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이 미츠마사

역대 일본 총리
36대37대38·39대
아베 노부유키요나이 미츠마사고노에 후미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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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内 光政 1880.3.2~1948.4.20

일본 제국의 37대 수상이자 연합함대 사령장관, 그리고 일본 해군의 마지막 해군 대신을 지낸 해군 군인이다.

1880년 모리오카의 번사였던 요나이 히데마사의 장남으로, 이와테 현 모리오카 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선거에서 낙선하고 사업에 실패해 집안이 곤궁해져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로 고학하며 대학 진학 대신 해군병학교에 들어가 1901년 졸업했다. 이후 1903년 소위로 임관, 1905년 러일전쟁에 참가했다. 이후 1914년 해군대학을 졸업하여 러시아폴란드 주재무관으로 부임하였다. 1차대전 후에는 베를린의 주 독일 대사관의 무관으로 가 정보수집을 담당하고, 중국에서도 근무했다. 성격이 온화하고, 전투와 참모직을 오가며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

1930년, 중장이 되어 조선 진해요항부[1]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진해사령관 자리는 한직이었기 때문에 사직 5분 전, 유배형의 소리가 도는 자리였다. 요나이 제독 자신도 동기들에게 언제라도 사임할 각오가 되어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 시절에는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후 1932년 함대사령관이 되나 사세보의 사령관으로 있을 적, 토모즈루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조사관인 해군중장 모리타 칸이치 제독이 사세보에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을 때 좌천되거나 해임될 수도 있었으나 요나이는 이 사건은 해군의 근간에 관련되는 것이다. 나는 어찌되어도 좋으니 확실하게 살펴달라라 하였다. 이 말로 조사관이 오히려 크게 감격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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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함대 사령장관을 지내던 당시의 요나이 미츠마사 제독

1936년에는 2.26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요코스카 수비대의 사령관인 요나이 제독은 신바시의 찻집 겸 여관에 머무르다 소식을 듣고 전차로 요코스카로 돌아갔는데 그가 돌아간 후 반란군에 의해 전차 노선의 운행이 중단되어 위기를 겪을 뻔 했다. 수비대에 돌아온 요나이 제독은 곧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해군육전대 병력을 투입하였다. 이 공적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 겸 제1함대 사령관으로 승진한다. 1937년에는 하야시 센쥬로 내각에서 해군대신으로 임명되어 해군대장으로 진급, 이후 제1차 고노에 내각, 히라누마 내각에서도 해군대신을 지냈다. 1938년 11월 25일에는 격화되는 중일전쟁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과 함께 하이난다오 공략을 주장했는데, 장차 대미 대영 개전을 위한 포석이라 생각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해군 상층부에 의해 승인, 하이난다오를 점령하게 된다.

요나이 제독은 제1차 고노에 내각 당시 나치 독일이 중재하여 중국과의 협상을 한다는 것에 찬성하였으며, 히라누마 내각에서도 삼국동맹에 대해 반대하였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노우에 시게요시와 함께 해군 좌파 삼인방으로 일컬어졌다.

1940년 1월 16일, 해군에서 예비역으로 물러난 요나이 제독은 쇼와 천황에 의해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히틀러는 유럽에서 파죽 지세로 세력을 뻗어나가고 있었기에 일본군부에서는 삼국동맹을 체결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중에 쇼와 천황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런 분위기를 우려하여 해군 내 반 삼국동맹파였던 요나이 제독을 수상에 임명했다고 한다. 당시 요나이는 수상직을 맡아 조각하는 것을 거절했으나 쇼와 천황이 짐은 경에게 조각을 명한다라고 강하게 말하여 취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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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전사자의 유자녀들을 총리관저에 불러 위문하는 요나이 미츠마사 제독.[2]

온건파였던 요나이 제독을 해군 내 강경파 뿐 아니라 육군도 싫어했기에 취임 당일까지 내각을 타도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며 취임 반년 후에 육군은 삼국동맹 체결을 요구했으나 요나이 총리는 독일 때문에 일본을 불구덩이로 밀어넣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육군은 하타 슌로쿠(畑俊六)[3] 육군대신을 사직시켜서 후임수상으로 밀면서 요나이 내각을 압박했다. 당시에는 육군대신, 해군대신은 현역 무관만 맡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그렇기에 군부가 수상에 반기를 들어 육/해군 대신을 사임시키고 후임을 추천하지 않으면 내각은 무너졌다. 그렇기에 요나이 제독은 물러나게 되었다. 쇼와 천황은 "'요나이 내각은 이어질 줄 알았다. 저 내각이 없다면 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결국 1940년 9월 27일 삼국동맹이 체결되기에 이른다.

이후 정계에서 떠나 생활하다가 1943년 부겐빌 섬에서 친구였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전사하자 아사히 신문에 추도문을 기고하고 국장의 위원장이 되었다. 당시 야마모토 제독의 신사를 건건립하려던 움직임이 있었으나 야마모토 제독의 성격을 알았기에 이를 "'야마모토가 싫어한다.'"라는 말로 반대해 신사건립계획을 중지시켰다.

1944년 도조 내각이 쓰러지고 고이소 내각에서 다시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복귀, 해군대신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 가이텐의 제식화를 최종 결재했다. 이후 1945년 스즈키 내각에서도 해군대신을 유임하였다. 원래는 고이소 내각 퇴진 시 함께 물러날 생각이었으나 스즈키 간타로 총리의 부탁으로 유임했다. 도고 시게노리와 함께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고 일본이 항복하는 데 앞장섰다. 이 때의 일화 중 하나로, 1945년 8월 12일 종전 직전, 주전파인 해군군령부 차장 오니시 다키지로 제독이 종전반대의 입장을 천황에게 직접(!!) 상주하자 요나이 제독은 격노하여 크게 꾸짖었는데, 소리에 문 밖의 초롱이 흔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종전 후, 요나이 제독은 전범으로 지목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들어갈 것을 각오하고 있었으나, 미군은 그가 삼국동맹을 반대하였고, 기소된 전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이 요나이는 전범이 아니라 주장하여 도쿄 전범재판에 기소되지는 않았다. 다만 증인으로 출석해 전쟁 수행의 부당함과 천황의 책임이 없음을 변호했다.

이후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내각과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에서 해군대신을 계속 맡았으나 이미 종전 후 일본해군은 무장해제되어 하는 일이 없었고, 1945년 12월 1일 육군성과 해군성이 폐지, 제1/제2 복원성으로 개칭됨에 따라 물러나게 되었다. 즉, 마지막 일본 해군대신을 지내게 된 것이다.

전쟁 이후 만성 헤르페스와 고혈압, 뇌출혈로 쇠약해져 고생하다가 1948년 4월 20일 폐렴으로 죽게 된다. 이후 1960년 고향인 모리오카 하치만 신사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모리오카 하치만 신사 경내에 있는 요나이 제독의 동상
중일전쟁의 확대와 대미전 개전 등을 반대한 선견지명과 호감을 주는 성격 등으로 일본 내에서도, 전후 미국 등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며, 국내에서도 그가 딱히 조선에 대해 악랄한 수준의 뭔가를 하지 않은 탓인지 나쁜 평가는 없다. 일각에서는 그가 해군선옥론을 대중에개 퍼뜨린 장본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1. 일본해군에서는 군항의 등급을 진수부 - 경비부 - 요항부로 크게 나누었는데 이 중 요항부의 규모가 가장 작았다.
  2. 보통 육군 출신 정치인들이 퇴역 후에도 공직에 있으면서 육군 제복을 상시 입는데 비해, 해군은 근무 시간이나 행사 외엔 사복 정장을 착용하는 경향이 있어서, 요나이 제독 역시 사복 차림을 많이 했다. 사이토 마코토 제독이 조선총독 및 총리 시절 사복 정장 차림으로 근무한 것도 이런 경향 탓이다.
  3. 전쟁 말, 고이소 후임 총리대신을 결정할 때 도조 등의 육군파가 수상 후보로 추천한 그 사람이다. 육군 원수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 나중에 도조는 육군이 본토방위의 근간이라며 본토결전을 속행하기 위해 그를 추천했으나 정작 하타 원수는 본토결전에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