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軍善玉論(かいぐんぜんだまろん)
- 관련항목 :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일본의 전쟁범죄, 역사왜곡, 국방군선옥론
1 개요
해군선옥론의 다른 명칭은 '육군악옥론(陸軍悪玉論 (りくぐんあくだまろん) )'이라고도 하며, 또다른 명칭은 육군악옥, 해군선옥(陸軍惡玉 海軍善玉)이라 불린다. 여기서 선옥, 악옥은 각각 선역, 악역을 뜻하는 일본 고전문학 용어.
일본군 육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의 군국주의화, 중일전쟁의 확대, 국제정치에서 고립 및 미국에 대한 전쟁 유발과 패전, 일본군의 잔학행위와 국제법위반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 이와 관련하여 일본군 해군과 그 일파가 대미 개전에 대해서도 소극적이었다고하는 견해도 주장된다.
2 어째서 육군이 덤터기를 쓰는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직후부터 일본 육군은 2.26 사건을 일으켰고, 만주사변은 관동군의 폭주에 기인 한 것이며, 쇼와 시절 군부독재 정치는 육군군벌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전개되었다. 이 주장은 오랫동안 일본군을 연구하거나 거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리고 마지막 육군 대신 시모무라 사다무 장군은 1945년 11월 28일 일본 하원에서 군부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스스로 그러한 군국주의에 빠져 횡포를 일삼은 육군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물론 일본군답게 식민지에서 범한 악행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져 있고 전사자에 대하여만 거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 질문자였던 사이토 타카오는 해군대신이었던 요나이 미츠마사에게는 답변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당시 요나이는 묵묵히 시모무라 육군대신의 반성 담화를 듣고 있었다. 또한 극동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받은 해군 인물은 3명이고 , 육군 인물은 총 7명인데 해군은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고(그 중 한명은 집행 전에 옥사) 육군은 1명을 제외하고 도조 히데키 등 6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또한 삼대오물도 전부 육군 출신이다. 재판 결과에서도 보듯 해군으로서 전범으로 처형된 사례는 다이고 타다시게나 사콘조 나오마사[1]가 유명하지만 이들은 각각 네덜란드나 영국군의 즉결재판으로 사형에 처해진 특이한 사례다. 그래서 해군반성회에서는 전범재판 당시 해군측에서 대대적으로 육군에게 자신들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해군들은 사실상 불기소처분으로 방면되었다는 언급이 있을 정도다.
물론 공직추방령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더라도 195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핸디캡이 존재했지만 이런 핸디캡은 육군도 마찬가지였거니와, 해군 전범의 대다수는 처벌도 받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과거에서 자유로웠으므로 결과적으로 해상자위대에 일본군 해군 출신 인사가 대대적으로 유입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재판 결과만 놓고 일본 해군은 육군에 비해 사악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일본의 전쟁범죄 항목에 보면 일본 해군 소속 군함에서 일어난 범죄가 다수 나와 있다. 전범으로 기소된 예가 적은 이유는 책임자가 전쟁 중에 전사했기 때문이다. 군함이 침몰하면 갑판병부터 제독까지 한큐에 수장되니까 전사하지 않았다가 붙잡힌 해군 전범의 예로는 치치지마 식인 사건에서 식인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사형에 처해진 요시이 시즈오 대좌가 있다. 실제로도 적군과 민간인과 직접 접촉할 기회가 많은 육군에 비해 해상전과 항공전이 주가 된 해군은 육군에 비해 적과 민간인의 접촉은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전쟁범죄 증거 인멸 또한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실제로 마리아나 해전 시기의 일본 해군은 겉으로는 결사항전과 특공을 기조로 싸우고 있었지만 상층부에선 패전후의 책임 추구를 비껴나가기 위해 자신들의 전쟁 범죄 관련에 대한 증거 인멸과 입막음을 해왔다. 물론 육군도 바보는 아닌지라 똑같이 증거 인멸과 입막음을 했지만 그 규모와 시기는 육군보다 훨씬 방대하고 철저했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요시다 유타카의 저서 '현대역사학과 전쟁책임(現代歴史学と戦争責任)'에선 '(전쟁 범죄의)공식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공습중에 소실되었거나 육해군이 고의로 기록을 폐기했다는 것이 이유로 꼽힌다' 라고 서술했다. 그에 덧붙여 '증거는 있어도 재판소에 제출되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다'고도 서술했다. 게다가 2008년 4월에 일본 교도통신에선 일본 해군이 덴노의 사진이 포함된 중요문서의 소각을 명령했다는 정황이 당시 연합군의 일본의 암호문서를 해독한 문서에 의해 판명되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
또한 전범재판의 주요 증인으로 육군 소장 다나카 료키치(田中隆吉)가 지목된 것도 원인이었다. 다나카 료키치의 증언은 전쟁범죄의 사실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언으로 다수 채택되었는데, 당연하지만 다나카 료키치는 육군 장성인 만큼 육군의 내부 사정에는 밝았지만 해군의 내부 사정에는 비교적 어두웠으므로 해군의 전쟁범죄 폭로는 상대적으로 훨씬 덜 한 편이었다.
3 비판
전후, 육군악옥, 해군선옥론에 대하여는 1960년 때부터 학술적으로 검토 논의가 제기되어왔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 국제 정치 학회 태평양전쟁원인연구부가 간행한 '태평양 전쟁에의 길'에는 여러 곳에서 해군이 대미 개전에 소극적이었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방위청에 의한 발간전사로 편찬된 '전사총서'에서 개전경위의 설명이 육군과 해군 별도로 나뉘어있는 원인에 대해 구 해군 관계자가 육군악옥론, 해군선옥론 수정 논의를 저지하려고 한 게 아닌가 지적되었다.
4 민간에서의 평가
소위 육군악옥론이 항간에 떠도는 배경으로 당시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육군과 해군에 대한 인상의 차이를 지적하는 견해가 있다. 대전까지 일본군대라고하면 일반적으로 그것은 일본 육군을 지칭한다. 징병제가 기본이였던 당시의 일본에서는 남자는 만 18세가 되면 징병 검사를 받고 많은 거주지를 관할하는 지방 연대에 입대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병역 이행 방법이었다.[2] 징병 검사에서 징병되면 육군에 입대하는 것을 의미하고 지원제를 기본으로하는 해군의 경우는 병역의무의 이행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일반인과 육군의 거리는 해군에 비교하면 아주 가까웠고, 평시에는 휴가를 얻어 귀가하는 것이 비교적 쉽다는 측면이 있었다. 이는 육군의 군인은 일반인과 접할 기회가 해군 군인보다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해군의 경우 함대 근무가 기본이 되는 군대생활 때문에 사관, 병을 관리하는 진수부에서 관할하는 군항 소속 함정 등에 배속되기 때문에 진수부에 설치되어 있던 함대에 입단 때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병역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데다 훈련과 원양 항해 등으로 장기간 귀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체제로 군복무가 육군보다 어렵다는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해군 수병으로 채용된 경우는 일반 국민과의 접점은 육군 병사보다 훨씬 적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병역이행 방법의 차이에서 육군과 해군에 대한 것이 일본인이 서로 다른 감정을 갖게되었다.
국민의 인상의 차이를 지적하는 논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었다고한다.
- 일반인이 자주 보는 군인이라고 하면 압도적으로 육군이었고, 무서운 존재의 대명사였으며 특히 헌병이 전시에 종종 일반인을 대상으로 횡포를 부려서 인상도 나빴다. 이렇게 헌병을 혐오하는 정서는 중일전쟁 이후에 특히 심해졌으며, 일본 본국보다는 식민지에서 더욱 심해졌다. 이는 식민지 경험을 한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일제시대를 경험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군 중에서도 헌병에 이를 북북 가는 분들이 많다. 걸핏하면 되도 않는 시비를 걸며 군도로 목을 자르거나 아니면 군홧발, 주먹, 몽둥이로 두들겨 팼으니 인상이 좋을 리가 있나. 해방 이후 70여년이 흐른 지금도 일제시대를 경험한 노인분들 중엔 예전 악몽을 꾸거나 치매 증상이 왔을때 '타스케떼!'[3]를 외치며 벌벌 떠는 경우가 곧잘 있을 정도다.
- 젊은이가 소집되는 것은 거주지역 인근 육군 연대가 일반적이었다. 육군은 국민과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국민이 가지는 군의 인상은 주로 육군에 대한 것이 표준으로 되어 있었다.
- 전시 중의 육군과 해군 항공대에서 군가 및 선전영화 소재가 된 가토 하야부사 전대등 육군 쪽이 각광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 방공도 담당하는 육군은 관측, 조명, 대공포, 방공 전대 등을 국내에 배치하고 전쟁의 실상을 가린 채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웠다는 정보만 방송하고 국민을 통제해 왔지만, 결국 전략폭격을 가한 B-29의 일본 본토 공습을 막을 수 없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초토화... 따라서 공습으로 생명, 재산 피해를 겪은 국민 사이에 전후 본토 방공에 책임이 있던 옛 육군에 대한 배신감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해군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진 못할텐데
- 태평양 전쟁 당시 국내 유명연예인이 전후 회고록에서 "전시 중의 위문시에 육군이 위문 방문한 우리들에게 오만하게 대하고 엉성하게 취급했다"고 회상 한 것. 예를 들어 가수인 후지야마 이치로는 전후에 "전쟁 중에 육군은 오만한 태도로 엉성하게 취급했지만, 해군은 정중한 태도로 대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 종전 전까지 일본에서는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경제력을 포함한 엘리트였던 풍조가 있었다. 당시 일본은 전형적인 학벌만능주의 사회였고, 이는 군도 다를바가 없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전후 사회의 관료, 경영, 정치, 학계, 문단 등으로 영향력 있는 실력자가 되었다. 육, 해군 모두 대학 재학, 졸업생을 단기간의 교육 사관에 임관하는 제도(육군 간부 후보생 제도, 해군의 단기 현역 장교 제도와 예비 학생 제도 등)가 대학 재학 이상으로 군대에 들어가 전쟁에 소집, 돌아온 사람의 대부분은 소위, 예비 소위 이상으로 임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인해 전후사회의
범털유력자들 대다수가 해군출신이거나 육군에 비판적인 입장이라 해군을 옹호하는 경향이 매우 커지고 곧 일반적인 여론으로 정착되었다.
- 해군에는 계급 제도와 해군병학교[4]를 정점으로 한 엘리트주의의 학벌 편중주의가 겹치는 독특한 신분서열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고참 수병이나 하사관도 곧바로 자신보다 학벌이
쩌는훌륭한 학도사관에 거칠게 대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소위급 대우를 받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사관에서 민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므로 해군을 편애하는 정서가 고착화되었다. 특히 해군은 육군과는 달리 함선을 동작시키는 기술관련사관의 위력과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해당 분야에서는 서로 전문가 대접을 하거나 독자적인 서열체계가 만들어지고 타 부서에서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초심자가 적응하기 쉬운 편이었다. 또한 해군 주계(보급, 경리, 행정을 맡는 해군 병과)사관의 경우 대부분 육상에서 근무하는 덕에 주 전장이 바다였던 해군의 특성상 전사할 가능성이 적었고, 함정에 배치받아도 전투시 함교에서 전투일지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음과 동시에, 함정을 포기해야 할 경우 일반적으로 장교가 나중에 퇴함하는 것에서 열외되어 전투일지 등 기록물과 히로히토의 사진 등을 챙기고 군의관과 함께 제일 먼저 퇴함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어 함정 근무시에도 생존률이 높았기에, 높으신 분들의 자제들이 많이 지원했다.
- 물론 막장 일본군답게 이런 식으로 학사장교나 학사사관이 되어 전쟁터로 소집된 경우 일선에서 잔뼈가 굵은 올드비들이 일종의 올드비부심으로 아니 이 쏘가리는 뭐죠 늅늅 하고 울어봐 하며 사병들이 학사출신 상관 뒷담화, 심지어 앞담화를 까거나, 기수열외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긴 했다. 하지만 육군보단 이런 문제가 엄청나게 적고 그 수준도 약했다.
- 육군도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사관에서 민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일단 해당인이 '간부후보생'에 채용되더라도 입영에서 몇 개월 동안 반드시 이등병으로 병영 생활을 보내야하며, 여기에서 가혹행위가 유발되었다. 육군도 군 경력이 긴 사람이 판을 치고있던 풍조가 있었고, 간부 후보생이어도 입영시에는 일반 병사와 같은 입장이며, 진급, 임관도 생도 출신의 현역 장교보다 교육 기간은 짧기 때문에 고참 병사와 하사관들에게 외면당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육군 재향 학도 장교들조차 육군을 편애하는 경향이 되긴 커녕 오히려 육군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 일반인이 육군이나 해군에 징병될 경우 그 대부분은 간부 후보생·예비 학생이 될 학력과 자격을 갖지 못한 신병으로 입영·입단해서 고참병과 사관의 가혹행위에 계속 견디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는 막장 일본군답게 둘 다 고생길이었지만, 해군 수병보다 육군 병사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살아남아 돌아온 소집병들은 해군에 종군했던 '해군기피'가 된 인원보다 육군에 종군했던 '육군기피'가 된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당연했다.
- 육군은 나중에 가면 식민지 현지민도 채용 및 강제로 징병하는 등[5] 개나소나 들어가는 데였고, 해군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라는 당시 일본인의 풍조도 한몫했다.
위의 사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패전후 일본군이 해체된 뒤, 전쟁 당시의 해군을 호의적으로, 육군을 비판의 표적이 되는 논조가 전개되었다. 만만한게 육군 특히 전시 중, 앞서 말했듯이 헌병대에 불쾌한 기억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경험을 체험한 일본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육군에 대한 인상이 안좋았으므로 육군에 대해 이런 종류의 논조가 받아들여지게 될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실상의 재군비라고 볼 수 있는 자위대 설립시에는 다음과 같은 사태가 일어났다. 일단 육상자위대는 옛 제국육군 출신자가 다수 입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유와 전 군인들의 생각의 변화로 제국 육군의 전통이 대부분 단절되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제국 해군의 전통이 명확하게 해상자위대에 계승된 것으로 증명되었다. GHQ도 이 풍조에 따라 자위대의 일본국군으로의 재개편을 포기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6]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육군, 해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정확히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다분히 사후의 이론으로 호도된 전후의 인간들이 갖는 인상론에 가까운 것도 포함된다.
5 기타
일본내에서는 골수 우익이 아닌 우익, 중립, 심지어 좌익에게도 자주 받아들여지는 설이다. 때문에 일본인 중에 일본군의 악행과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해군선옥론자가 상당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아사히 신문이 매우 좋아하는 떡밥. 사실 범위를 좁혀보면 이 해군선옥론은 해군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비롯한 '해군 좌파',특히 삼인방의 찬양에 가깝다. 이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일본군을 베이스로 한 가공전기같은 창작물에서 해군은 개념적인 이미지이고 육군은 피에 굶주려 미쳐 날뛰고 있는 인상인 경우가 다수이다. 대표적으로 지팡구. 또한 이런 매스미디어를 쉽게 받아들이는 일본의 젊은이들과 젊은 우익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그리고 일본 해군의 숨겨진 진실을 일본 해군 사람들이 토로한 해군반성회의 다큐멘터리가 NHK를 통해 방송된 뒤 상당수 일본인에게 태평양 전쟁 비화가 알려져 해군선옥론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똑바로 알아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군 육군에 비해 나았다는 것이지,[7] 일본 해군은 우리 입장에서건 국제적인 입장에서건 보편적인 도덕과 인륜의 관점에서건 천하의 개쌍놈들이다.[8] 아까 말했듯이, 정말로 이렇게 생각하는 일본인이 상당수다! 좋은 일본군은 죽은 일본군이라면 몰라도
윤영식 제독이 번역한 <해상학살-일본 해군의 전쟁범죄(마크 펠튼 저술)>라는 책에서도 2차대전기 일본 해군의 만행에 대해 알 수 있다.
6 독일의 깨끗한 국방군 신화
독일이라고 해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은 그렇게 경계하던 공산주의자들이 진짜로 국가를 분할해버리자 이를 빌미로 일본 넷우익들 뺨치는 수준의 합리화를 시전하였으며, 국민들이 이정도였는데 신생 연방군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더욱이나 이쪽은 나치와 SS라는 책임소재를 떠넘기기 쉬운 절대악의 존재 때문에 이런 사상이 더더욱 부추겨졌다. 이후 나치와의 연계 혐의가 없거나 옅은 구 독일 국방군 인사들과 서방 군사저술가들의 합작으로 깨끗한 국방군(Saubere Wehrmacht, Legende von der sauberen Wehrmacht)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비록 히틀러와 나치에게 이용당하기는 했어도, 자신들은 신사적이고 정당한 전쟁을 했다는 것. 실제로 독일인들이 자신들 역시 가해자임을 자각한 것은 70년대 이후 세대 교체와 빌리 브란트 등의 자성운동을 통해 이뤄져 왔지만,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군의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자성은 그보다 10~20년 정도를 더 기다려야 했다. 국방군선옥론 역시 그 특성상 육군이 주로 까임의 대상이며, 해군과 공군은 상대적으로 덜 까이는 편으로, 특히 크릭스 마리네는 국방군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신사적이기도 했고 공군도 군종의 특정상 범죄를 저지를 여지가 적기도 하다. 물론 중립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같은 엄연한 전쟁범죄를 저지른건 변함이 없지만.[9]- ↑ 1944년 3월 18일, 토네급 중순양함 1번함 토네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와 토네의 승조원들이 일으킨 베허호 사건의 책임을 지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토네급 중순양함 항목 참조.
- ↑ 당시 육군의 복무기간은 2년이었고, 해군은 3년이었다. 일본군은 병장의 개념이 없어서 병 계급이 상, 일, 이 3계급제로 실시되었다.
- ↑ 일본어로 '살려주세요.' 라는 뜻
- ↑ 해군사관학교의 패전 전 일본식 명칭
- ↑ 일부 출세한 경우도 있긴하나 전체 외지인 징병자중 5% 미만일 뿐, 어퍼머티브 액션일 뿐이었다. 물론 나머지 90%는 총알받이라는게 교과서적인 설명.
- ↑ 그러나 현재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고 일본이 평화헌법개정을 하는것을 보고만 있는듯. 어쨌건 미국이 한때 자위대를 '군'으로 개편하려는 생각을 했었던건 사실이다.
- ↑ 치치시마 섬 사건을 들어 반박하기는 하나, 그래도 일본군 해군은 난징 대학살, 미얀마 대학살, 충칭 대공습, 세균전 같이 일본군 육군이 저지르고 다녔던 대량 학살같은 것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위안부나 징용자들에 대한 처우, 포로 학대 및 살해, 식인 등 흉악범죄 측면에서는 도찐개찐이다.
- ↑ 일본 해군 또한 육군의 전공에 뒤지지 않기 위한 막장 군사행동을 자주 했다. 항상 육군보다 덜 유명해서 그렇지.(...) 대표적으로 육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성공하자 이에 뒤질세라 (1차) 상해사변을 주도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진주만 공습, 그리고 태평양 전쟁으로의 확전 또한 앞선 중일전쟁에서 육군만 신나게 재미보자 어떻게든 관심을 끌려고 해군이 나서서 추진한거라고 할 수도 있고. 실제로 태평양 전쟁은 그동안 유명세가 떨어지던 해군이 엄청나게 몸값을 올린 전쟁이다.
- ↑ 여기서 미국도 민간선박을 공격했다던가 민간인을 폭격했다는 물타기를 시전하는 경우가 있는데 민간인 폭격이나 민간선박 공격은 나치가 먼저 시작한 행위이다. 그리고 민간인 폭격은 당시 기술과 상황을 감안해야하며 미군은 중립국 선박을 공격한 적은 없다. 크릭스 마리네가 문제가 되는건 중립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이지 민간선박 공격이 아니므로 민간 선박을 공격했으니 똑같다고 주장하는건 물타기일 뿐이다. 워낙 이런 문제는 1차대전때부터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