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よど号ハイジャック事件.

640x640.jpg
납치 전인 1968년 8월 1일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찍힌 사진.[1]

1 개요

요도호 사건이라고도 한다. 1970년 일본 적군파(赤軍派)라 칭하는 요원 9명이 승객 등 129명을 태우고 하네다 공항을 출발, 후쿠오카(福岡)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소속 보잉 727 여객기를 납치해 북한에 망명한 일본 최초의 항공기 공중 납치 사건이다.

2 과정

2.1 공중 납치 실행

1970년 3월 30일 타미야 타카마로(田宮高磨)등 9명의 일본 적군파(赤軍派)조직은 도쿄발 후쿠오카행 일본항공 351편 요도호(기체 등록번호 : JA8315)를 공중 납치했다. 당시 극좌조직이던 적군파는 경찰서 습격사건 등으로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요도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등 129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들은 일본도와 권총, 폭탄 등의 무기를 들고 승객들을 창가로 몰아세운 뒤 로프로 포박, 기장을 위협하여 북한의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2.2 이타즈케 공항으로

파일:Attachment/20100326org00m040031000p size8.jpg
비행기에서 풀려나는 인질들

이 요구에 기장은 "이 비행기는 국내선이라 북한까지 갈 연료가 없다"고 범인들을 설득하였고(실제로는 북한까지도 갈 수 있는 연료가 충분하였다) 연료의 보충을 위해 오전 8시 58분경 이타즈케 공항(현 후쿠오카 공항)에 비행기를 도착시켰다. 경찰들은 범인들이 국외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위대를 보내 활주로를 막는 등의 공작을 펼치지만 범인들을 더욱 자극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장은 범인들을 설득시킨 끝에 여성, 노인, 어린이들, 환자를 포함한 인질 23명을 풀어주고 다시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하며 이항했다. 대한 해협을 지나는 도중 범인 그룹들은 승객들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읽고 싶으면 빌려주겠다."(…)고 얘기하였는데 그 책들은 적군파의 기관지 '적군(赤軍)', 레닌 전집, 김일성 전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이었으나 승객들 중 책을 빌린 사람은 후에 나오는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뿐이었다고 한다.

2.3 김포국제공항 도착

파일:Attachment/yodo-kinpo-thumb-300x221-1215.jpg
김포국제공항에 주기중인 요도호를 감시하는 한국 군인

요도호는 실제로 38선을 넘었으나 휴전 라인이 완전히 38도선에 포함돼있지 않았기때문에 아직까지 한국령 안에 있었다. 북한으로 도착했다고 생각한 기장은 영어로 "여기는 JAL351편"이라 신호를 보냈으나 응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곧 "여기는 평양 진입 관제"라는 수신이 들어와 지시대로 남쪽으로 회항하였는데 이것은 범인 그룹들을 속이기 위해 한국 측에서 기지를 쓴 것이었다. 망명을 원하면서 정작 북한과 같은 말을 쓰는 한국어조차 전혀 모르던 범인 그룹들은 아무 의심을 가지지 않았고, 인천 앞바다를 거쳐 3월 31일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비상 착륙. 추후 범인들은 그들이 착륙한 곳이 평양이 아님을 안 후, 승무원과 승객을 인질로 잡고 북한까지 안전한 비행 보장을 요구했다.

당시 이 적군파들의 목적은 북한의 체제를 지지해서가 아닌 "일본을 혁명하기 위한 배후지"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북한을 자신들의 군사기지로 만들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북한을 뒤집어 엎어서 자기네 땅으로 만든다는게 아니라, 김일성이 북한 정권을 발족하면서 민주기지론을 내세웠듯이 일본에서 혁명을 하기위해 북한을 전진기지로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매우 비현실적이었으며 실현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래저래 국제 현실을 물렁하게 본 것. 이들의 범행 선언 중에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중2병 이 문구는 최근에 주범들이 개설하여 함께 갱신하고 있는 트위터 프로필 문구에도 쓰여져있는데, 나이가 노년에 들어도 아직까지 철이 덜 든듯 하다.(...)

이들은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해서도 한참동안 속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철저한 위장을 했기 때문. 인민군 복장도 준비하고 '환영 평양도착'식으로 플랜카드까지 걸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적군파 대원들이 북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김포에 도착하고 한참 이후였으며 그 계기는 북한군 장교 복장을 한 한국군 정보 요원에게 '북조선은 지금 경제 개발 운동 중일텐데 올해가 몇 해째냐?'라고 물어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을 보고 다른 이에게 "이곳은 서울인가?"라고 묻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던 군인이 "서울이다"라고 대답한 것을 듣고 그제서야 알아차렸다고 한다. orz. 이건 다양한 설이 있는데 우선 노스웨스트 항공기를 보고 알아차렸다던가, 흑인 미군 병사를 보고 의심을 했다던가 하는 의견이 있다. 또, '긴 닛세이(김일성)의 커다란 사진을 가지고 와봐라'라는 요구에 북한과 적대국이던 한국엔 그런게 있을리가 없었기에 위조 공작이라는 걸 알아챘다는 말도….일단 위에 사진 속 군인이 칼빈을 들고있다

한편 범인 그룹들이 인질을 살해하는 등의 최악의 상황으로 진행할 경우 한국 군/경 측에서는 특전사전투경찰, 헌병부대를 요도호에 투입해 진압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당시의 국군엔 아직 전문적인 대테러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이런 항공기 인질극 상황에 대한 준비와 대응 매뉴얼조차 없던 때라서 만약 무작정 투입됐다면 범인들 뿐 아니라 다수의 인질들도 사망하는 혼란의 참극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2] [3]

2.4 교섭

한국 당국은 범인 그룹들과 영어로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범인 그룹들은 영어조차 잘 모르고 있었기때문에 대화가 성립되지 않아 결국 일본어로 교섭을 시도하였다.(…) 범인들은 다시 바로 평양으로 떠날 것을 요구했는데 멈춘 엔진을 재가동시키기 위해선 보조시동기가 필요했지만 한국 측에선 보급을 거부하여 그대로 서울에서 교착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나온 범인들이었으나 곧 교섭에 응하여 식사등을 넣어주었다. 31일 특별기로 야마무라 신지로(山村新治郎) 당시 운수성 정무차관이 서울에 도착하였고 범인들은 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를 인질로 잡고 79시간 만에 한국을 떠나 북한 미림 비행장으로 도착하여 4월 3일 망명하였다.

3 지옥평양 도착

오후 7시경 범인들은 38도선을 넘어 북한의 평양순안국제공항으로 도착하였다. 북한 측은 무기 등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여 무기들을 놓고 비행기를 내렸으나 일본도, 권총, 폭탄 등은 전부 장난감이었다는 것이 후에 알려졌다. 이뭐병?

요도호에 타고 있던 범인 그룹 9명, 승무원 3명, 인질인 야마무라 차관, 총 13명은 북한 당국에 의해 신원이 확보되었다. NHK가 오후 7시반에 내보낸 특별 방송 '요도호 승객들 돌아오다'는 40%가 넘는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애초에 북한은 "인도주의적 차원에 따라 범인 그룹들을 뺀 승무원과 기체는 돌려보내겠다."고 했으나, 요도호가 도착하자 곧 말을 바꾸어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승무원과 기체의 빠른 송환은 보장할 수 없다."고 발표하여 일본 측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결국 한 발 물러나 꼬리를 내린 북한은 다시 "인도주의적 관점에 따라 승무원과 기체의 송환을 행하겠다."고 입장을 번복. 그놈의 인도주의 참 좋다?

다음날 범인들을 제외한 모든 인질들은 요도호를 타고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십년이 흐른 1980년대에 주모자등 3명이 사망하고[4] 당시 16세였던 1명은 1988년 일본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 유일하게 체포돼 형기를 마치고 석방됐다. 1명은 2000년 6월 태국에서 달러위조 혐의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돼 재판을 받았다.

일본 공안당국은 현재 북한에는 나머지 4명의 범인과 일본인 처[5], 20여명의 자식들이 살고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이들이 납치범(테러리스트)이므로 인도해 줄 것을 북한에 꾸준히 요구해 왔으나 북한측은 이를 거부해 왔다. 그러나 2001년부터 북한은 요도호 납치범 가족의 귀국을 허용하여, 몇차례 귀국이 이루어졌으며, 2004년 7월 북한은 요도호 문제는 일본 정부측과 이전의 적군파 구성원들 사이의 문제라며, 납치범을 일본으로 보낼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한국 정부는 수년 전 만경봉호를 통해 북한으로 수많은 재일 동포를 북송시킨 것에 대해 일본을 마음놓고 깔 수 있게 되었고[6] 일본은 한국과의 외교 교섭에서 커다란 빚을 지게 되었다.[7]

당시 요도호 탑승자 중의 한 명인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는 1911년생으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친왕을 뺨치는 벰파이어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현역 의사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요도호 사건 관련의 방송에서 이 히노하라가 당시 피랍된 기내의 상황 설명에 증언자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서울에 협상단으로 도착해 인질로 보내졌던 야마무라 신지로는 일본으로 귀국하자마자 평생 까임방지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농림수산성 장관을 지내는데…. 이후 중의원 당선도 되고 잘나가다가 1992년 외교사절로 재방북을 하루 앞둔 때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차녀의 칼에 찔려 사망하게 된다. 인생무상...

4 북한으로 망명한 적군파 조직원

0302_03.jpg

  • 타미야 타카마로
  • 코니시 타카히로 - 현재도 북한 거주중. 국제지명수배중이다. 타미야 사망 뒤 멤버들의 리더격인듯 하다.
  • 오카모토 타케시
  • 타카나 요시미 - 북한을 벗어나 타이 등에서 범죄에 가담하다가 2000년 일본에 송환되어 수감중 2007년 병으로 사망했다.
  • 우오모토 키미히로 - 현재도 북한 거주중. 일본인들을 북한으로 납치하는 북한 공작원 활동에도 관여하여 인터폴에서 국제지명수배중이다.
  • 와카바야시 모리아키 - 북한 거주중. 2010년 일본의 어느 사이트에 'ポン太さん'[8] 이라고 불리는 드러머의 추모글을 올렸다. 부인은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인 납북 사건의 용의자로 국제 지명수배되어있다.
  • 아카기 시로 - 북한 거주중. 현재 인터폴에서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 요시다 킨타로 - 1985년에 병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지만, 상세한 것은 불명이다. 북한의 악명높은 정치범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 시바타 야스히로 - 사건 당시 16세(고2)로 나이가 제일 어린 멤버였으며 85년 타미야 타카마로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돈과 사람을 모집하라는 지령을 받고 극비 귀국, 타인으로 변장하여 공작원 활동을 펼쳤으나 85년 위조여권 혐의로 체포. 복역 뒤 현재는 오사카에 살고있다. 자녀들은 한참 후인 2004년 경 일본으로 귀국했다.

북한에서 낳은 범인들의 자녀들은 현재 전부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5 적군파 주범들의 근황

Zlazztd_D.jpg
트위터 프로필 사진에 있는 최근 모습.

최근 적군파 범인들이 북한에서 트위터를 개설한 사실이 알려졌는데, 북한 내에서 인터넷에 활발히 접속할 정도로 매우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위터 글에 의하면 일본라디오TV 방송도 자유롭게 듣고 보고있으며 미국 등의 외국 영화와 매체 또한 자유로이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실은 직접 업로드가 아닌 그들의 지원자라는 인물에게 메일로 올릴 글을 보내고 다른 이들의 답글이나 질문도 메일을 통해 송신하는 방식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원자안 시이노 노리타니(椎野礼仁)[9]2015년 현 리더인 코니시 타카히로가 NHK 뉴스를 통해 아랍의 민주화 운동에 트위터가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을 보고 '트위터를 해보고싶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트위터 프로필에는 '1970년 적군파에 의한 yodo호 하이잭.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라며 북한에 건너간지 40주년, 몸도 yobo yobo, 납치 혐의로 yobo yobo, 하지만 yodo는 yodo! 뭐든지 들어&얘기해주세요. 무엇이든 받아들이고&대답하겠습니다. 납치의혹과 귀국, 북한에서의 생활 이것저것, 일본 얘기는 뭐든 가능합니다"라는 어딘가 정신나간 문구가 쓰여져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에서도 아직 정신을 못차린 것 같다. 트위터는 생존해있는 요도호 멤버들과 국제지명수배된 그들의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글을 올리고있고, 글 마지막 문단엔 글쓴 본인의 이름을 써넣는다.

2016년 4월 15일자 트윗으로 분명히 하이잭 사건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소중한 건 훈련이다. 하지만 지금이니까 말할 수 있어. '낙원'따윈 모르지만 북한에 온 것은 정답이었다.라는 글을 올려 충격과 공포를 주고있는 중.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

또한 "당신들이 북한에서 골칫거리 취급 받는 건 알고있나요?목숨이 남았을 때 귀국하는 게 어떨까요"라는 현자일본인의 질문에 북한에 민폐만 끼쳐 죄송할 따름이다. 한국일본에게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한 요도호 사건의 재평가를 하루라도 빨리 실현하기 위해 귀국하고싶다 라는 글을 올리거나 "북한에선 의료교육이 우리 망명 외국인에게도 모두 무료라 감사하다", "매스컴은 20년전 비참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 정보만 계속 내보내고 있다"라는 등 북한에서의 생활을 찬양하는 트윗을 올리며 일본인들에게 각종 어그로를 끌고있는 중.(...)

'안락한 망명객으로 (북한에서) 평생 살 생각은 없으며 귀국하는 게 목표'라는 글을 보아 일본으로 되돌아 가고싶어하는 것 같긴 하다. 돌아가면 깜빵행이다 거기서 살다 뒤지지 그래 일본의 반응은 "돌아오지말라"며 매우 싸늘한 분위기다. 참고로 현재 살고있는 곳은 평양의 '일본인 마을'이라고 적혀있으며 납북 일본인들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있는 것은 확실하다.

6 트리비아

  • GTO 애니메이션 38화에서 오키나와 수학여행 당시 오니즈카 에이키치가 아마쿠사 시로의 보물을 찾는답시고 학생들을 태우고 달린 배의 이름이 요도 호다.(...) 이 사건에 연루된 비행기 이름의 패러디인 듯. 어느 정도 뜻이 통하는게 자기 보물 찾겠다고 학생들을 이 배에 태우고 무인도로 납치데려가서 거의 반강제로 노역을 시키는 터라......
  1. 해당 기체는 1965년일본 항공에 인도된 기체였으며 등록 번호는 ja8315.1975년까지 일본 항공이 운용하다가 해외로 매각했다.
  2. 한국의 전문 대테러부대인 특전사 707특임대나 경찰특공대는 1980년대에 창설되었다. 그리고 707특임대 이전에도 특전사에 606부대(1975년 창설된 대테러 및 청와대 경호부대)와 27특공부대(1979년에 창설된 청와대 경호부대)가 있었지만 이 사건이 발생한 1970년도엔 이들 부대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때다.
  3. 그리고 이 1970년경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대테러 부대라는 개념조차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최고의 군사 선진국인 미국에서조차도 대테러부대는 아직 없었다. 오직 세계에서 가장 앞서갔던 특수부대인 영국의 공수특전단 SAS 정도나 대테러훈련을 하며 대테러분야를 막 개척하고 있었던 시절이다.
  4. 항간에는 이들 중 몇몇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는데, 몇몇 사망자는 북한에 적응을 못해서 나중에는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져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5. 이들은 전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들이었으며 북한까지 오게 된 경위는 불분명하였다.
  6. 위에 설명한대로 북한이 자기가 한 말도 번복하는 추태를 보임으로써 북송이 인도주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7. 다시한번 말하자면 결국 대부분의 인질을 구출한 곳은 서울 김포공항이다.
  8. 일본의 유명 스튜디오 뮤지션. #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며 다양한 뮤지션들과 작업했다. 와카바야시 모리아키로 60년대 후반 하다카노라리즈라는 밴드의 베이스 주자였고 교토 출신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근데 지금도 활동중이라면 살아있는 사람을 추모했다는건가?
  9. 대학생 시절 신좌익운동을 펼쳤으며 평양에 자주 드나들며 요도호 멤버들과 자주 교류하는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