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릭 라르손

헬싱보리 IF 감독
헨릭 라르손 (Henrik Larsson)
생년월일1971년 9월 20일
국적스웨덴
출신지헬싱보리
178cm, 72kg
포지션공격수
소속팀회가보리 BK (1988 - 1992)
헬싱보리스 IF (1992 - 1993)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93 - 1997)
셀틱 FC (1997 - 2004)
FC 바르셀로나 (2004 - 2006)
헬싱보리스 IF (2006 - 200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임대) (2007)
라 IF (2012)
회가보리 BK (2013)
지도자란스크로나 보이스 감독 (2009 - 2012)
회가보리 SK 수석코치 (2013)
파을켄베리스 FF 감독 (2014)
헬싱보리스 IF감독 (2015 - )
국가대표106경기 37골
2000-01 유러피언 골든슈
헨릭 라르손

1990~2000년대를 대표한 스트라이커계의 전설중 하나

군나르 노르달 다음가는 스웨덴의 전설적인 공격수

1 소개

스웨덴 출신 전 축구선수, 현 헬싱보리스 IF 감독

스웨덴 축구의 살아 있는 전설. 볼 컨트롤, 보디 밸런스, 브레인 3가지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어 그 파괴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교과서적 골잡이.

178cm로 타겟형 최전방 공격수 치고는 비교적 단신이었지만 예술적인 볼터치와 트래핑을 선보이며 상대 수비진을 파고들었고, 탄탄한 체격에서 나오는 완벽한 보디 밸런스로 장신 수비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헤더 능력도 탁월하여 "헤더는 키로 하는 것이 아니다."란 말을 널리 퍼뜨리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여기에 엄청난 축구 아이큐와 탁월한 멘탈을 겸비하니 그야말로 가공할 위력을 보여줬다. 그 냉정&침착한 판단력은 다른 선수들에게서 쉽게 보기 힘든 특별한 것이었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패스와 슈팅, 공간침투 능력은 호나우지뉴 조차 풀지 못하던 전술적 제한성까지 풀어 주었다. 단 한사람의 존재만으로도 공격 지역에서 엄청난 공간창출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셀틱 시절의 감독이었던 마틴 오닐이 라르손에 대해 남긴 말은 아주 유명하다. "라르손이 스코틀랜드에서만 통할거라 생각해온 사람들도 적지 않으나, 나는 그가 어떠한 장소에서든 골을 터뜨릴 수 있음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라르손은 이 말이 맞다는 것을 그라운드 위에서 골로 확인시켜주었다. 축구판에서 아주 유명한 명언인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가 100% 어울리는 선수 중 하나

특정 인기팀에 치우쳐 있는 대한민국의 대다수 해외 축구팬들은 그를 임대의 전설 정도로만 기억하지만 이 위대한 선수를 고작 임대의 전설로 말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이다.

여담으로 아버지가 서아프리카의 카보베르데 출신이다. 웃지 못할 이야기로, 2002 한일 월드컵이전 선수투표에서 20위를 차지한것까지는 좋았는데 국내언론의 병크로 중원의 사령관으로 소개되었다(...)[1]

골을 넣고 난 뒤 혓바닥을 내미는 특유의 세레모니가 있는데, 이는 라르손이 마이클 조던의 광적인 팬이라서 따라한 거라고 한다. 마이클 조던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아들 이름까지 조던으로 지었다.(..) 아들도 현재 축구 선수로 활동중.

2 선수 시절

1988년 만 17세의 나이에 스웨덴 리그 화가보리에서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조금씩 경험을 쌓으면서 성장세를 보인 라르손은 약관이 된 1991년 (컵대회 포함) 32경기에서 15골을 기록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가능성을 인정받고 고향 팀 헬싱보리스로 이적한 라르손은 61경기에서 무려 51골을 집어넣는 대활약을 펼치며 스웨덴 리그 최고의 골잡이로 우뚝섰다.

1993년 네덜란드의 명문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으로 이적한 라르손은 4시즌 동안 총 149경기에서 42골을 집어넣었다. 1997년 스코틀랜드 최강 팀 셀틱 FC로 둥지를 옮긴 라르손은 이 곳에서 전설로 거듭난다.[2] 첫 시즌 44경기에서 16골을 뽑아내더니 두번째 시즌이던 1998-1999 시즌에는 51경기 35골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99-2000 시즌 올랭피크 리옹과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정강이뼈가 부러지는[3] 끔찍한 부상을 입었다. 서른이 다된 라르손에게 축구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라르손은 위기에 강한 남자였다. 충실한 재활로 7개월 만에 부상을 털어버리고 더욱 강해져서 팬들 앞에 다시 섰다.

그는 이후 4시즌 간 201경기 161골을 기록하며 4년 연속 스코티쉬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라르손과 함께한 7년간 셀틱은 4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스코티쉬컵 우승, 2번의 리그컵 우승을 차지했다. 별볼일 없는 변방팀으로 전락한 셀틱이 배출한 마지막 월드클래스.

2004년 서른을 훌쩍 넘긴 라르손은 스페인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일각에서는 '라르손은 빅리그용이 아니다.', '이미 전성기가 지났다.'라는 혹평을 내놓았지만 그는 오히려 빅리그 선수들에게 한 수 가르치면서[4] 팀의 2연패에 공헌했고 2005-2006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도 기여했다.[5]

셀틱과 바르셀로나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라르손은 2006년 고향 팀 헬싱보리로 금의환향했다. 하지만 이 때 라르손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Sir 알렉스 퍼거슨 감독.

2006-2007 시즌 뤼트 판 니스텔로이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고 주전 공격수 루이 사하가 시즌 중반 이후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되자 대형 공격수 부재로 고민하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라르손이라는 깜짝 카드를 꺼내들었고 라르손은 임대 가서도 전설이 되었다.[6]

라르손과의 계약은 단기 임대 형식이었는데 겨울에는 휴식기를 보내는 스웨덴 리그였기에 맨유는 그 기간에만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려는 목적이었다.[7] 비록 3달 남짓의 기간 동안 많은 골을 넣어주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순간 골을 넣어주고 경기의 흐름을 바꿔주는 움직임으로 맨유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 적잖이 기여했다. 그의 활약에 매료된 맨유 팬들은 시즌 종료까지 임대를 연장하라고 부르짖었고 퍼거슨 감독도 적극적인 구애의 손짓을 보냈지만 라르손은 소속팀 헬싱보리스 IF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고사했다.

그리고 고향팀으로 돌아가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주다가 2009년 10월 28일 유르고덴스 IF 풋볼과의 리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프로통산 769경기 415골. 유럽대항전(챔피언스 리그+유로파 리그) 통산 108경기 59골.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 지도자 과정을 밟기 위해 선수시절 활약했던 셀틱으로 돌아가 경험을 쌓고 싶다는 의견을 표력하기도 했으나 은퇴한지 두 달 뒤인 2009년 12월 스웨덴 2부리그 클럽인 란스크로나 보이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란스크로나 보이스는 헨릭 라르손의 고향 팀인 헬싱보리의 전통적인 라이벌 팀이었기 때문에 란스크로나의 취임이 스웨덴 내에서는 꽤나 화제였다고 한다. 2010 시즌 4-3-3 포메이션으로 시즌 초반에는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줘 승격에 대한 기대를 받았으나 리그 5위를 기록하여 승격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팀 내 보드진은 이런 성과에 만족하여 헨릭 라르손과 1년 연장 계약을 맺었다. 2011 시즌에는 2부리그 팀임에도 스웨덴의 국가대표 선수를 영입하는 등 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라르손은 1부리그 승격을 장담하였으나 정작 2011시즌에는 2부리그에서 10위를 기록하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다. 팀 내 서포터들의 항의에 라르손은 선수로 컴백하여 경기를 뛰어볼 생각도 했지만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아 포기 하였고 팬들의 불만에도 구단은 라르손과 1년 연장계약을 체결하여 2012시즌에도 팀을 그에게 맡겼다. 그러나 2012시즌 리그 6위를 기록, 리그 승격권인 3위와 승점 15점차를 보이며 2012시즌에도 승격에 실패했고 라르손은 란스크로나 보이스와 연장계약을 하지 않고 팀을 떠난다.

2013년에는 4부리그 팀인 회가보리 SK의 수석코치직을 맡았고 팀이 강등 위기에 빠지자 직접 선수로 복귀하여 강등을 막겠다고 나섰다.# 답답해서 내가 뛴다

2014 시즌에는 2부리그에서 갓 승격한 파을켄베리스 FF를 지휘하여 리그 11위로 끝마쳤고, 2015년 3월 부터 헬싱보리스 IF의 감독직을 맡게 된다. 2015시즌 성적은 리그 8위로 마감하였다.

4 국가대표

A매치 106경기 37골. 국가대항전에서도 그의 꾸준함은 변함이 없었다.

1994년 22살의 나이로 미국 월드컵에 출전해 스웨덴의 3위 입상에 공헌했으며[8]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선 나이지리아전에서 2골을 몰아쳐 스웨덴이 죽음의 조(나이지리아, 잉글랜드, 아르헨티나)를 1위로 통과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다. 16강에서 당시 돌풍의 팀 세네갈과 만나 탈락했다.[9]

유로 2004에서 대회 4경기 3골을 기록하며 스웨덴의 8강행에 앞장섰고[10],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조별리그 잉글랜드전에서 천금같은 동점골을 넣으며 조국을 16강에 올려놓았다. 유로 2008에서는 러시아에 패해 아쉽게 예선 탈락했고, 이후 프레드리크 융베리가 국가대표에서 은퇴하자 스웨덴 국가대표팀 주장에 선임되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지역예선까지 치뤘으나 4번째 월드컵 출전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예선탈락에 그쳤다. 이후 스웨덴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고 얼마 뒤, 현역에서도 물러났다. 그는 노란 바이킹의 전설, 2000년대 최고의 스웨덴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여담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라르손이 함께 국대에서 활약한 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즐라탄이 유망주를 벗어나 대선수로 크고 있을 무렵, 라르손은 이미 노장 소리 들은지 꽤 된 짬빱이었기에 즐라탄이 좀 더 일찍 태어났거나 라르손이 조금만 더 젊었으면 스웨덴의 국대 성적도 더 좋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그 둘의 호흡은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았고 그 즐라탄도 '라르손의 경기력은 내가 함께 해왔던 선수들중 최고.' 라고 인정할 정도, 포스트 플레이로 수비라인을 분쇄하면서 공간을 열어주는 즐라탄과 완벽한 바디밸런스와 순간적인 뒷공간 후려치기로 수비라인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라르손의 조합은 이상적인 빅&스몰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아쉽게도 스웨덴은 2016년 유로를 마지막으로 즐라탄이 대표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라르손의 대체자를 키워내지 못했다.

5 기록

5.1 대회 실적

  • 페예노르트 (1993/94 - 1996/97)
  • 셀틱 FC (1997/98 - 2003/04)
    • 스코티쉬 프리미어리그 (4) : 1997/98, 2000/01, 2001/02, 2003/04
    • 스코티쉬 컵 (2) : 2000/01, 2003/04
    • 스코티쉬 리그 컵 (2) : 1997/98, 2000/01
    • UEFA 컵 준우승 : 2002/03

5.2 개인 수상

  • 1994 미국 월드컵 브론즈 볼
  • 스웨덴 올해의 선수 (2) : 1998, 2004
  • 스코틀랜드 기자협회 선정 올해의 선수(2) : 1999, 2001
  • 선수들이 선정한 스코틀랜드 올해의 선수 (2) : 1999, 2001
  • 스코티쉬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선수 : 2000년 9월, 2002년 11월
  • 유러피언 골든슈 : 2001
  • 유로 2004 베스트 일레븐
  • 스코틀랜트 축구 명예의 전당
  • 스웨덴 역대 최고의 선수 : 2005
  • UEFA 유로파 리그 역대 최다 득점자 : 40 득점
  • UEFA 창립 50 주년 기념상 (1) : 2003
  • 스코틀랜드 스트래스 클라이드 대학 명예 박사 : 2005
  • 2006 대영제국 훈장 (MBE,5등급)

5.3 리그 출전 기록

시즌클럽소속리그리그FA컵리그 컵유럽대회
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1989회가보리 BK스웨덴 디비전 3[11]211------
1990회가보리 BK스웨덴 디비전 3217------
1991회가보리 BK스웨덴 디비전 32215------
1992헬싱보리스 IF스웨덴 디비전 1[12]3134------
1993헬싱보리스 IF스웨덴 알스벤스칸[13]251651----
1993/94페예노르트네덜란드 에레디비지151125----
1994/95페예노르트네덜란드 에레디비지23891--67
1995/96페예노르트네덜란드 에레디비지321041--71
1996/97페예노르트네덜란드 에레디비지31740--61
1997/98셀틱 FC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3516405320
1998/99셀틱 FC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3529550084
1999/00셀틱 FC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97000045
2000/01셀틱 FC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3735692554
2001/02셀틱 FC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33293210104
2002/03셀틱 FC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352822221212
2003/04셀틱 FC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37305510156
2004/05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12300--41
2005/06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281044--101
2006헬싱보리스 IF스웨덴 알스벤스칸15854----
2006/07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71410021
2007헬싱보리스 IF스웨덴 알스벤스칸22910--99
2008헬싱보리스 IF스웨덴 알스벤스칸271410--20
2009헬싱보리스 IF스웨덴 알스벤스칸20710--43
2012라 IF스웨넨 디비전 3[14]10------
2013회가보리 BK스웨덴 디비전 2[15]10------
  1. 당시 해축 정보를 찾기가 지금처럼 쉽지 않아서 생긴 웃지못할 이야기.
  2. 2002년 팬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셀틱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현역 선수로는 유일하게 포함되었고,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선정된 바 있다.
  3. 영상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다리가 거의 두동강이 났다.
  4. 사무엘 에투 曰, '라르손은 수비수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5. 챔스 결승전에서 교체 투입되어 포풍2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역전승을 이끌어냈다.
  6. 임대 가서에 주목. 대한민국에서 해외 축구라면 맨유밖에 모르는 팬들의 경우엔 라르손을 임대의 전설로 밖에 언급하지 않는다. 맨유 시절은 이선수의 커리어에 일부분일 뿐이다. 이 맨유 시절만으로 라르손을 임대의 전설이라는 단어로 폄하하는 경향이 네티즌뿐만 아니라 스포츠 기자에게서도 보인다. 안타까운 현실. 임대의 전설이 아니라 임대 가서도 전설이라는 표현이 라르손의 위상을 알려준다.
  7. 미국 MLS에서 뛰는 유럽 출신의 선수들이 비시즌 기간 단기 임대로 유럽에 복귀하는 것과 비슷하다. 데이비드 베컴, 랜던 도노반, 로비 킨, 티에리 앙리 등이 대표적인 예.
  8. 3-4위전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3번째 골을 터뜨렸다.
  9. 이 경기는 스웨덴의 라르손과 세네갈의 디우프의 일기토 수준의 경기. 2002 월드컵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재미있는 경기였다. 골대를 맞힌 세네갈은 골대에 맞은 공이 골문으로 들어가 골든골로 이겼고, 그 직전에 골대를 맞혔으나 공이 골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스웨덴은 패했다.
  10. 사실 2002 월드컵을 마치고 국가대표 은퇴 선언을 했는데 아들이 "아빠가 국가대표에서 뛰는거 계속 보고 싶어" 이 말에 국가대표 은퇴를 번복했다. 이후 2006 월드컵 이후 2번째 은퇴를 선언했지만 코칭스태프의 설득 끝에 유로 2008을 앞두고 다시 국가대표에 복귀했다.
  11. 당시 스웨덴 4부리그
  12. 당시 스웨덴 2부리그
  13. 당시 스웨덴 1부리그
  14. 스웨덴 5부리그, 1999년 스웨덴 리그 명칭 변경에 따라 디비전 1이었던 2부리그는 수페레탄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디비전 1은 3부리그, 디비전 2는 4부리그, 5부리그는 디비전 3으로 변경
  15. 스웨덴 4부리그, 1999년 스웨덴 리그 명칭 변경에 따라 디비전 1이었던 2부리그는 수페레탄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디비전 1은 3부리그, 디비전 2는 4부리그, 5부리그는 디비전 3으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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