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조광호 |
출생 | 1965년 8월 3일 |
신체 | 172cm, 69kg, A형 |
가족 | 아내 손혜련, 아들 조휘, 조현, 조환, 딸 조하은 아버지 조통달 할머니 박초월 |
학력 | 국악예술고등학교 |
데뷔 | 1994년 1집 앨범 <My First Story> |
소속사 | 제이컴엔터테인먼트 |
사이트 | 인스타그램 |
40대 귀요미
팀포2 스나이퍼
조유비 조관우 조장비 중 둘째
1 개요
레전드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한국의 음악사에서 손꼽히는 유니크한 창법의 소유자
1994년 1집 앨범 'My First Story' 를 발표하여 데뷔하였다.
방송 출연을 하지 않으며 유흥업소 출연을 하지 않고 MR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였으나[1] 2008년 방송에 출연함으로써 방송 출연에 대한 원칙은 깨졌다[2].
자칭 눈 감고 듣는 가수. 외모와 목소리의 갭이 커 그렇다.
2 바이오그래피
기억하나요 우리사랑을그땐 서로의 아픔을 함께 했었죠
이젠 무엇도 남아있진 않지만
하얀 눈내리던 그날의 입맞춤을 기억해요.
-2집 겨울이야기 중-
"가요계에서 내와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두명, 이승철과 조관우이다. 나는 범처럼, 이승철은 매처럼, 조관우는 뱀처럼 노래한다."-임재범-
1965년 판소리의 대가인 조통달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통달의 집안은 예로부터 국악만을 해온 집안으로 조통달의 이모인 박초월 역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 명창이다.[3] 가계의 영향인지 조관우 역시도 어렸을 적부터 판소리, 창 그리고 가야금에 재주를 보여 국악예술고등학교[4]에서 가야금을 전공한다. 하지만 조통달은 아들이 국악을 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래서 국악을 하는 아들에게 크게 화를 내고 국악기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여 결국 국악은 접게 된다.[5]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국 음악을 접해왔으며 국악을 그만 둔 이후 완전히 미국 디스코/펑크 밴드들의 음악으로 빠지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 비지스와 같은 가성 창법을 이용하는 록밴드와[6] 나 Earth Wind&Fire 등 가성을 사용하는 흑인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여기에 감명받은 조관우는 자신만의 가성 창법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것은 이후 조관우의 특징이 된다.[7]
참고로 조관우의 전성기 가성이 6옥타브, 7옥타브라는 음역에 도달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거짓이다.[8] 그를 대표하는 곡인 '늪' 이나 '꽃밭에서' 등을 들어봐도 '늪' 은 높아야 4옥타브까지 올라가고, 8집 imprssion의 수록곡 '그랬죠'가 4옥타브 도샵 이라고 한다. 그의 가성이 여자조차 누르는 음역대를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9] 가성이라면 거들떠도 안 보는 대중음악평론가들에게 조관우가 호평을 받은 것은 단순히 가성으로 노래해서가 아니라 가성을 아름답게 내고 유지할 수 있으며 진성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카운터 테너와는 또 다른 특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성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겠지만 가성은 내는 것은 쉬워도 유지하기는 어렵고 특히 음역의 양극에 다다를 수록(즉 저음한계나 고음한계에 다다를수록) 음은 흩어지고 또 올바르게 내지 않을 경우 성대를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이것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창법으로 50이 다 된 나이까지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가성으로는 세계 제일로 평가받는 머라이어 캐리마저 나이를 먹으면서 목이 상당히 손상된 것에 비해서 독학으로 일반적 카운터 테너가 아닌 팔세토 창법을 개발해서 그 성대를 유지한다는 것만 봐도 조관우가 그냥 날로 먹는 가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10]
1집은 발매 후 130만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히트[11]를 치게 된다. 얼굴을 전면에 내세웠던 기존의 가수들과 달리 얼굴을 가린 사진을 수록하였으며 방송 출연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명 '얼굴 없는 가수' 로 불리게 된다. 이것에 대해서는 MBC <놀러와>에서 조관우 본인이 직접 밝힌 바가 있는데[12] 음반이 불티나게 팔려나가자 TV 출연을 해달라는 방송국과 소속사의 요청에 결국 수락했고 단 한 번 출연한 방송 직후 음반 판매량이 급락했다고 한다. 이 음반에 실린 "늪" 이라는 곡은 이후 조관우의 대표곡으로 꼽히게 되며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의해 리메이크된다. 이 곡은 유부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곡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2011년 조관우가 엠넷의 MIC라는 프로에 출연해 밝히길 자위 행위를 묘사한 곡이었다고 한다(꼬춘 어~ 느새 시들고~♪). 결국 그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종교계 등에서 큰 지탄을 받기도 했으며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되기까지 한다.
이후 2집은 리메이크 앨범인 "Memory" 를 발표하게 된다. 이 앨범은 비공식 추산 320만장, 공식 214만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공식적으로는 3번째, 비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리는 기록을 세우며 1집 이상의 엄청난 히트[13]를 기록하며 리메이크곡 "꽃밭에서" 는 "늪" 과 함께 조관우를 대표하는 곡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2집에 수록된 오리지날 곡 "겨울이야기" 는 CF 음악으로 삽입된 적이 있다. [14]
하지만 1, 2집이 연속으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자와의 불리한 계약으로 인해 조관우 본인은 지하 전셋방에 살며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는 등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15] 이런 상황은 1996년 3집 "My 3rd Story About" 을 발매하고 소속사를 옮긴 후에야 개선될 수 있었다.
이후 3집도 100만장이 넘는 히트를 치지만 4집부터 깊은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특히 대중적인 노출을 꺼리는 그의 특성을 언론에서 선정적으로 비틀어서 여러 추측성 기사 및 루머를 양산했고 전 소속사와의 갈등의 골도 깊어졌으며 음악적으로도 매너리즘에 빠져 음반 판매량에서는 100만장으로 선방했으나, 여러모로 다소 아쉬운 성과를 올리고 만다.[16] 5집의 타이틀곡 '실락원' 은 가사가 자살을 미화한다고 하여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고 그 결과 5집은 35만장을 조금 웃도는 판매고를 올린다.
이후 6집부터 다시 심기일전하여 좋은 평을 받게 된다. 6집의 수록곡인 '사랑했으므로' 는 초심을 되찾았다는 평을 받으며 조관우의 매니아층에서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는다. 이후 2002년부터 당시 유행하던 팝페라를 접목시킨 작품들을 발표하는데 이때 발표한 7집과 8집은 다시 예전 그의 명성을 되찾게 한다.
2012년 새로운 앨범 발매가 계획중이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정도로 예상하고 있는데 팬들은 다시금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7월 15일, 지인이 휘두른 흉기에 목 부위를 찔리는 중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문에 100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는 하지만 목 부위에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에 앨범 작업과 앞으로의 가수 생활에 문제가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일단 성대는 문제 없다니 천만다행.
2013년 새로운 디지털 싱글 '화애'가 발매 되었다.
2014년 EP앨범 'Friday Night' 가 발매되었다.
2014년 세월호 추모곡 '풍등'이 발매되었다.
2015년 신곡 '불꽃'이 발매되었다.
2016년 2월 14일자 복면가왕에 풍물패 컨셉의 '모 아니면 도'로 출연하여 이상한 나라의 에이스와 장가가는 갑돌이를 꺾고 3라운드까지 진출하였으나 작년에 왔던 각설이에게 패하여 가왕결정전에 나가는 데엔 실패하였다.
노래는 물론 더할나위 없이 잘불렀으나 그 외의 장면들에서 본인이 삘춤이라 주장한 이상한 춤을 춘다든가(...) 변조된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계속 투덜댄다든가(...)목소리가 왜이래 진짜 짜증나게 ㅆ... 아재개그를 한다든가(...) 하는 허당스런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며 예능적으로도 본의 아니게 활약하였다.
3 가족
아버지는 판소리 명창 조통달이고, 할머니도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박초월(사망)이다. 형제관계는 1남 2녀 중 셋째로 누나 2명이 있다.
결혼을 두 번 하였는데, 1993년 SBS 공채 탤런트 출신 장연우와 결혼하여 음반 작업을 함께 하는 등 소문난 잉꼬 부부로 세간에 알려졌었다.[17] 아들 조휘[18], 조현[19]을 낳았으나 2003년 성격 차이를 이유로 합의이혼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혼 후에도 친구처럼 지낸다고 하며, 2005년에 발매한 조관우의 EP 앨범 "가을의 기적" 에서 다시 음반 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다. 심지어 현재 아내인 손혜련과 셋이 모여서 함께 식사도 하는 사이라고.
이후 2010년 3월 14일 46세의 나이로 현재 배우자인 10세 연하의 손혜련과 재혼하여 1남 1녀 (조환, 조하은)을 얻었다.[20]
4 배우
2011년 12월 5일 첫 방송한 종합편성채널 JTBC의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에서 첫 연기 도전을 했다. 부도난 연예기획사 사장 역으로 초반에는 거의 야바위꾼(...)에 가까운 이미지였으나 식신 캐릭터로 점점 성격이 바뀌고 있다.
2012년 8월부터 2013년 2월까지 방송된 KBS의 일일시트콤 <닥치고 패밀리>에 황신혜의 전남편이자 박지윤(가수) 다솜(씨스타)의 아버지로 출연하였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에 출연했다. 그것도 카메오가 아닌, 상당히 비중 있는 배역이었다. 여기서 그는 원래 전공하던 국악 실력을 발휘하였다. 자세한 부분은 해당 영화 항목에서 보시길..
5 나는 가수다
본격 나가수의 생존왕. 위기의 중년
소심, 투덜, 엄살, 예민, 징징, 귀여움 등등을 모두 합친 그동안 예능에서 볼 수 없었던 희귀 캐릭터. 인순이의 YTN 인터뷰에 의하면 나가수 내에서 조관우의 별명은 '엄살왕자' 라고 한다.
나는 가수다의 출연설이 돌았는데 건강 문제로 하차한 임재범을 대신해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으나 결국 하필이면 가장 논란이 심한 순간에 JK김동욱의 급작스런 하차로 SOS를 친 제작진에 의해 합류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출연 요청에 당황하긴 했지만 열심히 연습중이라고. 하지만 6월 19일 본방송에서 꼴찌인 공동 6위를 하면서 기대보다 성적이 안 나왔다는 평이 많다[21]
나가수 첫 출연에서 김범수와 함께 처음으로 공동 6위에 떨어졌다. 그날 부자가 나란히 큰 무대에 선다고 긴장해서 들어갔다가 날봉변당한 꼴. 무대가 무대라지만 인터뷰에선 궁지에 몰린 셈이라고 자신을 자학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었던 국악과 자신의 창법을 합쳐 '하얀 나비' 를 부르는 것으로 완벽하게 돌파하며 2위를 차지했다. 2위라곤 하지만 이날 1위를 차지한 YB의 무대가 워낙 흥겹고 신난 노래였기에 곡의 퀄리티에 대한 호평은 조관우에게 쏟아지고 있다. 스콧의 기타줄만 안끊어 졌어도.. 조관우의 '하얀나비'는 임재범의 '여러분', 인순이의 '아버지'에 이어 제작진 선정 감동무대 3위에 오르기도 했다.
퍼포먼스 무대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 나가수에서도 진성을 섞은 <남행열차>를 불러내며 유일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가수. 실제 순위도 '하얀 나비' 를 제외하고는 4~6위에서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이소라의 포지션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덕분에 관빠들은 매 경연이 두렵다 이것이 아쉬운 이유는, 음원에서의 높은 퀄리티가 경연 순위와 연결되어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나는 가수다가 종영된 이후 DAUM에서 투표한 결과 감동무대 best5에 선출되기도 했다.
7월 24일 방송에서는 박미경의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을 편곡하여 순위는 비록 4위에 머물렀지만 이 날 그가 보여준 극한의 가성과 전제덕의 하모니카 연주는 나가수의 무대를 예술적으로 끌어올렸다는 호평을 얻었다. 조관우가 화요일부터 시작된 폭우의 원인이 아니냐는 소리도 있다~ 이 경연 역시, 엄청난 음원 퀄리티에 비해 낮은 순위를 받으며 아쉬움을 삼켰다. 특히 디시엔사이드 나는가수다 갤러리에선 "조관우가 1등 아니면 손가락 자른다" "조관우 오늘 역대급이다. 미쳤다" 와 같은 반응으로 도배되었으나, 1등, 2등 3등을 호명할 때까지도 조관우가 나오지 않자, "조관우 나가수 그만둬도 이해한다" "나같으면 나왔다"와 같은 글로 도배되었다.
7월 31일 5라운드 1차 경연 방송에서는 나훈아의 '고향역' 을 편곡, 5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8월 14일 5라운드 최종 경연에서는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을 편곡하여 불렀는데 이 노래는 듀엣곡이다! 그는 초반부를 남성톤으로 낮춰 부르고 후반으로 진행될수록 톤을 올려부르는 방식으로 솔로로 듀엣곡을 소화해내었고 '하얀 나비' 이후로 오랫만에 4~6위의 성적에서 벗어나 3위를 기록하였다.
가성을 쓰긴 하지만 그 스타일이 전혀 다른 임재범의 '그대는 어디에' 를 불렀을 때는 7위의 굴욕을 맛봤다.
다음 경연에선 김현철의 '달의 몰락' 을 디스코펑키하게 편곡해서 3위에 안착, 또다시 생존하게 되었다. 관우 그릴스? 이 날 대기실에서 조관우의 댄스 율동을 지켜보던 여가수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다른 의미의 여가수 킬러
방송 내에서는 겸손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음악이 경연에 어필하기 힘든 스타일이라 그렇지 이 사람도 음반 판매량이 앨범 천만장을 팔아치운 조용필, 김건모, 신승훈 같은 괴수들 바로 다음에 위치한다(약 700만장 정도). 실력이 부족해서 나가수의 성적이 나쁜 건 아니라는 의미.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게 된 것은 제작진에게 임재범이 조관우를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재범은 자신처럼 방송에 자주 나오지 않는 조관우가 출현하면 좋겠다며 '자신은 범처럼, 이승철은 매처럼, 조관우는 뱀처럼 노래한다' 라고 말했다고. 조관우는 이에 공감하며 임재범은 입을 크게 벌려 통성으로 '어흥' 하는 듯 노래하고 이승철은 먹이를 본 매처럼 쪼아 부르고 자신은 입부터 벌리는 게 아니라 뱀처럼 몸으로 말아서 노래하는 스타일이라고 부연했다.
10월 2일 7라운드 2차 경연에서 최종 7위로 탈락하고 말았다. 명예졸업을 2라운드 앞둔 상태에서의 탈락이라 팬들은 더더욱 울부짖는 중. 경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조관우 본인은 실수[22]를 인정하고 겸허히 탈락을 받아들였다. 원곡의 창법을 생각해봤을 때 조관우에게 딱 어울리는 선곡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가사를 틀리면서 회생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여기에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조관우는 원래는 조용필 스페셜에서 '한 오백년' 을 부를 예정이었으나 제작진의 뜻에 따라 '단발머리' 로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한 오백년' 을 정말 1위를 안할래야 안할 수 없도록 편곡을 하느라 '단발머리' 준비를 많이 못했다고. 본인이 말한 것이라 사실인지는 확인이 불가하나 조용필 스페셜의 선곡이 대본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므로 완전히 픽션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라면 제작진이 형평성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게 된 것이므로 적지않은 파문이 예상된다.
조관우가 탈락하게 된 주된 요인으로는 이제는 호불호가 갈리는 팔세토 창법[23], 어울리는 곡을 좀처럼 찾기 어려운 유니크한 음색등이 꼽힌다. 경연보다는 음원용의 음악적 색깔들로 여겨지는데, 이를 증명 하듯 가수 시즌 1이 끝난 이후 DAUM에서 하얀나비가 네티즌 선정 감동 무대 3위, 남행열차가(경연에서는 5위를 했음에도) 네티즌 선정 다시보고 싶은 무대 BEST5에 올랐다. 평소 나는 가수다의 체제를 부담스러워 한 조관우지만나는 가수다를 통해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등의 추억을 생각하면 나는 가수다에 대해서 시원섭섭함을 느낀다고. 언제나 좋은 음악을 들려주었기에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 후 19대 총선에서 나는 가수다 멤버가 모여 부른 총선 홍보곡에 참여하였는데 잘 보면 다들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는데 혼자만 벗고 있다.
5.1 나는 가수다에서 부른 경연곡
날짜 | 노래 | 순위 |
2011년 6월 19일 | 이별 여행 - 원미연 | 공동 6위 |
2011년 7월 3일 | 하얀 나비 - 김정호 | 2위 |
2011년 7월 10일 | 남행열차 - 김수희 | 5위 |
2011년 7월 24일 |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 박미경 | 4위 |
2011년 7월 31일 | 고향역 - 나훈아 | 5위 |
2011년 8월 14일 |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 조덕배 | 3위 |
2011년 8월 21일 | 사랑했으므로 | 4위 |
2011년 8월 28일 | 그대는 어디에 - 임재범 | 7위 |
2011년 9월 11일 | 달의 몰락 - 김현철 | 3위 |
2011년 9월 18일 | 이름 모를 소녀 - 김정호 | 6위 |
2011년 10월 2일 | 단발머리 - 조용필 | 6위(탈락) |
평균 순위 | 4.64위 |
6 디스코그래피
- 1994년 정규앨범 1집 "My First Story"
- 1995년 정규앨범 2집 "Memory"
- 1996년 정규앨범 3집 "영원"
- 1997년 콘서트 라이브 앨범 Part 1, Part 2
- 1997년 정규앨범 4집 "Waiting"
- 1999년 정규앨범 5집 "실락원"
- 2000년 베스트 라이브 앨범 "파리넬리"
- 2002년 정규앨범 7집 "My Memory II"
- 2003년 정규앨범 8집 "Impression"
- 2005년 EP앨범 "가을의 기적"
- 2006년 베스트 앨범
- 2008년 디지털싱글 "날 버려요"
- 2008년 디지털싱글 "소나기"
- 2013년 디지털싱글 "화애"
- 2014년 디지털싱글 "Maybe U"
- 2014년 디지털싱글 "All for you"
- 2014년 EP앨범 "Friday Night"
- 2014년 디지털싱글 "풍등"
- 2015년 디지털싱글 "불꽃"
- ↑ 그래도 데뷔 초창기에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는 나왔다. 당시 "늪" 말고도 "Because I love you girl" 같은 노래로 청취자와 공개방송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보내버렸다.
- ↑ 정확히는 1990년대에도 특집 콘서트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바 있다.
- ↑ 그래서 아버지는 통달했고 할머니는 초월했는데 넌 왜 이 모양이냐고 까였다고...
- ↑ 중학교 때 조관우는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에 갈 수 있을지도 장담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누군가 조관우에게 연극 대회에서 상을 타면 특례로 갈 수 있다고 해서 조관우는 연극부에 들었고 큰상도 탔다. 그러나 당시에는 연기를 잘해서 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한 군데도 없었고 조관우는 절망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가야금을 가르쳐줘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악고는 음악 분야에서도 서울, 선화예고와 함께 본좌급 학교다.
- ↑ 조관우가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1등만 알아주는 세계이기에 말렸다고 한다. 오히려 재능에 있어서는 천재적이었는데 가야금 3년 커리큘럼을 일주일만에 뗐다고한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소리였기에 과정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고.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도 가야금을 17년만에 연주했는데 과연 가야금을 오랫동안 안 친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수준급의 연주 실력을 보여주었다.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에 출연했을 때는 직접 가야금을 연주하기도 했다.
- ↑ 비지스는 3인의 백인으로 구성된 형제 그룹으로 팝-락으로 시작해서 디스코까지 넘어간 그룹이다. 시대에 따라서 음악성이 많이 갈리는데 조관우가 참고한 것은 'Holiday' 등의 서정적인 팝발라드 시절이다.
- ↑ 참고로 아버지 조통달은 고자 창법이라며 말렸다고 한다.(...)
- ↑ 다만 예능 '승승장구'에 출연해 "전성기때엔 클래식 기타가 제 소리를 못잡았어요." 라고 밝힌적은 있다.
- ↑ 휘슬을 사용하지 않은 가성으로 4옥타브까지 올라간다... 창법이야 다르지만 그야말로 한국의 비타스.
- ↑ 일본의 유명 가수 토쿠나가 히데아키도 리메이크를 많이 하고 목소리도 비슷한 스타일이어서 조관우와 비교되는 일이 잦지만 실제로 토쿠나가는 팔세토 창법을 사용한 목소리가 아니라 그냥 음역대가 높고 얇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 ↑ 다만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모른다. 대체로 100만장 정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130만장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명확치는 않다. MBC 놀러와에서는 130만장이라 나왔다.
- ↑ 17년 가수 생활 동안 MBC 방송 출연이 15번밖에 안된다.
- ↑ 2집은 1집보다 더 통계가 혼란스럽다. 당시 조관우의 소속사가 탈세를 위해 판매량을 거짓보고 했기 때문. 지난 2002년에 조관우 2집의 판매량이 320만장을 넘었다는 보도가 난적이 있다. 참고로 공식통계상 대한민국 가요계를 통틀어서 이 앨범보다 많이 팔린 앨범은 김건모 3집 과 신승훈 5집 딱 두 장뿐이다.
- ↑ 여기 수록된 8곡 중 6곡이 리메이크 곡인데, 다 여자노래다. 심지어 여자노래에서 키를 높여 노래했다.
- ↑ 주위에서는 떴으니 한 턱 내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돈이 없어 도망다녔다고 한다.
- ↑ 발매 당시가 아니라 서서히 스테디 셀러로 자리잡아 나중에 100만장을 돌파한다. 4연속 밀리언 셀러 ㄷㄷㄷ.
- ↑ 탤런트 출신이지만 원래는 조관우와 같은 소속사의 가수 지망생이었다. 결혼 후에는 작사가로 활동했으며 2006년에 본인의 앨범을 내서 가수로 데뷔하기도 했다.
- ↑ 히든싱어 조관우 편에 모창능력자로 나왔다.
- ↑ 불후의 명곡에서 할아버지,아버지와 같이 경연에 나와 피아노를 쳤었고 부모님과 같이 유자식 상팔자에 출연한 적이 있다.
- ↑ 참고로 재혼할 당시 이미 아들을 임신한 상태이고 둘째 조현과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난다. 여담이지만 아버지 조통달 명창은 반대를 했지만 지금은 손주가 넷이나되서 좋아한다.
- ↑ 그러나 이날은 1위와 최하위의 표차가 6%밖에 나지 않는 접전이 벌어졌던 날이다. 500명 중 6%인 30명 차이로 1등을 놓쳤다라고 생각하면 크게 부진한 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 ↑ '단발머리' 에서 가사를 틀렸고 에드리브도 부족했다고 스스로 평했다.
- ↑ 전성기 때만 하더라도 모두를 자지러지게 만드는 마성이었으나 지금은 중후한 팔세토가 되었다. 그 외에도 조관우의 음색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게 많이 변화한 시대 상황도 나름 요인이라면 요인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