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Henri Fabre(1823.12.22 ~ 1915.10.11)
나는 살아있는 것을 연구한다
프랑스의 곤충덕후곤충학자이자 박물학자. 일명 곤충학의 아버지.
프랑스어 식 발음으로는 r발음 문제로 엉히 파브흐가 맞겠지만...
1 유년에서 청년 시절
프랑스의 남부 지방인 생레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여서 돈이 많이 없었다고 한다.[1] 아버지는 아들인 앙리가 그저 농부가 아닌 착실하게 평범하게 살아가면 좋겠다는 순박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파브르는 4살 무렵 말라발의 할아버지 댁으로 갔고[2][3] 학교에 들어갈 나이인 7살에 생레옹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가난 속에 파브르는 장난감마저 만져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파브르는 마을 앞에서 흐르는 시냇가에서 노는 걸 좋아했는데, 이때부터 싹수가 보여서주변의 벌레들을 관찰하며 즐겼다고 한다. 나중에는 벌레들을 키우기도 했다.[4] 하지만 계속 되는 가난 때문에 파브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객지에 나가서 돈을 버는 상황이 된다.
철도 막노동업을 비롯하여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학구열이 뛰어난 청년이었던 파브르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해서[5][6] 19살에 초등학교 교사 임용 시험[7]으로 합격하여 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그 후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1849년에는 또 중학교 화학교사가 되었고 또 4년 후에는 고등학교 물리교사가 된다.3단 진화
물론 이때도 자연과학에 대한 공부는 쉬지 않고 했던 모양이다.[8] 오쿠모토 다이사부로가 지은 8권짜리 파브르 곤충기에는 동료 교사들이 파리를 연구하는 파브르에게 '파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2 곤충학자가 되다
1854년 겨울, 파브르는 레옹 뒤프르(1780~1865)의 소책자를 읽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크게 감명을 받아서[9] 곤충학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인 1855년에 노래기벌을 연구하고 발표했으며, 얼마 안 가서 아비뇽의 르키앙 박물관장(Musée Requien)으로 임명된다. 이때 박물관장인 식물학자 르키앙의 제자로 많은 것을 배웠으나 얼마 안 가 르키앙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후 탕동 교수 밑으로 들어갔다. 여러 연구[10]로 1868년에는 나폴레옹 3세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승승장구 했으나, 관학파의 비난과 공격으로 인해서 교단과 박물관장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11] 그렇게 물러난 파브르는 과학 보급서를 저술했지만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빈곤 속에서 허덕여야했다.
파스퇴르가 그의 집에 찾아온 적이 있다.[12] 그런데 파브르를 찾아온 파스퇴르는 누에고치 안에 뭐가 들었는지조차 몰랐고헐 파브르는 파스퇴르가 누에고치를 챙겨가는 걸 허락했다. 파브르는 파스퇴르가 자신이 모르는 점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솔직히 밝히며 열정을 보이는 태도에는 감동했지만, 도시에서 부유하게 자란 학자답게 가오거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빚 때문에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무렵 생레옹에서 오랑주로 이사했고, 후일 노년기에는 세리냥의 알마스로 이사해 주변에서 곤충 연구를 이끌어나갔다. 아내는 마리 세자린 빌라르, 마리 조세핀 도들로 마리 세자린은 파브르가 젊을 무렵[13], 마리 조제핀 도들은 파브르의 노년기 시절[14] 아내였다.
이런 가난 속에 영국의 철학자이자 교육부 장관이던 존 스튜어트 밀이나 찰스 다윈[15]과도 편지를 보내 친하게 지냈다. 특히 부자였던 밀에게는 3천 프랑의 돈을 빌린 적이 있는데 어린이 곤충 도서를 쓰면서 이 책이 제법 잘 팔려서 받은 인세로 몇 해에 걸쳐 기어코 이자까지 내주면서 깨끗하게 갚았다. 밀이 이자는 안 내도 된다고 했음에도 이 돈으로 나와 내 식구가 살 수 있었기에 작은 성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는 다윈이 보낸 편지에서 "벌이 얼마나 집을 잘 찾는지 아나? 벌집에서 최대한 멀리 벌을 내보내도 반드시 집을 찾아온다니까." 이런 편지를 보고 실험을 했는데 생활이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탓에 집 근처에 있던 벌집에서 벌을 따로 잡아다가 아침부터 멀리 뛰어가서 먼거리에서 벌을 풀어주고 집으로 돌아오나 실험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멀어도 벌이 잘 찾아오자 심지어 천막까지 가지고 며칠 동안 야영가듯 멀리 최대한 걸어가서 거기서 벌을 풀어서 벌이 오는 속도 및 방향을 연구하기도 했다.[16]
하지만 개인적으로 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은 전면 부정했다. 하지만 다윈도 파브르도 이 점으로 서로 싸우거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인 파브르로서는 신앙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의 관찰에 의거한 논리로 반박하였다. 곤충의 행동에는 학습이 아닌 본능밖에 없는데, 그 본능이란 게 곤충의 기본적인 생존은 물론 몇몇 경우에는 번식에까지 필연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나니벌, 호리병벌 등 사냥벌의 번식인데 이들은 애벌레의 먹이를 잡아 마비시켜서 애벌레의 먹이를 만드는 곤충이다. 그런데 마비에 실패해 죽어서 썩어버리거나 혹은 도로 살아나 버리면 애벌레의 생존은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저히 학습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경지의 행위를 파브르는 이것은 타고난 본능에 의한 것이라 단정지었다. 번식자체가 되지 않는데 자연선택은 커녕 종의 생존자체가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다윈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로 당시의 진화론 연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이었다.[17]
3 곤충기
사실 파브르를 가장 괴롭혀 온 건 가난뿐이 아니었다. 위에 언급한 동료 교사들의 경우처럼 파브르는 곤충 연구를 하면서 항상 주변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고, 한때는 오랑주에 살 때 자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땅 주인이 집 앞의 플라터너스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자 그로 인해 마찰을 빚기도 했다.[18]
다 큰 어른이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만 보는 걸 보고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하기도 했고,지금도 그렇지만 위에 언급되었던 벌의 귀소본능을 실험하기 위해 멀리 나간뒤 벌을 어지럽게 해서 방향감각을 상실시키겠다고(...) 통에 넣어 빙글빙글 돌리는 걸 보고 미신에 빠져 굿을 지내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1868년에는 친하게 지내던 교육부 장관 뒤뤼이가 바로 파브르와 같이 얽혀서 억울하게 해임당한 것과 같이 그도 고생을 해야했다.
이 당시에 파브르는 여성들에게 식물학이나 곤충학도 강의하여 제법 인기를 모았는데, 당시만 해도 여성에게 이런 고등교육은 보기 안 좋다고 하던 보수층이 딴지를 걸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식물의 유성생식 강의(꽃의 수분)가 저질이라고 이걸 빌미로 강의 자리도 죄다 취소되고 뒤뤼이까지 모가지당하게 된 거였다.
이렇듯 다른 사람들과의 시선과 마찰에 시달려야했던 파브르는 거처를 세리냥의 알마스 지역으로 옮겼다. 그곳으로 이사한 이유는, 그 집 앞의 넓은 벌판이었는데, 넓기만 하지 엉겅퀴와 수레국화 등 온갖 잡초만 무성했던 곳인지라 농사용으로는 쓸 수 없는 황무지였다. 그러나 파브르에겐 넓은 자기 땅에서 남들의 방해없이 온갖 곤충 연구를 하기엔 더할나위 없던 곳인지라, 단숨에 헐값으로 땅과 집을 사버리고! 세리냥으로 이사를 하게된다. 이후 그는 이 쓸모없는 땅에 알마스 (황무지, 불모지)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여기서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살았는데 1891년에는 아내를 병으로 여의고 근처에 매장하여 틈만 있으면 아내 무덤을 자주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곤충기를 출판했다. 10권으로 이루어진 이 곤충기는 그 당시에 있던 모든 곤충학의 정수라고 불릴만 할 정도였다. 이것을 계기로인지 파브르는 다시 급격히 인기를 얻게 되고, 나중에는 1910년에 파브르 후원회가 설립되며, 또한 스톡홀름 학사원에서는 린네상을, 프랑스 정부에서는 훈장과 연금을 수여하는 등 다시 인기를 얻게 된다. 노벨상은 몇번 후보에 오르는데 그쳤다.
하여튼 이렇게 말년에야 겨우 그 공로를 인정받은 파브르는 이후 안락한 여생을 살았는데, 1913년 90세 생일에는 전세계 각지에서 축하해줬으며, 각종 훈장이나 표창장도 받았지만 프랑스 아카데미에서는 파브르를 인정하지 않아 죽을 때까지도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았기에 이를 아쉬워했다. 그의 생일에는 파랑새 작가인 메테를링크라든지 유명인들도 손수 찾아와 축하해줬다.
1915년 요독증으로 92세 나이를 일기로 눈을 감는다.
4 이외
평생을 바쳐 곤충을 포함한 절지동물들을 탐구한 학자이지만, 정작 곤충들과 절지동물 입장에서는 이 양반이 싸이코패스+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보일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파브르는 곤충기를 집필하기 위해 주변의 벌레들을 잔뜩 잡아와서는 가둬놓고 혹사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실제로도 수많은 곤충들을 살아있는 채로(...) 채집해 관찰했고, 심지어 전갈은 두2마리를 풀어놓고 싸움을 시켰다.[19] 하지만 이때는 전갈이 자살한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곤충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게 없던 때였기에 상세한 관찰을 하기 위해서였다.
곤충기 이외에도 식물에 관심이 많아, 식물기를 저술하였다. 원래는 3부작으로 계획되어있었으나, 출판사에게 거절당하거나 당시 빈곤한 사정도 있어서 결국에는 <나무의 역사> 단 한 권만 출판되었다. 이후에서야 다른 시리즈인 <씨앗과 열매>가 추가되어서 <La Plante>로 다시 출판되었다.
국내와 일본에 나와 있는 책들은 초판이라 볼 수 있는 <나무의 역사>를 번역한 것이라, 완전하지 않다. 최근에서야 국내에서 파브르 식물기 원본을 풀어쓴 책인 <파브르 식물 이야기>와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곤충기 수준으로 다양하고 자세한 식물의 구조와 특징을 29장의 차례에 걸쳐 저술했다. 비록 곤충기보다는 많이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국내에서 2014년 교양필독서 100선에 들을 정도로 그만큼 좋은 책이다.
시집을 내기도 했다. 직접 관찰한 곤충들과 일상, 아들 폴이 등장하는 시가 대부분.[20]
늘그막에는 비행기 연구에도 참여했는데 1910년 87살 노령임에도 글라이더를 설계하여 잠깐 하늘을 날아보기도 했다.
파브르에 관한 전기는 청년사에서 나온 [파브르 평전 : 나는 살아있는 것을 연구한다] (마르틴 아우어 지음/인성기 옮김)이 있다. 시중에 나온 파브르 관련 저서 중 가장 사실적이고 세심한 묘사를 보여준다.[21] 또 최근에는 아동티에서 벗어나 좀더 고증에 맞춰진 파브르 위인전도 나와있으니 찾아보자.- ↑ 당시 시대상으로 나폴레옹 1세가 죽은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빼앗겼던 귀족과 성직자의 권력이 되돌아왔고, 시민들은 또 다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집은 그나마 잘사는 집이었고 빵도 없어 자기 밭에서 감자를 캐먹는 집이 대다수였다고.
- ↑ 할아버지는 부농이라 살 만했고,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어머니가 도저히 아이를 둘이나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가로 보낸 것이다.
- ↑ 이 무렵 그의 남동생 프레더릭 파브르가 태어났다. 형과는 다르게 변호사가 됨
- ↑ 다만 생계유지에 바빴던 파브르의 부모님은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파브르가 가지고 온 동물들을 버리기도 했다. 나중에 파브르는 그 당시에 당연한 말이었다면서 회고한다.
- ↑ 다만, 파브르는 공부에 기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집을 나와 막노동일을 하기 이전까지 성당에서 복사를 서며 학비를 면제받으며 왕립학원, 레스킬 신학교를 다니며 라틴어에 능통하게 되었었고, 이것이 사범학교의 근로 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게 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 ↑ 라틴어에 능통한 게 지금으로 따지면 영어를 문법, 회화 모두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무렵에는 학계에서 라틴어의 중요성이 매우 높았다.
- ↑ 정확히는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의 근로 학생 선발 시험이다.
- ↑ 곤충, 화학, 수학은 그의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브르가 화학실험을 할 때에는 학생들보다 자신이 더 열정적이었으며, 아이들과 야외수업을 하면서 벌집의 꿀을 나눠먹기도 했다. 파브르가 화학교사를 맡았던 허름한 중학교는 파브르 덕분에 명성이 올라갔다.
그래도 교사는 찬밥신세였다. - ↑ 레옹 뒤프르의 논문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기보다는 곤충의 생태를 연구하는 학문이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명을 받았던 듯 하다.
과연 곤충덕그리고 뒤푸르의 벌의 마취 능력에 대한 가설을 뒤집었다. - ↑ 꼭두서니에서 알리자린을 추출하는 방법이나 각종 식물, 버섯, 곤충 연구 등이 주요하다.
- ↑ 이런 상황에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교육부 장관 빅토르 뒤루이가 실각한 것이 좀 컸다.
- ↑ 당시 유행하던 누에의 미립자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를 위함이었다. 근방에서 곤충에 대해 빠삭한 사람이 파브르였기 때문에 그를 찾아온 것. 미립자병으로 인해 당시 양잠산업이 망해 버릴 상황이었던지라 해결이 시급했다.
- ↑ 이때 낳은 아이 중 2명은 금방 죽었다. 아들 쥘이 죽은 이후 파브르의 심경은 원본판 곤충기 1권과 2권을 찾아보라.
- ↑ 이때 태어난 자녀가 폴과 안나
- ↑ 벌레나 식물 연구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서 벌이나 식충식물 관련 책자도 썼다.
- ↑ 벌을 통에 담아서 방향감각을 상실하도록 빙빙 돌린 후에 풀어준 후 돌아오는 개체수를 관찰하는 실험을 한 적도 있다. 참고로 이 방법은 다윈의 아이디어다(...)
- ↑ 정작 다윈은 자신의 저서에서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다른 애벌레를 파먹고 자라는 벌을 왜 창조했는지 모르겠음'이라고 기생벌에 대한 감정 섞인(?)평을 내렸다. 현대 생물학에서 진화론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파브르의 냉철함과 다윈의 감성적인 면이 다소 아이러니해 보이기도 한다.
- ↑ 오쿠모토 다이사부로 저술의 곤충기에서는 이 사건이 파브르를 세리냥으로 이주하게 만든 계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르틴 아우어의 파브르 평전에서는 사실 이보다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연구할 수 있는 한적한 공간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 ↑ 전갈 독이 얼마나 강한지 보려고 사마귀나 다른 벌레를 싸움붙이기도 했다. 물론 거의 다 관광당했지만.
- ↑ 후일 파브르가 유명해졌을 때 찾아오는 사람은 문인이 대다수였다. 현재도 파브르가 사는 알마스 지역에서는 파브르를 곤충학자보다 철학자나 문인으로 보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 ↑ 파브르가 늘그막에 시집을 냈다거나, 물리, 화학 교사였다거나, 수학, 철학, 자연과학에 큰 관심이 있었다거나, 가족관계, 동생과의 편지 내용, 진화론에 대한 관점 등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파브르의 일생을 잘 풀어놓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