(삼국지 공손찬전)
『오록(吳錄)』에 이르길「이때 관동(關東)의 주군에서 서로 겸병(兼竝)하여 스스로 강대해지는데 힘썼다. 원소가 회계(會稽)군의 주우(周喁)를 보내 예주(豫州)자사로 삼고는 내습(來襲)하여 그 주를 취하였다. 손견이 비분강개하여 탄식하길 "같이 의병을 일으켜 장차 사직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적들이 거의 격파되려 하는데 각자 이같이 하니, 내가 마땅히 누구와 함께 힘을 합쳐야 하겠는가!"라 했다. 말을 하자 눈물이 흘러 내렸다. 『회계전록(會稽典錄)』에 이르길「처음 조공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사람을 시켜 주우에게 요청하니, 주우가 곧 병사들을 거둬어 합쳐서 2천명을 얻어, 조공을 따라 정벌에 나서니, (그를) 군사(軍師)로 삼았다. 후에 손견과 함께 예주를 다투었는데, 여러번 전투에게 실리를 잃었다. 둘째 형인 구강(九江)태수 주앙(周昻)이 원술에게 공격당하자, 주우가 가서 도왔다. 군대가 패배하자 향리로 돌아왔으나, 허공(許貢)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삼국지 손견전)
이미 원소와 틈이 벌여졌는데, 또한 유표와도 평화롭지 못하니 북으로 공손찬과 연계하였다. 한편 원소는 공손찬과 불화(不和)하여 남으로 유표와 연결하였다. 그 형제가 다른 상대와 손을 잡고,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곳과 교류하는 게 이와 같았다. 군대를 이끌고 진류(陳留)로 들어갔다. 태조과 원소가 같이 공격하여 원술을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원술이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구강(九江)으로 달아나, 양주(揚州)자사 진온(陳溫)을 죽이고 그 주를 다스렸다.(삼국지 원술전)
4년(193) 봄, 견성(鄄城)에 주둔하였다. 형주목 유표(劉表)가 원술의 군량보급로를 끊으니, 원술이 군대를 이끌고 진류로 들어가 봉구(封丘)에 주둔하였으며, 흑산의 나머지 적들과 어부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이 장수 유상(劉詳)을 시켜 광정(匡亭)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태조가 광정을 공격하자, 원술이 그를 구원하니, 더불어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원술이 퇴각하여 봉구를 보전하니, 마침내 이를 포위하였고, 합쳐지기도 전에 원술은 양읍(襄邑)으로 패주하니, 추격하여 태수(太壽)에 도착하여 도랑의 물을 터뜨려 성을 수공(水攻)하였다. 영릉(寧陵)으로 패주하니, 또 추격하여 구강(九江)으로 패주시켰다.(삼국지 무제기)
황제가 장안으로 이동하고 동탁의 군대가 여전히 강하자, 기약 없는 싸움에 지친 동맹은 무너진다. 원소는 아예 동탁에 의해 옹립된 헌제 대신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하나 유우의 반대로 실패한다. 그러는 중에도 유대가 교모를 죽이고, 공손찬은 한복과 싸워 이긴다. 한복이 불안에 떨자 원소는 한복이 자신에게 기주를 양도하게 시킨다.
사실 189년 12월~190년 2월까지만 동탁과 싸웠고 그 이후부터는 동탁과 싸운 기록이 영 없다. 서로 싸운 기록만 남아있지.
이렇게 동맹 내부의 사정은 복잡하게 꼬여서, 원소-유우-조조-유표와 원술-공손찬-도겸-손견이 서로 대립한다. 원술은 유우의 아들을 잡고, 공손찬은 공손월을 보내어 원술과 연합한다. 원소는 주우를 예주자사로 삼고 주앙을 보내 손견의 보급로인 양성을 친다. 손견과 공손월은 패해 공손월이 죽고, 공손찬은 크게 노해 대군을 이끌고 기주로 내려온다.
동맹은 자연히 해체되고 군웅이 할거하게 되며 이후 계교 전투, 서주 대학살 등이 이어져 난세가 찾아온다.
6 기타 창작물
6.1 게임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군웅할거, 영웅집결과 함께 매우 인기가 높은 시나리오다. 초반부터 연합 형성으로 안정적으로 내정을 정비할 수 있고 대부분의 군웅들이 등장하여 맛깔나는 진행을 할 수 있기 때문. 일반적으로 동탁군과 직접적으로 맞서는 조조 세력이나, 혼자서 각각 성도, 장사에서 인재 모으기 좋은 유언과 손견, 막강한 전력을 초반부터 가지는 원소나 동탁이 플레이어에게 인기가 좋은 세력이다. 유비는 연합이 끝나자마자 원소가 공격해오기 때문에 플레이하기 상당히 꺼려진다. 유비로 플레이할 경우 인접 제후, 특히 원소와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인재를 모으고 세력을 불려나가는 것이 좋다. 원소군을 멸망시키면 일단 고비는 넘긴 것.
실제로 구현된 것은 시리즈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 삼국지 5에서는 18로 제후에 해당하는 전 군주가 12개월 짜리 동맹을 체결한다. 그런데 동탁령과 직접 맞닿은 군주가 원술과 마등 말고는 없는 관계로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 별도의 이벤트 전투는 없다.
- 삼국지 6에서는 18로 제후에 해당하는 전 군주가 동맹이 체결된다. 삼국지 6에서는 동맹은 파기되기 전까지 계속 유효하기 때문에 침략 걱정 없이 안심하고 세력을 키울 수 있다. 별도의 이벤트 전투는 없다.
- 삼국지 8에서는 이벤트로 반동탁연합이 발생한다. 이 시리즈에서 최초로 특정세력 타도[12]를 위한 연합을 형성하는 커맨드가 생겼다.
- 삼국지 10에서는 역사 이벤트로 잠깐 보여줄 뿐이다. 낙양이 폐허가 된 이후에는 각 군주가 갈 길을 가며, 플레이에 영향을 미치는건 없다.
- 삼국지 13에서도 반동탁연합 자체는 동영상과 이벤트로만 발생하며 전투는 없으나, 특기할 점으로 유저의 세력이 확장주의적으로 세를 넓히며 강성해지면 반ㅇㅇ연합(반유비연합, 반손책연합 등)이 발생해서 몇몇의 약소 군주들이 연합하고 즉시 공격해온다! 연합에 참가한 세력들과는 외교도 바로 막혀버려서 정전협정을 걸 수도 없고, 심지어 유저보다 약한 세력들뿐 아니라 오히려 유저보다 강한 군주까지 연합에 참가하기도 하는데 이러면 진짜 답이 없어진다. 배후에서 위협이 생기지 않도록 확장 방향을 잘 선택하고, 동맹 중인 세력은 연합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남은 동맹 기간을 계속 고려해야 한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매 시리즈에 호로관 전투로 등장한다. (몇몇 시리즈에서는 사수관 전투와 함께 등장한다.) 특히 적으로 나오는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여포가 넘사벽으로 강력하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호로관 메뚜기.
진삼국무쌍7에서는 유비군과 조조군의 초반 스테이지로 나오며 정작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손견군은 이 전투가 짤렸다. 이 게임의 극악무도한 대사밀림 현상의 극치를 보여준다. 초반에 열어야 할 문이 많은데 손견이 군량 없다고 징징댄다고 적장을 격파해도 문이 제때 안열려 죽치고 기다려야 하고 사수관을 너머 화살비 지역을 돌파해 장료와 싸울 무렵에 쓸데없이 왕방이 아군 진영으로 돌입해 원술과 교전한다. 뭐 딱히 의미있는 이벤트도 아니고 왕방이 원술에게 바로 쳐발리는데 둘이 대사를 날린다고 시간을 잡아먹어 도대체 왜 넣었는지 모를 이벤트이다. 더구나 가후를 처치하면 고순이 뜬금없이 아군이 당하는걸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지키라는 투석기는 안지키고 뛰어내려 공격해와 플레이어에게 할일을 두 번 하게 만들고 장제를 격파할 즈음에는 유비와 조조가 또 담화를 나눈다고 문이 안열린다. 그야말로 진삼국무쌍7의 총체적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스테이지라 볼 수 있다. 여기 나오는 호로관 메뚜기는 시리즈 사상 최약체로 이 시리즈에서 처음 선보인 스톰러시와 배리어블 카운터를 적절히 활용하면 게임 처음 시작할때부터 아무 캐릭으로도 다 잡을 수 있다. 워낙 덩치가 큰데다 병졸들도 안데리고 오는 만큼 보기 좋은 표적으로 삼고 후려패주면 그만... 오히려 아군들이 여포에게 떼로 달려들어 다굴을 놔서 공격을 자꾸 방해하는것만 거슬릴 뿐이다. 무기가 속성을 잘 받는다면 궁극의 여포까지 단번에 제압당할 정도로 예전의 위용을 대폭 상실했다.
6.2 드라마/만화
드라마 삼국에서는 3화부터 조조 주도 및 원소를 맹주로 해서 등장한다. 대체로 연의와 비슷하나 드라마 창작인 부분도 있다.
연의에선 그나마 하급 관직이라도 있던 유관장 3형제는 여기선 공손찬 휘하도 아니고, 관직하나 없는 그야말로 평민(몰락한 귀족)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동탁을 무찌르고 한실을 되살린다는 큰 뜻을 품고 3명 단신으로 초대도 없이 18로 제후군에 들어가려고 한다. 문지기는 사실상 평민인 유비를 무시했고, 무시당한 것에 빡친 장비가 문지기를 패는데, 유비도 빡쳤는지 굳이 말리진 않는다(…). 다행히 그때 조조가 들어오면서 1화에 왕윤의 생신잔치 때 자신이 문전박대 당한 게 생각났는지 유비 일행이 들어올 수 있게 해준다.
원술이 손견에게 군량 안보낸 건 정사의 내용이고 화웅이 맹장으로 묘사되고 관우에게 목이 잘린건 연의의 내용, 실제로는 화웅은 호진의 일개 부장급 인물일 뿐이고 손견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차이가 있다. 아무튼 관우가 화웅의 목을 따고 돌아와 사기를 높이자, 원소는 19번째 부대를 증편하고 지휘관을 유비로 임명한다. 하지만 원술이 약속했던 군량을 주지 않고 버틴데다 유비의 명령으로 군량을 요청하러 갔던 병사가 맞고 돌아와 빡친 상황에,[13] 손견이 물자 부족으로 패했으나 제후들의 사기를 고려해 오히려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자 지들은무슨 소풍 온줄 아나 어이가 없어 연합에서 나오려 한다. 하지만 그때 여포가 쳐들어왔을 땐 3형제가 나가 교전해 여포를 패퇴시키고 연합 탈퇴는 잠시 미룬다. 자세한 건 여포, 유비 항목 참조바람.
그런데 황당하게도 호뢰관 싸움에서 여포를 상대로 버티기 작전을 하고 있을때 서로 Cabin Fever를 일으켜 보급 등 쌓인 문제로 멱살잡고 싸워서 조조가 포기하고 회의장을 떠날 정도로 막장인 팀웍을 보여준다. 게다가 맹주로서 별다는 일은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원소는 그렇다 치더라도 시기심 때문에 군량도 제대로 안대주는데다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치만하는 원술 등의 막장 행위들이 종종 보인지라 이 연합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이 대놓고 보인다. 원술은 손견이나 유비 뿐 아니라 다른 제후들에게도 보급을 제대로 안해주거나 아예 무관심 하게 방치하는모양. 보급을 요청하기 위해 내달려온 황개가 '우리는 보급이 부족해 내 칼도 다 못쓰게 된 판인데, 여기에서 신나게 연회벌이고 술판 벌이나?'라며 빡쳐하자 원소는 달래느라 진땀을 뺀다. 원술은 원소에게 대놓고 '손견이 공을 세우면 입지가 커져서 겁나 복잡해지는데 그 꼴 보고 싶은거요?'라며 손견을 견제하기 위해 군량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견제한다고 했을 정도. 물론 직후 손견이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원소가 원술 에게 '고맙네 이 멍청아 선봉장군이 결국 패했버렸고 나까지 바보가 됐는데 이제 어쩔거냐?'라고 까였지만.
폐허가 된 낙양성 도착 후 조조는 원소에게 공격하자고 간언하다 거절당하자 혼자서 기병4천 이끌고 손견 진영 으로 가서 손견한테 기병3천명 을 빌려 동탁을 치러 갔다가 대판 깨는데[14], 조조가 혼자 돌아올 때 원소,원술 등은 술판을 벌여놓고 놀고 있었다.(…) 한편 이름만 19번 부대 지휘관이지 물자도 병력도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다 제후들한테 설움까지 당한 유관장 3형제는 한실의 황제들의 초상화들이 있는 곳에 가서 선조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경의를 표하는데, 그때 마침 여포한테 패주하고 돌아온 조조는 원소, 어디있냐고 유비한테 묻자 손견의 승전 축하를 위해 술판벌인다고[15] 예길 듣고 빡친 조조는 이들과 같이 원소한테 쳐들어간 다음, 무책임 과 비겁한 짓거리만 골라서 하는 원소,원술 형제 및 다른 제후들을 대 놓고 신나게 깐다. 유비도 원소와 원술을 까고 조조와 함께 나가고, 손견도 병력을 끌고 강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가 전국옥새 예기가 나오면서 원소, 원술이 병사들을 동원해 뺏으려고 하지만 역으로 먼저 매복시킨 수하들로 받아 치고, 원소를 압박해서 요양을 빌미로 동맹에서 나가게 된다.
그 후 조조와 유관장 3형제, 그리고 옥새를 얻은 손견은 제 각자 갈길을 가는 데, 가기 직전 조조는 유비와 손견에게 "18로 제후들 중에 진정한 영웅은 당신 둘뿐"식의 말을 한다. 서로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조조에게 유비는 한 왕실을 위해 일하면 벗, 한 왕실을 저버리면 적으로 만날거라고 복선을 깐다. 유비가 떠난 이후 조조는 손견에게 전국옥새에 대해 떠봤으나 옥새에 대해 손견에게 진시황의 예를 들었던 손권을 소개하면서 손책은 장남인데 쩌리가 되버렸다. 애초에 이 드라마에서 손책은 손권에 묻히는 느낌이 강하다. 두루뭉술하게 예기를 바꾼 뒤 길을 떠난다.
여담으로 이때가 조조, 유비, 손가(손견, 손책, 손권)-훗날 중국을 세등분 할 주역들이 가장 사이가 좋았던 때였다. 조조는 유비 삼형제를 자신의 수하로 받아들이고 싶어 공을 들였었고 손견과 손가에 대해서도 존경스러우면서도 걱정된다고 평했다. 유비도 조조와 견해가 다르긴 했지만 그와 뜻이 통했으며 손견과는 접점은 적었지만 그래도 영웅으로 평했고, 손견도 두 사람을 다른 제후들보다 나은 인물로 보는듯 했다. 이후에는 서로 견제를 하다가, 아예 전쟁을 벌이게 된다.
삼국전투기의 시작이 18로 제후의 결성이다.- ↑ 직접 참전한 것은 아니나 반동탁의 포지션을 천명한 주준을 맹주로 받들며 지원했다.
- ↑ 공융과 마찬가지로 주준을 맹주로 받들며 지원했다.
- ↑ 실제 마등은 동탁에게 반란죄를 사면받고 동탁군에 합류하려고 했으나 도착 전에 동탁이 암살되어서 무산되었다.
- ↑ 원소가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 하자 즉각 이를 반대하고 공격했다.
- ↑ 처음엔 원소에게 협력했지만 얼마안가 배반했다.
- ↑ 연의에서는 원소의 우유부단함을 부각시키면서 맨 마지막에 참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조가 보낸 황제의 (가짜) 밀조를 보고 "조조 따위가 그런 걸 받는 게 이상하지 않나?"라고 의심을 하다가 신하들의 간언을 못 이겨 출전했다는 것... 도 가정본/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는 없는 내용이다. 역시 국내 번역본의 설정으로 의심되는 부분.
- ↑ 영웅기에 조조와 함께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의에서는 공손찬 휘하 객장으로 참가하지만 위에 써있듯 실제로 공손찬은 연합에 참가하지 않았다.
- ↑ (연의 한정?) 후일담. 이후 원소가 18로 제후의 총사령관이 되었다는 전갈이 왔을 때 주비와 오경은 뭣모르고 "지금은 군사를 지켜서 백성을 편안하게 할 때입니다."라고 했는데 동탁이 "너네들 말 들어서 원소가 저렇게 개기잖아!"라며 성을 내서 목이 날아갔다.
- ↑ 김홍신 평역판 삼국지에서는 이 부분에서 원술이 데꿀멍 수준으로 사과하다가 "이 놈이 그러자고 했소."라며 손견을 깠던 심복을 불러내서 단칼에 죽였다. 이에 손견은 '저런 놈한테 성을 더 내봤자 무엇하리'라고 생각하며 물러갔다.
- ↑ 이때 한 왕조 대대로 전해 내려온 '하늘의 명을 받아 영원토록 번성하리'라고 쓰인 옥새를 손에 넣었다.
- ↑ 김홍신 평역판 삼국지에서는 이 장면에서 조조의 위급함을 많이 강조했다. 여기서 조홍은 (이후에 조앙이 그랬던 것처럼) "천하를 위하여 이 홍은 없어도 되지만, 형님은 아니 됩니다."라며 자신의 말에 조조를 태웠다. 물론 조앙과 달리 조홍은 살아남았다.
형제애가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 - ↑ 악명높은 군주의 세력 또는 강대한 세력이 주 타깃이 된다.
- ↑ 게다가 병사의 말로는 원술에게 약손한 군량 받으러 갖는데 군량이 낙양성에서 있으니 거기에서 가져가라고 말하고 따지다가 원술의 부하놈한테 인신공격까지 당했는데, 삼형제의 전직을 두고 돗자리 장수, 개돼지 잡는 백정이라고 깐다.
그 와중에 화웅 목을 따 자기 어필을 화끈하게 했던 관우만 전직인 서당 훈장을 두고 안까였다. - ↑ 참고로 조조는 손견한테 기병을 빌리떄 기병 만명 이라고 예기했다. 동탁을 추격할 때 조인이 기병4천도 안 되는데 왜 만명이라고 손견한테 예기 했냐고.? 묻자 조조는 그렇게 예기 하지않았다면 손견이 기마병을 빌렸주었겠나라고 대답했다.
- ↑ 사실은 원소 원술이 손견이 얻은 전국옥새을 뻇을려고 손견의 승전을 축한다는 구실로 축하연을 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