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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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산국의 쇠망

적어도 철기시대가 시작될 즈음부터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삼국지에는 위나라 장군 왕기가 옥저로 도망친 동천왕을 추적하다가 어떤 노인에게서 '바다 동쪽에 섬이 하나 있다'는 소문을 듣는데, 이것이 역사상 울릉도의 첫 등장으로 추정된다.

이후 울릉도에는 우산국(于山國)이라는 독자적인 정치체가 자리잡는다. 구전되는 설화에 따르면 우산국의 우해왕은 대마도(!)까지 쳐들어가서 담판을 지었을 정도라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어찌되었든 512년에 신라 지증왕 때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입에서 연기나는 나무 사자상을 풀어 놓겠다는 야바위를 시전하여 우산국을 정벌한 사실은 상당히 유명하다. 어떤 노래 덕분에 독도에 끼워판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이후 신라에 복속되어 있다가, 후삼국시대에는 우릉도(芋陵島)독자적인 세력이 자리를 잡아[1]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관직을 받았다. 그런데 워낙 육지에서 떨어져 있다 보니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이러한 독립성은 더욱 강해져서, 이들은 다시 우산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정도.

하지만 이 우산국은 1018년에 동북여진족의 침략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 때문인지 1032년에는 우산국에서 다시 호족 단위로 격하된 우릉성(羽陵城)이 고려 조정에 조공을 바쳤고, 115년 뒤인 1147년에는 고려의 명주도감창사 이양실이 사람을 보내 울릉도(鬱陵島)를 조사한 것으로 미루어 울릉도의 독자적인 정치체는 이 기간 사이에 완전히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1157년에는 고려 의종이 울릉도 개척에 관심을 보였다가 울릉도를 현지 조사한 김유립의 부정적인 보고에 논의를 중지하기도 했고, 최충헌도 한때 사민정책을 벌여 울릉도 개척을 시도했다가 풍랑에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울릉도에는 이러한 사민정책 이외에도 국가의 통제를 피해 자발적으로 들어가 산 사람이 있었고,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에도 울릉도에 촌락 터가 7곳 있었다고 한다.

2 공도 정책의 시행

하지만 조선왜구의 출몰에 맞서 이러한 섬의 주민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空島) 정책을 시행한다. 이에 따라 1403년 조선 태종은 강원도의 무릉도(武陵島) 거주민에게 모두 육지로 나오도록 명하였고, 이에 쓰시마에서는 무릉도에 사람을 보내어 다스리게 해달라고 징징요청하였으나 조선 조정의 대답은 당연히 거·절·한·다.[2]

그럼에도 군역을 피해 무릉도에 들어가 산 사람들이 다수 남아 있었기에 태종은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1416년 김인우를 안무사로 무릉도에 보냈지만, 무릉도 주민 86명 가운데 김인우를 따라온 것은 고작 3명에 불과했다. 이에 열받은 태종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울릉도 주민을 끌어낼 것을 논의하게 했는데,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 황희가 홀로 쇄출에 찬성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게 1417년.

그 뒤로도 조선 조정에서는 무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공도 상태를 유지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지금의 독도로 추정되는 우산도(于山島)가 발견되어 일부 이름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몰래 울릉도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지만 일본인들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모두 정착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연장선에서 1614년에는 쓰시마 번주가, 1615년에는 일본 선박이 각기 이소다케시마(磯竹島)다케시마(竹島) 안내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일도 있었다.

  • 당초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가리켜 '다케시마' 또는 '이소다케시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지금처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 명명하며 편입한 이후의 일이다.

3 안용복의 도항과 쟁계

하지만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일본인들의 울릉도 출입이 잦아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625년부터 1691년까지 66년 동안 오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가문에게 매년 번갈아 도해면허가 발급되면서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업을 일삼았고, 마침내 1692년에는 조선인 어민과 충돌하여 아무런 소득 없이 귀환하였다.

이들은 이듬해인 1693년에도 같은 일이 발생하자 안용복 등을 일본으로 잡아갔고, 이들을 조선에 송환하는 과정에서 쓰시마 번주 소오 요시쓰구(宗義倫)는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를 보내 "다케시마에 조선 배가 드나들지 못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상의 영토 요구에 대해 남인의 온건대응론이 대세를 차지한 조선 조정은 "우리나라인 울릉도라도 못 가게 하는데, 하물며 다른 섬이야 당연하다"는 답서로 슬그머니 빠져나갔다.[3]

그러자 이 부분에 대해 다시 마사시게가 파견되어 답서에서 울릉도 언급을 빼달라고 여러 차례 징징요구했지만, 이미 1694년 갑술환국이 벌어진 조선 조정은 강경대응론으로 선회하여 오히려 전에 보낸 답서를 취소하고 "울릉도와 다케시마는 한 섬을 두 이름으로 부른 것이니, 일본 사람들이 오가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답서를 새로 보냈지만 마사시게는 그 뒤로도 10개월을 버티며 답서의 수정을 요구했다.[4]

그러던 중 1695년 요시쓰구가 죽고 소오 요시미치(宗義倫)가 새로이 쓰시마 번주가 된 가운데, 마사시게는 본국에서 자신을 소환하자 한동안 조선 조정과 논쟁을 벌이다 마침내 열폭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해 12월 돗토리번에 다케시마와 마츠시마(독도)의 일을 문의했던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는 이듬해인 1696년 1월 소오 요시미치가 입근한 자리에서 "다케시마는 조선에 가까워 조선 영토로 볼 수 있으므로, 일본인의 도해를 금지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조선에 알리도록 했다.

한편 안용복은 이러한 정황에 힘입어 사람들을 규합하여 울릉도와 자산도(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을 꾸짖어 내쫓고, 나아가 자신을 포함한 11명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호키(伯耆)에서 번주와 만나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는 엄중 처벌하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좀 뒷북스러운 감이 있지만...

여하간 이러한 일본 측의 도해 금지 결정이 조선 측에 통보된 뒤에도, 조선 조정의 답신 여부와 그 내용을 두고 한동안 이어지던 이 문제는 1698년 조선 조정의 답신이 쓰시마 번을 통해 에도 막부로 전달되고, 다시 1699년 쓰시마 번의 답신이 조선 조정으로 전해지면서 완전히 종료되었다.

4 울릉도 개척과 그 이후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지던 조선의 공도 정책은 1881년에 일본인이 울릉도에 몰래 들어와 벌목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이에 고종은 일본 정부에 이를 항의하는 한편, 이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임명해 울릉도에 파견하면서 조만간 울릉도에 행정 구역을 설치하려는 뜻을 드러냈다. 그리고 1882년 이규원 일행이 울릉도를 조사하고 돌아오자, 임오군란이 수습된 직후 울릉도 개척 방안을 공표해 김석규(金錫奎)를 도장(島長)으로 임명하고 5년간 면세 조치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883년에는 김옥균(金玉均)을 개척사(開拓使)로 임명하면서 울릉도 개척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울릉도 이주 정책과 토지 개간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지속적인 항의를 통해 울릉도에 불법 침입해 벌목을 자행하던 일본인 254명을 그해 9월 모두 본국으로 송환하였다. 이후 갑신정변으로 김옥균 등이 축출된 뒤에는 울릉도민 서경수(徐敬秀)를 월송만호(越松萬戶)에 임명하고 월송만호가 도장을 겸임하도록 해서 개척사업을 이어나갔지만, 서경수는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다.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 12월에는 다시 도장을 설치하고, 이듬해 8월에는 도장을 도감(島監)으로 격상시켜 배계주(裵季周)를 임명하였다. 하지만 아관파천과 더불어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다시 일본인의 벌목이 자행되었다. 이에 대한제국은 1899년 내부관원 우용정(禹用鼎)을 시켜 다시 울릉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함과 더불어 1900년 울릉도 관제개정안을 발표하여 도감을 감무(監務)로 개칭하기로 하였으나, 도중에 개정안을 바꾸어 울릉도에 정식으로 군(郡)을 설치하고 군수(郡守)를 두며, 강원도 관할에 둔다는 '칙령 제41호'를 공표하였다. 이 당시 군의 명칭은 울도군이었다. 1906년 강원도에서 경상남도(!)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지금의 경상북도로 편입되었다. 1915년 울도군은 울릉도(島)로 개칭되었으며[5], 군수(郡守)는 도사(島司)로 개칭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울릉도에서 울릉군으로 다시 개칭되고, 도사 직책도 군수로 환원되었다.

5 관련 항목

  1. 신라에 복속되어 있던 우산국이 국체를 유지하고 있다가 이때 다시 떨어져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호족화한 것은 분명.
  2. 이때 태종의 반응은 쓰시마를 일본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대마도를 주고 울릉도를 얻는다?
  3. 즉 '다케시마는 어디 붙은 섬인지 모르겠지만, 다케시마가 어찌되었든 울릉도는 우리 영토'라고 한 것이다.
  4. 시위의 일환으로 조선 정부에서 공급하는 음식과 의복을 거부하는 바람에 돌아갈 때는 거지꼴이었다.
  5. 여기서의 도(島)는 행정구역 단위 명칭으로 쓰인 것. 같은 시기 제주군 역시 제주도(島)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