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민당/역사

중국 국민당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1 1949년 이전

1.1 신해혁명

일단 쑨원이 만든 흥중회(1894)부터를 중국 국민당의 전신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국민당 스스로도 해당 단체를 전신으로 간주하고 있지는 않다. 쑨원을 제외하고 계승하는 인적,물적 자원이 전무하기 때문.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를 토벌하기위해 비밀결사단체 중화혁명당(1914)이창당되었으며, 5.4운동 이후 쑨원을 중심으로 중화혁명당을 근대형 정당으로 개편한 것이 중국 국민당으로 1919년 10월 10에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쑨원 사후 국민당은 분열되었지만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 우파가 좌파를 숙청하였고 이후 중국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였고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타이완 섬으로 천도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무시못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 즉 오늘날 존재하는 중화민국은 사실상 국민당이 만든 국가인 셈이다.[1] 뒤에 보면 알겠지만 중화민국 내에도 국민당 외의 다른 정당이 존재하긴 했으나 꽤나 오랫동안 유명무실한 형태였다.

참고로 1911년에 결성된 '국민당'도 있는데, 이 정당은 중국 동맹회의 회원이었던 쑹자오런이 주도해 결성한 정당으로 중국 국민당은 해당 단체를 자신들의 전신으로 간주한다.

1.2 북벌

1925년 제1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었을때 국민혁명군이 결성되었다. 사실 본래 목적은 국공합작을 염두해둔 것인데, 쑨원 사후 장제스가 약속을 깨면서 당내 공산당 세력이 대거 숙청되었다. 이 사건을 4.12 상하이 쿠데타라고 하며, 공산당원의 70%가 처형되었고, 이 학살의 폭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게릴라전을 벌이게 되었다.

국민혁명군은 쑨원, 장제스의 지휘 하에 군벌들을 소탕하고 중국을 재통일하기 위해 북벌을 준비한다. 자세한 것은 장제스의 북벌항목 참고.

1.3 국민정부

동아시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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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북한/역사중화민국/역사 (북양정부/국민정부)

장제스의 주도로 북벌이 성공을 거두면서, 국민당의 주도로 '국민정부'(國民政府)가 수립되었다. 이 시기 중화민국독일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국민혁명군은 독일의 군사고문단의 지원과 함께 상당수의 독일제, 체코제 무기를 도입 무장하였다.

이당시 온 독일의 한스 폰 젝트 대장은 연전연패하던 국민당군에게 토치카전술을 제안하여 마오쩌둥이 세운 서금 소비에트를 붕괴시켜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1만킬로미터의 패주를 떠나게 하는데 큰 공헌을 했고,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대장은 오송 전투에서 일본군을 패퇴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이 일본과 친교하는 방향으로 외교방침을 바꾸자 독일로 송환되었다.

1.4 중일전쟁

그러나 기존 군벌들의 내란, 공산당과의 다툼에 휩쓸리고, 급기야 야욕을 불태우던 일본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딴죽을 걸어 베이핑[2] 앞까지 일본군이 몰려와 눌러앉은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만주국이 세워졌다. 만주의 지배자인 장쉐량은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이 자신의 기반을 말마먹을 것이라 생각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1만 5천명의 관동군에게 만주를 손놓고 잃는 뼈아픈 타격을 입고 중국 내륙으로 달아나야 했다.

장제스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허약한 국제연맹은 도움은 쥐뿔도 주지 못했고 장제스는 이를 갈면서 후일을 도모해야만 했다. 장제스는 우선 후방을 단단히 하기 위해서 공산당 사냥에 나서 공산당을 쥐잡듯이 몰아 산시성에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지방 군벌들의 영지에 중앙군을 보내 군벌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군벌군을 선봉에 세워 군벌군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썼다. 이는 장제스의 권력을 강화했지만 군벌들의 반발을 샀다. 군벌들은 장제스 좋으라고 자신의 기반을 깎아먹기 싫었고 공산당과의 협상을 통해 태업행위를 일삼았다. 초공 작전 중인 장학량도 이 중 하나였다. 장쉐량은 공산당을 토벌이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자신의 기반을 까먹기 싫어 제대로 싸우고 있지 않았다. 장제스의 독촉에 장쉐량은 오히려 국공합작의 대의에 대해 설득하려 했지만 상하이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막기 위해 공산당 토벌군을 뻈다가 오히려 뒤통수 맞은 경험이 있는 장제스가 공산당을 믿을리 만무했다. 장제스는 싸우기 싫으면 북방에서 더 먼 중국 남부로 떠나라고 최후통첩을 내렸고 궁지에 몰린 장쉐량이 장제스를 납치하니 이것이 바로 서안 사건이다. 결국 장제스는 항일의 의지에 불타던 여론에 밀려서 공산당과 휴전한다.

이후 장제스는 대규모 경제 개발, 군비 증강, 신생활운동을 통한 중국 사회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돈과 시간과 의지가 부족하여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진 못했고 특시 신생활운동은 눈뜨고 아웅으로 끝났고 경제 개발 정책은 급격한 성장을 하긴 했으나 대공황과 쿵샹시의 막장 정책이 겹치면서 완전히 말아먹고 말았다. 하지만 군비 증강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1937년 정신줄을 놓은 일본군이 노구교 사건을 일으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장제스는 공산당까지도 8로군을 재편하고 일본에 맞서 결사항전의 의지를 곧추세웠지만 베이핑의 지배자 쑹저위안의 태업행위와 산둥 군벌 한푸쥐의 적전도주로 화북에서 참패했고 제2전선인 상하이에선 수만명의 일본군을 섬멸하며 큰 전공을 세웠으나 장제스의 전략적 실수를 통해 항주만의 일본군 상륙을 허용하면서 결국 상하이에서도 참패하고 말았다. 중국의 최정예 주력 80만 대군이 붕괴하면서 상하이를 잃었고 이어 수도 난징, 우한도 모두 잃었고 충칭으로 천도해야 했다. 이어 푸젠성과 광둥성의 주요 항구들도 모두 함락됨으로 사실상 고립되었다. 허나 장제스는 항일의 기치를 놓지 않았고 1938년 태아장 전투를 시작으로 반격에 나서 일본군의 진군을 저지했다. 이미 난징을 공격하던 시점에서 보급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군이었으니 중국 내륙의 깊숙한 지역을 치기엔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창사와 헝양 등지에서 중국군은 매우 용맹히 분투하여 일본군을 잇달아 격퇴했다. 점령지에서조차 일본군은 주요 거점과 철도를 제외하곤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1941년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자폭을 하면서 미국과 동맹을 맺게 되었으나 미국 고문 스틸웰은 도움은 커녕 방해만 되는 X맨이었고 그의 무능으로 50만에 가까운 중국군 사상자가 발생했고 상덕 전투, 대륙타통작전 때는 자신의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중국군 전략 예비대를 빼내서 버마 탈환전에 투입함으로 중국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만들고도 이게 다 장제스 때문이다! 라고 정신승리를 시전하다가 짤리고 만다. 새 고문 웨드마이어는 오만한 인종차별주의자 스틸웰보다 훨씬 유능하고 협조적인 인물로 중국을 더 잘 도왔고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으로 전열을 정비하여 1945년부터 반격에 나서 차례로 일본군을 격퇴했다. 중국 전선에서 사실상 패배했음을 직감한 일본은 장제스에게 평화를 구걸하였으나 장제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1945년 일본군은 원자탄 두방을 처맞고 소련의 침공까지 마주하게 됨으로 항복하고 장제스는 항일 전쟁에서 비싼 댓가를 치르고 승리를 거두게 된다.

1.5 국공내전의 재발과 3당 훈정의 출범

전후에는 중국 공산당 및 중국 민주 동맹과 함께 논의한 협상이 결렬되고 국민혁명군을 동원해 총공세에 나서면서 국공내전이 재발한다. 중국 국민당은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을 초청하면서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여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한 '제헌' 국민대회를 1946년에 소집했으며, 중화민국 헌법을 반포하면서 다당제 헌정으로 전환했는데, 1947년에 여당/야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해 소집한 '행헌' 국민대회/'행헌' 입법원/'행헌' 감찰원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참정을 거부하면서 중국 국민당(大)/중국 청년당(中)/중국 민주 사회당(小)의 여대야소를 자연스럽게 연출했으니, 장제스의 책략으로 '3당 훈정'을 형성했다. 여기서 '3당 훈정'은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지만, 그들의 표밭은 어디까지나 중국대륙의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결국 1949년부터 1950년까지 국공내전의 패전으로 중화민국이 중국대륙의 99%를 상실하면서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지지세력의 99%를 잃어버렸다. 중화민국의 중앙정부가 타이베이로 천도하면서 3대 정당들의 본부도 타이완 섬으로 이전했다.

2 1949년 이후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타이완 섬으로 본거지를 옮겼으며, 이후에는 중화민국의 형식적인 연립여당이자 실질적인 독재정당으로 군림했다. 본토수복을 목적으로 38년간 계엄령을 유지하고 야당도 없는 현실로[3] 많은 것이 설명된다. 타이완 섬으로 건너간 직후에 패배의 원인을 부정부패로 몰면서 "부패 완전 박멸"에 나서, 상당부분 개선되었고, 장씨 가족/측근의 횡포도 점차 줄었다. 그러나 대만 본토에서 살던 이들에 대한 차별은 사회문화적으로 여전했다. 또한 그 후 여러 차례 중원 회복을(?) 노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1970년대 들어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 대신 UN 상임이사국이 되고, 리처드 닉슨 이후로 서방세계도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점차 고립되어 결국 현실은 시궁창이 되었다.

아무튼 중국 국민당이 3당 훈정을 포기하고 국민대회 대표선거(國民大會代表選舉)에 야당 참여를 허용한 것이 1991년이었고, 첫 직선 총통선거를 치른 것은 1996년이었다. 그 이후로도 천수이볜(陳水扁) 집권기인 2000~2008년, 그리고 차이잉원 2016~2020년에 야당이 되었다.

  1. 청천백일만지홍기에 캔턴으로 들어간 '청천백일기'는 국민당의 당기이며, 중화민국 국가는 동시에 국민당의 당가이기도 하다.
  2. 北平(북평). 현재의 베이징을 말한다. 명나라영락제가 천도하기 이전의 지명으로, 삼국지연의에서 공손찬의 본거지로 나오는 바로 그 곳 맞다. 다만 이 시기에는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기 때문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쑨원은 이 천도를 매우 중시하였는데, 실례로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을 이양할 때도 내건 기본 조건 두 가지가 난징 천도와 공화제 실현이었다. 후자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전자는 지켜졌다.
  3.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3당 훈정의 여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