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두산을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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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白山/ 长白山 Chángbáishān (창바이산)
밑에 표기하겠지만, 중국만의 명칭이라고 하긴 뭣한 명칭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까지는 '백두산'과 '장백산'이라는 명칭을 혼용해왔으며, 《조선왕조실록》과 《성호사설》에도 등장한다. 물론 오늘날에 와서는 들을 일이 없고 무협소설에서나 가끔 보이는 수준.
김수현과 전지현의 헝다생수 광고 원산지 표기논란이 일어났다. 현재 장백산의 가장 오래된 표기는 세종 13년의 실록이다. 다른 자료가 있으면 추가바람,[1] 조선시대에도 스스로 백두산과 장백산을 혼용해 부른 기록이 많다. 뿐만 아니라 백산이라고도 썼는데 이들 뜻이 다 흰머리산, 긴 흰산, 흰산이라는 뜻으로 서로 비슷하다. 한국의 지리시간에서도 산맥을 가르칠 때 백두산이 포함된 산맥을 백두산맥이 아니라 장백산맥으로 가르쳤고, 북한에서도 김돼지 "김일성 장군의 노래"의 가사에서 "장백산 줄기줄기.." 운운 한다.
현재 백두산의 소유권이 중국과 북한에 반반씩 있으므로, 이전에는 백두산과 장백산 모두 같이 썼고 별 문제 없었으나, 근래 동북공정 때문에 한국에서는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 KBS 스페셜에는 백두산을 오로지‘중국의 영산’으로만 만들기 위해 각종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의 산으로 규정되고 있는 백두산 공정 실태를 밀착 취재했다. 관련 유튜브 영상 관련 유튜브 영상 2
조중변계조약으로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을 나눠 소유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에 통일시애초에 조중변계조약을 승계 안하면 통일이 안돼변계조약을 충분히 여러방향으로 이끌어오는 근거가 된다. [2]
북한이 협정을 유리하게 맺었다는 근거를 청조에 두고 있다면 우린 이보다 더 오래전부터 백두산을 영토로 사용해왔다.백두산의 영토로써 실효적인 지배의 기간이 우리가 중국보다 더 오래 전 부터 더 오래동안 지배했다는 역사적 근거는 전혀 없다.[3][4]
이미 김수현-전지현 생수문제만 해도, 생수 이름에 창바이산이라고 붙은 것도 아니고, 원산지 표기가 창바이산이라고 해서 문제가 불거진 것인데, 이를 가지고 중국측에서 백두산을 자국 영토라고 우긴다고 해석하는 건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이다. 만약 원산지 표기를 백두산이라고 했으면 한국에서는 더 난리가 났을 것이다.
백두산을 뜻하는 장백산 이외에 동명의 산에 관한 기록도 있다. 천지가 있는 백두산과는 달리 중국 방향의 북쪽으로 더 들어가서 장백산맥 줄기의 또 다른 산이 장백산이란 얘기다. 그리고 백두산 남쪽, 그러니까 장백산맥과는 상관없는 훨씬 남쪽인 함경도 지역에도 장백산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당시의 이 기록에는 함경북도 경성군에 장백산이 있다고 한다.
2 열혈강호에 등장하는 지명
정파의 성지. 정파 최대의 문파 현무문의 문주였던 검황 담신우가 현무문을 해체한 후에 이 곳에 지내게 된 후로 정파의 성지처럼 여겨지고 있다.
담신우를 쫓아 옛 현무문의 무사들이나 검황의 가신들은 장백산 인근에 무리를 지어 마을을 형성해 살아가고 있다. 한때 잘나갔던 정파의 무사들이 검황을 따라 은퇴하여 약초를 캐거나 농사를 짓고 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유명 세가의 자식들을 '돈 받고'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 중에는 진짜로 검황에게 매료되어 따라온 자도 있지만, 검황이 곧 은퇴를 번복할 것이라고 믿고 현무문이 재건되면 공신으로서 완장질을 할 목적으로 잠시의 고난을 감내하고 따라온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무림에 복귀하지 않는 검황에게 불만을 갖고 신지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은석우 총사의 계략과 한비광 및 매유진 등의 활약으로 인해 배신자들은 거의 몰살당했다.
현재는 장백산 인근의 정파 배신자들도 전부 숙청하기는 했지만 장백산의 손실도 상당히 입은 상태다.
2.1 장백산 소속 인물
- 백리향
- 공손벽
- 장모주 : 장백산 배신자들의 수장격. 은석우한테 당함.
- 설영태 : 장모주와 함께 배신에 가담. 한비광한테 당함.
- 제일경 : 논검당에서 은신술로 알아주는 고수.
- 왕운 : 논검당 사범. 괴개를 죽였다.
3 사망유희의 이소룡 대역
원래는 홍콩의 사업가였으나 이소룡과 외모가 흡사해 사망유희의 이소룡 대역으로 발탁되었다.인용 오류: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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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에 '2000년 전 쓰인 《산해경》에도 나온다.'라고 써있었는데 산해경엔 '장백산'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불함산'이 나오는데 이 불함산이 장백산과 동일시 되면서 오해가 생긴 듯 하다. 즉, 중국이 2000년 전부터 그렇게 불러왔던 것은 확실히 아니란 소리
- ↑ 다만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북한을 국가로 승인한 상태이기에 이것이 실질적으로 근거가 되기는 힘들다.
- ↑
청일간도협약은 을사조약이 무효이니 원칙적으로 무효가 되고 그보다 오래 된 백두산정계비는 청나라신하 목극등이 일방적으로 세워놓고 갔다는게 조선측 입장. 실제 토문강 같은 경우 중국은 두만강으로 보나 한국은 다르게 보고 과거의 지명과 현재의 지명을 이어줄 연결점을 찾아야 하는데 전혀 고증이 되지 못하고 있다. 덧붙여 까마득한 남북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실효성을 들먹이는게 아닌 바로 이전 17~19세기 실질적 지배를 조선이 해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 이 시대 조선인의 터전은 지금의 한반도 경계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다.위의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일방적인 주장이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조정도 백두산 정계비의 실효성을 인정했다. 더군다나 토문강의 문제는 정계비를 세울 당시 지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발생한 일이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조정이 이 문제로 인하여 심각하게 논의를 하는 것이 숙종실록에 분명히 실려있는 사실이다. 즉 일방적으로 백두산 정계비를 청나라가 세웠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거기에 이후 발생하는 간도의 영토분쟁은 지류파악을 잘못 한 일에서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실록을 보면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오히려 정계비의 오류를 이용하여 영토분쟁을 일으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백두산 정계비는 위의 일방적인 주장대로 한반도 경계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나 아주 명백하고 심각한 오류가 있었으며, 이 오류로 인하여 조선은 조정에서 회의를 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며 간도 지역이 조선의 영토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다. 허나 후에 조선은 노선을 바꾸어 정계비의 오류를 이용하여 간도지역의 영토 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자세한 상황은 간도를 참고. - ↑ 위의 주장과는 별개로 백두산이 17~19세기 조선의 영토였다는 분명한 역사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백두산 일부는 영토로서 영유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그것이 백두산 전체를 커버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영조는 백두산에서 제사를 지낸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바라보며 백두산 근처의 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자국의 영토에 가지 못 하는 왕이 있던가? 애초에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이라는 개념으로 봐야하지, 영토의 개념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중변계조약을 김씨조선의 태조가 중국에 팔아먹었다는 카더라가 정설인양 굳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백두산을 영토의 개념으로 분명히 인지한다기 보다는 영산이기에 막연히 우리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허나 역사적으로 백두산은 여진족의 영산이기도 하며 우리가 백두산 전체를 영토로 영유한 시기는 남북국시대로 거슬로 올라가는 것이 더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