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대결전사상

1 개요

근대 전열함의 싸움을 넘어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출현하면서 해전은 거함거포주의와 all-big-gun 등 전함 중심의 교리로 재편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각각의 함정이 무지막지한 전투력을 지니게 되었으나 그 대가로 가격과 유지비, 그리고 건조기간은 상상을 초월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일본 제국의 군대인 일본군러일전쟁쓰시마 해전으로 얻은 대함대전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함대결전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상기된 건조기간의 장기화에 입각해서 "여기저기서 깨작깨작 싸우면서 복잡하게 하지 말고, 한타싸움에서 크게 한 번 이기면 그 다음부턴 전쟁 끝날때까지 부담없이 쟤네들 바다 휘젓고 다닐 수 있겠다" 라는 교리가 탄생한다. 한 번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놓으면 패배측에서는 그 상황을 복구하는데만 몇 년이 걸리고, 그동안 승자측은 이미 톡톡히 득을 본 뒤이며, 무엇보다 복구한다고 해도 다시 함대결전에서 져 버리면 그 몇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더 득이 된다고 일본군은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미군과 자신들이 맞붙어도 이길 가능성이 절대 높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있었기에 '어떻게 하면 미군을 이길 수 있을 까' 라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고민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제대로 된 한타싸움 이전에 잠수함과 같은 비대칭전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미군의 전력을 갉아먹고 피폐화된 미군을 자신들의 준비된 주력전력으로 상대하여 격멸시키겠다는 점감요격작전이다. 태평양 전쟁에 관련된 서적을 읽다보면 종종 '미군은 일본군이 주력부대 앞에 잠수함을 선행시킨다는 교리를 알고있었기에 다수의 잠수함을 발견하자 주력부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는 식의 서술을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테란이 토스랑 한타하면 불리하니까 마인 먼저 깔아두고 마인에 피해입은 토스병력을 미리 자리잡은 메카닉 병력으로 상대하겠다는 사상이다 그런데 프로토스 망할 놈들캐리어를 풀업 인터셉터 태우고 무한대로 뽑아왔다

2 문제점

그러나 함대결전사상은 전근대적인 '회전(會戰)' 개념에 의거한 사상으로 매우 뒤떨어진 생각이었다.[1] 이런 회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양쪽 지휘관이 모두 회전을 원해야 하는데, 전력이 약하거나 불리한 쪽은 당연히 회전을 기피하게 된다. 전력을 다 모아도 상대방을 이길 수 없거나 불리하다면 상대방이 한 방에 잡기 쉽게 일부러 전력을 모아서 던져주지 않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며, 전력이 약하거나 불리한 측은 전력을 모으더라도 적의 주력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과 선택을 통해 적의 전력을 깎아먹는 길로 나가게 된다.

그래서 한쪽이 원하지 않는 전투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외교나 정치, 전략적으로 한 쪽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 어려운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대함대전을 유도하는 것 또한 함대결전사상의 일부분이겠지만 말처럼 쉽지 않아 구시대적인 실책이라는 평을 듣는 것. 무엇보다 전쟁은 '최후의 외교수단'이라는 별칭에서 알수 있듯이 외교나 정치로 상대방을 움직일수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하는건데, 스스로의 힘으로 외교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 외교에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군대 전술이라면 그건 이미 전쟁에 쓰기에는 실격인 셈이다. 유틀란트 해전의 예에서 보듯 전력상 불리한 독일의 해군은 영국 해군 주력이 접근한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이전에 짜놓았던 작전을 포기하고 망설임 없이 후퇴를 선택했다.

또한 전쟁의 흐름이 총력전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1차례의 결전으로 전쟁이 끝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러일전쟁에서 발트 함대가 한 차례의 해전으로 궤멸되면서 러시아 해군이 바다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된 것은 러시아의 중심지와는 멀리 떨어진 동북아시아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으며, 그나마도 추가적인 동원이 가능했지만 혼란스런 국내 상황 때문에 발을 뺀 것이다. 오히려 한 번의 결전으로 한 나라의 해군력이 와해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좀 오래된 예지만 한니발은 열 번에 가까운 대규모 회전에서 승리하고도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했으며, 범선 시대의 대영제국 해군은 라이벌인 프랑스 해군보다 두 배 가까이 규모가 컸지만 수십 회의 해전을 겪고 나서야 겨우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여기에 대해 당시 해전의 특수성으로 인해 소모율 자체가 낮고 수리를 통한 복귀율도 컸으며 함대결전 교리보다는 현존함대에 가까운 사상의 대함대전이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던것 이라며, 전함의 탄생 이후 '맞으면 격침된다'는 계산이 가능해졌기에 함대결전사상이 주목받은 것이라는 변명이 있다. 그렇지만 철갑선과 작렬탄의 등장으로 배를 격침하는 것이 가능해진 이후에도 적지 않은 생존성을 보여준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의 수많은 해전들이 반례가 된다.

3 오해

함대결전사상은 전함들을 많이 모아서 시밤쾅!!의 개념이 맞다. 다만, 일본으로써는 자신보다 물량이많은 미국과 그냥 시밤쾅을 했다가는 승리할 가능성이 0이었기에 [2], 비대칭전력(잠수함, 어뢰정등) 을 사용하여 미국의 전력을 줄여 보고자 하는 구상을 했고, 그것의 결과물이 바로 점감요격작전이기도 하다. [3]

또한 전쟁이 터지면 바로 항공모함으로 바꿀 수 있게 수상기모함, 상선, 잠수모함 등을 건조해내기도 했다.[4] 일본도 일본 나름대로 자기 주제를 알고 어떻게 하면 미국과 더 잘 싸울 수 있을까 고민해봤다는 것이다.전쟁을 시작한 시점에서 승기가 없긴 했다만

4 일본의 함대결전사상

4.1 이론

공격적인 함대결전사상은 나폴레옹식의 기동을 통한 부분적 수적/화력적 우위를 얻어 란체스터 법칙을 이용, 아군에게 적은 피해로 적을 격멸하는게 된다. 그러므로 공격자의 함대결전 사상이라면 주력함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자신보다 약한 적을 제거해야 한다. 아군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군이 입는 피해가 적어지기 때문에 주력함이 주로 투입될수 밖에 없고 이렇게 해서 발생하는 손해를 아까워 해서는 안 된다. 일본군 해군의 전력이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였어도 적에게 선빵을 때렸으면 어느 정도 무리가 있더라도 절대 멈추면 안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했다.

방어의 함대결전 사상이라면 반대로 이쪽은 꾹 눌러참고 있다가 단 한방에 모든 것을 뒤집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주력은 최후의 최후까지 움직여서는 안되며 주력을 한곳에 모으고 모을수록 좋다. 이때는 최후의 일전 이전에 발생하는 주력의 피해를 누구보다 아까워 해야 한다.

일본은 러일전쟁 당시 방어적인 함대결전으로 톡톡한 재미를 보았다. 문제는 이 승리에만 눈이 돌아간 나머지 이들은 방어적 함대결전의 전략을 이용하여 공세적 작전을 폈다는 것이다. 사실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잘 해봐야 정말 버티고 버티다가 제2의 쓰시마 해전을 찍어야 했을지도 모른다.[5] 그러나 일본에게 운이 좋게 진주만 기습은 성공했고, 일본은 잘못된 전략을 지니고도 순간의 반짝임으로 이득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총력전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국력이 딸리는 국가가 자신보다 국력이 높은 국가와 싸울때는 처음부터 장기적인 총력전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모든 군사력을 높혀서 단번에 승부를 보는 단기결전을 노리는게 최선이긴 하지만, 무조건 이쪽에서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부터가 이미 망상이었다. 같은 추축국인 나치 독일도 단기 결전을 노렸지만, 이와는 별개로 미흡하나마 장기전을 예상한 각종 개발 계획과 동원 계획을 만들고 사회간접자본 투자까지 진행했는데, 일본은 단기결전만 생각하고 장기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원 축적 면에서 보더라도 나치 독일은 석탄을 액화해서 석유로 만드는 시설을 국내에 대량으로 건설해서 가동한 후에야 전쟁을 벌였지만, 일본은 석유 수입선이 다 끊어지고, 비축한 석유도 잘 해봐야 1년 버틸 수준의 양만 가지고 전쟁을 했다. 그런걸 떠나서 이미 중일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양면전선을 만든 시점에서 이미 졌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노린 단기결전의 첫 단추가 성공한 시점에서 계속 전투를 벌여 승부를 결정 짓던지 혹은 외교적 수습을 하던지[6] 아니면 얻어진 이득과 시간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뒤를 보는 총력전의 개념을 생각해야만 했어야 했는데, 그 어느쪽도 선택하지 않고 그냥 운좋게 얻어진 그 상황에 대한 현상 유지만을 꾀했으므로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길을 걷고 만다.

4.2 실전

주력함을 미끼로 던진 어리석은 전술

원래 함대결전에 대해서는 다른 국가도 생각해본 적이 있으나, 이미 유틀란트 해전으로 그런 망상은 끝난지 오래였고. 특히 미국이 유틀란트 해전 이전에 이런 전략을 구상을 했었으나, 유틀란트 해전을 참관을 한뒤에는 건함 사상을 바꿔가면서 까지 전략을 바꾸었다.[7]

애초에 일본은 산호해 해전같은 경우에도 경항공모함을 미끼로 일부러 떨어뜨리는 작전을 전개해서 무의미한 항공모함 손실을 보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리고 동솔로몬 해전에서는 아예 대놓고 경항공모함인 류조를 미끼로 사용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정규항공모함 즈이카쿠를 비롯한 잔존항공모함들을 미끼로 투입한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일보다 더 전인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전함 부대의 방패로 생각해서 상식적으로 보면 전함 부대가 탱킹을 하고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아웃레인지를 해야 하는데, 항공모함 기동부대로 탱킹을 한 병크 of 병크도 저질렀다. [8]

항공대의 경우도 연합국이 어느정도 베테랑이 된 조종사는 후방으로 돌려 교육에 종사, 신임 파일럿들의 기량을 높이는데 사용한 반면 일본은 매 전투마다 출격하던 놈을 그대로 다 투입했고 결국 한 줌도 안되는 에이스들이 소모되자 대전 후반기엔 새파란 신병만 남은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그 외에도 순양함이나 구축함 역시 전함간의 결전을 보조하기 위한 목적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순양함이나 구축함들은 서로 포화를 주고받는 전함 사이로 돌진해서 어뢰로 상대방의 전함을 격침시키는 이른바 '포뢰격전'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대공-대잠 기능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특히 도쿄제국대학 총장이기도 했던 히라가 유즈루 중장이 1930년대 초에 구축함의 주포를 대공-대수상 양용포로 하는 것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낸 것이 결정타였다. 일본의 함대형 구축함들이 사용한 5인치 포들은 앙각이 75도로 높긴 했지만 주퇴기의 거리가 긴 평사포(캐논)인 탓에 방공전에 필요한 대량의 포탄을 고속으로 사격하는 것이 상당히 불리했다. 게다가 이 보고서가 나온 얼마 후에 5인치 대공포를 전함과 항공모함의 대공포로 장착하게 되는데, 태평양 전쟁에서 주된 상대가 전함이 아니라 함재기와 잠수함이 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역시 상당한 삽질이었다. 덕분에 태평양 전쟁 중반기 이후에는 미국의 잠수함이 오히려 일본군의 구축함을 사냥하는 충격적인 경우까지 생겼다. 여기에 대해서 당시 일본에는 제대로 된 소나가 없어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는데, 이미 제1차 세계대전때 개발된 소나를 몇십년이 흐른 후에도 제대로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은 순전히 자기들의 역량이 부족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다른 기술은 외국에서 기술자를 초빙해서 잘만 가져왔는데?

이런 지경에 이르면 다른 나라라면 통상파괴전이나 다른 방식으로 교리를 선회했겠지만, 유연성이 부족했던 일본 수뇌부는 '그래도 꾸역꾸역 모으다보면 언젠간 역전의 날이 오겠지'라는 판단으로 역량 부족을 드러냈다. 물론 공업력의 차이로 역전의 날이 영영 찾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단기결전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단기결전만 노렸으면서 뭐라는 건지

결국 함대결전만 보다가 소모전을 보지 못한 일본 제국군은 함대결전은 항공모함과 숙련된 파일럿 등 인적 자원 부족으로 밀리는데 다른 방향은 신경조차 안 쓴 덕분에 어디로 가나 답이 없는 안습한 상황에 직면했다. 이는 상기된 것처럼 구축함에 대잠장비가 부족하다던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같은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오며,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정말로 함대결전급 규모의 함대를 끌고와서도 대함대전이 아니라 '적진돌파 후 수송선 격파'를 목표로 잡게 되는 창피를 겪게 된다. 이는 급기야 일본의 패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고, 함대결전교리에 가장 열성적이던 일본 해군로서는 치욕적인 침몰이었다.

거기다 미국이 콜해서 순수 함대결전을 하려 해도 미국은 네바다급 2척(14인치 2연장X2, 3연장X2 총 10문), 펜실베이니아급 2척(14인치 3연장X4 총 12문), 뉴멕시코급 3척(14인치 3연장X4 총 12문), 테네시급 2척(14인치 3연장X4 총 12문), 콜로라도급 4척(16인치 2연장X4 총 8문) 총 13척의 구식 표준형 전함과 스탠더드 타입이 아닌 16인치급 고속전함으로 노스캐롤라이나급(16인치 3연장X3 총 9문) 2척, 사우스다코타급(16인치 3연장X3 총 9문) 4척, 아이오와급(16인치 3연장X3 총 9문) 4척을 추가해서 2차대전 중 총 23척의 전함을 운용했다. 거기다 5척몬태나급 전함(16인치 3연장X4 총 12문)까지 추가로 건조하려 했다. 주포 숫자로 따져도 공고급, 후소/이세급과 같은 14인치 주포가 104문, 나가토급과 같은 16인치 주포가 90~150(몬태나급 포함시 150문.)문이다. 야마토급 전함 2척의 18인치 함포 총 18문으로 이런 수적, 질적 열세를 해결하기에는 감당이 안된다. 애초에 일본은 함대결전으로도 미국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9] 다만 어쨌든 일본군도 스스로와 미군 함대와의 전력차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미군 함대 수를 함대결전시 이길 수 있는 숫자로 줄이기 위해 점감요격작전이라는 것을 만들어 제 나름대로 부족한 전력차를 메꿔야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긴 했다. 하지만 점감요격작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조차도 상대의 수준을 지나치게 무시하여 적의 행동 패턴을 타워 디팬스 게임의 몹처럼 극도로 단순화한 것을 기반으로 한, 전략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의 결함품이었다.그냥 애들은 뭘 해도 안 될 운명이었다.

게다가 함대결전이라는 단 한 번의 큰 전투에 승패가 갈리기 때문에, 장기전을 염두에 두는 지원세력에 대해서는 생각도 없다.

5 결과

일본해군도 필리핀 해 해전레이테 만 해전으로 두번이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구레 군항 공습등으로 해군이 사실상 사라지건 말건 패전시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함대결전에 버금가는 타격인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도 끝까지 전쟁을 했지 절대로 항복 따위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독일 또한 1943년 중반 이후 연합군의 호위항공모함이 바다를 뒤덮으면서 해전의 승패가 결정났지만 U보트의 저항이 종식된 것은 전쟁이 끝날 무렵이며, 일본도 그 허접한 잠수함대가 전투를 종료한 것이 전쟁에서 패전한 후다. 애초에 이렇게 많은 반례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이라는 단 1개의 예외를 가지고 다 그렇게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게 모든 문제의 근원.[10]

결정적으로 현대에서 국가와 국가 간의 전력전이 나올 가능성은 제로라 봐도 된다. 한국에서의 북한 도발사나 미군이 개입하는 여러 분쟁지역 등은 전부 소규모 교전(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이다. 미사일 위주의 해전이 주류가 되는 지금에 와서는 함대결전은 현존함대에 입각한 교리의 일부분으로 남아있을 뿐으로 '모든 해군을 동원한 한타싸움으로 승리한다'는 교리는 결국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1. 개별 군주/국가의 권력과 민중 통제력이 약하고 농업생산량이 부족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장기간 유지할 수 없었던 봉건사회에서는 전력이 뒤쳐지는 쪽도 마지못해 회전을 강요받는 상황이 종종 있었으나, 민족국가가 탄생하고 산업혁명으로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 끝으로 총력전의 개념이 생겨남으로서 후술할 외교, 전략적 수단만이 원치않는 상대를 회전으로 끌어내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2. 애시당초 전쟁 초기 목적부터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약을 맺기 위해 우위를 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3. 다만 점감요격작전 항목에서도 그렇고 결과적으로 일본이 패했다고 해서 이러한 구상을 과하게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 해군 소장이었고 퓰리처상까지 받은 사무엘 모리슨도 저서에서 당시 일본이 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작전이었다고 평했다. 다만, 점감요격전략이 훌륭하기 보다는 전력이 떨어지는 쪽에서 할수 있는 거의 결정된 선택지 라는 뜻으로 보는게 옳겠다.
  4. 히요, 준요, 치토세, 치요다, 쇼호, 즈이호, 류호 등이 그 예
  5. 사실 백번 봐줘서 일본 해군이 쓰시마 해전급으로 이겨서 미군 주력함을 다 박살냈다 해도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러일전쟁 역시 종전한 이유가 쓰시마 해전에서 주력함을 잃고, 일본군이 막강하고 계속 러시아군을 이겨서가 아니라(203고지같은 실책도 많았다) 러시아의 국내 사정이 이미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정도로 악화되었기에 러시아가 정전 협상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의 국내 정치 사정이 좋았다면 애초에 러일전쟁의 결과는 전혀 달랐을 수도 있었으며, 게다가 러시아는 당시 공업생산량 같은 기초 생산력이 바닥을 치는 와중에 군대육성에 중점을 둔 상황이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시점에서 세계 공업생산량 1위를 찍은 미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 만일 함대를 잃었어도 미국은 실제 역사에서 보여줬었던 대로 함대를 찍고 찍고 또 찍어내고 그냥 많이 만들어내서 소모전과 물량전을 걸었을 것이고, 이미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태평양 전쟁을 치르던 일본이 이를 이겨 냈을리가 만무하다. 다만 이렇게 되면 유럽 전선은 조금이나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6. 다만 외교적 수습은 절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선전포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대놓고 상대국을 폭격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함선들을 파괴했는데 저쪽에서 외교적인 시도를 받아줄 리가 전무하다. 내가 때려서 아팠지? 미안 만일 미국의 함대 전체규모가 태평양 함대였고 함대 생산능력도 미흡해서 태평양 함대를 잃는순간 해군력이 증발하고 비슷한 규모의 함대를 재건하는데 몇년씩 걸리는 상황이었다면, 미국으로서도 일본 함대가 미 본토를 타격하기 전에 적당히 끝맺고 후일을 도모하는게 합리적이었을 테니 외교적 수습이 가능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태평양 함대 정도의 전력은 미국에게 말 그대로 껌값이었으며, 열받은 미국은 역으로 쇼미더머니를 갈겨서 바다 수평선을 군함으로 가득 매웠다.
  7. 유틀란트 해전 이전에는 최대속도가 느리더라도 언제든지 전장으로 갈수있게 순항속도와 연비를 늘렸고, 적의 공격을 잘 받아내기 위해 집중방어같은 방어력에 치중했다고 하면. 유틀란트 해전 이후 한번의 해전으로 전멸 시키기도 당하기도 어렵다는걸 알게 되자, 순양전함의 빠른속도와 표준전함의 강력한 공격력과 집중방어를 가진 고속전함을 요구하게 되었다.
  8. 다만 이 점은 일본도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서, 이후의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전함을 포함한 부대가 선두에 서고 항모가 포함된 본대는 살짝 뒤에서 움직이며 목표 분산을 노렸고, 실제로 미군 항모에서 발진한 공격대는 대부분 전함부대만 깔짝대고 돌아갔다. 문제는 이런 진형은 안 그래도 부실한 대잠전력을 더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정규항모 을 잠수함에게 말아먹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9. 물론 함대결전으로도 미국을 이기기엔 수적 열세였다는 점은 일본군도 알고 있었다. 일본군의 군사정보 획득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런던 해군 군축조약 때문에 이미 각 함선의 소유량과 함대의 최대 규모가 미리 정해져있었기 때문. 이 때문에 일본 해군 내부에선 장교들끼리 파벌까지 나뉘었다. 대략 함대결전을 위해 군축조약을 쌩까고(최대 조약 파기까지 감수하고) 함대수를 무조건 미국의 함대 수와 비등하게, 또는 그 이상으로 늘리자는 '함대파'와 조약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미군의 함대 수를 그나마 그정도로 묶어놓는 거라는 '조약파'가 그것이다.
  10. 물론 점감요격작전 항목에서 언급되는 나카무라 료조 중장처럼 대충 본 사상의 약점을 알고있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러일전쟁의 전훈을 과도하게 신격화하고 금과옥조로 여기며 이에 대한 반론을 쉬이 제기할 수 없었던 일본군의 경직된 군사문화 때문에 이를 대놓고 반박할 수 없었을 뿐. 이런 상황은 일본 육군도 다르지 않아서 이들 역시 사실상 러일전쟁 수준에 머물러있는 전략전술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