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돈

위서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하후돈하후연조인조홍조휴조진하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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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侯惇
(? ~ 220)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하후영의 후손, 조만전과 세어에 따르면 조조의 사촌. 는 원양(元讓). 패국 초현 사람.

연의에선 맹장으로 각색되었지만 정사에선 눈에 띄는 군사적인 업적이 거의 없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14세에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배웠는데 어떤 이가 그의 스승을 모욕하자 그를 죽였고 이로 인해 그의 강직한 기풍이 알려지게 되었다.[1]

조조가 처음 거병한 이래 하후돈은 늘 비장(裨將)으로 정벌을 수행했다.

2.2 반동탁 연합군

조조가 분무장군의 직을 행할 때, 하후돈을 사마로 삼아 백마에 따로 주둔시켰고, 절충교위로 승진시켜 동군태수를 겸하게 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하후돈 등과 함께 양주로 가서 모병하니 양주자사 진온, 단양태수 주흔이 군사 4천 여 명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예주 패국 용항현에 당도하자 사졸들이 다수 모반했다.

한호전에 따르면 하후돈이 한호의 명성을 듣고 청하여 서로 만났는데 그를 높게 평가하여 병력을 지휘해 정벌에 수행케 했다.

2.3 복양 전투

조조가 도겸을 공격할 때 하후돈을 남겨 복양을 수비하게 했다.

순욱전에 따르면 순욱장막이 반란을 일으켰음을 알고, 곧 병사를 이끌고 대비를 했으며, 동군태수 하후돈을 빨리 불러 들였지만, 연주의 여러 성이 모두 여포에게 호응했다. 이때 조조의 모든 군대는 도겸을 공격하고, 남겨서 수비하던 병사는 적었고, 감독하던 장수와 큰 관리들이 장막, 진궁과 많이 남몰래 서로 통하여 공모하였다. 하후돈이 도착하자, 그날 밤에 모반하였던 자 수십인을 주살하니, 군대가 이내 평정되었다.

예주자사 곽공이 군사 수만을 이끌고 성 아래에 이르르니, 혹자들은 곽공이 여포와 같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말하니, 군사들이 심히 두려워 했다. 곽공이 순욱을 보려 하니 순욱이 가려고 했다. 하후돈 등이 말했다.

그대는 한 주의 중요한 인물로, 가면 반드시 위험하게 될 것이니 가면 안됩니다.

순욱이 말했다.

곽공이 장막 등과 본래부터 결탁한 것은 아니며, 지금 빨리 온 것은 그 계책이 반드시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요.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그를 설득하면, 중립을 하게 할 수 있으니, 만약 먼저 의심한다면, 저들은 장차 노하여 계책을 완성할 것이오.

곽공이 순욱을 만나보내는데 두려운 뜻이 없고, 견성은 쉽게 공격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에,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가버렸다.

장막이 모반하여 여포를 맞이했는데 조조의 가솔들이 견성에 있어 하후돈이 적은 수의 군대로 견성으로 나아가다가 여포와 조우해 교전했다. 여포는 군을 물려 마침내 복양에 입성하여 하후돈 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탈취했다.

여포가 장수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는 하후돈을 사로잡아 보물을 요구하니 하후돈의 군중이 두려움에 떨었다. 이에 하후돈의 장수 한호가 군사들을 지휘해 병영의 문에 둔치고 군리(軍吏)와 제장들을 불러 모두 각자 담당하고 있는 부(部)를 단속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자 여러 군영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하후돈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그를 인질로 잡고 있는 자들을 질책하여 말했다.

너희들이 흉역하게도 감히 대장군을 사로잡아 겁박하고도 살기를 바라는 것인가! 내가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어찌 장군 한 명 때문에 너희들을 용서하리.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하후돈에게 말했다.

응당 국법이 이러하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리고 병사들을 재촉해 하후돈을 인질로 잡고 있는 자들을 공격하게 하자 두려움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희들은 다만 필요한 돈과 물품을 얻어 떠나려 했을 뿐입니다.

한호가 여러 차례 책망하며 모두 참수했다.

하후돈이 풀려나고 난 뒤 조조가 이를 듣고 한호에게 말했다.

경이 이처럼 한 건 가히 아주 오랜 세대의 법이오.

이에 영을 내려 지금 이후로 인질을 붙잡는 자가 있으면 모두 함께 공격하고 인질을 돌보지 말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인질을 붙잡고 협박하는 자가 없어지게 되었다.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오고 하후돈이 이를 수행하여 여포를 공격하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왼쪽 눈을 다쳤다.

위략에 따르면 이때 하후연과 하후돈이 둘 다 장군이었는데, 군중에서는 하후돈을 맹하후(盲夏侯)라 불렀다. 하후돈은 이를 싫어했는데 거울을 보면 화를 내며 번번이 땅바닥에 집어던지곤 했다.

그래도 부하들을 죽이거나 처벌했다는 기록은 없고 거울에만 화풀이하고 만걸 보면 역시 사람은 좋았다.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그 장애를 놀리는 별명을 붙인건데, 현대라도 충분히 고소감이고 그 시대라면 상관을 모욕한 죄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데 자기 혼자 화풀이하고 넘어갔다는건 대단히 너그러운 행동이다.

2.4 서주에서

여포전에 따르면 198년, 여포가 다시 모반하여 원술 편에 서고, 고순을 보내 패(沛)에서 유비를 공격해 격파했다. 조조는 하후돈을 보내 유비를 구원했으나 고순에게 패했다.

2.5 조조 휘하

다시 진류, 제음태수를 겸하고 건무장군의 직이 더해지고 고안향후에 봉해졌다.

위진전에 따르면 하후돈이 진류태수가 되었을 때, 위진을 계리(計吏)로 추천하고, 부인에게 연회에 출석하도록 명령했다. 위진이 말했다.

말세의 풍속이야. 바른 예절이 아니오.

하후돈은 매우 화가 나서 위진을 체포했지만, 오래지 않아 그를 사면시켜 주었다.

큰 가뭄이 들고 황충이 일자 하후돈은 태수(太壽)의 물을 끊어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손수 흙을 져 나르고 장병들을 이끌고 벼 심기에 힘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입었다. 전임하여 하남윤을 겸했다.

2.6 관도대전

조조가 하북을 평정할 때 대장군을 위하여 후방을 지키게 했다.

2.7 박망파 전투

이전전에 따르면 유표는 유비를 보내 북방을 침략하도록 하고 엽에 이르렀다. 조조는 이전을 보내 하후돈을 따라가서 유비와 대항하도록 했다. 유비는 하루아침에 군영을 불태우고 떠났으며, 하후돈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를 추격하려고 하는데 이전이 말했다.

적군이 이유도 없이 물러났으므로 틀림없이 매복하고 있을 것으로 의심됩니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좁고 초목이 우거져 있으므로 추격할 수 없습니다.

하후돈은 듣지 않고 우금과 함께 그를 추격하였고, 이전은 남아 군영을 지켰다. 하후돈 등은 과연 적군이 매복해 있는 가운데로 들어가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전이 구하러 가자, 유비는 구원병이 도착한 것을 보고 흩어져 물러났다.

2.8 하북 평정

업이 함락된 후 복파장군으로 승진시키는 한편 예전처럼 하남윤을 겸하게 하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여 법령에 구애 받지 않도록 했다.

두기전에 따르면 조조가 하북을 평정한 뒤, 고간이 병주를 이끌고 반역했다. 당시 하동태수 왕읍은 중앙에 불려와있었으므로, 하동의 위고, 범선은 겉으로는 왕읍의 귀환을 청원하였으나, 속으로는 고간과 모의를 함께하였다.

두기전에 따르면 조조는 하후돈을 파견하여 그들을 토벌케 하였으나, 그 군은 아직 도착치 않았다.

두기전에 따르면 위고 등과 고간, 장욱은 힘을 모아 두기를 공격하였으나 이를 격파하지 못했고, 이에 여러 현을 약탈하였으나 손에 넣은 것도 없었다. 이때, 대군(하후돈)이 도착하여 고간, 장욱은 패퇴, 위고 등은 주살되었다.

207년, 하후돈의 앞뒤 공을 기록해 봉읍을 1800호를 늘려 이전과 아울러 모두 2500호가 되었다.

전주전에 따르면 조조는 조정 신하들의 생각을 듣고 전주를 제후로 봉하려고 했다. 전주는 평소 하후돈과 친했으므로, 조조는 하후돈에게 말했다.

그대가 먼저 가서 우정으로 그를 설득하오. 이것은 모두 그대의 뜻이라고 말하고, 나의 뜻이라고 말하지는 마시오.

하후돈은 전주의 숙소로 가서 조조보다 먼저 권하는 것처럼 했다. 전주는 하후돈이 찾아온 뜻을 알고 그와 얘기하지 않았다. 하후돈은 떠날 때, 전주의 등을 치며 말했다.

전군(田君), 주군의 뜻이 이토록 간절하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는 없겠소?

전주는 대답했다.

장군은 나 전주의 사람됨을 잘 알면서 오히려 이렇게 재차 말하고 있소. 만일 반드시 부득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나는 당신 앞에서 머리를 잘려 죽기를 원하오.

전주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하후돈은 이런 사정을 모두 조조에게 보고했다. 조조는 전주의 뜻을 끝내 굽힐 수 없음을 알고 깊게 탄식하며 그를 의랑으로 임명했다.

2.9 장로 정벌

장로전 주석 위명신주에 따르면 양평산 위의 둔영들을 공격하는데 있어 제대로 이기지도 못하고 상처 입은 병사들이 많았다. 조조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군대를 데리고 후방을 막으면서 돌아가고자 하후돈과 허저를 보내 산 위의 병사들에게 소리쳐 돌아오도록 하였다. 전군이 다 돌아오지도 못했는데 밤중이라 길을 잃어 적의 군영으로 잘못 들어갔고 적들은 기습이 있는 줄 알고 모두 퇴산하였다.

시중 신비유엽 등이 군대의 후방에 있으면서 하후돈과 허저에게 말했다.

관병이 이미 적군의 둔영을 점거했고 적들은 퇴주했습니다.

그 둘은 믿지 않았다. 하후돈이 나아가 친히 이를 보고 마침내 돌아와 조조에게 아뢰니 병사를 진군시켜 평정했으므로 운이 좋게 이긴 것이다.

2.10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

사마랑전에 따르면 사마랑은 하후돈, 장패 등과 오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무제기에 따르면 3월, 왕(조조)이 군을 이끌고 돌아오며 하후돈, 조인, 장료 등을 남겨 거소에 주둔하게 했다.

216년, 손권을 정벌하는데 수행했다가 돌아올 때 하후돈을 26군의 도독으로 임명해 거소에 머물게 했다. 기악(伎樂)과 명창(名倡)을 하사하며 영을 내려 말했다.

위강은 융족과 화평한 공으로 금석(金石)으로 만든 악기를 받았는데 하물며 장군이랴!

2.11 번성 공방전

219년, 조조가 마피에 주둔했을 때 하후돈을 불러 항상 함께 수레를 타고 특히 친밀하고 중하게 대하여 침소에 출입케 하니 다른 여러 장수들 중 이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위서에 따르면 이때 여러 장수들이 모두 위의 관직을 받았는데 하후돈이 홀로 한의 관직을 받았다.[2] 이에 상소하여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니어 부당하다고 진술하자 조조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 가장 좋은 것은 스승 같은 신하요, 그 다음이 벗 같은 신하라 했소. 구차하게 위의 관직일 필요가 있겠소. 신하는 몸을 굽혀 주군을 섬기면 충분하오.

하후돈이 굳게 청하자 전장군에 임명했다.

무제기 주석 위씨춘추에 따르면 하후돈이 왕(조조)에게 말했다.

천하가 한조가 이미 끝나고 다른 대(代)가 바야흐로 일어서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30여 년간 군사들을 이끌어 그 공덕이 백성에 드리웠고 천하가 귀의했으니 하늘과 백성에 순응할 뿐 어찌 다시 의심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만약 천명이 내게 있다면 나는 주문왕이 될 것이다.

과거 주문왕주왕의 신하로 주왕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으나 그 아들 주무왕이 결국 주왕을 죽이고 천하를 통일한다. 조조가 주문왕이 되겠다는 것은 찬탈의 악역을 자신의 후계자에게 넘기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제기 주석 조만전과 세어에 따르면 환계가 왕(조조)에게 정위(황제)를 권하자, 하후돈은 의당 먼저 촉을 멸해야 하며 촉이 망하면 곧 오가 복종할 것이니 두 지역을 평정한 연후에 , 의 궤범(선양)을 따라야 한다고 하니, 왕이 이에 좇았다.

전장군에 임명되고 제군을 지휘하여 수춘으로 돌아갔는데, 소릉으로 옮겨 주둔했다.

2.12 죽음

하후돈은 군중에 있을 때도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 그 성정이 청렴, 검소하여 남은 재물이 있으면 즉시 나누어서 베풀고 부족하면 관청에서 도움을 받고 별도로 산업을 경영하여 치부하지 않았다.

무제기 주석 조만전과 세어에 따르면 왕(조조)이 죽자 하후돈은 예전에 했던 말을 상기하고 한스러워 하다 발병하여 죽었다.

조비가 왕위에 즉위하자 하후돈을 대장군에 임명했는데 그 몇 달 뒤에 죽었다.

문제기 주석 위서에 따르면 이때 조비는 흰 상복을 입고 업성의 동쪽 성문까지 행차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예법에 의하면 같은 성씨를 가진 경우에는 종묘의 문 밖에서 곡을 해야 하는데, 성문까지 나가서 곡을 한 것은 예법에 어긋난 것이다.

시호를 내려 충후(忠侯)라 했다. 아들인 하후충이 후사를 이었다.

2.13 사후

황제가 하후돈의 공을 기려 그 자손들을 모두 후에 봉하려고 하후돈의 식읍 천 호를 나눠 하후돈의 일곱 아들과 두 손자에게 하사하고 모두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하후돈의 동생 하후렴과 아들 하후무는 원래 이와 별도로 열후에 봉해졌었다.

명제기에 따르면 233년 여름 5월 12일, 조칙을 내려 지금은 고인이 된 대장군 하후돈, 대사마 조인, 거기장군 정욱을 조조의 종묘 정원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진양추에 따르면 266년, 고안향후 하후좌가 죽어 하후돈의 후사가 끊기자 조서를 내려 말했다.

하후돈은 위의 으뜸 공신으로 위로부터 선위를 받은 짐(사마염)이 어찌 공신을 잊겠는가! 마땅히 하후돈의 가까운 친척을 택해 책봉하도록 하라.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맹장으로 각색되어 조조군에서도 손꼽히는 용장의 이미지로 나타나서, 늘 조조가 싸울 때는 최선봉에 나선다.

초반엔 조조가 동탁에게 벗어날 때 서영을 베어 죽이며, 원술의 부장 교유를 찔러 죽인다.

서주에서 여포군의 맹장 고순과도 겨루다가 40합 만에 우세를 점했다가, 고순의 부장 조성이 기습적으로 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는데 이때 "이 눈은 아버지의 정(精)과 어머니의 피로 이루어진 것인데 어찌 함부로 다룰 수 있겠느냐."라는 말과 함께 화살 꽂힌 눈을 화살째 뽑아서 씹어 삼키고는 조성을 베어 죽인다. 눈에 화살을 맞으면 뇌까지 손상을 입고 높은 확률로 즉사, 또는 쇼크로 의식을 인데 화살을 뽑고 딸려나온 눈을 먹는다는 것은 허구이다.

전설의 아가리 파이터 예형이 조조의 부하들을 놀릴 때 하후돈을 완체 장군이라고 칭했다. 그 완체란 말 자체가 사지가 멀쩡하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라 오히려 애꾸인 하후돈을 놀리기 위해서 비꼰 것이다.

자신이 아끼던 진기가 관우에게 베이자 복수하러 관우를 공격하러 와서 천하의 관우와 대등하게 맞짱을 뜨는 모습도 보여준다. 결국 장료가 정리.

박망파 전투에서 하후돈은 이전의 충고를 듣지 않고 조운을 추격하다가 화계에 당한다. 병사들을 죽게한 책임을 지기위해 스스로를 포박하고 조조에게 죄를 청하나 조조는 그를 용서했다.

조조의 명으로 복황후를 죽이는데 앞장 서고 이후 조비의 부름을 받아 입궐하다가 하늘에 떠 있는 복황후의 유령을 보고 기절해 그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창작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냥 노환으로 죽었다.

4 평가

4.1 부정적 평가

인격이나 정치력은 나쁘지 않지만 군사적 능력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낙하산 똥별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하후돈은 동료들보다 떨어지는 군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야전에서 맹위를 떨친 쟁쟁한 장군들보다도 훨씬 고위층인 대장군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임에도 이에 대한 별다른 설명이 없다.

아예 능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장군 같은 거창한 지위를 얻기에는 군사적 능력이 심히 함량 미달인 인물인데 단지 조조와 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조의 군부 장악 정책의 일환으로 대장군 자리에 박아넣었다는 것이다.

4.2 긍정적 평가

당시 조조의 입장에서는 친족 우대는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아무래도 믿을 만한 친족들이 곳곳에서 활약해주면 조조를 중심으로 하는 군벌 세력은 조직력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세력 내에 조조의 막부와 헌제의 조정이 공존하면서도 서로를 견제하는 모순적인 정치 상황에서 조조가 권세를 유지하려면 신뢰할 수 있는 친인척 인사들이 군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어차피 조조 자신이 당대 최고의 군략가로서 중요한 원정에는 거의 항상 친정했고, 조씨 일족의 조인을 비롯해 일선에서 활약할 뛰어난 장군들도 많이 있었기에 하후돈의 군사적 능력 부족은 큰 결격 사항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친족을 통한 군부 장악 원칙은 아들 조비에게 이어져서 조비 즉위 이후 대사마 조인을 중심으로 하였고 조인 사후에는 조휴, 조진이 대사마와 대장군이 되어 군부 중추에 자리잡는다.[3] 즉, 조조가 원했던 대장군 감은 단순히 군사적으로만 능력있는 인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면서 아랫사람들을 적당히 아우를 수 있는 충성과 인망을 겸비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헌제에 충성하는 자들이 군부에 파고들거나 군부의 장성이 헌제에게 직접 포섭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후돈의 역할은 군정을 총괄하는 대장군으로써 부하들의 인망과 충성을 얻으면서 그 방향이 오직 조조에게만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지 않았나 생각되며 이렇게 보면 하후돈의 공은 조조의 패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기타

허창에서 하후돈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무덤 속의 그의 부장품이라고는 검 한자루 밖에 없었다. 그의 죽기 전 직책이 최고직인 대장군이었음을 고려하면 실로 청렴한 무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진수가 처음 정사 삼국지를 편찬할 때 조조의 친부 조숭의 출신을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조조가 하후돈과 같은 집안이라는 이야기도 없었다. 후세에 배송지가 하후돈이 조조의 사촌이라는 조만전과 세어의 기록을 주석으로 넣었다. 그런데 유명 인사 조조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진수가 조조의 출신을 몰랐는데 오나라 사람이 저자인 조만전과 후세 사람이 저자인 세어에서 조조의 출신을 어찌 알았는지 의심스럽고 출처조차 불분명하다. 청나라 시대의 학자 홍량길은 조씨와 하후씨가 서로 대대로 결혼한 것은 둘이 같은 일족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주장했으며, 유함흔 역시 조씨 일가가 조숭환관의 양자라는 사실도 숨기려 하지 않았는데 무엇하러 하후씨임을 숨겼겠느냐고 깠다. 게다가 현대에 이르러 유전자 감식을 통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조와 하후씨가 친척이라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화살에 맞아서 애꾸눈이 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의 시신경은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물컹한 안구를 화살이 못 뚫을 리 없으니 이 부분에 화살을 정면으로 맞으면 즉사다. 정말 화살에 맞아서 애꾸가 된 케이스라면 날아온 화살이 방패 등의 장애물에 맞고 튕겨져서 속도가 떨어진 화살에 맞았거나 힘이 없는 화살이라 눈 근처에 가볍게 상처를 입었는데 감염 등의 이유로 시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후돈이 연의에서 용장, 맹장으로 각색되는 것도 외눈 탓이 커보인다. 악의 화신인 조조의 오른팔로서 강하지만 결국 당하는 역할과 용장 역할을 맡기려는데, 독안룡이라는 별명처럼 중세 중국에서도 애꾸눈은 뭔가 쎈 악당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극의 재미를 위하여 하후돈에게 맹장의 이미지를 입힌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무장으로서 애꾸눈은 큰 약점이다. 원근감을 잃어버리는 데다가 무장은 말을 타고 다녀야 하는데 애꾸일 경우 눈을 잃은 쪽 방향으로 방향 전환이 심각하게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화살을 피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어진다. 때문에 정사에서 애꾸눈이 된 하후돈은 무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다. 장군이 꼭 전열의 선두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이 시대의 전쟁이라는 것이 장군에게 직접적으로 위해가 가해져서 장수가 창칼을 휘둘러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리스크 때문에 결국 조조군 전선의 후방 총책을 맡는 것으로 보직을 변경하게 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6 미디어 믹스

7 관련 항목

  1. 이건 현대 관점으로 보면 얄짤없이 살인자이지만, 옛날 중국에서는 이러한 협객 문화를 의롭게 여겼다.
  2. 한과 위는 형식상 황제국과 제후국 관계였기에 동급이라도 당연히 한의 관직이 더 높다.
  3. 조예는 사마의가 유능하다고 적극 푸쉬하고 그 일족까지 중용했는데 그 대가는 쿠데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