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역대 일본 총리
42대43대44대
스즈키 간타로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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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2세 당시.

東久邇宮稔彦 1887년 12월 3일~1990년 1월 20일

메이지 20년에 태어나 쇼와 덴노의 죽음을 본 경이로운 104세의 생애. 일본 근현대 메이지-다이쇼-쇼와-헤이세이 네 시대를 모두 겪은 사람.4명의 왕을 봤어... 장제스만슈타인과 동갑이며, 쇼와 덴노 히로히토보다 14살이 많다. 그를 개관한 블로그인데 사견이 좀 많다.

1 출신 배경

일본의 43대 총리. 교토 출생으로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왕족이다. 이방자 여사의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 守正王) 왕의 이복동생. 그러니까 이방자 여사의 삼촌이다.

메이지 덴노의 9녀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 聰子) 내친왕과 결혼했고, 그의 장남 모리히로(盛厚) 왕은 히로히토 덴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과 결혼했다.

일본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인 후시미노미야의 자손으로 일본 황실에서 친왕의 호칭을 쓸 권리는 직계 왕족에게만 한하며 그 외에는 왕(王)의 칭호를 쓰나 후시미노미야, 카츠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 간인노미야의 가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대대로 친왕의 호칭을 세습하여 '세습친왕가'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호칭과 더불어 황위 계승에도 우선권을 가져 천황이 후계자를 못 남기고 죽으면 대신 황실의 대를 이을 권리도 있다. 그 가운데 후시미노미야가 가장 오래 존속해 큰 힘이 있었다.

19대 당주인 후시미노미야 사다요시(伏見宮 貞敬 1776.01.01~1841.02.22) 친왕의 아들들부터 분파 미야케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의 넷째 손자이자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의 4남인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18번째이자 마지막 아이이며 9왕자가 바로 히가시쿠니노미야다. 참고로 후시미노미야는 26대 히로아키(博明) 왕으로 이어지고 쿠니노미야는 3대로 끝, 히가시쿠니노미야는 계속 이어지나 신적강하로 친왕, 왕 칭호는 못 받는다.

2 왕족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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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육군 대장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었다.[1]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이틀 후에 총리로 기용되어 조각, 패전 후 일본의 첫 총리를 지냈지만 당시 일본은 알다시피 망했어요. 현실은 시궁창

당시 일본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연합군이 점령한 상태였고, 맥아더가 사실상 일본의 실권자로 행사했던 시기였으니 이 사람은 말만 왕족이고 총리지 사실상 얼굴 마담이었다.

그나마도 내각 구성한 지 2달도 안 지나 총사퇴. 명색이 왕족이란 자부심이 남아있었던 양반이라 점령군으로 온 맥아더에게 자주 개겼다고(…) 한다. 사실상 히로히토가 승인하고 맥아더가 해산시킨 꼴이 됐다. 전후 첫 총리이면서 가장 짧은 시간에 무너진 내각(54일)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3 기행

그 외 특기할 만한 사항은, 생몰연도 보면 알겠지만 무지하게 오래 살았고 나중에는 황족 직위를 스스로 내던지며 신흥종교(…)를 만들어 교주로 활약하신 업적을 남겼다. 흠좀무. 덧붙여서, 그 종교 이름이 히가시쿠니 교다.[2]

메이지 덴노가 같이 식사하자는데 설사가 났다는 까닭으로 거절한 흠좀무한 일화가 있다. 말이 "같이 먹자"지 당시 일본에서 덴노와 같이 밥먹기를 거절하면 중죄로 취급했다. 근데 그 당시의 나이가 최소 25살 이전[3]의 이야기... 고노에 후미마로보다 얼굴에 더 두꺼운 철판을 깔았나보다. 그나마 황족이라서 망정이지[4] 그래서 당시 황태자였던 다이쇼에게 욕을 신나게 먹고 난 뒤 스스로 신적강하를 신청했으나 메이지 덴노이 늙은이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5]고 말하면서 신분을 그대로 유지했다. 나이는 메이지가 히가시쿠니보다 35살, 다이쇼가 8살 많다.

프랑스 유학 사이에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화가라 속이면서 어떤 노파에게 손금을 봐달라고 했다. 노파가 손금을 보고는 당신은 일본의 총리를 하겠다라 했는데, 그제서야 신분을 밝히며 일본의 황족이자 군인이라서 정치를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노파가 "일본에서 대 격변이 일어나겠다. 그래서 총리를 하겠다." 라고 했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흠좀무 저 노파는 미래시를 가지고 계신듯(...) 그냥 노파가 적당히 얼떨결에 둘러 댄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히가시쿠니 본인의 회고록인 やんちゃ孤独에 따르면, 사이온지 긴모치와 함께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6] 물론 당시 일본 지도층에서 사이온지는 꼬장꼬장한 늙은이(...), 히가시쿠니는 황족 가운데 좀 이상한 양반(...)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보기좋게 씹혔다. 솔직히 신흥종교 교주까지 해먹었으니 맞는 말이지만... 히가시쿠니는 사이온지가 죽은 뒤인 1941년, 고노에 후미마로 2차 내각의 육군 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를 직접 찾아가서 미국과 전쟁을 말라고 충고했지만….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7]

여담으로, 현 일본 황실의 후계자 문제를 만든 원흉(…)이기도 하다. 1947년에 다이쇼 덴노의 직계자손을 뺀 모든 일본 황족들이 신적강하되었는데, 신적강하 문제가 이슈였을 때, 이 사람은 아예 자청해서 신적강하를 하겠다고 언론에 밝히면서 다른 황족들도 동참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람 탓에 현 일본 황실은 남성 후계자가 모자라서 골머리를 앓는다. 모순이지만 이 사람은 메이지 덴노사위[8]라서 이 사람의 후손들이 구황족의 유력한 부활 후보 가운데 하나다… 음?

사실 이 사람의 일화를 보면 유독 황족 신분을 싫어했던 듯하다. 자세한 것은 여기 참조(일본어 자료이다.)
  1. 이 무렵 치바공업대학을 설립하였다.(1942년
  2. 이 종교는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었다.
  3. 메이지 덴노1912년에 죽었다.
  4. 실제로 히가시쿠니는 황족들 사이에서 고노에 후미마로와 비슷한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5. 메이지 덴노 항목에서 나오듯 메이지 덴노는 오히려 자기 자식들도 잘 안 만날 만큼 대인기피증이 심했다. 따라서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만나는 문제 때문에 황족이 신적강하를 하느니 마느니 하는 논란이 일어나 기분 나빴을 것이다. 아래에서도 나오지만 오히려 히가시쿠니가 이 기회를 빌미로 신적강하를 노렸을지도
  6. 정확히는 프랑스 유학후 귀국해서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 입장을 주변에게 밝혔지만 사이온지만 그 주장에 귀를 기울인것에 가깝다.
  7. 그런데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도조 본인도 태평양 전쟁 개전에 반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도조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사임한 후 히가시쿠니를 총리로 추천했다. 이후 전개 상황은 도조 히데키 항목참조.
  8. 히가시쿠니는 메이지 덴노의 9녀 야스노미야 도시코 내친왕과 결혼했으니 다시 말하자면 히로히토의 고모부다. 더불어 그의 장남 모리히로(盛厚) 왕과 히로히토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이 결혼했기 때문에 사돈 관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