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
영어로는 junk ship.쓰레기 배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목조 선박을 말하며, 영어권에서는 동아시아계 배를 모두 정크선으로 통칭하는 경우도 있다.
정크선의 어원은 중국 원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랍인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 원나라에서 가장 큰 배를 진극(眞克), 중간 것을 조(曹), 작은 것을 객극(喀克)이라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중 진극의 중국 발음인 '전커'가 중동을 거쳐 서양으로 전래되면서 정크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혹은 배를 가리키는 중국어 '船(병음:chuán)'이 말레이어를 거쳐 서양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음운변화를 겪으면서 '정크'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정크선의 기원은 다른 나라의 배들과 마찬가지로 원시시대 독목주(통나무배)에서부터 기원한다. 한때 조지프 니덤은 국배의 기원을 원시적인 대나무 뗏목에서 찾았고, 중국 배의 격벽구조도 대나무의 마디에서 기원했다고 보았으나 독목주의 발견으로 더 이상 깊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후 역사시대에 접어들면서 청동기 유물의 표면에 그려진 수전도나 극소수의 유물(배 모양 장난감이나 토용 등 부장품)를 기반으로 배의 모습을 추정한다.
1.1 시대에 따른 분류
동한시대 삼판선 토우. 용도는 껴묻거리(부장품)
유방의 움직이는 성오스프리에서 고증한 중국 한나라 때 수군의 모습. 그림 오른쪽 아래 노꾼들 주면에 나무로 된 방어판을 두른 배는 주가(走舸), 뽀족한 통나무를 얹은 배는 돌모(突冒)라고 하는 돌격선이다. 중국 고대의 수전에 대해 다룬 병서에는 각 선박들의 기능과 수전 전술을 뭍의 전차(채리엇)전술과 성격의 수상전판으로 보고 있다. 이때의 배들은 통나무배와 완전한 형태의 배의 중간인 준구조선에 속해서 현대의 배들과 생긴게 많이 다르다.
이후 당,송 시대를 접어들면서 수전의 횟수가 늘고 조선술이 발달하면서 대륙스러운 거대 누각선들과 혁신적인 기술을 도입한 배들이 출현한다.
거대 누각선의 모형. 배 주변의 베개(?)를 끼운 장대같은 것은 근접한 적선을 때려부수는 박간이라는 망치다.
당나라 시기 대형 누각선을 그린 오스프리 그림. 중국쪽 자료 중에는 이걸 은근슬쩍 한대로 올리려는 자료들이 있다.(...)
송나라 때 전선을 그린 오스프리 그림. 인력으로 움직이는 수차를 장착한 외륜선(왼쪽 위)과 몽동(몽충蒙衝)이 보인다.
송나라의 차륜식 배 그림과 이를 고증해 그린 오스프리의 삽화.
송나라 시기 삼판선을 그린 당시의 그림.
그러나 이런 대형선들이나 인력식 차륜선들은 안전성이 떨어져 대부분 해안 근처나 넓은 강에서 주로 쓰였고, 바다에서는 높이가 낮고 원양항해에 적합한 배들이 쓰였다. 고려도경 34권 해도(海道) 객주(客舟)에도 중국의 사신선인 신주(神舟)와 객주(客舟)를 기록하면서 서긍이 자국인 선원의 증언을 기록한 것에 따르면 '뱃사공들은 교옥(㢗屋, 배 위에 설치하는 누각)이 높아지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는데, 그것이 바람을 저항하여 전대로 있는 것의 편리함만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나온다. 참고로 객주의 교옥의 높이는 1장(丈, 약 3미터).
또한 근세로 들면서 연안이나 강에서도 점차로 대형 누각선 종류는 쇠퇴하고, 비교적 작고 안정적/실용적인 삼판선(三板船)이 중심을 차지한다. 삼판선은 우리나라에 거룻배에 해당하는 갑판조차 없는 경우도 있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배로, 홍콩의 유명한 수상가옥도 이 삼판선이다.
근현대에 들어서 서양식 배의 도입으로 중국 내에서도 전통 정크선은 점차 사라졌으나, 홍콩의 수상가옥이나 관광지의 유람선으로 현대화된 정크선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현대화된 정크선들은 서양식 선체구조를 절충하거나 받아들이기도 하며, 서양식 선체구조를 받아들인 정크선들을 영미권에서는 별도로 '로차(Lorcha)'라 부르기도 한다.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1550년 마카오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로차(오른쪽)의 모습. 왼쪽은 보통 정크선. 우리나라의 한선이나 일본의 화선도 근현대시기에는 이렇게 변한 게 많다.
이와는 별개로 정크선식 돛만을 받아들인 정크 스쿠너(Junk Schooner)선도 있는데, 말레이시아에서는 지금도 쓰인다.
1.2 지역에 따른 분류
지역에 따라 분류할 때는 4가지로 나누는 게 일반적이다. 이때는 중국 북부의 사선(沙船), 복건성 지역의 복선(福船), 광둥성 지역의 광선(廣船), 저쟝성 근방의 조선(鳥船)으로 나뉜다.
1.2.1 사선
사선의 내부 구조. 편용골(배 밑바닥 가운데의 다른 바닥재보다 굵고 큰 부품)과 대랍(선체 좌우의 곡선을 이루고 있는 것), 격벽이 보인다.
사선을 그린 그림. 배 양옆의 날개같이 생긴 피수판이 보인다. 피수판 밑에 약간 볼록하게 튀어나온 선체 부분은 당송 시대부터 나타나는 대랍이다.
사선은 상대적으로 수심이 얕고 모래톱이 발달한 북부지역에서 많이 쓰였기에 바닥이 평평하고 용골도 보통 배와는 달리 납작한 편용골이다. 때문에 한선처럼 방향을 돌리기 좋고 수심이 얕은 데서도 뱃바닥이 걸릴 염려가 없다. 주로 연안 항해용으로 쓰이지만 동남아 지역에서도 사선과 관련된 벽화유물이 발견되어 원양항해도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선에는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일종의 파도막이인 대랍과 안전성을 높여주는 피수판을 설치한다. 사선은 한선과 유사하지만,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당송 시기부터이다.
1.2.2 복선
복선은 중국 복건성 지역에서 사용하던 유형의 정크선이다. 뱃머리에 그려진 똘망똘망한 눈이 특징으로, 항해시 돛만을 사용한다. 선체의 단면을 보면 선수는 첨저형이며, 선체 중간은 U자형으로 첨저원형의 곡선을 이룬다. 중국의 전통 선박인 정크선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인 형태의 배이며, 흔히 정크선이라 하면 나오는 배들은 대부분 이 복선이다. 정화의 대보선도 현재는 복선이라고 보고 있다.(신웬어우 저, 허일/김성준 역 '정화의 배와 항해'참조). 복선은 원양 항해시 적합하도록 활수창(活水艙, 부력창)이라는 독특한 밸러스트 탱크를 갖고 있다. 이 활수창은 선수나 선미에 위치하며, 만재흘수선 아래에 이와 연결된 구멍이 있다. 선수/선미가 수면 아래로 내려가면 작은 구멍으로 서서히 물이 들어오고, 수면 위로 올라갈 때는 서서히 물이 빠져나가 큰 파도가 칠 때도 배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
복선 중 큰 것은 대(大)복선이라 하고, 초선(哨船), 동선(冬船)이라는 종류도 있으나 기본 구조는 같다.
- 대복선
복원모형. 모형임에도 정말 크고 아름답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에도 대형 복선류로 해당 선박 계열이 재현되어 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이런 기존의 대복선의 복원이 지나치게 부풀려진 거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1.2.3 광선
광선은 구멍이 뚫린 개공타라는 특이한 키를 가지고 있다. 이런 형태의 키는 물의 저항을 줄여 조종이 쉬우면서도 키의 성능은 그대로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또한 흘수가 크고 선체의 굴곡이 적고 길며, 선수가 뾰족하고 돛의 테두리를 철사로 튼튼하게 꿰어 항해력이 특히 뛰어나다.
광선을 그린 그림. 배 앞부분의 젓가락같은 것은 삽판(揷板)으로, 수직으로 움직이며 배를 조종하는 데 쓰인다.
1.2.4 조선
조선은 복선이나 광선과 비슷하나 30미터 안팎의 길이의 노와 쌍돛을 단 규모의 쾌속선으로, 선수를 특히 좁게 만든다. 해남선(海南船)이라고도 한다.
1.3 정크선의 성능
정크선의 성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화의 원양 항해로, 해당 항목의 내용처럼 정화함대가 아프리카까지 갔었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다.
또한 1847~1848년 정크선인 기영(耆英)호는 미국 뉴욕과 영국까지 세계일주에 성공하여 정크선의 원양 항해능력을 확실히 입증하였다.
영국에 도착한 기영호를 다룬 당시 기사.
이러한 정크선의 항해능력은 기술적인 선진성에 기반을 둔 것으로, 유선형의 선체와 배를 지지하고 내수성을 키워주는 수밀격벽 구조, 가로활대를 넣어 역풍항해도 가능하게 만든 돛과 발달된 선미 고정식 수직타에 기인한 것이다.
수밀격벽 구조는 당송 시대부터 완전히 대중화되며(김재근의 설을 따름), 사고시 배에 물이 들어오는 것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한편 선체를 지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서양의 경우 용골과 늑골을 사용해 배를 지지했으며 18세기 말에 들어서야 수밀격벽이 채택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중국 원나라의 무역선인 신안 무역선에서는 배 밑바닥 용골 위에 수안(水眼)이라는 개폐 가능한 배수통로가 설치된 것도 선박 인양 결과 확인되었다.
중국의 선미 수직타는 2세기부터 등장하며, 서양은 12세기 코그선에 초보적인 수준의 선미 고정타가 등장하기 전에는 선미 양쪽에 노에 가까운 큰 키 두 개를 걸쳐놓는 측타(side rudder) 방식을 사용하였다.
중국의 가로활대 돛은 활대를 넣어 조종이 쉽고 역풍항해가 가능하며, 똑같이 역풍항해가 가능한 아랍식 삼각돛(라틴세일)이 순풍시에는 일반 사각돛보다 효율이 떨어지는 것과 달리 순풍시에도 효율이 좋다. 그러나 돛 자체가 무겁다보니 약한 바람이 불면 성능이 낮아지며, 때문에 동양에서도 일반 사각돛이 같이 사용되었다.
중국 돛(junk rig)의 구조를 나타낸 그림.
그러나 전통 정크선은 의외로 싸움배로서의 성능은 여러 가지로 못 미더웠다. 물론 엄청난 위용의 고대/중세의 대형 누각선들이나 인력식 차륜선은 확실히 대단했지만 원양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비단 중국 누각선뿐 만 아니라 서양 전열함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대항해시대 당시 각국의 실질적인 주력 싸움배는 죄다 프리깃함이었다. 인력 차륜선의 경우 사람의 힘으로 차륜을 움직이다보니 거친 바다에서는 안정성이 떨어지는데다 풍랑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에 인건비가 많이 들었고, 이는 노와 돛에 비해 그다지 나을 게 없었다. 서양에서도 고대 로마 시기부터 말이나 소로 수차를 돌리는 마력선이 개발되었고, 같은 원리의 배가 미국에서도 쓰인 적이 있지만, 기술적 한계는 여전해서 강에서나 좀 쓰이는 정도였다.
또 원양에서도 활동하기 좋은 싸움배들은 비슷한 시기 한국이나 일본의 싸움배에 비해 특별히 좋다고는 볼 수 없었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나 신라 수군이 중국 수군에 그렇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일찍부터 강력한 화포로 무장한 고려 수군 및 조선 수군, 날렵한 선체를 사용한 고속함을 운영한 일본 수군, 3~4급 전열함 수준의 싸움배인 대효선(大效船)을 뽑아내던 베트남 수군에 비하면 동시대 중국 원양수군의 실적은 그야말로 초라한 수준이었으며, 이후 청대에도 딱히 괄목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대항해시대찍던 유럽하고는 뭐 비교불가고
오랫동안 북방 민족들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한몫했던 송나라 수군을 보자면 원나라 때 그대로 흡수되어 원 수군으로 편입되었으나 일본 정벌 때 태풍에 휘말려 거의 전부 박살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려배를 탄 쪽은 반 이상 생환했다. 또 송나라의 베트남 침공 당시에 씡나게 발렸다(...) 아니, 그 전에 고려 침공 때 고려의 피난민들이 모여있던 섬 지역을 공략하려다 삼별초에게 걸려 깨지고, 심지어는 피난민들이 섬과 자신들의 배에 간이 투석기를 설치하고 '좋아 한번 붙자!'식으로 나오니 쫄아서 싸움 한번 안해보고 튀기까지 했다.(...)(정진술 저, '한국해양사 고대편', 투석기항목 참조.)
오스프리에서 고증한 원 수군. 훨씬 안습한 수준의 베트남 수군에게 씡나게 발리고 있다.(...) 다만 저 그림에서 베트남 전함의 고증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실제로는 베트남의 배는 중국식 정크선과 유사한 목선이나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배, 혹은 바구니배 위에 목조 구조물을 장착한 형태의 배다. 그림의 베트남 수군은 같은 오스프리 시리즈에 실린 캄보디아 벽화에 근거해 복원한 캄보디아 카누를 그대로 갖다쓰고 있다.
부관!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무슨 색이냐! 눈물이 아니라 불이다! 대장님 빨리 끄고 같이 튀자!
왜구와 명 정규 수군의 대결을 그린 왜구도권(倭寇圖券). 어느 쪽이 명군이나면 왼쪽. 구분이 안간다!
임진왜란당시 명군이 사용한 전투용 사선. 괜히 진린이 판옥선을 받고 싱글벙글한 게 아니었다.
아편전쟁 당시 씡나게 터져가는 청나라 전투선들. 당시 영국의 무장 상선과의 전투 후 남은 중국 배가 29척 중 달랑 3척이었는데, 영국 배가 물러갔다고 승전보로 기록되었다고. 흠좀무
그나마 병자호란때 청나라가 삼판선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강화도를 공격해 점령하지만, 이건 지휘관으로 있던 김경징이 병크를 저질러 조선수군 대부분이 도주했기에 가능했던 일. 결과적으로 전투함으로서의 발전상은 고대 및 중세의 경우 강이나 연근해에서는 경이적인 수준이었으나 원양에서는 그렇게 우월하지는 않았고, 근세로 가면 많이 뒤떨어졌다는 평가가 타당할 것이다.
물론 이는 중국이 해양 문화보다는 대륙 문화 중심인 것도 있었고, 민간 무역상/해적/화교들의 활동은 상당했다. 특히 중국의 유명한 여해적으로 치 카이가 있다. 본래 매춘부였으나 유명한 해적두목 칭위와 결혼한 이후 칭위가 중국 조정에 의해 독살되자 당황하는 부하들을 모아 복수를 외치며 중국 역사상 최대의 해적세력이 되었다. 치카이는 5만이 넘는 부하들과 1,000여 척이 넘는 배를 몰고 다니며 남중국해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불패를 자랑했으며, 결국 치 카이 때문에 남중국해에서 정상적인 무역이 불가능해지자 영국/포르투갈/중국이 3국 연합함대를 구성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에 치 카이는 중국에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는 대신 그동안 확보한 재물을 그대로 가진 채로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고 평화롭게 해산하였고, 이후 30년 간 남은 재산과 도박장 운영으로 편안하게 살다 편하게 죽었다. 다만 이 때 해적들이나 무역상들이 사용된 배도 본문에 나오는 일반적인 근세의 복선/광선/조선이었으며, 특별히 발전하거나 개량된 건 아니었다.
또한 정크선은 만드는 방법이 상당히 복잡하였다. 정크선은 배를 만들 때 쇠못과 갤리선과 비슷한 촉이음 방식으로 선체에 하나하나 작은 홈을 파 여기어 촉을 꽂아서 선체부품을 잇는 식으로 만들어 배를 만드는 데 공력이 많이 소모되었으며(목선 선체의 제작방식항목 참조), 여기에 비교적 얇은 선체 위에 바다벌레의 침입을 막는 나무판을 얇게 덧붙이는 갑선(甲船)식으로 만들어 충격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조선시대 중국의 배를 도입하려다 포기한 이유가 바로 이 내구력 문제였다. 조운선항목 참조.
또한 내부구조를 유지하는 격벽 역시 수밀성을 부여한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기술적 한계상 수밀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정크선의 수밀격벽이 정말 제대로 된 수밀능력을 가졌을지에 대해 부정적인 주장도 있다. 상식적으로도 당시 선박은 동서를 막론하고 나무를 짜맞추어 배를 만든 뒤 나무 사이에 생기는 미세한 틈에다 타르를 칠하거나 기름에 반죽인 석회(유회)나 기름먹인 나무껍질/천/솜 등을 끼워넣어 물을 막는 식으로 만들었기에 그 한계는 안 봐도 뻔하다. 또 격벽을 설치하는 재료인 나무와 제작/설치시간을 너무 많이 먹었다. 때문에 원 간섭기 원나라는 일본 침공 당시 실패원인 중 하나로 중국의 배가 내구력이 약하다는 접을 꼽으면서 고려에서 배를 만들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을 정도. 당시 중국에서 배를 급조한 것도 한 이유로 보지만, 같은 조건에서 만들어진 고려 한선의 생존률과 중국 정크선의 생존률 차이, 그리고 원 수군으로 송나라 수군뿐만 아니라 용병으로 고용된 중국 해적들도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되기 힘들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정크선은 분명 기술적으로는 매우 뛰어난 배이나 오버 테크놀로지로서의 대가 또한 컸으며 이상하리만치 원양 싸움배로서의 발전은 그렇게 뛰어나지 못했다는 특성이 있다. 중세시대 길이 30m, 높이 9m, 너비 7.5m의 대형선인 객주와 그 객주의 무려 3배나 되는 신주를 만들어 동남아까지 원거리 무역을 했으면서 정작 싸움배로서의 발달은 상대적으로 지지부진한 점은 아이러니다.밸런스 패치? 그러나 [1], [2], [3] 이민족 정권이 아닌 한족 정권 하에서는 진짜 아주 약하지는 않았고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항해 능력에 비해 전투 능력이 대단하지는 않은 편이지 과학기술적인 면에서나 투사 전력, 화력 면에서 강했다. 위의 서술도 편파적인 면이 있는데 원양을 관습적으로 사용한 것일 가능성도 있으나 [4], [5]원양어업 범위 당시 동양의 해군은 원양 해군으로 보기가 힘들고 내륙과 가까운 인근 해역이나 좀 돌아다니는 수준이었다. 일본 같은 경우 표류 등을 통해 원양으로 나간 적이 있으나 의도적으로 나간 적은 없으며 조선 해군의 경우 원양에서 전투를 한 적은 없었다.있으면 추가바람 물론 정크선으로 원양 항해를 성공한 자료가 있고 실제로도 가능했고 나간 적도 있지만 중국 역시 의도적으로 원양에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원양에서 전투선의 실적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