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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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2대 남해 차차웅 박유3대 유리 이사금 박유리4대 탈해 이사금 석탈해
시호유리 이사금(儒理 尼師今) /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
세리지 니사금(世里智 尼師今)
박(朴)
유리(儒理) / 치리(治理) / 치리(齒理)
생몰년도음력? ~ 57년 10월
재위기간음력24년 ~ 57년 10월 (33년)

1 개요

신라의 제3대 . 이사금 칭호를 처음 사용했다. 남해 차차웅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부인이다. 박혁거세의 손자. 다른 이름으로는 치리(治理) 또는 치리(齒理)가 있다. 다른 이름으로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 간혹 유리왕(儒理王)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에도 한자가 다른 유리왕이 있고(유리명왕)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살았던 시대도 비슷하기 때문에[1] 그냥 유리왕이라고 하면 헷갈릴 여지가 있다. 두 유리왕이 비록 이름의 한자는 다르지만, 둘 다 순우리말 '누리'의 음차자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신라 제14대 왕인 유례 이사금은 한자까지 똑같은 유리라는 이름과 유례라는 이름 두 설이 있는데, 김부식도 어느 쪽이 맞는지 옛 기록을 봐도 알 수 없다고 삼국사기에 써 놨다. 다만 14대 왕은 석씨 왕이라 '석유리'고, 이 왕은 박씨 '박유리'다.

왕후는 일지 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혹은 허루 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박씨, 또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지만, 일지 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은 제7대 왕이 될 일성 이사금, 차남은 제5대 왕이 될 파사 이사금이다. 왕위에 오르는 순서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여러 설이 있다.

2 일생과 업적

남해 차차웅이 죽자 덕망이 높은 매제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했지만, 석탈해와의 유명한 잇자국 대결(?)을 통해 군신(群臣)들의 추대로 서기 24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기록에서는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尼師今)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또 다른 해석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가 많은 사람이 덕망이 높다는 얘기에 따라, 서로 을 물어보어 잇자국이 가장 많은 유리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질금 즉 이사금이라는 칭호 또한 여기(잇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의 전통문화를 만든 것 이외에는 참 별거 없는 무난한 왕이었다(...). 단, 42년 이후 승하할 때까지 15년 정도 기간 동안의 역사기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왕인 탈해 이사금 문서를 참조할 것.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의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저 주요 한국의 성씨들이 유리 이사금 대에 정립됐다는 것. 물론 고대 한국에는 아직까지 성씨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하기도 하지만, 6촌→6부 개념은 분명히 상대부터 있었으므로 후대에 소급됐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한민족 제2의 명절추석의 여러 풍습들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도 유리이사금 때다. 추석 문서 참조.

5년(서기 28년) 겨울에는 유리이사금이 나라를 둘러보다가 한 노인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걸 보고는 느낀 바가 있어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밥을 먹인 뒤, 관리에게 명해 나라 곳곳의 홀아비, 과부, 고아, 부양가족 없는 노인과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복지정책을 펼치자 신라가 살기 좋다는 소문이 주변국까지 나서 백성들이 신라로 몰려왔으며, 이들이 도솔가(兜率歌)라는 노래를 새로 지어서 불렀다고 한다. 전근대시대는 인구가 많아서 생산력이 높은 나라가 거의 무조건 유리했으므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경주시 일대의 성읍국가였던 초기 신라가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한편 이 시대에 북방에서는 고구려 제3대 왕 대무신왕 무휼낙랑군을 격파하자 5천여명의 낙랑 사람들이 피난 왔다가 신라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 역시 초기 신라의 인구 증가(=국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33년을 재위한 후 중병에 걸리자 두 아들(파사, 일성)보다 사위 석탈해의 재능이 뛰어나니 탈해에게 왕위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승하한다. 신라 사회에서는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상황이 하대까지 여러 번 존재한다. 국왕의 성씨가 바뀌는 다른 사례를 들어봐도 최초의 경주 김씨미추 이사금도 그렇고, 후기 박씨 왕조를 연 신덕왕도 김씨 왕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아무튼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평가와는 별개로 늦게나마 각자 왕에 오르긴 한다.

가족관계를 살펴보자면 둘째 아들이 파사 이사금(婆娑王, ? - 112년, 신라의 5대 국왕), 첫째 아들이 일성 이사금(逸聖王, ? - 154년, 신라의 7대 국왕)이다(그 외에 아들 둘이 더 있으며 딸은 각각 석탈해와 상장군 김명옥(金鳴玉)에게 출가했다 함). 다만 첫째아들의 나이를 따지면 늦둥이라도 조금 괴랄하긴 하다. 일본의 역사에 남아있는 천일창 왕자 이야기와 관련하여, 첫째 아들인 일성 이사금이 바로 그 천일창 왕자였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3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九月 유리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五年冬十一月 진휼을 실시하다
九年春三月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十一年夏五月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다
十一年夏六月 홍수가 나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이 타산성을 함락시키다
十四年 낙랑인들이 항복해 오다
十七年秋九月 맥국과 우호를 맺다
十九年秋八月 맥의 우두머리가 사냥한 짐승을 바치다
三十一年春二月 살별이 자궁에 나타나다
三十三年夏四月 용이 나타나다
三十三年夏五月 바람이 강하게 불다
三十四年秋九月 탈해가 후계를 잇도록 유언하다
三十四年冬十月 왕이 죽다

  1. 고구려 유리명왕 쪽이 한두세대 앞의 인물로, 재위기간은 겹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