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이력

한국 연예인 유재석의 이력에 관해 다룬 페이지.

1 과거

여러 프로그램들을 통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과거 아버지가 공기업을 다니고, 퇴사 이후에 하던 사업이 있어서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유년기를 보냈으나 초등학교 즈음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져 약 20억 정도 까먹고 일명 '빨간 딱지'를 경험했다고 한다. 이에 아버지가 고모부의 권유로 치킨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 사업마저 실적이 영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몰랐던 어린 시절의 재석은 친구들에게 무상으로 치킨을 뿌리다가 아버지에게 혼난 일도 있었다고.[1][2] 유재석의 아버지는 수십년 후 아들의 휴대폰 VIP 마일리지를 아들도 모르게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복수하셨다

서울예전 91학번으로 입학은 했지만 방송을 하느라고 졸업은 못 한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방송에서 밝히기를 학교에다 방송한다고 결석한다 그랬는데 방송출연도 잘 안 나와서 학교측에서 의아해했다고. 그리고 당시 친구 집에서 자주 개그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 친구가 지금은 성우가 된 전태열. 그래도 서울예대에서는 졸업은 못 했지만 국민MC답게 엄청난 예우를 해준다. 무한도전 타임스퀘어 광고 특집때 서울예대 학생들이 광고에 나왔는데[3], 그때 전부다 고개 90도로 숙여서 선배님이라고 인사하고 크게 열광했다.

젊은 시절(방송 데뷔 초창기 포함)엔 나이트 죽돌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방송 동기인 김용만, 남희석, 김수용 등의 증언, 제보가 줄줄이 나오는데다가 유달리 클럽 풍 음악을 즐기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는 사실인 듯. 본인도 방위 시절에 클럽에서 밤새 놀다가 차에서 제복으로 갈아입고 출근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4] 무한도전에서 선보인 곡 '압구정 날라리' 제작비화를 보면 압구정에 있는 클럽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당시 살던 곳은 수유리였다고(…).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차례 응용하는 것을 보아서 아주 지어낸 이야기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방송용 과장이 다소 첨부되어있지만 편치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은 반쯤 기정사실화.

2 데뷔 및 무명 시절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곤 믿지 않았지
믿을 수 없었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단 건 거짓말 같았지
고개를 저었지
- '말하는대로' 가사 중

사실은 한 번도 미친 듯 그렇게

달려든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봤지 일으켜 세웠지 내 자신을
- '말하는대로' 가사 중

고등학교 때부터 비바! 청춘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PD의 주목을 받고 20살(만19세)의 나이로 최연소로 KBS 공채 개그맨에 합격했다.[5] 유재석은 공채 7기에 해당한다. 동기로는 최승경, 양원경, 전효실, 김수용, 김용만, 박수홍, 남희석, 김국진, 윤기원[6]이 있다.

당시로서는 어린 나이에 성공을 맛본 것이라 데뷔 초기엔 다소 건방진 인물로 소문이 났었다. 1991년 KBS 대학개그제에 최승경[7]과 콤비로 나와 "개그칼럼"이라는 시사개그를 하였다.무한도전 "묵은 때를 벗기길 바래" 특집에 나온 대학개그제영상[8] 이때 당시 유재석은 최소 금상은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장려상에 그치자 삐뚤어져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반대편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면서 시상하러 나오는데 선배 개그맨들에게 좋게 보였을 리가 만무. 결국 찍혀서 매우 혼났다고 한다. 훗날 술회하기를 "그때 정말 철이 없었어요. 선배님들께 예의라고는 인사밖에 할 줄 몰랐거든요."라고. 그리고 무명 시절 하도 딱해보였는지 김용만이 자기 집에 데려가 밥을 먹였는데 고기반찬이 없고 풀반찬만 있다고 투정부려서 빈축을 산 일화도 있었다.


아무튼 20대 무명 시절에는 철없고 개념이 없었던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반성했다고 한다. 그 결과 지금은 성실하고 반듯한 이미지로 국민 MC 반열에 들었다. 지금도 친한 선후배 사이에선 허물 없고 직설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해 은근히 얄미운 인간으로 보이기도 하나 성실하고 훈훈한 마인드의 인물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유재석이 데뷔 초기에 안하무인한 인간으로 보였던 이유는 개그맨 사이의 강한 위계질서 때문. 나이는 어리지만 데뷔 년도는 빨라서 애매한 관계에 있었다. 예를 들어 김국진, 남희석, 김용만과는 동기, 강호동, 박명수, 조혜련, 김구라, 김현철 등 현재 방송하는 웬만한 개그맨들의 경우 방송국은 다를지언정 후배 위치에 있다.

그런데 실제로 유재석은 절대 허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단순히 친해지기 위해 "언제 술 한 잔 해요."라고 말했을 때 자기가 술은 잘 못 하고 이번달은 바쁘니 다음달에 편하실 때 언제 밥이나 한 끼 먹자고 연락해달라 했을 정도라고. 지금에야 국내 최고의 MC로 손꼽히지만 무명에 가까운 생활을 10년 가까이 했을 뿐만 아니라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코미디계가 사실상 붕괴하는 비극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MC로 전향,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이 글만 봐도 그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피나는 노력과 쓴 실패를 많이 겪어왔는지 알 수 있다.

개인사에 대해서 무한도전이나 해피투게더에서 단편적으로 언급한 정보를 모아보면 부모님의 사업실패로 경제적, 정신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낸 듯. 무명으로 계속 암울했던 시절에는 딱 30살까지만 방송계에서 열심히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기술이라도 배워 돈을 벌어 어떻게든 집안을 다시 일으켜볼 생각이었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초반 나름 유망주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브라운관에선 거의 임팩트를 주지 못 했는데도 결국 정착하게 된 것은 PD들이 꾸준히 신뢰해 방송에 내보낸 덕도 컸는데, 이유가 '사석에서는 웃겨서'였다고. 즉, 카메라 울렁증 때문에 방송에선 제대로 웃기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기인 김용만, 박수홍, 김국진, 남희석 등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몇 번이나 개그맨을 관두려고 했었단다. 열등감 때문에 TV를 보고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고.[9] 한 번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김용만과 김태균의 설득으로 다시 개그를 시작했다고 한다.

군 제대 이후 다시 꽁트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무명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데(기사), 대체로 꽁트에서 맡은 역할은 지금의 그의 초중딩 팬들은 상상도 하지 못 할 '찌질이', '백수' 등 대체로 무능력한 인물 역을 맡았다. 특히 늦은 밤시간대에 방영되었던 '코미디 세상만사'에서 '남편은 베짱이'에선 게으르고 무능력한 남편 역할을, 그 뒤 '귀농일기'에서는 귀농한 백수사위 역을 맡아 맨날 장인(김학래氏)에게 구박받는 찌질함과 무능 연기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왜 (자꾸 저한테만) 그러세요' 류의 대사는 그가 맡는 역할마다 말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다. 이 이미지는 훗날 시트콤 '멋진 친구들'이나 출발 드림팀 출연 시기 때까지도 계속 유재석의 아이덴티티 中 하나였다.

동시에 무명 시절에 만든 자신만의 캐릭터로는 바로 메뚜기. 리포터로 활동할 때 직접 메뚜기탈을 쓰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인터뷰에서 회고하기로는 지방 촬영을 갈 때 짐에 메뚜기탈을 직접 챙겨 가지고 다니는 것이 남보기 무척 창피했고 그냥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고.

그 시절에 주목을 못 받은 이유는 사실 콩트가 재미가 없었다는 것. 무능력, 메뚜기라는 캐릭터는 정착했지만 개그가 재미가 없는걸(…). 그래도 최악 수준은 아니라 맡은 역할 맛깔나게 잘 한다는 의견도 어느 정도 있어서 남편은 베짱이에 나오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에 언젠가 유재석이 뜰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름은 기억 못 하는데 웃기던 개그맨이 MC를 하더니 엄청 유명해졌는데 그게 유재석이더라 하는 정도.

사실 무명이라는 항목을 만들었지만, 유재석의 케이스는 지금의 무명 개그맨들과 크게 차이가 난다. 오히려 동기들과 비교해서 인기가 적었다는 것이 더 적합하다. 애초에 유재석 데뷔당시는 SBS 개국 때문에 많은 KBS 개그맨 선배들이 빠져나가서 그 자리를 유재석과 동기들이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인기가 많거나 돈을 많이 벌고 있지는 않았어도 유재석의 얼굴 자체는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한 예로 코미디 세상만사에서 유재석의 동기 양원경이 토크 코너에 게스트로 초대되었을 때, 자기 동기들이 데뷔때부터 지금까지 하락세 없이 계속 유명하다며 살짝 자랑을 한적이 있었는데, 김미화가 동기가 누구누구인지 물어봤고 듣자마자 '남희석, 김용만, 박수홍, 유재석까지"라고 답했고 김미화도 "역시 공채 7기는 다르네. 모두 스타네.'라고 했었다. [10] 유재석이 군대 갔다와서 방송복귀한 지 얼마 안 되던 시점, 즉 찌질이나 메뚜기 캐릭터를 소화할 때, 신문에서 조사하는 '이 주의 개그맨 인기순위 10위' 안에 있던 적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서세원쇼'의 토크 박스라는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이것이 인기 방송인 유재석 탄생의 시작이었다. 카메라 공포증은 그리 나아지지 못 해 심한 울렁증 때문에 시선도 한 곳에 못 맞추고 손도 벌벌 떨면서도 자신의 친구 찍새[11]와의 에피소드 등을 재미있게 풀어내 순식간에 인기 스타로 오르기 시작한다. 토크 박스 역대 결산에서 토크왕 1위를 차지했을 정도. '자, 1000원 출발!', '그래! 이놈들이야!' 등의 에피소드는 워낙 유명해 유투브에서 자세히 검색하면 아직도 찾아볼 수 있다.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단 걸
알지 못했지 그 땐 몰랐지
이젠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힘들었던 나의 시절 나의 20대
멈추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너의 길을 가
주변에서 하는 수많은 이야기
그러나 정말 들어야 하는 건
내 마음 속 작은 이야기
지금 바로 내 마음속에서 말하는 대로
- '말하는대로' 가사 중

결국엔 기나긴 무명 시절 끝에 유재석은 대한민국 최고의 MC가 되었다.

3 국민 MC가 되기까지

어쨌든 꽁트에서 맨날 깨지고 까이고 치이면서 인지도를 쌓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유재석은 웃기지는 못 하더라도 일단은 '부담 없다'는 이미지를 얻었고 2000년에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의 한 코너인 '60년을 이어라'[12]의 진행자 역할을 맡으며 MC로서의 발돋움을 시작한다. 유재석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에게 친근하게 다가가[13] 깔끔하게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PD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코너가 바뀌어도 계속 진행자를 맡았다. 참고로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던 당시 유재석은 매주 파격적인 복장으로 무리수를 두는 기믹을 잡아 무대 등장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상승시키는 시도도 했는데 이는 아는 사람만 안다.

또 같은 프로의 코너였던 '잠을 잊은 그대에게'에선 남희석 로드매니저 출신이었던 방송인 김종석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는데 주요 컨셉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공부하는 학생을 찾아 격려하는 프로그램. 도서관 불꺼지는 시간동안 유재석과 김종석은 '밤을 잊은 퀴즈대결'이란 타이틀로 퀴즈 대결을 벌였는데 처음에는 7주 연속으로 패하며 맨날 유재석이 담당 고PD랑 김종석한테 당하고 열받은 유재석은 최종벌칙을 받으면서[14] 담주에 꼭 이기고 말리라는 컨셉이 주요 웃음거리였다. 8주차에 처음으로 승리한 이후에는 조금씩 승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국어, 국사, 상식 분야에서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국어는 둘이 비슷했고 상식은 유재석, 국사는 김종석이 우세를 보였다. 맞힌 갯수만큼 핫바, 소세지 등의 야식이 제공되었는데 서로 야식을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서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주요 웃음 포인트.

2001년에는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에 고정으로 출연했는데, '사랑의 쌀 나누기' 코너에선 무의탁 노인들에게 쌀배달을 갔다가 할머니에게 지금의 당신의 처지를 듣고 눈물을 펑펑 흘렸고 그 뒤 몰래 개인적으로 밑반찬류를 잔뜩 싸서 다시 찾아가 할머니께 드린 일이 알려지면서 호감도가 대폭 상승하게 된다.

유재석이 본격적으로 MC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것은 2001년경 MBC의 프로그램인 목표달성 토요일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 유재석의 인지도에 부스터를 달아주었던 코너다. 그 당시에는 그다지 안면이 없던 최진실이 PD에게 적극 추천해서 맡게 된 코너라고 한다.

2002년부터 출연한 KBS의 프로그램 일요일은 즐거워의 MC 대격돌도 유재석의 이름을 알리는 데 한 몫 했다. 여기서는 MC라기보다는 고정 멤버에 가까웠다. MC대격돌에서 강호동이 힘을 이용해서 다른 출연자들을 제압하는 캐릭터였다면 유재석은 강호동 앞에서 까불대다가 처절한 응징을 받는 캐릭터였는데 공교롭게도 이 공포의 쿵쿵따에서 유재석의 입담이 제대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때가 강호동과의 콤비 플레이가 극에 달한 시기. 사실 두 국민MC의 시발점은 공포의 쿵쿵따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것이다. 특히 강호동은 공포의 쿵쿵따와 강호동의 천생연분이 연속 히트치며 국민MC로 발돋움하는 결정적 프로그램이 되었다.

참고로 지금이야 전 국민적인 호감을 사고 있는 연예인이지만 당시의 유재석은 오히려 다소 경박하고 부담스러운 웃음 소리를 냈었고, 깐죽거리기까지 해서 비호감 이미지로 각인되던 개그맨이었다. 웃음 소리는 지적이 많이 들어오자 차츰 줄여서 현재는 이렇게까지 오버하면서 웃지는 않는다. 하여튼 당시의 공포의 쿵쿵따위험한 초대를 보면 지금의 박명수처럼 상당히 시끄럽고 말 많은 캐릭터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지금도 수다스럽다. 실제로 이 시기 유재석은 자신이 먼저 데뷔했는데도 박명수의 짝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개그맨 생활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 공포의 쿵쿵따, 느낌표 등 맡은 프로그램들이 연이어 성공하면서 버라이어티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유재석은 2003년, 돌연 이휘재, 송은이, 김한석, 정준하 등과 SBS에서 코미디 타운이란 프로그램으로 콩트로의 귀환을 시도햔다.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고 이로 인해 유재석은 6개월 동안 무명 시절의 설움을 다시 맛봐야 했다. 이때의 실패를 교훈 삼아 유재석은 더 이상 절대로 타 장르로의 외도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그래도 태생이 개그맨인지라 꽁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모양이며 2013년도에 했던 인터뷰에서도 잘 나오는데, 다시 개그 프로에 도전할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언젠가 다시 꽁트를 하겠다고 말할 정도이다. 또한 개그맨 후배들을 상당히 잘 챙겨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시 예능으로 돌아와서는 위험한 초대천하제일외인구단, 진실게임 등으로 성공적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2003년 말, 김제동과 함께 KBS 해피투게더를, 강호동과 함께 SBS 실제상황 토요일의 X맨의 MC를 맡게 되면서 다소 막 나가는 컨셉에서 탈피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는 편한 이미지로 진일보하면서 강호동과 함께 유강체제 or 국민 MC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사실 그 당시 MC계 톱이었던 신동엽이 사업한다고 스스로 프로그램들을 줄줄이 자진하차한 영향도 무시할수는 없다. 그리고 그 사업의 결과는...유재석과 신동엽, 그리고 소속사편 참고.

최초의 연예대상 수상은 2005년 KBS에서 해피투게더 프렌즈로 받은 KBS 연예대상. 이후 2006, 2007, 2009, 2010년에 무한도전놀러와로 MBC 평정, 2008년, 2009년에 일요일이 좋다 패밀리가 떴다, 2011년, 2012년에 일요일이 좋다 런닝맨으로 SBS 연예대상까지 가져가면서 방송 3사 연예대상을 모두 수상하였다.특히 2012년까지 8년 연속으로 공중파 3사 연예대상 트로피를 가져간 유일한 사람이다.

단맛과 쓴맛을 다 맛 본 방송 경험 탓인지 지금은 그 어떠한 캐릭터도 소화할 수 있으며 관찰력이 좋아서 타인 흉내도 곧잘 내고[15]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과도 함께 진행을 할 수 있는 진행의 극에 달했다. 게다가 연기력도 뛰어난 편이어서 과거 SBS에 일요일이 좋다의 한 코너인 반전 드라마에서 정준하, 이휘재, 앤디 등과 함께 주연을 꿰차며 다양한 배역을 맡으며 괜찮은 연기를 선보였다.

진행 능력만이 계속 부각되어 개그맨 출신으로서 정체성이 희미해졌었으나 SBS 일요일의 좋다의 옛날 TV에서 심형래와의 콩트 호흡, 무한도전 내의 역할 바꾸기 '체인지'에서 뛰어난 관찰력으로 박명수를 완벽하게 흉내내어 개그 센스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tvn 프로그램 택시에서 나온 바에 의하면 여러 토크쇼 프로그램을 비디오로 녹화하거나 다시보기로 보면서 나온 질문들을 '만약 내가 저 상황에 받는다면 어떻게 답변하면 웃길까'를 항상 연구했다고 한다. 역시 모든 결실은 숨겨진 노력의 결과.
  1. 무한도전 여름방학 특집(2009년)에 나온다. 아버지가 유재석의 뺨을 내리치고 울먹거리며 하는 말 "네 놈이 우리집을 다 말아먹으려고 하는구나!"
  2. 박명수의 평가는 IMF때 너무 무리한 사업 확장을 하다가 아예 말아먹었다고 한다. 물론 장난으로 한 말이다. 애초에 시간대가 다르다. 유재석의 가계가 흔들린 것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이고 IMF는 1990년대 말이다.
  3. 그때 서울예대에 다니던 김슬기가 짧지만 한컷 잡혔다.
  4. 여담으로 덧붙이자면, 같이 방위 근무를 했던 동기가 배우 이정재이다. 여기서 에피소드가 있는데, 유재석과 이정재는 격일로 돌아가면서 카풀로 출근했다고 한다. 이때 당시에 이정재는 모래시계로 급부상하는 신인이었기에 지인들과 술약속이 많았다고 한다. 술이 덜깬 이정재는 자신이 차를 몰고 출근할 차례가 되어도 늦잠을 잤고, 유재석이 오히려 이정재를 모시러(?)갔다고 한다. 이정재가 언급하기로 유재석은 예나 지금이나 착하고 성실한 친구라고.
  5. 현재 최연소 공채 개그맨 타이틀은 SBS 공채 7기 김홍준이 가지고 있다. 1986년 12월생인데 2003년 공채에 합격해서 만으로 17세도 되기 전에 공채 개그맨이 됐다.
  6. 군 전역 후 SBS 6기 공채 연기자로 전환. 공채 동기로 김명민, 류진 등이 있다.
  7. 참고로 이 사람은 봉숭아 학당에서 오서방 아들로 나왔던 개그맨이다. 후에는 사실상 조연전문 탤런트가 되어 영광의 재인을 비롯한 각종 드라마에 조연으로 나왔고 그 인연으로 탤런트 임채원과 결혼에도 성공.(!)
  8. 해당 개그는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을 풍자하는 내용의 개그였으며, 유재석이 어린아이를 흉내내며 손발이 오그라드는 개그를 하였다. 그 개그는 1990년도 당시 CF를 패러디 한 것으로 그 CF에서 어린아이가 나와서 "우리엄마는요"하며 엄마를 자랑하는데 유재석이 그 아이를 모사한 것이다. 그 CF에 나온 아역배우가 김민정이다. 1990년 카스타드CF
  9. 이 일화는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 6번째 탈락자로 유재석이 선정된 직후 나온 '그는 누구인가'(...)에서도 나온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말한 걸 짜깁기한 거 같지만.
  10. 실제로 KBS 개그맨들 중 7기가 가장 오랜 연예활동의 생명을 이어간 사람이 많은 케이스다.
  11. 많은 사람들이 웃기려고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라는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지만 자신이 실존인물이라고 확실히 못박았다.
  12. 미션이 손자, 혹은 손녀와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 간에 끝말잇기를 해서 5단어 이상 성공하는 것.
  13. 여기서도 시작부터 끝까지 귀여운 메뚜기탈을 쓰고 진행을 했는데 그것도 원활한 진행에 도움이 되었다.
  14. 주로 대학교의 제일 높은 계단을 오리걸음으로 올라가기, 산 등산 등 육체적으로 힘든 벌칙이 많았다.
  15. 유거성은 그야말로 박명수와 판박이였다. 정준하를 흉내낸 유중앙 또한 충격. 무한도전 멤버 칭찬에 인색한 박명수가 입을 다물지 못 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