鄱陽湖大戰 | ||||
Battle of Lake Poyang |
진우량은 태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파양호(鄱陽湖)에서 역습하여 싸웠다. 진우량의 군대를 스스로 60만이라 칭했는데, 큰 전선을 이어 진(陣)을 형성하고, (배) 누의 높이가 10 여장이나 되어서, 서로 이어진 것이 수십이나 되었으며, 깃발과 창, 방패들이 바라보면 실로 산과 같았다. ─ 명사(明史) 태조본기(太祖本紀) |
파양호전투 | ||
날짜 | ||
1363년 | ||
장소 | ||
중국 파양호(鄱陽湖)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주원장군 | 진우량군 |
지휘관 | 주원장 서달 상우춘 유통해 | 진우량† 진선아 장정변 진리 진우인† |
병력 | 20만 | 60만(호왈) |
피해 규모 | 불명 | 거의 전멸 |
결과 | ||
진우량의 전사, 주원장의 승리 | ||
기타 | ||
명나라의 건국 |
1 개요
1363년, 중국 파양호(鄱陽湖)에서 주원장(朱元璋)이 이끄는 군단과 진우량(陳友諒)의 군대가 맞붙은 전투. 이 전투의 승리로 주원장은 전중국 최강자의 자리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진우량은 완전히 몰락해버렸고, 진우량이 몰락한 시점에서는 또다른 군웅인 장사성(張士誠) 역시 주원장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면으로 볼때, 파양호 대전의 결과로 주원장의 황제 등극은 사실상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원장 일생 일대의 격전이었던것.
그리고 파양호 전투는 중국 역사에서는 매우 보기 드물게, 당대 최강의 군웅들이 모든 전력을 걸고 수군(水軍)을 동원해서 겨룬 전투다. 물론 그전까지 수군이 전쟁에서 동원되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이 정도 규모의, 그리고 역사적 의미에서 이렇게 커다란 싸움의 수전(水戰)은 오직 적벽대전(赤壁大戰) 밖에 없다.[1]
또한 이 싸움에서는 분명하게 화약 병기가 사용되는 언급이 나온다. 이제 수전에서도 화포가 사용되면서, 수전과 해전(海戰)의 양상은 분명하게 바뀌게 되었다.[2]
2 발단
2.1 주원장의 대두
명(明)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
역사상, 주원장보다 비참한 신세에서 기어오른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유민, 거지, 고아의 신세가 되고, 탁발승(托鉢僧)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병으로 죽을뻔 하기도 하는등, 그의 인생은 비참함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주원장은 곽자흥(郭子興)의 수하가 된 후로 뛰어난 능력을 살려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355년, 곽자흥이 사망하고 그 세력을 이어받은 주원장은 자신의 근거지를 장강 이남으로 옮길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였다. 당시 주원장의 근거지는 정원(定遠)[3]이었는데, 안휘성 중부에 있는 큰 호수인 소호의 장군 요녕안(廖永安)과 유통해(俞通海)가 무려 1000척의 배를 이끌고 자신에게 항복하자, 이를 이용해 강을 건너고 원나라 중승 만자해아(蠻子海牙)의 군대를 격파하여 강남으로 세력을 옮기게 되었다.
그 후 주원장은 태평(太平)[4], 채석(采石), 우저(牛渚), 그리고 현재의 남경인 집경(集慶)을 손에 집어 넣으며 일약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2.2 장사성, 진우량과의 조우
장사성(張士誠) |
그러나 당시 강남에서는 주원장 말고도 강력한 세력들이 있었다. 게중에 장사성은 원(元) 말기의 혼란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군웅 중에 한명으로,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에게 탈탈 털려서 대패하여 세력이 약해졌다가, 탈탈이 모함을 받고 쫒겨나자 다시 한번 세력을 일구는데 성공했다.
1356년, 주원장은 양헌(楊憲)을 사자로 보내 장사성과 우호 관계를 맺을 의사를 표시했으나, 장사성은 양헌을 돌려보내지 않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역으로 주원장을 공격했는데, 이 공격등은 주원장 휘하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인 서달(徐達)이 막아내고 반격까지 하면서 격파하였다.
서달은 상주(常州)[5]까지 나아가고 점령함으로서, 장사성에게 대단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장사성은 원나라 조정에 항복하여 그 기반으로 항주를 점령해서 다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이러한 때, 주원장은 세력을 키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서달과 상우춘(常遇春), 두 명의 장수는 계속해서 밖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주원장 본인은 학자들을 모으고 지역 백성들 만나 다독이며 민심을 얻는데 주력했다. 그는 장수들에게도 약탈을 막으라고 계속해서 지시했고, 차츰 기반을 굳혀가던 중, 1360년이 되자 마침내 진우량과 인접하게 되었다.
2.3 진우량과의 대립
진우량은 본래 어부의 자식으로, 당대 군웅 중 한명이었던 서수휘(徐壽輝)의 군단에서 예문준(倪文俊)이라는 인물의 수하로 있었다. 서수휘는 천완(天完)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으나 원나라에게 패배하여 세력이 약화되었고, 다시 세력을 일구었지만 이번에는 승상인 예문준에게 좌지우지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진우량은 기회를 보아 예문준을 참살하고 스스로 선위사(宣慰使)라고 일컫으며 그 세력을 손아귀에 넣고, 서수휘의 세력 역시 실질적으로 장악하였다. 진우량은 안경(安慶), 용흥(龍興), 서주(瑞州), 소무(邵武), 길안(吉安), 무주(撫州), 건창(建昌), 공(贛), 장(汀), 신(信), 구(衢)를 모두 격파하고 손에 넣어 일약 장강 이남 최대의 세력이 되었다. 진우량과 주원장은 태평을 경계로 세력을 마주하였다.
선공을 먼저 취한것은 주원장이었다. 주원장은 먼저 상우춘을 보내, 진우량이 함락시킨 원나라 영토인 지주(池州)를 공략하게 함으로서 선공을 취하였다.
1360년 5월, 진우량은 조보승(趙普勝)[6]을 격파하고 그 세력을 병합한 후 지주를 공략하려 했지만, 명나라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서달은 진우량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곧 진우량 역시 반격에 나섰다. 진우량은 태평을 함락하고, 수비장이었던 주문손(朱文遜), 원판(院判) 화운(花雲), 왕정(王鼎), 지부 허원(許瑗)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곧 명목상의 군주였던 서수휘까지 참살하고 명실상부한 강남 최강자가 된 진우량은 광서와 호광을 손아귀에 넣고 국호를 한(漢)이라고 정하여 강력한 기세를 뽐내었다.
황제가 된 진우량은 이제 장사성에게 동맹을 제의했고, 주원장의 세력인 응천부(應天府)[7]을 함락시키자고 권했다. 당연히 응천부에서는 엄청난 난리가 벌어졌고, 주원장은 이제 최대의 위기에 처하고 만다.
2.4 주원장의 반격
원말군웅도 |
당시의 시점에서 진우량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그 진우량이 장사성과 힘을 제대로 합친다면 주원장은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게 된다. 주원장 휘하의 맹장들은 모두 제각각 의견이 분분했고, 어떤 이는 아예 항복을 주장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종산(鍾山)[8]으로 달아나서 굳게 수비만 하자고 주장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의견이 분분한데도, 계책을 내놓을 유기(劉基)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대충 그 속을 짐작한 주원장이 따로 유기를 불러 개별적으로 말을 하도록 하자,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유기는 갑자가 화를 버럭 내면서[9] 소리쳤다.
"항복이나 달아날 것을 주장하는 자들은 참수해야 합니다!"
주원장이 적절한 계책을 물어보자, 유기는 "적이 교만하니, 깊이 들어오길 기다려, 복병을 두어 이들을 맞이하게 하면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였다.
그러던 중, 의견을 교환한 일부 장수들은 먼저 함락된 태평을 먼저 회복하자고 주장했지만, 주원장은 이 의견에 회의적인 생각이었다.
"불가하다(不可). 저들은 상류에 있는데다, 수군이 우리보다 10배나 되니, 갑작스레 회복하기는 어렵다."
또다른 장수들은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진우량과 격돌하자고 주장했지만, 주원장은 이에 대해서도 분명한 전략적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불가하다(不可). 저들은 측면부대(偏師)로 우리를 막고 있어서, 전군이 금릉(金陵)으로 재촉하여 가도, 흐름을 타고 반나절이 도달할 수 있지만, 우리의 보기가 급히 돌아기는 힘들다. 백리를 급히 가서 싸우는 것은 병법에서도 꺼리는 바이니, 계책이 못된다."
장수들의 제안을 모조리 거부한 주원장은, 수하인 호대해(胡大海)를 진우량의 후방인 신주(信州)[10]로 진격시키고, 부하 중에 과거 진우량과 친분이 있던 강무재(康茂才)를 이용해 거짓 편지를 보내, 진우량을 꾀어내었다.
이에 제대로 걸린 진우량은 급하게 부대를 이끌어 동쪽으로 나아갔는데, 이미 주원장 휘하의 명장들은 모두 매복을 한 상태였다. 상우춘이 오익군(五翼軍)을 이끌고 석회산(石灰山)에 매복하였고, 서달은 성 남문 밖에 진을 쳤으며, 양경(楊璟)은 대승항(大勝港)에 주둔하고, 장덕승(張德勝) 등은 수군으로 용강관(龍江關)을 나오고, 주원장은 직접 노룡산(盧龍山)에서 군단을 지휘하였다.
이후 진우량이 도달할때가 되자, 때마침 기상 상태는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것만 같은 형세였다. 이에 주원장은 부하들이 서둘러 밥을 지어먹게 하고는 공격을 가하였다. 과연 예상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 비때문인지 진우량은 자신을 포위하는 주원장의 군대를 눈치채지 못한듯 싶다.
빗 속에 여러 수군들이 뒤엉키고, 육지에서 주원장의 군대가 합공을 가하자, 진우량은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대패를 당하였고, 전선 수백여척이 일시에 도망을 쳤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셀수조차 없었다. 진우량 본인은 작은 배를 타고 서둘러 강주[11]로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가장 우려하던 장사성과 진우량의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초에 주원장이 강무재를 진우량에게 보낼 당시, 계책의 성공을 의심스러워 하던 이선장에게 주원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걱정할것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두명의 도적들이 힘을 합치면, 우리의 꼬리와 머리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만약 급히 와서 (한쪽을)먼저 물리치면, 장사성은 깜짝 놀라 낙담할 거요."
실제로 장사성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주원장은 당면한 최대의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원장은 기세를 몰아 태평을 회복하고 안경(安慶)을 탈환하면서, 역으로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며 진우량을 압박하였다.
진우량도 계속 당하지 않기 위하여, 반격에 나섰다. 다음해인 1361년의 7월, 진우량의 장수인 장정변(張定邊)은 안경을 함락시켰는데, 때마침 8월 주원장은 산동을 평정하면서 기세를 떨치고 있는 원나라의 차칸테무르(察罕帖木兒)와 손을 잡고 북으로부터의 위협을 봉쇄했다. 또, 차칸테무르가 익도(益都)[12] 공략에서 많은 시간을 소모하자, 그틈에 직접 주력을 이끌고 진우량과 격돌, 진우량을 대파시키고 강주(江州)를 함락하였고, 군사를 나누어 남강(南康), 건창(建昌), 요(饒), 기(蘄), 황(黃), 광제(廣濟)까지 모조리 손아귀에 집어 넣었다.
대패를 거듭한 진우량은 무창(武昌)으로 물러났다.
주원장의 진격과 밀려나는 진우량 |
주원장의 세력은 날개가 달린듯이 성장하였고, 이에 비해 진우량은 계속해서 엉거주춤 물러나고만 있었다. 점점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진우량은 드디어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전력을 모조리 총동원하여, 남창(南昌)으로 진격하였다. 주문정(文正) 및 등유(鄧愈) 등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으나,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자 마침내 주원장 역시 대군을 이끌고 지원하기 위해 진군하였다.
3 양측의 전력
무경총요(武经总要)의 누선(樓船) 그림 |
진우량은 이 싸움에 앞서, 그야말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하였다. 그는 즉시 누선 수백여척을 제조하였는데, 문제는 그 누선이 모두 높이가 십여 장이나 되고, 붉은 칠로 장식하며, 배마다 3겹으로 만들어, 말달리는 마구간(馬棚)까지 달려있던 충격적인 물건이었다는것.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모두 기가 막혀서 "이렇게 큰 배는 생전 처음 봄." 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임팩트였다.
또한 남창 공략에서는 비제(飛梯)[13]와 충차(衝車) 등을 있는대로 동원하였다. 얼마나 진우량이 이 싸움에 모든 전력을 다 동원하였는가 하면, 명사 진우량 전에서는 가족과 백관을 싣고, 모든 예봉으로 남창을 공격하였다. 라는 언급이 있다. 기둥뿌리까지 뽑아서 진격한것. 이건 무슨 함대결전사상에 거함거포주의까지
그리고……가장 중요한 전력으로 병력의 숫자에 대해서인데, 명사 태조본기에서는 진우량의 병력에 대해 60만이라는 충격적인 언급이 있다. 다만, 진짜로 60만이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60만이라고 칭했' 다는 언급이다. 이른바 호왈(號曰) 이라는것. 그러나 호왈이라고 해도 60만이라는 언급을 할 정도면 엄청난 대군임은 분명하다.
이에 맞서는 주원장은 20만 대군을 동원하였다.[14] 물론 이 역시 어느정도 과장이 있을것이다. 하지만 진우량보다 적은 병력이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병력의 숫자보다 주원장이 진우량과 결정적인 차이가 났던 부분은 바로 함선의 차이. 진우량은 거대한 몽둥(艨艟)선 위주로 함대를 꾸렸으나, 이에 주원장은 이에 비해 가볍고 대신에 속도가 있는 배 위주로 함대를 보유했다. 싸움에 들어가기 이전까지, 눈앞에 보이는 함선의 거대한 크기 차이에 모두가 주눅이 들었으나, 실제 싸움에서 이는 주원장이 승리를 거두는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명나라 간행물 삼재도회(三才圖會)의 복선(福船) 그림 |
4 전투 진행과정
주원장은 우선 호구(湖口)에 진을 치고, 그보다 후방인 경강구(涇江口) 및 남호자(南湖觜)에 복병을 배치하여, 진우량의 퇴로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한편 주원장이 당도하기도 하였고, 자신에 대한 포위망을 펼치는 모습이 보이자, 진우량은 남창에 대한 포위를 풀고 파양호로 나와 주원장과 결전을 벌이려는 모습을 취하였다. 어차피 주원장의 주력군만 무찌르면 남창 정도는 언제든지 함락이 가능하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7월 20일, 양군은 강랑산(康郎山)이라는 곳에서 처음 조우하였다. 주원장은 부대를 11부대로 나누어 적을 막아내었다.
본격적인 교전은 다음날 부터 이루어졌다. 7월 21일, 상류의 흐름을 타고 있는 진우량의 군세가 가히 하늘을 찌를듯 하는데, 서달은 몸소 다른 장수들보다 앞장 서서 싸워 적의 선봉을 깨고 1,500명의 적을 무찌르고, 적의 큰 배를 한척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상우춘 역시 장수들을 이끌고 싸웠고,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가 가히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조용하던 파양호는 수십만 대군이 외치는 함성 소리로 가득찼다. 유통해(兪通海) 역시 군대를 지휘하며 화포를 사용해 진우량 군의 함선 수십여척을 박살내었다.
이때, 진우량군의 효장(驍將)[15] 장정변(張定邊)이 주원장이 타고 있는 함선을 발견하고, 바로 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모래사장이 있는 얕은곳에서 배가 서로 뒤엉켜서 주원장은 엄청난 위기에 처했는데, 곁이 있던 상우춘이 화살을 쏘아 장정변을 물러나게 하고 벗어날 수 있게 했지만, 다시 얕은 곳에 걸려 들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때마침, 운 좋게도 패주하던 아군의 배를 발견하여 여기에 탑승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날 밤, 주원장은 진우량과 싸우고 있는동안 장사성이 움직일 것을 염려, 가장 믿을 수 있는 서달을 남경인 응천부로 귀환시켜 장사성에 대비하게 하고, 나머지 장수들과는 진우량과 결전을 낼 준비를 하였다.
본래 이 싸움에서 주원장은 흰 돛대의 배를 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진우량은 다음날 전투에서는 돛대가 흰 배를 공략하기로 했는데, 이 정보도 주원장이 미리 파악하여 다른 배 역시 모두 돛대를 흰 색으로 칠해버렸다.
7월 22일, 아침 진시(辰) 시[16] 무렵, 진우량은 가지고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거함(巨艦)들의 엄청난 위용에 주원장 군단의 모든 장수와 병졸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사기가 꺾이는 가운데, 주원장은 직접 전선에서 지휘하면서 퇴각하거나 움찔하며 나아가지 않는 자들은 죽이면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모든 병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서 결전하였고, 엄청난 대혈전이 벌어졌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입장이던 진우량군이 우세하였다.
또 주원장은 호상(胡牀)에 앉아 지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곁에 있던 유기가 펄쩍 뛰며 주원장에게 이동할것을 재촉했고, 주원장은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다른 배로 이동하였다. 아직 주원장이 경황을 챙기지 못했을때, 석포(石砲)가 날아와 주원장이 타고 있던 이전 배를 박살내었다.[17]
그런데, 오시(午)[18]를 넘기는 즈음이 되자 갑자기 동북풍이 불기 시작했다. 게다가, 진우량은 거함들을 쇠사슬로 연결하여(連鎖)하여 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에 주원장은 7척의 결사대를 뽑아, 화약과 갈대를 실어 바람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자 진우량의 함선은 삽시간에 불에 타버리게 되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광경 아닌가?[19]
파양호 전투를 다룬 명나라 연화(年畵) |
바람이 맹렬하고, 불길은 거세었고,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가득하니, 호수가 모두 붉은 빛이었다.[20] 진우량의 군대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고, 주원장 군단의 장수들은 모두 신이 나서 북을 치며 가공할 공세를 가하였다. 진우량의 거함들에 비해 작았던 주원장의 함선들은 오히려 진가를 발휘해서, 기동력으로 진우량군을 괴롭혔다. 이미 지휘계통이 마비된 진우량 군단은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해 주원장 군단은 수급을 잘라 확인한 숫자만 2천여명이었으며, 불에 타서 죽고 물에 빠져 죽은 진우량군의 병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진우량은 기세를 완전히 빼앗겼다. 이 싸움에서 진우량의 동생인 진우인(陳友仁)도 죽었는데, 진우인은 애꾸였지만 용맹하고 지략이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제 진우량은 더 이상의 싸움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는 혜산(鞵山)으로 물러나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주원장이 미리 군대를 움직여 좌려(左蠡)등을 장악하고 파양호의 퇴로를 막아버려 도주조차 불가능해졌다. 이에 진우량 군의 우금오장군(右金吾將軍)이 건의를 올렸다.
""호수를 탈출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배를 불태우고 뭍으로 올라, 바로 호남으로 가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러자 진우량 군의 좌금오장군(左金吾將軍)이 반론하였다.
""이러면 우리가 약하다고 보이는 것이며, 저들이 보병과 기병으로 우리를 뒤쫓으면, 진격하거나 퇴각해도 의지할 바를 잃게 되어, 대사를 잃게 됩니다."
진우량은 한참을 갈팡질팡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우금오장군이 말한 대로 행하려고 했지만, 그러자 좌금오장군이 주원장에게 항복해버렸고, 그 모습을 본 우금오장군마저 항복해버렸다. 도데체 어쩌라고 형편없어진 진우량에게, 주원장은 자신의 서신을 보내왔다.
"나는 공과의 약속을 따르고자 하여 각자 일방(一方)을 편안케 하며 천명을 기다렸소. 공이 실계(失計)하고 방자하여 그 독이 나에게까지 미쳤소. 나는 군대를 가벼이 해 그 틈을 빠져나왔으나, 문득 공은 용흥(龍興) 11군을 차지하였으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후회하여 뉘우치지 않고, 또다시 병화(兵禍)의 단서를 만들었소. 한번에 홍도(洪都)에서 곤궁해졌고, 두번째는 강랑산에서 패하였으니, 골육과 장사(將士)들은 거듭 도탄에 빠졌소. 공은 다행히 살아 돌아갔으니, 또한 의당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진정한 주인을 앉아 기다려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가속을 잃고 일족이 멸할 것이니, (그때는) 후회해도 늦소."
이 편지를 본 진우량은 멘붕 하여 잡아놓았던 포로들 까지 모조리 학살하며 발광하였다. 이에 비해 여유가 넘치게 된 주원장은 오히려 잡은 포로들을 놓아주고 잘 대해주고, 죽은 사람들의 친척들에게 조문을 하면서 대조를 이루었다.
대치가 이어지던 8월 26일, 마침내 진우량 군대의 식량이 바닥이 났다. 진우량은 최후의 발악을 위해 백척의 전함을 이끌고 호수 입구로 돌진하여 포위를 뚫으려고 하였고, 기다리고 있던 명나라 장수들은 진우량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진우량 부대는 살아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지만, 오히려 해가 저물때까지 마치 늪에 잠식당하듯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혼란하고 절망스러운 전투의 와중에, 군대를 지휘하던 진우량은 유시(流矢)에 맞아 눈과 머리를 관통당하고 즉사했다. 진우량 군은 모조리 괴멸당하고, 태자였던 진선아(陳善兒)는 사로잡혔으며, 이 싸움에서 주원장을 위협했던 장수인 장정변만이 진우량의 둘째 아들 진리(陳理)와 진우량의 시신을 가지고 무창으로 탈주하는데 성공했다.
5 결과
주원장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반대로 진우량은 완전한 패배를 당하였다. 본인 마저 죽어버린 것이다.
이후 도망쳤던 둘째 아들, 진리가 무창에서 제위를 이어받았지만, 물론 그 상태에서 제대로 세력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주원장은 직접 친정하여, 1364년, 어렵지 않게 진리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때, 진리를 대하는 주원장의 태도는 묘한점이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주원장은 자신들의 신하들에게는 엄청난 대학살을 자행할 정도로 잔인무도했지만, 이미 완전히 패망하였던 과거의 적들에게는 의외로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나하추도 주원장에게 사로잡혔지만 곧 자유를 얻었으며, 용맹하게 싸우다 죽은 적 장수들에 대해, 주원장은 정중한 예로 장사를 치뤄주었다.
심지어, 멸망한 원나라 순제(順帝)의 손자인 매적리팔라(買的里八刺)가 사로잡혀오자, 많은 부하들이 그 자를 종묘에 바쳐 명나라의 위엄을 널리 알리는 퍼포먼스를 취해야 한다고 했지만, 주원장은 그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그를 숭례후(崇禮侯)에 임명하여 융숭하게 대접해 주었다.
진리에 대해서도, 진리가 항복하는 순간 벌벌 떨며 감히 주원장의 얼굴도 마주보지 못하자, 주원장은 그를 귀덕후(歸德侯)에 임명하여, 본래 가지고 있던 재물들을 마음대로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하며, 직접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내가 너를 죄주지 않을 것이다."
주원장의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진우량의 아버지와 죽은 형제들에게 모두 작위를 내렸으며, 우울증에 빠져있던 진리가 무심결에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는 말을 내뱉자,
"이 아이는 어린 젖먹이에 지나지 않으나, 소인들이 미혹해서 짐의 은혜를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원방에 거처하게 하는 게 의당할 것이다."
라고 하여 벌을 주지는 않고, 진리를 고려로 보내주는 상상하기 힘든 대인배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라면 중국을 떠나 머나먼 외국으로 보내는게 좋은 일이 될 수는 없지만, 진리의 경우 주원장이 개국을 하는 도중 최대의 적이었던 진우량의 자손이며, 얼마든지 그를 죽이려 드는 사람들이 많다는것을 고려하면 이것은 오히려 관대함에 가깝다.[21] 심지어 공민왕에게 비단까지 주면서, 진리를 좀 잘 돌봐주라는 의사까지 전했다……[22]
주원장 개인의 일로 말하자면, 그는 진우량을 물리친 다음해인 1364년, 이선장등의 제안으로 오왕에 등극하였다. 이 시점에서 그는 강남을 넘어 전중국 최강의 세력자였으며, 이전의 적이었던 장사성 등도 모두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떠돌아 다니던 유민, 가족이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몰살당한 고아, 죽은 부모를 매장할 땅 조차도 없는 거지.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출발했던 주원장은, 이제 파양호 대전의 승리로 수천만 중국인 중 가장 강력한 사나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368년, 드디어 명(明) 제국이 건국되었고, 그 직후 서달과 상우춘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대도(大都)를 넘어 몽골의 초원까지 진격하는 장대한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 모든것은 파양호 전투의 승리로 이루어진 성과인 것이다.
6 기타 매체
김혜린 화백의 만화 비천무에 나오는 클라이막스.[23]
주원장이 답없이 밀리기만 하는 상황에서 유진하가 서달에게 화계를 쓸 것을 추천했다. 다만 단순히 주원장 진영의 화계 덕에 성공한 게 아니라 진우량측에 포로나 다름없이 잡혀있던 망향단 출신 고려인들의 자폭으로 시작되 크게 확대됐다. 그리고 진우량이 유시에 맞아죽은 건 홍보용일 뿐이고 실은 유진하가 직접 베어죽였다. 이로서 유진하 개인은 진우량에 대한 인연을 완전히 정리했다. 역사적 사실에 자연스럽게 내용을 끼워넣은 김혜린화백의 내공이 돋보이는 부분.
주원장의 이야기를 다룬 중국드라마에서도 등장한다.- ↑ 적벽대전의 기록은 기록에 따라 조조를 상대하는 군의 주도자가 유비로 나오는 등 오락가락 한다.
- ↑ 참고로 17년 후인 1380년에는 진포해전에서 고려군이 화약 무기로 500여천의 왜선을 불태웠다.
- ↑ 현재의 안후이성
- ↑ 이곳에서 나중에 요동에서 말썽을 부리고, 이성계에게 패배하는 나하추가 사로잡혔다. 주원장은 그를 풀어주었다.
- ↑ 창저우
- ↑ 본래 서수휘에게 귀부하였다가 진우량을 위해 싸우고 있었는데, 주원장의 이간계가 성공을 거두어 진우량과 적대하였다.
- ↑ 남경
- ↑ 남경에 있는 산. 쯔진산(紫金山)을 말함이다.
- ↑ 원문 그대로 옮기자면, '분격(奮激)' 하면서.
- ↑ 강서성 상요
- ↑ 강서성 구강
- ↑ 산둥성 중북부
- ↑ 운제. 공성용 사다리
- ↑ 중국을 말한다, 후민『신원문화사』
- ↑ 사납고 날랜 장수를 일컫는 표현
- ↑ 7시에서 9시
- ↑ 명사 유기전의 기록이지만, 정확히 어느날에 벌어진 사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7월 22일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으므로 이때가 아닌가 싶다.
- ↑ 11시부터 오후 1시 무렵까지
- ↑ 나관중이 원말명초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파양호 전투는 그의 작품에도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 ↑ 명사 태조본기.
- ↑ 당장 지금은 용서하더라도, 새로 황제가 등극하면 목이 달아나는 경우도 있다. 옹정제는 모반 사건을 일으킨 증정(曾靜)이라는 인물을 관대하게 용서하였지만, 건륭제는 즉위하자마자 증정을 죽여버렸다. 여담이나 그나마 이런 케이스에 가까웠던 근대 인물로는 레닌이 있다.
- ↑ 한왕 진리(陳理)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 될때도 살았다. 그때 삶이 곤궁해지자, 태조 이성계가 순덕후(順德候)에 봉하고 전지(田地)를 하사하였다. 임피 진씨(臨陂陳氏)의 시조 진여안(陳汝安)이 진리의 아들이라고 하나, 《태종실록》 18년 8월 23일 조에 진리의 처 이씨가 유일한 자식인 진명선(陳明善)이 유후사(留後司)에 갇혀있다며 선처를 호소하는 상언(上言)이 있고, 졸기에도 진명선만이 아들로 기록되었다. # 한국 역대 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때 천하를 논하던 세력의 몰락치고는 초라했달까. 진리의 후손은 양산 진씨가 되었고, 함께 온 군벌 명옥진의 아들 명승의 후손은 명씨의 시조가 되었으니 명계남 등이 그 후손이다.
- ↑ 이후에도 장사성과의 전투나 주원장 세력이 북진이 있지만 이 전투만큼 크고 화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