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Stuart Mill (1806년 5월 20일 ~ 1873년 5월 8일)
It is better to be a human dissatisfied than a pig satisfied; better to be Socrates dissatisfied than a fool satisfied. And if the fool, or the pig, are of a different opinion, it is because they only know their own side of the question. The other party to the comparison knows both sides.(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바보나 돼지가 다른 의견을 가진다면 이는 오로지 자기 입장으로만 문제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간이나 소크라테스는 문제의 양쪽의 입장을 다 이해한다.)[1]
-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론≫[2], 1861년 [3]
One person with a belief is a social power equal to ninety-nine who have only interests.(신념을 가진 한 사람의 힘은 이익만을 좇는[4] 아흔아홉 명의 힘과 맞먹는 사회적 힘이다.)[5]
- 존 스튜어트 밀, ≪대의정부론≫[6], 1861년 [7]
1 개요
영국의 경제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정치가, 문학 평론가. 공적을 보면 먼치킨급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사회주의의 시조가 칼 마르크스라면, 밀은 (현대) 자유주의의 시조로 뽑힌다. 참고로 근대 자유주의의 시조는 존 로크이다.
2 생애
밀은 엄청난 천재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수학자 가우스처럼 '가난한 집안에서 막 길렀는데 알고보니 천재더라.' 하는 식은 아니고, 그의 아버지의 혹독한 영재교육에서 비롯된 신동이다. 물론 밀이 어느정도 머리가 있었기에 그 교육을 따라갈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대략적으로 공부의 수준을 보자면, 세 살에 그리스어를 배우고 (아버지가 손수 단어장을 만들어주고 옆에서 붙들고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게 했다) 다섯 살 때 이미 그리스의 고전들을 독파했다. 밑에도 서술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 살짜리에게 그리스어를 주입시킨다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인 제임스 밀은 존 스튜어트 밀을 공부시켰다. 여섯 살 때 기하학과 대수를 익혔고, 일곱 살 때 플라톤을 원서로 읽었다. 여덟 살 때 라틴어를 공부했고 열 살 때 뉴턴의 저서를 공부하고 로마정부의 기본이념에 관한 책을 썼다. 그리고 10살이 안되었을 당시에 취미 처럼 흔히 하던 것 중에는 라틴어로 고전 읽기와 동생들에게 자신이 3 살때부터 배운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열한 살 무렵에는 물리학과 화학에 관한 논문들을 섭렵했으며 열두 살 때 아리스토텔레스, 열세 살 때 애덤 스미스를 공부했으며 열여섯 살에 계몽주의 철학을 공부했다.
열일곱에는 동인도 회사의 공무원이 되었다. 동인도 회사에서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인도에 보내는 통신문을 책임지는 수석조사관의 일을 했는데, 이 자리에는 전문적 지식을 갖춘 당대 일류의 인재들이 기용됐다. 연봉만 해도 인도청 장관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밀은 이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사상을 동인도 회사의 인도 통치 정책에 반영하기도 했다.
유명한 그의 자서전[8]에서 그는 자신이 아이들이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깨칠 수 없는 나이에 벌써 어려운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최상의 예라고 말했다. 인간 정신의 한계를 본 것 때문인지, 20살이 되고서는 결국 정신적으로 탈이 나게 된다. 10살에 남들이 평생 할 공부를 이미 끝냈고, 20살에 인간 정신의 한계를 찍고 폭주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다행히도 이후 시를 비롯한 예술 등 아름다운 것들에 취미를 붙이게 되고, 친구의 아내였던 해리엇 테일러[9]가 남편과 사별한 후 그녀와 결혼을 하며[10] 정신적으로 회복되었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을 애처가로 살았다. 해리엇 테일러 밀도 먼치킨이었다고 한다. 밀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중요 저서 중 하나로 꼽히는 ≪자유론≫[11]은 아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3 철학자
우선 밀은 철학자로 가장 잘 알려졌는데 아무래도 한국에선 윤리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벤담과 대비되는 질적 공리주의로 유명하다. 밀은 '삶의 이론(theory of life)'으로서의 공리주의와 '도덕의 이론(theory of morality)'으로서의 공리주의를 구별한다. 이러한 구별을 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밀의 공리주의에 대해 엄청난 오해를 하게 된다. 공리주의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비판으로 공리주의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개인의 희생을 도덕적으로 정당화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밀의 공리주의 입장에 대한 오해이다. 공리주의 관점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할 경우 오히려 전체의 행복의 극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밀이 공리주의자임에도 개인의 자유와 도덕적 권리를 그 무엇보다 중시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자유론≫과 ≪대의정부론≫[12]을 통해 근대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언론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가치를 설파하였다. 그는 특정한 사상만이 진리라는 독단을 배격하고, 회의주의적 인식론에 입각하여 진리는 결코 확언할 수 없으며 강요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언론과 사상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며, 국가는 타인에게 해를 미치지 않는 한 개인의 삶의 방식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사상은 윤리적 다원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이 되었고, 오늘날 모든 민주주의 체제의 사상적 기반으로 인정되고 있다. 특히 그가 제시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 대한 최고의 판단자라는 주장은, 민주주의는 만인의 평등이라는 루소의 직접 민주주의[13]에 대한 옹호에 맞서는 대의 민주주의[14]의 사상적 근거로서 활용되었다.
현대 자유주의의 시조격인 인물이지만 그의 자유주의 사상은 일관적이지는 않았다. 말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의 주요 저서이자 옥스포드 대학 경제학 수업에서 교과서로 사용된 ≪정치경제학 원론≫[15]에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장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4 정치가
밀은 하원 의원 및 교육부 장관 같은 정치가로도 일했다. ≪여성의 종속≫[16]이라는 저작을 통해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다. 덕분에 그는 당시의 남성 정치인들과 사상가들에게 많은 조롱과 모욕을 당하였다. 밀은 이 책에서 여성의 무능함이 당시의 의미없는 여성 교육에서 비롯되었음을 논증하기도 했다. 여성도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인물로는 잔 다르크와 엘리자베스 1세를 예로 들었다. 또한 'man'이 인류를 뜻하는 용법으로 쓰이는 한, 이를 남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는 용법을 반대했다.[출처 필요\]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를 돕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정치인이 되면서 아일랜드 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 아일랜드 토지 개혁안을 내놓아 현지인들을 배려하고자 했으나 이 때문에 보수파들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정직한 성격 때문에 선거운동에서 포퓰리즘적 공약을 제시하지 않고 유권자들에게 직언을 했다. 하원 의원으로 한 번 당선되었지만 재선은 실패하고 정치계에서 물러서기도 했다. 처음 하원 의원 선거에 나갔을 때, 밀은 선거운동도 안하고 지역구를 위해 일하지 않겠다고 했고 여성 참정권도 여전히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당선 자체가 기적이었다. 산업혁명을 거치며 극도로 심화된 계급 격차와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보며 노동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무력 혁명이나 포퓰리즘에는 반대하면서도 부르주아에 의한 금권정치 역시 매우 혐오하였다.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면서도 수적으로 다수인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계급 독재를 우려하여 차등투표제[17]를 주장하고[18] 대표자의 자질을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 특히 급진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일부 좌파로부터 엘리트 민주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5 공부방법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업적뿐만아니라 공부방법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존 스튜어트 밀은 공부를 많이 했던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고 감사했다. 본인의 자서전을 읽는다면 첫 장에서 이미 그가 아버지의 교육을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버지 제임스 밀이 자신의 교육에 할애한 시간에 대해 희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을 정도로 아버지가 자신에게 투자한 것을 감사히 여겼다. 위에 서술했다시피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영어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을 3살 짜리 어린 아이에게 그리스어까지 이해시키면서 단어장을 만들어 가르치는 것은, 학자인 사람으로서는 굉장한 시간 낭비였을 수도 있음을 밀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기 쉬운 오해가 있는데, 어린 나이에 남들이 볼 때 과도한 양을 공부시켰다 하여 제임스 밀의 교육을 주입식 교육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제임스 밀의 교육은 주입식 교육의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인 방향은 주입식교육과 완전히 정반대인 교육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수혜자인 존 스튜어트 밀 스스로가, 아버지는 그가 배운 것이 기억력 연습으로 끝나게 두지 않았으며 자신이 받은 교육은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자서전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자신이 받았던 교육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일이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을 정도다.
제임스 밀은 되도록이면 자신이 아들을 가르치기 전에 아들이 스스로 그러한 개념들을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 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홀로 생각하게 두었고, 아들이 다방면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 전까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대체적인 교육방식은 이러하였다. 가르치려고 하는 학문과 관련된 책을 이것저것 주며 여러번 읽게 만들고 그 안에 담긴 저자의 뜻을 완전히 파악하게 했으며, 그에 대한 의견 그리고 이해도를 정확히 측정할만한 질문을 던지는 질의응답식으로 교육하였다. 10살이 넘어가며 존 스튜어트 밀이 어느 정도 학자 수준10살에 대학교수급 대학교수는 아니고 박사과정이 아니었을까 울면서 이의를 제기해 본다의 지성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이때부터는 질의응답을 통한 확인보다는 서로 여러 가지 논점에 대하여 말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표현력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명한 고전 시들을 읽고 또한 자신만의 시를 쓰도록 하였으며 물리학이나 화학같은 자연과학의 분야에 대해서도 논문을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을 정도의 공부를 시켰다. 또한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동생들을 틈나는 대로 가르치게 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기가 별로 뛰어나지 않다는 생각에 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였으나, 훗날 그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제임스 밀 쪽에서 아들에게 시킨 공부도 많았지만, 그 밖에 존 스튜어트 밀 스스로가 한 공부 역시 많았다. 그도 사람인 만큼 싫어하는 공부도 있었는데 산술(算術) 수업을 싫어했다고 한다.
제임스 밀의 교육은 토론식이나 문답식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둘 사이의 잦은 담론을 통해 아들에게 지식을 이해시키고 이를 제대로 이해하여 다시 자신에게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도록 했다. 또한 항상 공부와 관련된 겁나 지루한 책들만 던져준 것은 아니며 아라비안 나이트나 돈키호테같은 재미있는 작품들도 역시 빌려다 주었다고 하니, 제임스 밀은 주입식 교육 방식을 고집한 완고한 아버지가 아닌, 다양한 방법을 통해 다방면으로 아들의 학습을 돕고, 아들의 여가 생활 역시 지원해 준 훌륭한 아버지인 것이다. 다만 교육법 자체는 훌륭했으나, 엄한 아버지였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똑똑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이 겸손하지 않게 될 것을 늘 경계하였기 때문에, 결국 존 스튜어트 밀은 어린 시절에 자신이 남들보다 특출난 면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하다. 또한 즐길 시간은 있었지만 쉬는 날은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 꽤 유명한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도 이 어린 나이의 밀과 정치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그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19] 그 전에 리카도의 저서들을 완전히 독파하여 아버지와 깊은 토론을 나누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주입식 교육을 받았다는 편견이 있지만 일단 외우지 않으면 뭐든 더 깊이 파내려 갈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외우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추가로 매일 매일 아버지가 주는 숙제를 하였고, 이미 당대의 대학자였던 아버지와 함께 숙제의 내용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했으므로 사고력이 한없이 키워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부했음에도 늘 아버지의 생각에 비해서는 미치지 못하는 바가 조금씩 있었기 때문에, 18살 때에는 자기가 아직도 모자라다는 생각에서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깊게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우스운 것은 자기를 가르칠 대학 교수들보다 밀이 더 똑똑했다는 것이다. 제임스 밀은 당시 인정받는 학자였고 리카도는 경제학 발전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엄청난 인물이었는데, 이런 인물들과 꾸준히 토론을 해왔으니 일반 교수들이 밀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이 받은 교육에 대해 아쉬운 면 역시 가감없이 서술하였는데, 자신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다른 또래들에게서 나쁜 영향을 받거나 세상의 나쁜 부분에 물드는 것을 경계했고, 이를 위해 또래들이 주로 관심을 쏟는 예체능 방면으로는 아들이 부족한 면이 있어도 그냥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 부분에 스탯을 몰빵한 법사캐 만든다고 INT에 포인트 몰빵한거다 탓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은 결과적으로 성장 과정에서 지적 정신 활동 이외의 부분에서는 거의 자극을 받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또 제임스 밀의 교육법은 평균 이상의 것이긴 했지만 그의 교육법에서 큰 허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아들과 자신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에 따르면, 스탯을 몰빵한 자신은 결국 손재주 등의 일상적인 일에 서투르게 되어서 "부주의하고 똑똑하지 못하며 또 대체로 생각이 느릿하다고 늘 꾸중을 들었다."라고 한다. 원체 제임스 밀이 다방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아들을 가르칠 때 자신이 큰 노력 없이 얻게 된 것은 아들도 그럴 것이었다고 생각한 듯 하다. 덕분에 제임스 밀은 아들에게 문제가 있으면 엄하게 경고하고 꾸짖기는 하였으나, 정작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에게 부족하게 된 부분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20]
밀은 자신이 받은 교육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며, 자신은 오히려 타고난 재주에 있어서는 평균 이하였으며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그렇기에 이러한 교육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낭비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많은 분량의 지식을 주입받은 대부분의 소년ㆍ청년은 정신 능력이 강화되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지식 때문에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진 셈이 되고, 남들을 따라할 줄 밖에 모르는 앵무새가 되기 쉬우며 남들이 만든 길 위에서만 자신들의 지식을 써먹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6 한국에서의 인지도
명성과 사상적 기여에 비해 어째 한국에서는 별로 인지도가 높지 않다. 우파 입장에서는 밀의 사상이 매우 급진적이기 때문에 자유주의 코스프레를 하면서도 밀을 인용하기에는 껄끄러운 면이 있다. 국가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 보수입장에서는 정부의 역할에 회의적이었던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의 사고가 영 입맛에 맞지 않을 것이다. 요즘 들어서는 밀로부터 시작하는 자유주의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언급하는 우파가 늘긴 했는데, 자세히 보면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영향이 짙거나 아예 자유지상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쪽이다.어쨌든 별 인기가 없다 좌파 입장에서 밀이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그냥 마르크스만 보면 되기 때문에 굳이 '부르주아 사상가'인 밀을 내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굳이 밀의 이름을 밝히고 인용을 하지 않더라도, 과거에 밀이 내세웠던 생각들은 현재 시점에서 보더라도 꽤 친숙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밀과 마르크스는 같은 시대 인물인데다가 영국이라는 같은 공간에 있기까지 하였다. 다만 밀은 마르크스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본인의 저서 ≪정치경제학 원론≫이 당대 최고 지성들이 모인 옥스퍼드 대학 경제학 수업에서 교과서로 쓰였고, 본인이 죽은 뒤에도 계속 교과서로 쓰였을 정도로 유명인이였지만, 마르크스는 친구 돈(주로 엥겔스)으로 혹은 물려받는 유산으로 놀고 먹는 한량이였다.[21]
7 그 외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곤충에 흥미가 많아서, 벌의 이동에 대해 연구하거나 벌집을 열어보고 이를 자세하게 연구하기도 하는 등 독자적인 연구도 많이 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취미로 한 연구였기에 이 분야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곤충기로 유명한 프랑스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와 친하여 서신을 자주 주고받았으며, 그가 한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3천 프랑이라는 거액을 무이자로 기꺼이 빌려준 적도 있다. 신경쓰지 말라는 밀의 말에도 불구하고 파브르는 책을 써서 받은 인세로 이자까지 쳐서 빚을 모두 갚았다. 밀은 말년에 병을 얻은 아내의 요양을 위해 프랑스 아비뇽에서 지냈기에 파브르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James Mill; 1773년 ~ 1836년)도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교육자로 당대의 명사이자 대학자로 나름 유명하지만 아들이 너무 잘난 터라 묻혀버렸다. 재미있게도, 존 스튜어트 밀 자신이 말하는 그의 아버지는 그보다 다방면에서 훨씬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을 살펴 보면 애처가로서의 모습이나 가난한 사람들, 외국과 외국인에 대한 넓은 시야,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애호와 찬양 등 전반적으로 배운 거 많고 사람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을 풍긴다.
8 관련 문서
- ↑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의 원본.
- ↑ Utilitarianism (1861)
- ↑ 출처
- ↑ 좇다 : 목표, 이상, 행복 등을 추구하다.
- ↑ 이 말은 노르웨이 연쇄 테러의 테러범 브레이비크가 트윗에 인용하였다.
힘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했으면 그런식으로 오해하지 않았을텐데그걸 그런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거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 - ↑ 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 (1861)
- ↑ 출처
- ↑ Autobiography (1873)
- ↑ Harriet Taylor (1807년 ~ 1858년). 존 스튜어트 밀과 재혼 후에는 해리엇 테일러 밀(Harriet Taylor Mill)
- ↑ 본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친구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플라토닉 러브의 관계였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많은 책에서 제각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밀 본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 ↑ On liberty (1859)
- ↑ 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 (1861)
- ↑ direct democracy
- ↑ representative democracy 또는 indirect democracy(간접 민주주의)
- ↑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1848)
- ↑ The Subjection of Women (1869)
- ↑ plural voting. 모두에게 투표권을 주되, 교양 정도 등의 자격조건을 두고 1인당 투표 수를 차등화하는 선거 제도. 차등 선거라고도 한다.
- ↑ 존 스튜어트 밀은 훗날 이 주장을 철회하였다.
- ↑ 애초에 리카도는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 제임스 밀과 친한 사이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서전에서, 너무도 겸손한 리카도가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펴낼 수 있도록 자신의 아버지가 용기를 북돋아주었다고 회고했다.
- ↑ 많은 어른들이 자식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이지만, 부모가 된 사람들은 자식들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훨씬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르크스 문서를 좀더 참고해 보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