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

(청산리 대첩에서 넘어옴)
청산리 전투
한국독립운동의 일부
날짜
1920.10.21 ~ 10.26
장소
중국 길림성 화룡현 관내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대한민국 독립군일본 제국
지휘관서일
김좌진
김규식
나중소
이범석
홍범도
최진동
안무
허근
강창대
방위룡
김연군
가노 노보테루
토모타케 타카시마
마사히코 아즈마
나오키 이소바야
시마즈조 기무라
병력보병 약 3000명[1]5000명
피해 규모전사 60명
부상 90명
전사 11명
부상 24명
결과
교전 후 독립군은 러시아 방면으로 이동

1 개요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구 일본군과 교전한 일련의 전투를 말하며 전과규모에 대해 이런저런 의문점이 많은 전투이기도 하다.

2 상세

2.1 일본의 만주 탄압과 독립군의 결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은 더욱 활발해졌고 이에 일제의 대만주 탄압도 점차 강경해져 갔다. 이 과정에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제는 10월에 훈춘 사건을 일으켜 이것을 병력 진입 구실로 삼고서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기도 한 일변, 1920년 2월, 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 잠시 머무르던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소련 적군적백내전의 휴전협정이 성립된 이후 잉여 무기를 서둘러 매각하려 들고 있었는데, 마침 독립군은 독립선언 후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가 보관하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게 되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고 동년 7월 독립군은 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서 매입한 무기인 권총, 기관총, 탄약 200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도로 수송했다.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던 북로군정서의 주력부대는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써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의 제21사단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의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진해 3북로군정서군을 3면에서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탓에 대일 관계에 난처한 처지에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북로군정서는 일단 안도현으로 이동해 서로군정서와 합류하고서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 이동을 시작한 일변, 대한독립군도 봉천성의 경계 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했다.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 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 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고서 부근에 있는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부대와 일본군의 간도 출병 대책을 협의했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과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된 때 일본군이 부근까지 이미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고자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철수하게 했다.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투를 자제하였으나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2.2 청산리에서 맞붙다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 가지고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 덩어리 두 덩이 동지들 입에 넣어 주었다.

―이범석, “우등불”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이범석의 지휘하에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오전 9시경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매복중이던 이범석 부대와 교전을 벌였다. 뒤이어 야마다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과 독립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를 지시했다.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줬다고 기록했다.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 때 독립군과 일본군의 군복 색깔이 거의 비슷하여 일본군이 자기들끼리 서로를 오인사격하는 상황이 벌어져 독립군이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했다.

한편,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부대의 제1·2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그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기병연대와 교전을 벌였다. 곧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이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는 어랑촌 부근 고지에서 철수했다.

다음날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계 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여 급습했으며 이로 인해 난전이 벌어졌다. 독립군은 반격을 가해 이 습격을 저지했다고 기록했으며, 이후 새벽 무렵 방어태세에 들어간 일본군을 피해 안도현 지역으로 부대를 옮겼다.

2.3 전투 결과

해방 이후 교육 현장과 역사학계에서는 이 전투를 독립군이 압도적인 교환비로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대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일제시대 무장독립투쟁의 아이콘으로 기능해 왔다. 90년대 이전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청산리 전투보다는 대첩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한일 양국 네티즌 간의 정보공유가 활발해지고 여러 사료를 통한 교차검증이 행해지면서 오히려 결과는 정반대임을 입증하는 결론들이 도출되었으며 이는 심한 논쟁과 논란거리를 낳고 있다.

한국에서는 독립군 측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근거로 하여 1000여명을 사살한 대전과를 올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 정도의 성과를 올렸는지에 대한 여부는 불분명하다. 한국과 일본에서 제시하는 자료를 교차시키면 내용 자체가 상이한 부분이 다수이며 부정확한 요소가 많아 독립군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어쨌든 독립군이 추격하는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서 발목을 잡은다음 이들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계속 이동하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대단한 전과를 거두기보다는 일본군을 상대로 교전의 의의와 약간의 전술적 성과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최초로 전과부분에 대한 묘사가 나온 것은 박은식이 쓴 독립운동의 사기진작을 위한 일종의 역사서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이다. 여기서 3300명을 사살했다고 했지만 박은식 역시 목격담을 듣고 쓴 것이기 때문에 명확한 근거는 없었다. 거기다 최초 3300명에서 ~ 1200명까지 줄었으며 이범석이 쓴 자서전에서는 1000여명까지 피해는 줄어갔다. 허나 1000명의 사망자를 냈다는 것도 명확한 근거가 역시 부족하다.

만약 정말로 일본군이 수천 명 규모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면, 일본군은 마땅히 그 피해를 보충받았어야 하는데, 수천 명이나 되는 보충인원이 일본에서 만주까지 이동하는데도 행정문서 등의 기록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측 기록을 믿기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한국 측의 주장대로 일본군이 졸전을 펼쳐 폭도(일본 제국의 입장에서)들을 섬멸시키지도 못하고 대량의 사상자만 낸 전투였다면 당연히 사단장을 보직해임시키는 등의 인사조치가 취해지는 것이 정상 아니겠는가?

또한, 유일하게 실명이 거론되는 '연대장 가납'과 이름이 비슷한 사람은 가노 노보테루 연대장인데, 간도출병사에 따르면 가노 연대장이 지휘한 제 27기병연대는 퇴로 차단을 위한 기동에 나섰으나 습지가 너무 많아 퇴로 차단은 실행하지도 못하고 어랑촌에 포진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가노 연대장이 설령 전사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익히 아는 '계곡 속에 들어온 일본군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전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가노 노보테루는 1922년까지 군생활을 계속한 것으로 나온다.[2]

1979년과 1985년에 나온 일본의 군사 사학자 사사키의 청산리 전투 연구 논문에 따르면 일본 제 19사단 사령부의 보고서를 근거로 일본측에서는 청산리 전투의 일본인 사상자를 전사 11명, 부상 24명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 수치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전사자 명부와 일치한다. 따라서 일본 측은 이 기록을 바탕으로 청산리 전투의 사상자를 파악하고 있다.

청산리 전투의 전사자에 관한 일본 측 주장을 정리하면 첫째, 한국 측 자료의 추정치가 지나치게 들쭉날쭉하여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우며, 둘째, 수천 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명피해가 있었는데도 군을 재편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셋째, 유일하게 한국 측 사료에서 사망자로서 이름이 거론된 인물이 경우 청산리 전투 이후에도 활동한 것이 드러나고[3] 넷째로 일본 19사단 사령부의 보고서를 근거로 파악한 사망자의 숫자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전사자 명부와 일치한다는 것을 근거로 청산리 전투의 일본군 피해는 전사 11명, 부상 24명으로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일본 측 주장 역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 근거로 일본군이 자신들의 패배를 축소, 은폐한 사례가 한두 건이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본군의 일방적인 패배였을 가능성은 높지 않으나, 적어도 일본군 입장에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결과를 사실대로 서술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상존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바로 일본 측 기록인 간도출병사에서도 나타난다.

간도출병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500~600명 규모의, 기관총을 보유한 무장 조직을 상대로 1개 기병연대는 퇴로 차단을, 1개 보병연대는 추격을 맡아 확실한 병력의 우세를 점한 상태였고, 실제로 600명 규모의 숙영지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첩보가 사실이라는 것까지 확인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후 실제로 추격에 나선 것은 1개 보병중대[4] 규모였고, 이들은 약간 떨어진 정도도 아니라 무려 30분 이상 단독으로 교전한 이후에야 연대 주력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본대와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600명 규모의 무장조직을 상대로 4:1 이하의 열세에 처한 상태로 교전을 벌였는데, 그럼에도 이들은 오히려 1대4의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이며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개 중대가 수적으로 4배 이상 많은 적에게 공격을 받아 핀치에 몰려 있었으나 용전분투하여 오히려 4대1의 유리한 교환비로 교전을 종료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 이거?


그리고 일본이 간도 참변에서 유달리 잔학한 토벌 작전을 펼친 것 또한 패배의 간접적인 증거로 작용할 수 있다. 일본이 의병을 잡기 위해 애꿎은 민간인까지 희생시킨 것이야 남한 대토벌 작전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 때는 '의병을 잡겠다'라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민간인들의 희생을 신경쓰지 않은 것에 가까우며 실제로 수많은 의병들이 쓰러지면서 적어도 호남지역에서의 항일 운동은 그 기반부터 흔들리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간도 참변에서는 이미 독립군들이 중국군과의 사전 교섭을 통해 안전지대로 피난한 이후였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고,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수사가 아니라 화풀이성으로 잔학한 학살만 일삼았다. 간도 참변의 시작일자가 청산리전투보다 앞섰다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이런 반론은 간도 참변이 벌어진 대부분의 기간이 청산리 전투보다 뒤에 있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간도 참변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간도 참변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약탈과 강간을 하는 것 정도는 늘상 있는 일(...)에 가까웠지만, 이토록 잔학한 학살을 행할 때에는 대체로 그 이전에 일본군이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전투가 있었다. 수천 명이 궤멸했다는 것은 신빙성을 부여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일본군의 입장에서 '패배' 내지 '개운치 않은 결말'이라고 느낄 만한 피해가 있었던 것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측은 야스쿠니 신사에 기록된 인원과 후생성 자료,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의 내용이 일치한다는 것을 근거로 드나, 애초에 앞의 두 자료는 2차 사료에 가깝다.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를 바탕으로 전몰자를 봉안한 것이 야스쿠니 신사고, 같은 보고서를 채택하여 연금 수혜자를 결정한 것이 후생성의 자료이다. 서로를 참고한 자료들이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신빙성이 늘어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가 모든 전몰자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전후에도 살아있던 사람이 야스쿠니 신사의 명부에 올라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 [5] 야스쿠니 신사가 자체적인 조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대체 무엇을 근거로 집계했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오류가 있는 것인가?

청산리 전투의 전사자에 관한 한국 측 주장을 정리하면 첫째, 현대로 올수록 한국 측 자료의 추정치 역시 납득 가능한 선에서 모이고 있고, 교과서에 나온 숫자는 별로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은 잠시 넘어가자 둘째, 이 정도의 인명피해라면 재편성을 위한 인사명령까지는 갈 필요가 없으며, 셋째, 일본 측 사료를 전적으로 따른다 하더라도 세부적인 기록에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넷째, 일본군의 다른 대 게릴라 작전과 비교했을 때도 간도 참변은 그 정도가 지나쳤으며, 다섯째, 후생성 자료와 야스쿠니 신사,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는 서로를 바탕으로 작정된 것이므로 상호 간의 일치가 주된 근거로 작용할 수 없고, 여섯째, 야스쿠니 신사의 전몰자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근거로 적어도 일본군이 주장하는 것만큼 일방적인 교전비는 아니었다

2.4 전투 이후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아져 오자 동북쪽의 밀산으로 대거 후퇴하였고, 소련의 제안에 따라 적백내전에 참여했다가 자유시 참변에 휘말리면서 큰 피해를 입어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역량을 상실했다. 이후 만주사변으로 중국군과 함께 대일전에 참여한 1930년대 이후에도 외국군에 크게 의존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한국인 독립군이 단독으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인 마지막 전투인 셈이다.

2.5 한일 인터넷상에서의 논쟁과 시선

당시 기사화된 한일 네티즌간의 항쟁 '#'

과거 인조이재팬시절, 인조이재팬을 배틀 아레나로 순식간 만든 분기점이 있었으니 '청산리 전투 논란'이다.

당시 일본의 네이버 총독부를 위시한 네티즌들은 일본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를 근거로 한국측이 주장하는 '대승'이 사실이 아니며 결과는 반대였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에 '일본군 3명 사상 독립군 60명 사살. 다수한 총포를 노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한국측 주장대로 네 자리수 인원이 전사했는데도 모든 전사자를 안치하는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이 없다.
  • 독립군이 사살했다는 당시 일본군 연대장 가노가 이후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 3000여 명이나 전사했는데도 병력 충원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 연대들이 증원도 받지 않고 추격을 지속했다.
  • 3000여 명이 사망한 특기할만한 결과인데도 어느 곳에도 기록이 없다.
  • 한국측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언급이 독립군의 자서전에서도 나온다.
  • 독립군이 공세인 상황에서 후퇴했으며 일본군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되려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

거기에 편승해 기존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에 반감을 품고 있던 한국인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논거로 청산리 전투 대승이 사실이 아니며 독립전쟁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당시 독립운동가 등이 윤색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독립군의 전과가 신문이나 사료마다 중구난방이다.
  • 청산리 전투 관련 연구 사료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계속해서 감소하였다.
  • 청산리 전투 패잔병의 사진이라고 알려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일본군의 복식이 1930년대 이후 것으로 해당 사진은 청산리 전투의 사진이 아니라 후대에 찍힌 것이다.

3명밖에 죽지 않았는데 군사 2만5000을 간도로 끌고와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문제는 기존 역사교과서나 민족주의 사관에서 주장하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엄청난 전력손실을 입은 일본군이 복수의 목적으로 간도참변을 일으켰다는 인과관계인데 간도 참변이 시작된 날짜는 청산리 전투(10월21일 시작)의 이전인 10월 9일부터 약 27일간 지속되었으므로 모순이 발생한다.

당시(2004~2005년 경) 디시인사이드 역사갤러리의 네임드 유저였던 '고람거사'가 기존 사관으로 일본인과 맞섰다가 패퇴했으며, 같은 시기 서울대학교 교수 이태진이 인조이재팬에서 활동하다가 대패했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인조이재팬의 한국인과 한국사 사이트의 분위기는 초토화 되었다. 네이버 총독부의 활동이 더 활발해짐은 물론이요 국내의 일빠국까도 이에 물타기에 돌입했으나 '고람거사'는 기존에 네이버 총독부에서 자료로 들었던 일본 후생성의 문서가 날조된 자료라는 사실을 파악했다면서 이 점을 들어 반격에 나섰다. 네이버 총독부에서는 이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말 돌리기에 들어가 싸움은 한국 측 승리로 간주될 뻔했으나 익일 일본 측에서 후생성에 직접 전화해 문서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고람거사는 일본측이 논거로 드는 후생성 사망자 명단보다 실제 사망자가 많다는 일본 측 자료를 보고 반격에 나선 것인데 실상은 고람거사가 '사상자'를 '사망자'로 혼동한 탓에 나온 오해였다. 이 부분은 당시 활동하던 역사 사이트 회원 일부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인터넷 상에는 이전 패배만큼 주지하지 않았으나 해프닝에 가까운 이유로 어이없게 패배한 사례라서 역사 사이트에서 인조이재팬을 언급하면 이것을 금기로 다루거나 분노들에 휩싸이곤 했다.

논쟁이 발생한 지 10년도 더 넘었지만 한국 역사학계는 일본인들이 제시한 대외비를 비롯한 실제 자료들과 지표에 대해 반박을 내놓지 못한채 박은식의 주장이나 신문기사나 인용하고 있다(대표적으로 신용하 서울대학교 교수). 그리고 이 사건은 2010년대 이후로 인터넷 일각에서 몇몇 사람들을 친일파자국 혐오자로 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등 이 논쟁의 나비효과는 현재진행형이다.

한편 이 싸움은 한국사 사이트에 단순한 회의가 아닌 쇄신 필요성을 환기하기도 했다. 이때 논쟁을 보면 한국측엔 학술논쟁을 하면서 논문을 인용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민족주의 사관으로 쓰여진 교과서를 베이스로 한 사관과 엄격한 사료 비판을 이용한 논쟁을 대상으로 한 경험의 부재가 인조이재팬에서 벌어지는 연패를 낳았다는 분석이 나왔고 10대에서 20대가 절대 비중을 차지하던 이용자와 달리 일본 측은 30대에서 50대로 추정되는 인물까지 참여했다는 점도 반성할 점으로 꼽혀 고연령 층에서도 인터넷을 활용한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비판이 대두됐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역사 갤러리가 붕괴하고 이후 역사 사이트는 분화하고 군소화하면서 이런 논쟁하는 장은 좁혀졌으면 좁혀졌지 넓어지지는 않아서 쇄신 분위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로 제대로 된 토론을 위해선 논문과 1차 사료들을 베이스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게 성과라면 성과. 독립 운동 당시 사기 진작을 위한 일종의 선전인 과한 전과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민족사관에 대한 반성과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주장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억지로 키우기보다는 사실에 근거한 서술을 하되 열세의 전력과 상황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한 독립군의 의의를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6][7]

3 미디어

1983년 이장호가 감독한 <일송정 푸른 솔은>이 본격적으로 이 전투를 그린 영화지만 당시 막대한 제작비를 들였으나 서울관객 7만 3천에 그치며 흥행은 실패했다. 이 영화에서 김좌진 장군을 故 김기주(1940~2001)가 맡았는데 이 분은 나중에 여명의 눈동자에서 무다구치 렌야를 연기했다! 사실상 독립운동가 전문 배우

이 작품이 끝나고 보면 당시 유일한 청산리 전투 참전 용사로 살아계셨던 고() 이우석 옹(1896-1994)이 나와서 잠깐 내레이션을 하는데 참으로 가슴아픈 말을 하신다.

"그때 참전한 동지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병사하거나 이제 남은 건 나 혼자야. 나도 머지않아 곧 죽겠지. 하지만 이 늙은이 죽기전에 소원이 하나 있소. 두동강 난 이 조국이 제발 살아생전 통일되는 것을 보고 싶소....우리같이 남의 나라에서 죽어라 싸워야 하던 그들이 얼마나 안타깝겠어.....요즘 젊은이들은 나라가 먹고 살만해 지니까 이나라를 지켜낸 분들을 너무 기억하지 않는것 같아. 조금이라도 그분들의 고마움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1. 최소 1200명
  2. 단 이 부분은 일본어 위키백과 기준으로 청산리 전투 문서에서는 출처필요 태그가 붙어있고, 제 27기병연대 문서에서는 출처를 '관보'라고 하고 있다.
  3. 상술했듯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출처필요라는 부분과 출처가 존재한다는 부분이 혼재하고 있음
  4. 메이지 23년 육군정원령에 명시된 1개 중대의 정원은 장교와 부사관까지 포함해서 136명이다!
  5. http://news.kbs.co.kr/news/view.do?ref=A&ncd=2952521
  6. 비주류, 재야 같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학설들과 학자들이 하도 설쳐서 청산리 대첩처럼 과장되거나 왜곡된 주장, 사실들이 아직까지도 상당히 많다.
  7. 전투 결과가 일본측 기록과 같다고 해도, 전투에서 소기의 전술적 목적을 이룬 쪽은 독립군측에 가깝다. 일본군의 목적과는 다르게 독립군은 조직을 온존하여 이동하는데 성공하였고 포로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추격전의 목적달성에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봐도 된다. 일본군 전사자가 적다고 해도 저 전투결과는 상부에서 문책을 하면 했지 칭찬을 받을 결과가 절대 아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봉오동이나 청산리전투 이후에 일본군의 간도학살이 더 심해진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전사자 수를 떠나 이 결과가 일본군 입장에선 매우 약이 오를 결과였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