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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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성민(趙成珉)
생몰년도1973년 4월 5일 ~ 2013년 1월 6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서울특별시
학력신일고-고려대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NPB)
2005년 한화 이글스 신고선수[1] 입단(KBO)
소속팀요미우리 자이언츠(1996~2002)
한화 이글스(2005~2007)

1 고등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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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고 시절 조성민.

투수와 타자로 재능을 보였다. 190cm의 장신에서 내리꽂는 150km대의 강속구가 무기였다.

2 대학 시절

박찬호(한양대), 임선동(연세대) 등과 함께 '황금의 92학번'[2][3]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임선동, 손경수(홍익대)와 함께 '트로이카'라고 불렸다. 장신에 미남이라 신일고등학교 시절부터 여성팬들이 많았다. 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이상 광주일고), 김지훈(신일고), 유진호(중앙고)가 있다. 자신을 포함한 7명이 동기회 '칠갑산회'를 만들었다.</ref>

2학년 시절인 1993년 9월 영남대와의 추계리그 경기에서 7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다가 안타를 맞아 깨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 경기에서 모교 최남수[4] 감독이 조성민의 노히트 노런이 깨어지는 순간,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4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는 것. 결국 고려대는 10여일 후 열린 연세대와의 정기전을 감독 없이 치렀고, 끝내 승리하여 은사의 영전에 승리를 바칠 수 있었다.

3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1996년 ~ 200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조성민. 옆의 등번호 33번은 당시 감독직을 맡았던 나가시마 시게오.

뛰어난 체격 조건의 강속구 투수로 고교시절부터 주목받은데다 자기보다 뒤에 있던 박찬호의 해외진출로 자극을 받아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1996년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일반적인 일본진출 사례와는 달리 유망주 시절 건너가 거인팜에서 길러진 선수.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교진(巨人, 자이언츠)에게 관리 따위는 장식이었다.[5] [6] 신일고 시절부터 혹사당해왔던 팔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의 매일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다.

1997년 7월 처음으로 1군에 등록, 중간계투와 중무리를 오가면서 1구원승 11세이브, ERA 2.89를 기록한다. 1998년에는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 전반기에만 7승을 올리며 올스타에 선발되었으나, 이 올스타전에서 팔꿈치 부상을 당해[7] 그 이후 재활로 허송세월하다가 2002년 10월 방출되었다.

4 한화 이글스 입단(2005년 ~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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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부터 2004년 사이에 최진실에게 한 위법행위로 이미지가 극히 안 좋은 상태에서 2005년 신인 지명에 나섰다가 어느 구단에도 지명받지 못한 뒤 '지명 받은 선수 중 몇 명이나 뛰는지 지켜보겠다'는 발언으로 까였다. 뭐야... 이 라인업 무서워 ㄷㄷ 고려대 선배인 박노준처럼 스타 의식에 지나치게 젖어있다는 비판이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개인 사업[8]과 국내야구 해설[9]을 하다가 2005년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이글스에서 3년간 불펜투수로 활동하고 은퇴하였다. 한화에서는 이미 전성기가 지나서 별 기대가 없었으나 그래도 1년 정도는 쏠쏠한 활약을 해주었다.

5 야구 해설

XTM에서 마해영과 함께 김태균이 출전하는 지바 롯데 마린스의 경기를 해설하기도 했다.

무난한 해설톤에 분석적인 해설을 했다는 평가. 특히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 일본전의 경우 케이블에서 녹화 해설을 담당하였는데 투수와 포수의 움직임, 그리고 타자의 스탠스 등을 토대로 경기 흐름을 예측하는 해설을 했다.[10]

6 야구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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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시절 조성민.

2011년 1월 27일자로 두산 베어스의 2군 재활 코치가 되었다. 해당 기사

2012시즌이 박동희의 기사에 따르면, 코치로서 능력은 있었지만 잦은 지각과 결근을 하였다고. 두산 측에서는 해외 연수 등을 권유했지만 그가 거부하고 스스로 떠났다고 한다. 이혼후 과음으로 여러번 결근과 지각을 했고, 구단측에서 지적해서 본인도 그다지 재계약이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은듯.

7 혼인

7.1 첫 번째 결혼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우 최진실의 팬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동창의 증언에 의하면 최진실의 사진이 인쇄된 책받침을 갖고 다니며 나중에 꼭 최진실과 결혼할 거라고 공언했다고.

1998년 12월에 방송을 통하여 서로를 처음 만난 후, 조성민이 구애하여 둘의 관계는 연인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와 최진실의 연애는 순탄치 않았는데, 나이 차이와 서로의 직업적 특성 등을 들어 조성민의 아버지와 최진실의 어머니 모두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결혼 전 기사 이혼 직전 기사 하지만 조성민이 자살 시도를 한 끝에 결국 양가의 허락을 받아내어, 2000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최진실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2002년 12월 조성민이 기자들을 자신의 앞에 모아 놓고 최진실에 대하여 유책배우자라고 비난하였다. 더욱이 그는 이자리에서 출산을 앞둔 최진실을 폭행했다고 자백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혼 소송을 걸지 못했고, 대신 최진실의 명예를 갖은 방법으로 훼손하다가 최진실에게 폭력을 휘두른 죄로 2004년 8월에 결국 경찰에 의해 현행범 체포되었다. 결국 같은 해 9월에 합의 이혼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그는 인터뷰 등에서 자신과 최진실의 이혼을 합리화하고 최진실을 비난하였는데, 이 내용 대부분이 너무나도 유치한 나머지 그의 명성은 초라해질 뿐이었다. 그는 주로 기자들에게 결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최진실의 혼전 사생활에 대한 언급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당시 자신이 업소녀와 벌이던 애정행각을 감안하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식이었다. 이런 비열한 행보를 보인 것 때문에 당시 조잡한 영화로 유명했던 영화 '클레멘타인'의 포스터와 합성된 사진이 온라인 상에 유통되기도 하였다.

임신부 최진실을 상대로 간통 운운 하며 최준희를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해코지한 전적도 꼭 기억되어야 할 사실이다.# 더불어 그는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과 동생 최진영이 그에게 빌려 주었던 돈을 갚지 않으려고 언론플레이를 하여 뭇 대중으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는 그가 빌린 돈을 증여받은 돈이라고 주장하였는데, 2004년 8월에 법원으로부터 이는 엄연한 대여에 해당하니 피고 조성민은 원고 최진실의 어머니와 동생 최진영에게 돈을 갚으라는 판결을 받았다.#

최진실 사망 이후 아이들의 친권[11]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성민이 친권을 갖게 될 경우 아이들이 물려받은 최진실의 재산을 조성민이 관리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네티즌들이 다음 아고라에서 반대 투표를 하기도 했다. 정옥숙 또한 그가 최환희와 최준희의 생일에 한 번도 오지 않았다면서 반발하였다. 이에 조성민은 돈문제에 관해서 최진실의 개인재산을 신탁재산으로 바꾸어 아이들을 위해 관리하려는 생각이었다고 해명했다.

7.2 두 번째 결혼

2007년 말에 재혼 사실이 알려졌다. 2년 전인 2005년에 재혼했는데, 상대가 이혼 과정 당시 연인관계를 부인했던 '심마담'으로 알려져 '아니라고 우기더니만 사실이었군'이란 눈초리를 받았다.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에서 자신의 아내는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이고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지인도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2002년부터 2004년 사이에 조성민과 심마담은 멋진 언론플레이를 구사했는데 그 구체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다. 심마담은 조성민의 공범으로서 톡톡히 역할을 했다.#

1.조성민은 심마담과 이런저런 애정행각을 펼쳤지만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심마담도 인터뷰를 통해 조성민을 거들었다. '정조의 의무를 위반했지만 장난으로 그랬다'는 거고 이는 '음주운전은 했지만 장난으로 그랬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둘은 인터뷰를 통해 최진실을 의부증 환자로 몰았지만 '의부증 환자 최진실은 왜 이혼 소송 안 당하고 있는 거임?'에 제압된 사안이다.

2.조성민은 임신부 최진실을 폭행했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이 폭행에 대해서 쌍방폭행이라고 했고 심마담도 이 폭행에 대해 인터뷰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조성민을 거들었다. 역시나 '폭행범 최진실은 왜 이혼 소송 안 당하고 있는 거임?'에 제압된 사안이다.

3.조성민은 최진실을 납치범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심마담도 인터뷰를 통해 조성민을 거들었다. 역시나 '납치범 최진실은 왜 이혼 소송 안 당하고 있는 거임?'에 제압된 사안이다.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에서 최환희와 최준희에게 면접교섭의무 이행한 적 없고 그들을 만나는 게 자기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했다. 편지를 쓰며 면접 교섭 의무를 준수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말하고 다니며 욕을 벌었다. 이 때 여성조선 백은영과 우먼센스 하은정이 스피커 역할 했다. 이 스피커들에 의해 달랑 하나 있는 부모 역할인 면접 교섭 의무도 하지 않겠다고 떠드는 이야기는 영원히 기록으로 남게 된다. 백은영은 지금은 TV조선을 근거지 삼아 정옥숙, 최환희, 최준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조성민은 가해자로서 피해자 탓 한다거나 자기 의무 자기가 이행 안하는 것도 남탓 하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특기가 있었는데 면접 교섭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할 때도 그런 화법을 구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2008년 10월 조성민이 최진실이 남긴 재산에 관심을 보이면서 이들의 만행이 다시 인구에 회자되었다. 2010년 10월 이들이 별거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러면서도 같이 사업을 하는 게 2011년 12월 기사화되기도 했다.리누이 [12]

8 사망

2013년 1월 6일에 그는 전 여자친구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사건 당시 그가 남긴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의 죽음으로부터 1주일이 지난 1월 13일에 그가 남긴 유서가 발견되어 그의 사망 원인은 자살로 확정되었다.#

전날 그는 그의 여자친구의 집을 방문했는데, 이 집에 머물던 중 그는 여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별통보를 받은 뒤, 전 여자친구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같은 집에서 자살한 것이다.

죽음에 앞서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저도 한국에서 살 길이 없네요. 엄마한테 죄송하지만 아들 없는 걸로 치세요"라는 내용의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는 유서를 통해서 유산은 자신의 누나 조성미에게 남겼다#. 그의 아내의 존재가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조성미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이혼한 상태였다고 한다.

2013년 2월 여성잡지에서 조성미는 "(조성민과 최진실이)서로 너무 좋아해 더 싸웠던 것 같다"라고 말하여 가정폭력범을 편드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하였다.#

조성민까지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조성민의 자녀들은 어머니 최진실, 외삼촌 최진영, 아버지 조성민이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결과가 되었다. 우연이겠지만, 세 사람은 모두 한국 나이로 41세, 만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9 평가

유능한 운동선수였지만 신체 부상, 사업에 대한 욕심, 최진실에 대한 각종 위법행위로 사회적으로 추락했다. 같은 대학 출신인 마해영은 자신의 책에서 조성민에 대해 "전도유망한 최고의 타자이자 투수가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나..."하면서 매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10 기타

한국에 복귀한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해 종종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임창용의 이적설이 터져나왔을 때 임창용에게 요미우리로는 이적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11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2005한화 이글스1619⅓22040.5006.5230196815142.017
200676⅔00000.0006.75121604652.700
2007124312000.3334.194131951823201.395
KBO 통산(3시즌)356934040.4295.0983534113044391.696
  1. 입단 후 대우는 신고선수가 아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고선수 입단이었다.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한 적이 없어 국내팀에 뛰기 위해서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했으나 지명받지 못했다.
  2. 이외에 타자로는 박재홍(연세대), 김종국, 송지만(인하대)이 대표적이다.
  3. 간혹 정민철을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정민철은 대학에 간 일이 없으므로 고교야구 동기생이지 '92학번'이라는 분류는 사실관계상 부정확함.
  4. 고려대에서만 17년이나 감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선동열, 박동희, 이상훈 등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 고려대 출신의 스타 선수들은 모두 그의 제자였던 셈.
  5. 관리 따위는 장식인 팀 운영뿐만 아니라, 교진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 그리고 언제나 화끈하게 지를 수 있는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자금력을 자랑하는 구단이라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신인급 선수들이 성장하기에는 영 좋지 못한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이건 뭐 줍키스가 하는 짓과 똑같다.
  6. 그러나 요미우리도 문제지만 본인도 그다지 성실과는 먼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도쿄에서는 파다했다. 가끔 고종수와 비교되는 것 보면 재능이나 신체조건만 믿고 자기관리에 소홀하지 않았나싶다.
  7. 조성민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팔도 못 들 정도로 팔꿈치가 아프니 등판시키지 말아달라고 직접 일본어로 호소했으나 센트럴리그팀 투수코치인 곤도 히로시(당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가 "너만 아픈 줄 아냐?" 면서 무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성민을 나락에 빠뜨린(?) 곤도 역시 현역 시절(곤도는 주니치에서 현역으로 활약했다) 올스타전에서 팔꿈치 통증을 호소했으나 당시 센트럴리그팀 감독인 카와카미 테츠하루(당시 교진군 감독)의 농간으로 계속 던지다가 투수로써의 생명이 끝장난 아픈 기억이 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가해자가 된 피해자
  8. 조성민이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시절 그가 좋아하던 슈크림 빵(보통 동네 빵집에서 파는 베이비 슈보다 크기가 크고, 크림 종류도 다양함)을 국내에 팔아볼 생각으로 사업을 벌였으나 대차게 말아먹었다. 애초에 사전 시장조사가 미비해 무턱대고 사업에 뛰어든게 문제였다. 이 때문에 하술될 막장이미지와 겹쳐서 국내야구팬들에게 '슈크림 조'라는 별명(혹은 혐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도 사업도 말아먹고 사기까지 당한 채 몰락한 이호성보다는 양반.
  9. 2005년에 국내 프로야구 중계를 재개한 MBC ESPN에서 잠시 해설자로 있었는데, 고려대학교 선배인 허구연의 권유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10. 당시 그의 해설은 엠스플에서 틀어주는 베이징올림픽 야구 하이라이트에서 들을 수 있다.
  11. 부모가 이혼한 뒤 친권이 한쪽에게만 주어졌을 때, 친권을 가졌던 쪽이 사망한 뒤 다른 쪽이 친권을 회복하는지, 아니면 다른 쪽이 친권을 상실한 것과 같이 봐서 후견이 개시되는지는 명문의 규정이 없다. 결국 2011년 법이 개정되어 친권자동부활 금지 법안이 명문화되었고, 2013년부터 일명 '최진실법'이 발효되기 시작했다.
  12. 심마담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사진이 '강남패치'에 공개되서 논란이 있다. 실제 인물인지는 불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