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llah Begawan Sultan Sir Muda Haji Omar Ali Saifuddien Saadul Khairi Waddien ibni Sultan Muhammad Jamalul Alam II, 1914.9.23 ~ 1986.9.7
브루나이의 제28대 술탄으로 현직 하사날 볼키아의 아버지이다. 브루나이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브루나이인에게는 그야말로 아버지인 사람이다.
1 생애
1914년 9월 23일(헤지라력 1332년 11월 3일) 반다르브루나이(Bandar Brunei; 현 반다르스리브가완)의 전군주리(Kampong[1] Sultan Lama)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술탄 무함마드 자말룰 알람 2세와 왕비 라자 이스터리 파티마의 자녀 10명 중 둘째이며 아들만 봐도 차남이다. 형인 아흐마드 타주딘은 훗날 술탄이 된다.
1932년 자신의 조국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말라야로 건너갔으며 페락 주의 쿠알라캉사르 소재 쿠알라캉사르 말레이대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졸업 후 브루나이로 돌아가 쿠알라블라잇의 산림청에서 사관후보생으로 일했다. 이 때부터 자신의 리더십을 서서히 확보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일하면서 현지 주민들과 소통하기 시작했고 주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1938년 그는 쿠알라블라잇에 계속 남았지만, 직위를 법률부로 이전했으며, 그곳에서 영국 관리로부터 민형사소송법에 대해 배웠다. 후에는 영국계 기업 하에서 사업을 하다가, 일제가 쳐들어온 뒤에는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해방 후 브루나이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후에 종교법원장이 되었다.
2 술탄
1950년 6월 4일 술탄을 지내던 형 타주딘이 급서하자,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던 사이푸딘은 이틀 후 왕위를 승계했다. 물론 정식으로 취임한 것은 아니고, 일종의 유훈통치를 한 것이었으며 1951년 5월 31일 정식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사이푸딘 시대를 열었다. 동년 영국 왕실로부터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을 받았고 얼마 후 메카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1953년부터 헌법을 작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완성했다. 주민들의 독립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1959년, 브루나이는 영국으로부터 사실상 자치권을 얻었으며, 이를 통해 술탄이 브루나이에서 다시금 깽판치치 않는 전제 하에 실권을 쥘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본인이 직접 작성한 헌법이 본격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이는 소위 "1959년 헌법"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처음에는 당연히 여러 한계점에 부딪혔는데, 왕실에서 상정한 법안은 여전히 영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었다. 그러니깐 한마디로 말하지면 걍 그림의 떡. 헌법이 명실공히 존재하는데도 실제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주민들의 불만이 계속되었고, 1960년대에 접어들어 독립열기는 하늘 가까이, 더 가까이 치솟게 되었다.
안 그래도 똑같이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이웃나라인 사라왁과 북보르네오(현 사바)에서도 똑같이 독립운동이 지속되었고, 이미 같은 영국령인 말라야는 한참 전인 1957년에 이미 독립한 뒤였다. 이 때문인지 영국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주민들의 요구는 지속되었다. 바로 2년 뒤 싱가포르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총리였던 리콴유의 입장에서 그 조그만 허허벌판 섬나라를 운영하는 건 한마디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에 리콴유는 국가발전도 도모하고 리더십을 충분히 갖추기까지 말라야와의 합방을 시도하는데...
말라야는 북한보다 조금 더 큰 영토를 갖고 있으니 뭐 문제야 없었다지만, 천연자원 따위는 없었으며 주변에는 태국,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같은 말라야보다 더 크고 힘 센 강대국들에 큰 위협을 느꼈다.[2] 특히 방대한 영토를 갖고 있던 인도네시아는 툭하면 "말라야를 쳐부수자" 따위의 선전적 구호를 외치며 말라야 침공을 수시로 노리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말라야가 홀로 서는 것은 불가능했고, 아예 대만처럼 되는 것조차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한 말라야는 주변의 영국령 국가들을 편입해서 힘 좀 보태보려고 했었는데, 이러한 합방에 적극적이었던 나라는 다름아닌 싱가포르였다. 헌데 리콴유가 사라왁과 북보르네오에도 합방을 제안하고, 브루나이에게도 합방을 제안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사라왁과 북보르네오는 크고 아름다운 면적을 자랑했으며, 그 중에서도 사라왁은 북한과 맞먹는 면적을 갖고 있었고, 북보르네오는 남한의 약 80% 정도였다. 문제는 이 둘은 함경도 뺨치는 가파른 산지를 자랑했지만, 대신에 천연가스를 비롯한 자원이 풍부했으니 발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이 두 나라의 스케일은 그저 서울시만한 조그만 허허벌판 정글섬인 싱가포르와는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브루나이는 비록 조그만 땅덩어리에도 중동 못지않게 석유가 어마어마했으니, 발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던 것. 그런데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 3국이 갑자기 말라야로의 합방 소리를 듣자, 상황은 어수선해진다.
사라왁과 북보르네오는 당초 가입을 할 생각을 크게 갖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뭐 가입한다고 마냥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었거니와, 둘을 합칠 경우 말라야보다 훨씬 넓기 때문에, 괜히 말라야에 부담만 줄 것이 뻔했던 처지였다. 하지만 브루나이의 사이푸딘은 이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적극적으로 합방에 나선다. 사이푸딘의 입장에서도 걔네 밑으로 들어가면 본인들이 산유국이라는 점을 이용해 말라야 중앙정부 측에서 특별히 밀어줘서, 한마디로 자신들을 '말라야의 홍콩'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땅덩어리도 작은거 이왕에 좀 큰 애한테 맡겨서 숨통 좀 트이려고 했던 것도 있었다. 결국 브루나이마저 적극적으로 나서자, 사라왁과 북보르네오는 끝내 주민투표를 부쳤고, 여기서 대다수가 찬성하자 둘은 싱가포르와 함께 말라야로 편입이 결정되었으며, 1963년 9월 16일[3] 신설 '말레이시아'를 결성했다.
하지만 정작 브루나이는 가입하지 않았는데...
2.1 왜 가입하지 않았을까?
사실 조국을 포기하고 타국에 합방하는 건 매우 위험하거니와, 매우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한다. 굳이 머리를 동동 굴릴 필요 없이, 한국에서 툭하면 자주 거론되는 떡밥인 한미합방의 경우도, 정 한국이 미국으로 편입되고자 한다면 한국 정부가 그만큼 신중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유야 여러가지라나, 그 중 1순위를 고르자면,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사라왁, 북보르네오는 이런 점을 마냥 인식하지 못했으며, 본인들의 진짜 이유도 사실은 '잠깐 몸 좀 맡기자'는 취지였지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려는 게 아니었다. 또한 말라야 역시 영국의 핍박을 받아왔던 흑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잠깐 몸 좀 맡기더라도 나중에 나가겠다면 쉽게 허락할 줄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이 점은 브루나이도 그랬고, 사이푸딘 스스로도 그런 생각은 했었다. 문제는 내부 사정이...
A. M. 아자하리. 말은 '브루나이의 총리(Perdana Menteri Brunei)'라고 하지만, 실제로 총리는 아니었다.
사이푸딘에게는 가장 큰 정적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브루나이 인민당(PRB)의 서기장 A. M. 아자하리였다. 아자하리는 사이푸딘에게 있어 당장 뽑아버리고만 싶은 눈엣가시였는데, 안그래도 냉전시대라 흉흉하던 상황에서 뜬금없이 공산주의를 들고나왔으니, 철저한 이슬람과 반공을 고수한 사이푸딘의 입장에서는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산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자하리는 그것도 왕정에 있어 1급 불온사상인 공화주의를 제창했기 때문에, 마음같아서는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사이푸딘이 말라야와의 병합을 추진하자 아자하리는 공개적인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대신에 사라왁과 북보르네오와 합쳐 일명 '북보르네오 연방'을 꿈꾸었다. 아자하리는 사이푸딘의 취지가 조국을 팔아먹으려는 매국적 행위로 인식했으며, 보르네오 3국이 자주적인 독립을 쟁취하며 외세의 간섭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도 사실상 절대군주제였던 브루나이에서, 엄연히 술탄으로서 나라의 수장인 사이푸딘은 아자하리가 그저 지랄한다고만 생각했고 귀를 아예 닫아버렸다.
브루나이의 독립문제를 인식하고 있던 영국은 1962년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4]의 총선거를 치른다. 사이푸딘 입장에서는 혹시나 이 총선으로 인해 자신의 권위가 약해질 것을 우려했으나, 그래도 영국이 지시했으니 일단은 받아들이기로 했던 거다. 근데 이 때 PRB가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이다. 아자하리가 이끄는 그 당 말이다. 한마디로 사이푸딘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아자하리는 곧바로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그러자 사이푸딘은 난을 철저하게 진압했고, 아자하리는 결국 내란죄로 사형에 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였다. 다행이도(?) 사형은 면했지만, 사이푸딘은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바로 총선 결과를 무효화했다. 첫 민주국회는 바로 해산되었으며, PRB는 바로 위헌정당 크리를 먹었고 아자하리는 끝내 인도네시아로 망명한다. 그리고 이 때 계엄이 선포된 이후로 브루나이는 지금까지 계엄을 쭉 풀지 않고 있으며, 그 악명높은 대만의 38년 계엄을 뺨치는 세계 최장기 계엄을 기록하고 있다. 민주선거? 지금은 그런 거 없다.
여하튼 사이푸딘의 이러한 빠른 대처로 사태는 진정되었으니 바로 말라야로 합병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사이푸딘은 갑자기 합방을 포기하고 대신에 자주독립을 결정했다. 자신의 정적이 외쳤던 자주독립 말이다.
도대체 왜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꿨을까?
이 글을 잘 읽어보면 대강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일단 첫 번째가 바로 '석유'였는데, 중동 못지않게 풍부한 석유를 갖고있던 브루나이는 혹시나 말라야와 합방하면 중앙정부에서 자신들의 특징을 이해하고 자신들을 홍콩처럼 특별대우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영 아니었는데, 11개 주를 가진 말라야와 합방할 경우 오히려 석유의 대부분이 말라야로 흘러갈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브루나이에는 조금밖에 안 남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총선 결과'가 되겠는데, 이미 언급했다시피 아자하리를 축으로 한 PRB는 왕실에 도전하려고 했던 제1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주민들이 직접 참여한 총선에서 저 PRB가 이겼다는 말은 무엇일까? 바로 주민들이 아자하리를 지지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 말은 즉슨, 주민들은 말라야와의 합방이 아닌, 자주적인 독립을 원했던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하지만 언급하지 않은 마지막 이유가 있는데, 바로 '자신의 권력 야욕(...)' 때문이었다. 각 주의 술탄들이 돌아가면서 맡는 말라야의 군주제 때문에, 가상의 브루나이 주의 술탄인 사이푸딘도 언젠가는 말라야의 군주(임기 5년)가 되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본인은 이러한 점을 크게 노렸다. 그러나 브루나이의 특성상 결국 브루나이가 꼴지가 될 것은 뻔할 뻔자였고, 돌아가는 순서를 보면 브루나이가 오는 시기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1957년 독립과 함께 즉위한 초대 군주 투앙쿠 압둘 라만[5]은 느그리슴빌란 주의 술탄이었고, 그의 아들이자 후임인 투앙쿠 자파르가 집권하여 느그리슴빌란 술탄이 다시 군주직을 맡은 때는 1994년이다. 바로 그 전임이 아즐란 샤로 페락 주의 술탄이었다. 그런데 이 기준으로 보면, 사이푸딘은 1994년에 가야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중간중간 궐위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궐위가 없었다고 가정하는 하에는 2002년에 가야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14년생이니, 2002년이면 무려 88세(...). 평균수명까지 감안하자면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당장 브루나이는 술탄이 실권을 쥐는 절대군주제이지만, 말라야는 왕이란 이름만 왕이고 총리가 실권을 쥐는 입헌군주제라, 설상 집권하더라도 아무런 힘이 없는 군주가 됨은 뻔한 일.[6]
결국 사이푸딘은 가입 철회를 결정했는데, 이로 인해 독립이 다소 늦춰진 건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최근까지만 해도 브루나이가 세계에서 가장 늦게 독립한 나라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이푸딘의 결정은 매우 올바른 것이었다. 괜히 말라야로 가입하자고 난리피던 싱가포르는 결국 인종문제로 2년만에 쫓겨났고, 사라왁과 북보르네오는 계속 남았으나 결국 말라야가 주민들을 굶겨죽이고 독립분자들을 한마디로 죽탕쳐버려서, 사실상 소생불능의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괜히 쿠칭(사라왁의 수도)과 코타키나발루(북보르네오의 수도)가 쿠알라룸푸르(말라야의 수도)보다 훨씬 가난한게 아니다. 한마디로 들어가는 건 마음대로라도 나가는 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반면교사인 셈. 이 점에서 보면 사이푸딘은 매우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3 말년
말년의 모습. 참고로 옆에 서 있는 멋진 남자는 후임자이자 아들인 하사날 볼키아이다.
하지만 대신에 영국이 보다 큰 자치를 주기로 했고, 1960년대 중반이 되자 브루나이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부문에서 전면 자치권을 얻게 되었다. 술탄으로 지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던 탓에, 본인도 더 이상의 집권은 포기하기로 결심했고, 1967년 10월 4일 아들인 하사날 볼키아에게 전면 왕위를 이양했다. 이후 하사날은 1968년 8월 1일 공식 취임식을 가졌고 왕위는 성공적으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이런데서 그냥 쉽게 물러날 사이푸딘이 아니라서, 그러고도 본인은 하사날을 실컷 조종하며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979년 브루나이는 영국이 쥐고 있던 외교·국방권마저 되찾았고, 이어 1984년 1월 1일새해 첫날이네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사이푸딘은 신설된 브루나이의 국방장관으로 취임했다.정작 잠깐동안은 국방장관이 술탄 위였다 카더라 동년 7월 26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수장 야세르 아라파트를 초대했다.
4 죽음
사이푸딘의 묘. 브루나이 돈지랄의 스케일답게 묘소도 화려하다.[7]옆에 서 있는 사람은 신경쓰지 말자
1986년 9월 7일, 온 인민이 보는 앞에 향년 71세[8]로 사망하였다. 말 많고 많았던(?) 독립영웅이자 한 나라의 별이 지는 순간이었다. 사후 금수산태양궁전 격인 라파우에 안치되었다.[9]
후임자인 하사날을 비롯한 해외 각계의 대대적인 추모가 이어졌다. 다음은 각계의 추모 및 평가이다.
As a son of a dear father, I still feel the feelings of sadness and grief, and will always be felt, which is not limited to a period of time. Because his death is a great loss for me and my family. Moreover he is not only a father who always pour a friendly affection to his children, he always gave me advice up to the end of his life.사랑하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지금도 너무너무 슬프며, 앞으로도 슬플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지금만의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대의 죽음으로 저희는 매우 큰 것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단순히 저희를 친근히 대해주셨던 아버지가 아니요, 그대는 죽음의 시기까지 저를 조언해주신 조언자입니다. - 하사날 볼키아, 1986년 10월 20일 연설 中
I know the Paduka Seri (Sir Omar) since 1959. My late father was so close to him. I also highly respect him because to me he was a brilliant man.제가 1959년부터 그 분(사이푸딘)을 알고 있었어요. 제 선친이 그 분과 아는 사이셨기 때문이지요. 저는 언제나 현명한 그 분을 존경한답니다. - 아흐마드 샤(파항 주 술탄), 1984년 4월 25일 우투산 말레이시아와의 인터뷰 中
I highly respect Al-Marhum because of his heartfelt character which becomes a memories which will not easily forgotten. I consider him as my own father... (omitted)전 고인을 매우 존경한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진심어린 분이셨고 지금도 쭉 잊혀지지 않아요. 마치 제 아버지와도 같아요. (이하 생략) - 이스칸다르 샤(조호르 주 술탄이자 9대 말레이시아 군주)
아니 그걸 아는 양반이 왜 사람을 죽여?[10]
The Late Highness had a vision, for sightedness and wise leadership coupled with his outstanding services to his people.故 전하께서는 밝은 미래관과 현명한 지도력으로 인민들에게 훌륭한 봉사정신을 발휘하셨습니다. - 후사인 무함마드 에르샤드(방글라데시 대통령), 그를 향한 찬사 中
The Late Sultan Haji Omar Ali Saifuddien III is a honourable special friend to Britain. His death were deeply felt by the United Kingdom.故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술탄께서는 우리 영국의 영예롭고 특별한 벗입니다. 그대의 죽음은 곧 우리 영국의 슬픔이지요. - 엘리자베스 2세(영국 여왕)
The Late Highness had a unique position in the history of Brunei and in the hearts of all who knew him in Britain.
1986년 10월 17일 사망 40주일에 맞이하여, 하사날의 동의 하에 그를 추모하기 위한 특별 수라 야신(꾸란의 36번째 장)이 발매되었다.
5 가족 관계
1941년 다양 시티 아민과 결혼했으나 1979년 사별하였고, 동년 하자 살하와 재혼했으며 1986년 그의 사망과 함께 미망인이 되었다.
슬하 4남 6녀를 두었으며, 장남 당연히 후계자답게 하사날, 차남 모하메드, 3남 수프리이거 말고, 4남 제프리, 장녀 마스나맛있나?, 차녀 노르아인, 3녀 우미, 4녀 라키아, 5녀 나시바이거 말고, 6녀 제프리아를 두었다.
한때 브루나이와 함께했던 북보르네오(오늘날 사바)에 먼 친척을 두었는데, 크닝아우 출신으로 북보르네오 최초의 현지인 지도자인 페힌 오랑 카야카야 코로 빈 산툴란이 있다. 그 친척의 아들로는 말레이시아령 사바의 前 국무위원인 스테픈 코로, 5대 총독인 토마스 코로가 있다. 카야카야는 브루나이의 제25대 술탄 하심 잘릴룰 알람 아카마딘의 후손이며 원주민인 무룻인 출신이었다.
6 평가
브루나이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만큼 두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쉽게 생각하면 대한민국의 이승만 같은 사람이다.
6.1 긍정적 평가
브루나이인들에게 있어, 사이푸딘은 한마디로 국민적 영웅이자 브루나이의 국부이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는데, 생전 브루나이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말라야로의 합방을 권유하는 주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까지 거부하고 조국의 자주적 독립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석유를 통해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고, 그 돈으로 인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온 몸을 다했다.정은아 보고 있니? 인민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고 복지에 큰 신경을 썼으며, 오늘날 브루나이가 세계적인 부국이 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뿐만 아니라 적들의 반란에도 어김없이 즉각 대처하는 등 그의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또한 "현대 브루나이의 건축가"로도 평가받는데, 허허벌판에 수상가옥이 전부였던 반다르스리브가완을 나름 화려한 도시로 재개발하였으며 오늘날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아시아 최대의 모스크인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모스크를 개축하였으며, 세계적으로도 호평을 받는다.
독실한 말레이인 무슬림으로서, 이슬람 신앙을 빼놓지 않았으며 말레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민들에게 언제나 강조하곤 했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널리 알리고자 한, 민족의 아버지였다.
6.2 부정적 평가
하지만 이러한 국부에게도 비판은 존재하는데, 일단 이승만과 비교했다는 점은 그가 한편으로는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1962년 아자하리의 난을 진압한 이후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즉각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그 후에도 줄곧 반대파와 반국가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2년마다 계엄을 연장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무려 54년 계엄을 기록했고, 이는 매우 악명높은 대만의 38년 계엄보다도 훨씬 더 긴 길이이다.
또한 인민들에게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대신 표현의 자유를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만에하나 정부에 반대하기라도 하면 그 사람은 즉각 코렁탕 원샷이었다. 1962년 단 한번의 총선 이후 지금까지 그 어떠한 선거도 치러지지 않고 있으며, 사후인 2004년 술탄의 권위가 더 강화되며 브루나이가 절대왕정임을 다시금 보여주었다. 아자하리 사태 이후 브루나이에서 정당활동은 금지되었으며, 1980년대부터 몇몇 야당들이 창당되었으나 실상은 국제적 비난을 다소 돌리기 위한 어용정당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당들은 정치활동을 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술탄에게 절대적인 충성만을 하는 모종의 단체일 뿐이다.
그리고 석유를 통한 막대한 부의 뒤에는 그가 쌓은 치적들이 문제였는데, 인민들을 먹여살리는 대신 스스로를 신격화했다. 그를 향한 인민들의 충성과 찬양은 사실상 인민의 의무였으며, 이 때문에 윗동네 못지않은 살벌한 분위기를 깔아놓았다. 또한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모스크를 크게 짓는 선이 아니라 내부를 아주 순금으로 치장하는 등 유례없는 돈지랄을 강행했으면서도, 두바이처럼 현대화를 위한 개발에는 관심조차 없어서, 이에 대한 비판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말레이이슬람왕정(Melayu Islam Beraja; MIB)체제를 굳이면서 말레이·이슬람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댓가로 옆동네처럼 인종차별 정책을 강행했는데, 이는 악명높은 옆동네의 부미푸트라 정책보다 한술 더 떠서 종종 문제가 된다. 말레이·이슬람사상을 보존하는 전제로 중국인과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을 대대적으로 가했으며, 현재 이들은 국적조차 받을 수 없으며 차이나타운도 금지되어 있다. 기독교와 같은 적성종교에 대한 탄압도 큰 논란거리인데, 크리스마스를 금지시키고 툭하면 교회를 폐쇄시키는 정책은 각계의 큰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종교법인 샤리아가 도를 넘어서 문제인데, 저게 신앙심을 지키고 범죄척결에나 사용되면 모를까, 개개인의 사생활까지 탄압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다.[11]
7 유산
- 그의 고향이자 브루나이의 수도인 반다르브루나이가 반다르스리브가완으로 개명되었다. '브가완'은 그의 호칭으로 뜻은 '지도자', '영도자'이고, '스리'는 '존경하다'를 뜻하는 국빈인사들을 위한 말레이 호칭이다. 즉, 새 이름이 갖는 뜻은 '위대한
령영도자의 도시(...)'이다. - 반다르스리브가완의 국립 모스크인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모스크
- 반다르스리브가완의 하지 무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경 동(潼)
-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대학교
- 스리브가완 종교대학교
- 브루나이 다루살람 대학교의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이슬람학과
- 파두카 스리브가완 과학대학교
- 카티마하르 리(里)의 파두카 스리브가완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모스크
- 브루나이 달러 1, 5, 10, 20, 50센 동전, 500달러 지폐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으며, 25달러 지폐에는 자신의 아들에게 후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8 각주
- ↑ 고어 표기, 현대 표준으로는 kampung이 맞으나, 고유 명사의 경우 만약에 고어 표기로 되어 있으면 무조건 그 표기로 적어야 한다.
- ↑ 지금 필리핀과 미얀마는 완전 똥망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특히 필리핀은 일본을 추월하는 세계적인 선진국이었다. 오죽하면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한마디로 개무시했던 걸 보면... 물론 다 옛말이지만 말이다.
- ↑ 원래는 말라야의 독립기념일인 8월 31일에 맞춰 1963년 8월 31일을 예정하였으나, 이런저런 일로 보름이나 늦게 미뤄졌다.
- ↑ 그런데 이 선거가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였다. 그 뒤에 왜 선거가 없냐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지폐를 보면 나오는 그 사람 맞다.
- ↑ 게다가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가 집권하던 1994년 헌법 개정으로 군주의 권한이 더 축소되었으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지?
- ↑ 원칙적으로 이슬람의 장례식은 매우 간소하다. 화장은 엄금이고, 대게는 돌무덤이 전부이다. 하지만 나름 국부이다보니 저렇게 무덤을 만들어도 뭐라 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지 소원대로 아예 미라가 되어 박물관에 안치된 뽀그리우스보다는 몇 배 낫다.
- ↑ 생일을 겨우 며칠 앞두고 사망했으므로 72세가 아니라 71세가 맞다. 다만 이 정도 쯤은 걍 72세로 부르곤 한다.
- ↑ 이 곳에는 전직 술탄들도 안치되어 있다.
- ↑ 절대 농담이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이스칸다르 샤 문서 참조.
- ↑ 예를 들어 밤에 남녀가 한 테이블에 앉아 저녁하는 것도 사실상 금기사항일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