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

(손문에서 넘어옴)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임시 대총통
(초임)초대2대
쑨원위안스카이
중화민국 호법군정부 육해군 대원수
(초임)초대2대
쑨원첸춘쉔
중화민국 비상 대총통
(초임)초대2대
쑨원천중밍
중화민국 육해군대원수대본영 육해군 대원수
(초임)초대2대
쑨원후한민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파일이 없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강우규김구김규식김좌진
김창숙민영환서재필손병희
신익희쑨원쑹메이링안중근
안창호여운형오동진윤봉길
이강년이승만이승훈이시영
이준임병직장제스조만식
조병세조소앙천궈푸천치메이
최익현한용운허위박정희
파일:Attachment/Sun Wen.jpg
초상화
이름쑨원 (孫文 / Sūn Wén)
출생지청나라 광둥 성 광저우[1]
사망지중화민국 경도특별시 협화의원[2]
본관광동성 동완현[3]
학력홍콩 Alice 의학교 의과대학원 의과박사
출신정당흥중회 / 중국동맹회 / 중화혁명당 / 중국국민당
종교개신교(회중 교회)
국적청나라 / 중화민국 / 미국
배우자루무전(1885년 - 1915년)
천추이펀(1892년 - 1925년)
아사다 하루(1897년 - 1902년)
오쓰키 가오루(1903년 - 1906년)
쑹칭링(1915년 - 1925년)
자녀아들 쑨커, 장녀 쑨진위안,
차녀 쑨진완, 3녀 미야가와 후미코
생몰일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 (58세)
안장지점장쑤 성 난징 중산릉
서명Sun_Yat_Sen_Signature.png
경력1894 흥중회 창립, 중화혁명 발기
1896-1897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연구
1898 중서학교 창립
1904 중화혁명군 창립
1905-1912 중국동맹회 총리
1912 중화민국 선포
1912 중화민국 임시정부 제1대 임시대총통 취임
1912 국민연총회 총리
1912-1914 국민당 이사장 당선
1914-1919 중화혁명당 총리
1917-1918 중화민국군정부 육해군대원수 자임
1918-1919 중화민국군정부 총재(총재직) 개임
1921-1922 중화민국 비상대총통
1923-1925 중화민국 육해군대원수 대본영대원수
1919-1925 중국국민당 총리, 영구총리
저작민권초보, 손문학설, 실업계획, 삼민주의

孙文·孫文(손문) / Sūn Wén.

본명은 孙德明·孫德明(손덕명) / Sūn Démíng(쑨더밍)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

1 소개

현대 중국의 아버지 [4]

근현대사의 중국인 중 가장 압도적인 존경을 받는 인물[5][6]

광둥 성 향산(지금의 중산시, 中山市) 출생으로 중국인들에게는 쑨 중산(孫中山, Sūn Zhōngshān)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관화 병음으로는 쑨 원(Sūn Wén)이지만, 영어권에는 그의 호인 이셴(逸仙)의 광둥어식 발음 얏센(Yat-sen)으로 알려져 있다. 광동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어를 쓰던 사람은 아니고, 홍콩영화에 나오는 광동어를 쓰던 사람이다. 본명은 쑨 떠밍(광동어로는 Syūn Dāk-mìhng)인데 스스로 문(文)이라 이름을 바꿨다. 참고로 공자가 존경한 고대 문명국 주나라의 초대왕이 무왕(武王)이고 그의 아버지가 문왕(文王)이며, 중국은 옛날부터 암암리 중국문화의 계통을 상징적으로 문왕 주공 공자로 이어진다 생각하였다. 문(文)이란 글자는 아무한테나 올리지 않는, 중국에 있어서 최고의 시호였다. 따라서 이름을 문으로 바꿨을 때부터 자신이 새로운 공화국 문명의 시조가 되겠다는 남다른 포부를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영미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 쑨 얏센(Sun Yat-sen)은 타이완 가오슝의 중산대학의 영어명칭 'National Sun Yat-sen University'로도 쓰인다. 중산은 그가 일본에 있을 때 사용한 가명 나카야마(中山)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일본 귀족의 성씨를 빌린 것.

2 생애

2.1 청조 멸망과 민국 성립

일반적으론 신해혁명의 주동자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는 신해혁명이 일어날 당시 미국에 있었다.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노력도 했지만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미국에서 활동자금을 모으던 사이에 알아서 혁명이 터져버린 것. 쑨원이 혁명의 발발에 아무 보탬도 안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혁명의 주역인 중국 동맹회부터가 쑨원이 만든 단체였고, 쑨원이 미국에서 열심히 모은 활동자금도 중국 동맹회를 지원하는 목적이었다. 신해혁명 이후 쑨원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외교활동을 하여, 청조에 대한 차관 중단, '청조를 돕는 일본이 지원을 중단하도록 요구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낸다. 이후 쑨원은 홍콩을 통해 귀국하여 난징임시정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고 을 전복시키고자 했지만 기반이 미약한 그가 지방 각지에서 일어난 혁명군만으로 청을 쓰러트리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뭔가 이승만 필이 나기도

결국 그가 선택한 방법은 북양군 총사령관 위안스카이와의 협상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혁명군 토벌을 명받고 복귀한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제안한 중화민국 총통직을 받아들이게 된다. 위안스카이는 그대로 토벌군을 거꾸로 몰아 베이징으로 쳐들어가 청 황실을 무너뜨렸고, 혁명은 성공했다. 위안스카이를 이런식으로 이용하려는 면모는 어쩐지 종씨인 손견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이 협상은 청을 무너뜨리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중화민국을 공화국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완전히 실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사사건건 의회와 부딪혔고, 결국 쑨원과 국민당은 위안스카이의 군사력에 쫓겨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21개조 조약 체결 협박에 시달렸고, 대내적으로는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권력을 꿈꾸는 중국인들의 영원한 병 황제병에 걸려 중화제국을 세우고 황제를 칭하다가 지방 실력자들의 외면에 꼬리를 내리고 물러나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2.2 군벌의 난립

위안스카이의 죽음 뒤 중화민국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중앙에서는 북양군벌 내의 파벌들이 돌아가며 베이징을 장악, 정치적인 실권을 행사했다. 주로 돤치루이의 안휘파와 펑궈장, 오패부등의 직예파 간의 파벌싸움이었다. 나중에는 장쭤린의 봉천파도 가담하면서 헬게이트. 지방에서는 북양군벌과 충돌하던 광둥, 광시, 윈난 등 지방군벌들이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다. 쑨원은 그 와중에 이 지방군벌들(주로 광둥, 광시 등 서남군벌 세력들)과 협력해 1917년 광둥 지역에 호법군 정부를 창설, 북양군벌을 토벌하고 중화민국을 되찾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애초에 지방군벌들은 쑨원이 가진 중화민국의 정통성이 필요했을 뿐,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하는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쑨원의 북벌론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그를 1918년에 쫓아내기까지 했다.

이후 쑨원은 상하이로 망명가 저술활동하면서 강연하고 지냈다. 1919년 5.4 운동 발발 당시 쑨원은 상하이에서 저술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쑨원은 5.4 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이를 계기로 혁명 세력의 주체를 '민중들의 힘'으로 인식해 1919년 10월에 국민당을 개창했다. 이는 1914년 7월 도쿄에 있을때 쑨원이 만든 '중화 혁명당'을 개칭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위로부터의 혁명'을 구상했던 그가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평가된다.

2.3 제1차 국공합작

두 번이나 군벌들에게 쫓겨나 도피생활을 하면서 쑨원은 군사력이 없는 자신들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한 가지 계기가 있었으니,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연이은 소련의 해외 기득권 포기 및 약소민족 지원 선언이었다. 물론 당연히 공산주의를 확대시키기 위한 노림수였다. 소련의 특사 마링(Maring)은 중국 안에 공산당 세력을 키우기 위한 파트너를 찾고 있었는데, 그 대상으로 국민당과 쑨원을 선택한 것.

마링과 쑨원은 몇차례 만나며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 제1차 국공합작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입당이 허가되었고, 쑨원은 국민당의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에도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몇 차례 군벌들과 전쟁을 치루기도 했지만, 국민당군 건설작업은 제궤도에 올라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창설로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쑨원 본인은 직후 간암으로 사망하여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뜻은 후계자를 자처한 장제스가 북벌을 완수하면서 이루게 된다. 북벌 도중 일어난 장제스의 쿠데타로 국공합작은 깨지지만 국민당 단독으로 북벌을 끝까지 진행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중국 공산당의 창립과 중국 국민당의 시스템 개혁에 모두 영향을 주어 이 시기의 두 정당을 쌍생아 관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3 평가

3.1 중화권에서의 위상

중화민국국부로 추앙받는 정치가이자 대륙에서도 존경하는 인물. 게다가 쑨원의 묘를 중국에서는 중산묘가 아니라 중산(中山陵)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가 현대 대륙, 타이완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중국에서 묘지명으로 능(陵)을 쓴다는 것은 그 의미가 큰데, 이유인즉 천자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산릉 부근에 몽골을 몰아내고 을 건국해 한족 왕조를 부흥시킨 홍무제의 효릉(孝陵)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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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난징 교외에 위치한 중산릉. 1929년 6월 1일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쑨원을 기념하는 건물이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 두 곳에 모두 존재한다. 중화인민공화국광저우중산기념당, 중화민국타이베이국부기념관. 영어로는 둘다 Sun Yat-sen Memorial Hall로 불리고 위치해 있는 도시만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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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섬중화민국 정부에서는 '국부'(國父)로서 최고의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주요 관공서마다 그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장제스를 비롯한 역대 총통들은 모두 그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 선서를 거행하고 있을 정도. 정치 지도자로서 쑨원의 이미지가 긍정적이니 망정이지, 다른 나라의 경우였다면 개인 숭배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대목.

대신 범록연맹을 비롯한 대만 독립진영에게는 장제스 만큼은 아니더라도 은근히 부정적 인식을 받고 있다. 천수이볜 정부 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쑨원을 기존의 '국부'가 아닌 '외래인'으로 규정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물론 많은 대만인은 쑨원을 국부로 받아들이지만 독립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7].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마오쩌둥에 앞선 '혁명 선행자'로 평가한다. 기독교식으로 비유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 이전에 활동했던 세례자 요한 정도의 위상인 셈. 그렇지만 벌써 사망 100주기가 다 되어가는 만큼 현대 본토 중국인들에게는 생각만큼 큰 관심을 받고 있지는 못하다.[8]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에 큰 공을 세웠음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100년 전 인물이라는 막연한 이미지로만 남아있을 뿐 특별한 비판을 받지도 않고 열렬한 추앙을 받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묘지를 으로 칭한다거나 주요 도시에 중산이라는 도로명이나 지명이 거의 반드시 존재할 만큼 공식적으로 중국의 위인 대우는 확실히 받고 있다.

홍콩마카오는 기독교 교세가 강한 만큼 쑨원을 위대한 중국인 그리스도인으로 뽑는다. 홍콩인 신자들은 쑨원과 함께 중국 최초의 목사인 량파 목사,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제스 등의 인물을 가장 위대한 중화 기독교인으로 뽑는다. 쑨원 본인부터가 홍콩과 인연이 깊고, 홍콩 사람들과 똑같은 언어인 광동어를 썼다.[9]

3.2 개인적인 면

정치 사상 면에서는 삼민주의를 주장하며 오권분립을 주장했다.

우리가 흔히 인민복이라 부르는 옷을 발명한 사람이 쑨원이다. 흔히들 인민복은 중국 본토에서만 입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쑨원이 일본 거주당시 일본의 가쿠란에 영향을 받아서 우리도 저런 실용적인 옷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어 낸 것이 '중산복(中山裝)'이다. 이 옷이 훗날 재봉방식의 변화에 따라 '마오복'이라고도 하는 인민복과 타이완의 국민복으로 나뉘게 된다.

[1]
2차 국공내전 직전에 중재협상 과정에서 찍은 마오쩌둥장제스.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보면 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상의 앞 주머니를 드러나지 않게 안쪽으로 재봉하면 인민복, 드러나게 재봉하면 국민복이 된다.

이 양반이 대륙에서 연설을 할 때 자신들이 잃어버린 영토이며 또한 되찾아야 할 영토를 거론하면서 한반도를 거명하기도 했다.(!) 이는 기존의 중화사상에서 정체하기보다는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서 주변국과의 관계를 중국 본위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는 당시의 온건 개화파들의 이론이었다.

물론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넘어간 권리를 되찾자는 주장일 수도 있다. 1924년 고베 강연에서 중국과 일본은 인의도덕을 공유한다고 하여 중일 협력을 외친 혁명파를 이끌고 있던 그의 위치상 딱히 당장 조선을 속국화할 입장은 아니었지만. 첨언하자면, 고베 강연에서 주창한 대아시아주의는 중국이 아시아 민족들 간의 연합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제국주의 일본'과의 공동 지도자론을 펼칠 때부터 큰 오류가 있었다. 결국 이 강연으로 쑨원에 기대와 호의를 걸고 있었던 한국의 여러 언론사 (친일 언론은 제외하고)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 동경 특파원 윤홍열은 대아시아주의 강연 이후 쑨원을 단독 대담했는데, 이 자리에서 '대아시아주의의 주장이 한국 실상과는 상반되지 않는가?"하는 질문을 내비쳤고, 이에 쑨원은 "대아시아주의와 일본의 한국 지배는 물론 양립할 수 없지만, 일본 내에서 그것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일본과 일본민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손문 나름의 대책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쑨원이 일본에 대대 갖는 인식이 타 서양 제국주의 열강과 비교해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는 의문점이 생기는 대목이기는 하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으로부터의 지원을 모색한 부분도 있고. 그러나 '암묵적으로' 내지는 '사실상'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했고 원조한 바가 있으니, 이 공으로 1962년과 1968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을 받았다.

신해혁명 이전에는 '청나라부터 타도하고 보면 답이 나올것이다.'라는 순진한(...) 마인드기도 해서 조선왕조나 청왕조를 비판했던 일본 극우 정객들과 굉장히 어울려 지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일진회 고문을 지낸 (우리한테는 천하의 개쌍놈이지만...) 우치다 료헤이를 비롯해 미야자키 도텐토야마 미츠루키타 잇키등 극우파 인사들하고 같이 친분을 쌓았고, 이 일본 극우파 인사들은 쑨원이 조직한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해 우창봉기, 신해혁명에 적극 가담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마지막 수상인 이누카이 츠요시와도 친구였다.

그도 후에 다민족국가를 인정하게 되지만 평화,입헌노선의 캉유웨이와는 대치되던 혁명파로서 몇 차례 봉기에서 뜻을 함께하던 동지들을 처형한 만주족 정권에 상당한 증오심을 갖고있었기 때문에 청을 무너뜨리는 것을 도와주는 대가로 만주를 일본에게 할양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물론 이 때의 혁명가들은 만주족을 '중원을 점거한 외세' 로 생각하고 있었다. 쑨원이 조직한 흥중회(興中會)도 중국의 광복이라는 의미. 하지만 만주의 위치적인 중요성은? 그만큼 일본이 뒤통수 때릴지 몰랐다는 얘기(...) 이렇게 하지 않아도 나중에 실현 되지만... 이러한 점은 쑨원도 '아시아주의자'로 한국의 김옥균, 안중근, 여운형이나 베트남의 호치민, 미얀마의 아웅산등 주창한 '대아시아주의'와 일맥상통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이들은 처음에 일본을 지지하다가 나중에 일본의 속셈을 알아채 반일로 돌아서기도 한다. 쑨원 역시 위안스카이의 21개조항 허용을 보고 일본의 속셈을 알아차린 후에는 그토록 장점을 배웟었던 일본에 맞서 싸우게 된다.

여운형은 쑨원과 접견한 자리에서 그의 정치사상에 대하여 '젊은 시절에는 멸만흥한(滅蠻興漢)을 내세워 청나라에 반대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다민족을 포용한 범중국주의자가 되었으며 늙어서는 민족 개념을 넘어 민권과 계급을 중심으로 한 혁명을 주창하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쑨원 역시 이 평가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혁명은 익을수록 붉어진다'고 답했다고 한다.

첫 아내는 19세에 결혼한 루무전(盧慕貞)으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쑨커와 딸 쑨얀과 쑨완을 두었다. 둘은 1915년 9월에 이혼했다. 아들은 중화민국의 고위직에 오르게 된다. 두 번째 아내인 쑹칭링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쑹야오주 ('찰리 송'이라는 미국식 이름이 유명하다. 중국어판 성경을 팔아서 떼돈을 번 후, 정치활동=혁명사업에 투신했다.)의 딸이었으며 쑨원의 비서였다.(쑨원과 쑹칭링의 아버지는 친구사이. 고로 그와 그녀의 사이는 무려 26살 차이...ㄷㄷㄷㄷㄷ 이 때문에 현재 타이완에서는 쑨원이 진성 '로리콘'이 아니었는가 하는 평가도 있고, 그의 패러디 동인지도 있다. 흠좀무. 저 둘 외에도 일본 망명 중에 결혼한, 22살 차이나는 일본인 아내 오오츠키 카오루(大月薰)가 있었으며[10] 그 외 첩이 둘 더 있었다.

딸 하나를 두었으나 어릴 때 사망했고, 이후군벌들로부터 도피 생활을 하면서 건강을 해쳐 내가 고자라니 더 이상 자식을 얻진 못했다. 평생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며 중국의 국부인 쑨원의 아내다운 모습을 보여서 현재도 중국과 타이완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여인이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태생이라는 설이 있는데 쑨원이 관련 문서를 위조해서 생긴 일로 실제로 그는 광둥성 출생이 맞다.
국부는 이중국적따위 신경쓰지 않는다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개신교) 신자였으며 이 덕분에 쑹씨 일가와도 친하게 지냈다만 결혼 문제로 관계가 깨졌다. 오늘날 홍콩의 교회에서는 가장 위대한 중국인 기독교인으로 쑨원을 뽑는다.

또한 독립 운동가인 김규흥과 협력관계로 있었다.

4 그 외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사람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처녀다운 순진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했다. 혁명 다 만들어놓고 군벌이나 외세에 냅다 갖다바쳐서 물거품 만들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면 누구 눈에도 그렇게 보일듯

2012 런던 올림픽 당시 쑨양과 혼동한 이들에 의해 한국 트위터에서 난데없이 부관참시된 일이 있었다(...). #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대만)의 도로에도 보면 중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도로가 있는데, 시내도로 이름이 중산로(中山路)라든가 중산대도(中山大道)라는 식으로 되어있다. 대만의 경우에는 고속도로 이름까지 중산이라고 되어있는데, 중산고속공로가 그렇다.

중화민국 해군이 건조한 자국함인 얏센은 쑨원의 호를 붙인 순양함이었는데 중일 전쟁때 일본군에게 노획되어 개명당했다.안습 다행히 2차대전이 끝날때 까지 살아남고 대만으로 반환되었다.

5 창작물에서의 쑨원

쿠보 노리타다의 《도교사》에서는 청조의 관헌에게 쫓기는 도중에 관세음보살을 만났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 하고 다녔다고 한다만 쑨원은 전술한 것처럼 기독교(신교)를 믿었기 때문에 신빙성은 없다. 단 기독교 인구가 적은 당시 동아시아인에게 어필하기 위해 한 얘기일 가능성은 있다.[11]

서유요원전에서는 백운동의 석벽에 새겨진 천강36성의 명단 가운데 한 명으로 써있다. 서유요원전의 천강36성은 천하를 뒤엎는데 성공하는 천명을 받은 혁명가들의 목록이다. 쑨원 밑에는 마오쩌둥이 써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서는 주인공과 가끔씩 만나거나 협조하는 조역으로 등장하는데 아직 채 제대로 된 혁명가가 되기 이전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이 때는 위에서 설명한 국민복도 입지 않고 청나라 복식을 하고 있고. 여기서 쑨원은 근대 중국의 국부가 아니라 의욕은 넘치되 상당히 새파란 얼치기였던 것으로 젊은 모습이 그려져 다른 매체 대비 상당히 너프된 듯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야스히코가 김옥균에 무지막지하게 버프를 거는 것과 대비하면 꽤 신기하다. 사실 그렇게 많이 나오지도 않는다.[12]

중국전함소녀에서는 손중산의 다른 이름 얏센(逸仙)에서 따온 중화민국경순양함의인화되었다.

  1. 중화인민공화국 광둥 성 중산시
  2.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둥청구
  3. 원숭환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4. 중화민국에서는 국부(國父)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진시황이래 2천년간 이어져 온 중화 전제황권을 최초로 전복시킨 혁명의 선행자(先行者)로서 존경받고 있다
  5. 중화인민공화국 국민들에 한정한다면 모택동의 인기에 밀리지만, 그쪽은 크고 아름다운 정치적 병크들 때문에 해외는 말할것도 없고 중국내에서도 부정적인 평가 역시 만만치 않다. 손문 역시 해외에서 부정적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택동에 비할바는 아니다(...)
  6. 손문에 비견될만한 인물은 또다른 먼치킨인 주은래 정도.
  7. 중화민국의 국민의례에는 국기와 쑨원 사진(국기 앞에 건다)에 3차례 허리를 숙여 절하는 것이 있다. 독립파들이 이것을 거부하는 성향이 있다.
  8.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지는 관심과 세례 요한에 대해 가지는 관심 차이를 생각해보면 명백하다.
  9. 지금도 광둥 성은 기독교 교세도 꽤 강한 편이다.
  10. 1888년생. 1903년 결혼, 1906년 중국 귀국 전에 이혼. 둘 사이에 딸이 있으며, 손자가 현재 일본에 생존하고 있다.
  11. 쑨원이 활동한 일본은 기독교가 전무한 곳이다. 동아시아에서 당시 기독교 인구는 영국령이었던 홍콩과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 그리고 일찍이 가톨릭이 전래된 조선 정도에만 있었다.
  12. 다만 이 작품의 손문은 한편으로는 무지막지한 버프를 받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주제는 손문 사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조금더 정확히 말하면 멸망흥한으로 대표되는 초기 손문의 민족주의적 사상보다는, 후기 손문의 사상을 주제로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