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리크 융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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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아스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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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던 당시에는 머리를 이렇게 빨갛게 염색하고 나왔다.

이름프레드리크 융베리 ( Karl Fredrik "Freddie" Ljungberg )
생년월일1977년 4월 16일
국적스웨덴
출신지스웨덴 스코네 주 비트시외
포지션윙어 (오른쪽)
신체조건176 cm
유스팀함름스타드 BK (1982~1994)
소속팀할름스타드 BK (1994~1998)
아스날 FC (1998~2007)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2007~2008)
시애틀 사운더스 (2009)
시카고 파이어 (2010)
셀틱 FC (2010~2011)
시미즈 에스펄스 (2011~2012)
뭄바이 시티 FC (2014)
국가대표75경기 14골
그는 경기를 뛸 때 모든 것을 쏟아붓는 헌신적인 선수이다

아르센 벵거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승부욕도 강하다

ㅡ 라르스 라예르베크

1 소개

아스날 측면의 지배자이자 적토마

티에리 앙리, 데니스 베르캄프, 파트리크 비에이라, 로베르 피레스, 솔 캠벨, 애슐리 콜, 로렌등과 더불어 아스날의 EPL 무패우승의 핵심 선수 중 하나

스웨덴의 전 축구선수. 헨릭 라르손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스웨덴 축구 선수이기도 하다. 선수시절 아스날의 윙어로써 유명했으며 아스날에서 나간 뒤에는 J리그나 인도 슈퍼 리그등을 전전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인 아스날에서 뛸 당시에는 데이비드 베컴 못지 않은 굉장히 잘 생긴 외모와 독특하고 좋은 패션으로 많은 여성팬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광고도 여럿 찍었다. 후술할 팬티 광고는 유명하다.

2 클럽

자신의 청소년 시기에 뛰었던 클럽이자 스웨덴 리그의 소속팀인 할름스타드에서 데뷔한 그는 어린나이에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팀에게 우승컵을 안겨주는 등 재능을 뽐냈고[1]더 큰 무대로 나가기 위해 4 시즌 간 뛰면서 정이 들었던 할름스타드를 뒤로 하고 아스날의 감독인 아르센 벵거의 눈에 띄어 아스날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스웨덴에서 넘어온 그를 현지 잉글랜드 언론들은 탐탁치 않게 생각 하였고, 데뷔전 상대가 무려 EPL 최고의 팀들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기에 융베리에 대한 아스날 팬들과 융베리 개인 팬들의 우려는 끊이지 않았었다.[2] 이러한 우려와 걱정속에 융베리는 데뷔전에서, 그것도 무려 교체 출전 한 지 4분 42초 만에 골을 기록하였고 아스날의 다른 팀원 들과 함께 팀의 3:0 대승을 이끌며 축구팬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그는 프리미어리그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부진에 빠지기도 했는데[3]감독인 아르센 벵거의 도움과 본인의 적극적인 노력과 열정 등으로 자신의 축구인생에 찾아온 첫번째 위기인 부진을 극복하였고 이후 그는 아스날 내에서 꼭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나 01/02 시즌에는 컵대회 포함한 모든 경기에서 17골을 넣는 대활약을 하기도 했다.[4]

주로 우측 날개로 기용되어 우측 풀백이었던 로렌과 아스날의 무패 우승 시절 오른쪽을 담당했다.

선수시절 융베리는 어디서든 팀의 공격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선수였다. 베르캄프, 티에리 앙리 등의 화려한 슈퍼스타들에 묻히는 경향이 있는게 사실이지만[5]아스날이라는 클럽에서 그 둘과 함께 인기 선수로써 오랫동안 군림하였고 현재는 구너들에게 레전드 칭호를 받는 선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융베리는 아스날에서 9년간 선수 생활을 해왔던 선수이다.[6]

그렇게 아스날에서 뛰면서 FA컵과 커뮤니티 쉴드 등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에서 획득 할 수 있는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월드 클래스 윙어라는 명성과 함께 뱅거 체제 아스날의 최고 황금기를 만드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융베리는 1998년부터 2007년까지 216경기 46골을 기록하며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선수로 아스날의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외에도 융베리는 아스날에서 놀라운 활약을 선보이며 팀에게 영광스러운 2번의 우승을 성사 시켰으며 당연히 그의 최고의 커리어는 두 말 할 필요없이 아스날 최고의 업적이자 뱅거 감독의 전성기인 EPL 03/04 시즌의 무패 우승일 것이다.[7]

그러나 어느덧 서른 살을 넘어서고 라이언 긱스안드레아 피를로등의 소수의 선수를 제외한 여타 선수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융베리 또한 기량 저하가 왔다. 융베리는 06/07 시즌에 유망주인 알렉산더 흘렙에게 밀려나면서 말년에는 선발이 아닌 후보 선수로써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고 좀처럼 많은 기회가 오지 않았다.

뱅거 감독은 2007년 1월 겨울 이적시장 당시에 융베리의 이적 루머에 대해 입을 열었는데 " 물론 그에게 이적 제의가 온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그를 이적시장 목록에 올리지 않았다. 융베리의 경험과 태도로 봤을때 그는 아직도 아스날에게 있어 특별한 선수이며 나는 융베리를 아낀다 " 며 그를 두둔했지만...

결국 2008년에 여름 계약기간을 2년 남겨두고 아스날과 이별했다. 지난 7월 자신이 아스날에 올 때와 똑같은 금액인 300만 파운드의 이적료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로 떠났다. 융베리는 이러한 흐름에 대해서

" 2년 전 계약을 체결할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새로운 경기장을 짓고, 세계적인 선수를 데려올 것이라고 말했다. "
"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아스널이 많은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
" (티에리)앙리가 떠났을 때 나도 이제 새로운 도전을 할 때라고 느꼈다. "

...라는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보였다.
 
그렇게 저돌적인 플레이 스타일 만큼이나 프라이드가 강했던 그였기에 별로 그렇게까지 큰 미련은 없어 보였고, 이러한 점들이 자신이 선수로써 오랜 기간 동안 뛰었던 아스날을 미련없이 떠나기로 결심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떠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아스날이라는 구단에 대한 자신의 섭섭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웨스트 햄에 입단한 후 융베리가 아스날이 야망이 없다고 비판을 늘어놓자 당시 팀 동료였던 반 페르시는 "아스날에서 9년을 뛰었으면 좀 더 좋은 말을 해줄 수도 있었다. 앙리의 이적을 자신의 변명으로 삼는 것은 좋지 못한 언사였다"고 반박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래놓고 이 녀석은 라이벌 팀에 이적했다. 내 마음 속의 작은 아이.

뭐... 그래도 선수 은퇴 이후엔 지속적으로 아스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뱅거 감독의 18년 감독 임기를 축하하기도 하고, 4위라는 성적에 만족하면 안된다고 지금의 성적보다 더 큰 목표를 가지라면서 여러가지 조언도 해주는 등 이적 당시에 있던 응어리는 지금와서는 다 풀린 모양이다.[8]

어쨌든 융베리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서 뛰게 되었지만 이 이후의 행보가 전처럼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2008년에는 " 웨스트 햄이 두 번의 승리만 더 기록한다면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 할 수 있고 현재 부상 중이던 뛰어난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돌아오고 있다. " 며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결국 챔스 진출은 좌절 되었고 본인도 많은 출전 기회를 잡지는 못했다.

결국 2008년 8월에 웨스트햄은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 구단과 프레드릭 융베리가 잔여 계약기간을 즉각 파기하는 형식의 합의에 도달했다 " 고 전하며 "이번 결정은 선수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로 이뤄진 것이다 " 는 스콧 덕스버리 단장의 인터뷰도 함께 실었다.

이에 대해 융베리는 "웨스트햄에 모든 것을 바쳤으며 진정으로 그곳에서의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양측 모두에게 최선의 결정이다."라며 " 시간을 갖고 내 축구인생을 되짚어 볼 것이다 " 라고 덧붙여 자신의 축구선수 은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당연히 팬들은 충공깽을 외쳤고, 융베리의 다음 행선지는 2008년에서 2010년 까지의 미국 리그에서의 선수 생활을 청산하고 스코틀랜드 리그의 셀틱 FC가 되었다. 기성용, 차두리등의 코리안 리거와 같이 뛰게 된 것이다. 융베리는 웨스트햄에서 25경기를 뛰었고 2골을 넣었다. 준수한 활약이지만 9년간 축구생활을 해온 아스날을 그렇게 나간 것 치고는 그렇게 많이 뛰지는 못했다(...)

스코틀랜드 리그에서의 첫 경기에서 64분을 뛴 융베리는 별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는데, 당시 셀틱의 감독이었던 닐 레논은 " 프레드리크 융베리가 이번 경기에서 곧바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굉장히 혼잡한 경기였기 때문이다 " 고 그를 두둔했다.

결국 1년도 못뛰고 J리그의 중하위권 팀인 시미즈 펄스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고 J리그에서도 6개월 밖에 뛰지 않았다. 그가 노년에 리그를 가리지 않고 여러 팀을 전전하는 모습은 흡사 브라질의 축구선수인 히바우두를 보는 듯 하다.

시미즈 펄스와의 계약을 해지한 융베리는 "서로의 비전이 달랐다"며 실망했고, 시미즈의 한 관계자는 "융베리가 지난해 시미즈를 우승으로 이끌어 올해 AFC 챔피언스리그에 뛴다는 단기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팀은 젊은 선수들을 중점으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융베리가 올해 AFC 챔피언스리그에 뛸 기회를 잃은 게 이번 결정을 내린 주요 이유였다" 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2008년 당시 아스날에서 웨스트햄으로 이적 할 때와 비슷한 양상이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생활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길었던 선수 생활을 은퇴하나 싶었는데 1년뒤 다시 복귀하여 인도 슈퍼 리그로 떠나 많은 축구팬들에게 화젯거리가 되었다. 결국 인도 리그에서 1년을 뛰고 2015년 경에 드디어 선수은퇴를 했다.

3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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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스웨덴 U-21에 데뷔하였다.[9][10][11]오랜 세월 스웨덴의 키 플레이어였는데. 스웨덴에서는 전성기에 헨릭 라르손의 다음가는 네임드를 가진 선수였고,[12] 또 그만큼 실력이 뒷받침 되는 선수였기 때문에 스웨덴 리그에 있었을 때에도 기대를 받았고, 아스날에 입단해 좋은 활약을 펼치며 사람들의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13][14] 유로 2004에서는 불가리아를 5:0이라는 흠좀무한 스코어로 이겼음과 동시에 자신도 골을 넣으며 이탈리아를 밀어내고 8강에서 네덜란드를 만났지만 라르손과 본인의 슈팅이 골대를 맞고 나오는 불운으로 결국 본 경기의 승부차기에서 패하게 된다.

2005년 11월 서울에서의 친선경기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도 만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당시 스웨덴이 주전 선수들을 빼고 2군 듣보잡 젊고 유망한 선수들을 대거 기용했기에 융베리는 나오지 못하였다. 결과는 2:2 무승부였다.

당시 스웨덴의 주장이었던 수비수 올로프 멜베리가 시즌 직전 감독이 바뀐 소속팀 아스톤 빌라에 매진하고 싶다며 주장 완장을 내려놓은지 하루만에 융베리를 대표팀 주장으로 선임했다.융베리가 스웨덴 대표팀의 주장에 선임됐다. SFA의 대변인 요나스 니스테트는 "융베리는 팀원들 대다수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며 대단한 경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 선임 배경을 밝혔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본 경기에 들어가기 앞서 연습경기에 융베리를 제외시켰다. 아스날에서 오른쪽 발목이 부상당했기 때문인데 고통을 호소하는 와중에도 융베리는 벤치에 앉아 칠레와의 친선경기와 핀란드와의 경기를 관람했다. 여러모로 의지가 참 대단하다. 이런 악재에도 융베리는 스웨덴 대표팀의 패스를 책임졌다.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조별 예선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막판에[15] 헤딩골을 넣으면서 승패를 갈랐다. 이 골은 이번 대회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골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스웨덴은 1승 1무의 성적을 가지고 잉글랜드와의 경기를 치뤘다.

당시에도 지금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바이킹 군단에게 공한증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 많은 호사가들에게 잉글랜드에게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결국 무승부로 두 팀다 16강에 진출했다.

비록 팀은 16강에서 지고 말았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었기에 그럴만 했다는 평가도 종종 나온다. 아쉽게도 2:0으로 졌으나 본 대회에서 융베리는 꽤 이름 값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무래도 파라과이 전에서의 좋은 헤딩골이 있었으니 그런 듯 하다.

월드컵 다음으로 큰 대회 취급을 받는 유럽 국제 대회인 유로 2008에서는 본인이 스웨덴의 주장 완장을 차고 뛰었으나 이번 대회에서 스웨덴은 아쉽게도 1승 2패라는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는 성적을 거두며 조별예선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본인도 리그와 대표팀을 번갈아 뛰는 것에 한계를 느꼈는지 유로 2008이 끝난 이후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하다보니 리그 쪽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인듯 하나 애석하게도 이때부터 리그에서도 융베리의 기량이 많이 하락했다(...) 뭐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말이다. 또 융베리는 " 국가대표로 뛰었던 모든 경기가 내게는 한없이 소중했다. 팬들의 지지가 대표생활의 가장 큰 힘이었다 " 고 대표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국가대표를 떠났다.

4 플레이 스타일

클래식 윙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전성기 적에는 투지와 끈기가 넘치며 체력도 뛰어나서 공수 양면으로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박지성도 혀를 내두를 수준의 하드워커였다.

스피드와 테크닉도 최고 수준이었고 가속력과 돌파력, 드리블 실력이 좋았다. 아스날의 키플레이어로 절대적 존재감을 보여주었으며, 골 결정력도 윙어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과 MLS에서는, 중앙에서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기도 하는 등 다재다능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5 여담

  • 융베리는 어린 시절 본래 축구 이외에도 아이스하키와 핸드볼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축구와 아이스하키, 핸드볼중 진로 선택을 고민하다가 핸드볼을 선택하였고 핸드볼 선수가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다가 부상으로 인해 핸드볼을 포기하게 되었다.
  • 그러던 그는 다시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업에만 전념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칼리지에 입학하였으나 17살의 나이에 다시 한번 스포츠인 축구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16]
  • 은근히 저니맨 기질이 있는 듯 하다. 스웨덴에서 축구를 시작하고 영국에서 자신의 축구 전성기를 누렸으며, 노년을 미국과 일본에서 보낸 뒤 은퇴 후 1년 뒤에 인도 슈퍼 리그에서 다시 1년간 뛰었다.
  • 준수한 외모로 CK 언더웨어의 모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팬티만 입고 사진을 찍었는데, 축구팬들 사이에서 그것(...)의 크기가 크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지금도 "융베리 순대" 등의 검색어를 볼 수 있을 것이다.[17]
  • 소녀시대의 티파니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밝히길 융베리를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라고 한다! 아무래도 티파니가 평소에 축구를 많이 보는 듯하다.
  • 15/16시즌에 아스날이 370억원을 들여 칠레의 축구선수 아르투로 비달을 영입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적극 지지하면서 "비달은 위대한 선수다. 공을 뺏기면 열정적으로 소유권을 되찾으려 하는 모습이 좋다. 아스널에는 이런 유형이 딱 맞다" 고 말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아스날 쪽 입장은 비달이 영입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융베리만 바보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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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세의 나이로 결혼을 했다! 그것도 11살 연하의 나탈리 포스터와! 이거 아주 도둑놈이다 팬들은 대부분 "티파니와 전세계의 게이들이 글을 싫어합니다"나"리중베르그 형 축하" 등으로 축하해주고 있다.
  • 은근히 같은 스웨덴 선수면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사이가 안 좋은것 같다. 즐라탄이 자서전에서 융베리를 향해 "한 명의 프리마돈나와 착한 녀석들만 있는 대단한 팀"이었다면서 이어 "그 프리마돈나는 자신의 장단에 맞추어 모든 걸 하려고 했고 그건 아스날에서도 마찬가지" 였다며 맹렬히 비난했다.
  • 또 유로 2004를 치를 당시 융베리가 등 부상을 이유로 특별제작된 버스를 요구했던 것까지 거론하며 비난 수위를 높였다. 이에 융베리도 곧바로 맞받아쳤다. 융베리는 "유감이다. 그는 책을 팔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고 곧바로 맞대응했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나는 다른 사람과 문제가 생기면 서로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데, 그는 책을 썼다"고 비판했다. 융베리는 이브라히모비치와 항상 의견 충돌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둘 사이의 관계는 프로선수들의 그것이었다고 전했다. 더불어 "더 이상 미디어를 통해 인신공격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뜻을 강조하기도 했다.[18]
  • 융베리가 셀틱에 온다는 소식을 듣자 차두리가 굉장히 좋아했고, 둘이서 셀틱 시절에 친하게 지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인터뷰에서 융베리가 켈빈 클라인의 속옷 광고를 찍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자신도 켈빈 클라인의 팬티를 좋아해서 집에 여러벌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했던 모양이다(...)
  • 2011년 2월에 차두리가 SNS에 자신과 융베리가 같이 있는 사진을 올렸는데 차두리는 물을 먹고 있고, 융베리는 빵을 먹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는 그 기묘함으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자아냈다. 본 글 내용은 " 새로운 친구가 찾아 왔어요. 조금 유명한 친구. 내 친구 프레디 " 라는 귀엽고 훈훈한 내용이다.
  • 뱅거 감독의 박지성에 대한 칭찬으로 " 그가 말이 없어 사람들이 무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무서운 선수이다. 마치 아스날의 전설적인 윙어인 융베리와 처럼 말이다 " 라는 말을 한 걸로도 유명하다. 아무래도 그가 은퇴했으므로 요즈음에는 이러한 인터뷰나 피파 온라인 3등의 게임으로 융베리라는 선수를 알게 되는 경우도 많은 듯.
  • 펑크록 밴드인 섹스 피스톨즈의 광 팬 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아스날로 갔나보다 [19]프로 데뷔 이전엔 자신의 앞으로의 삶을 펑크로커 로써 살아갈 것 인지. 아니면 축구선수로써 살아갈 것 인지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1. 79경기 10골로 윙어로는 꽤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2. 대표팀으로 치자면 데뷔전이 한일전 인 셈이다.
  3. 이는 프리미어리그가 스웨덴 리그보다 일정이 지나치게 빡빡하기 때문이었다.
  4. 그러나 다음 시즌인 02/03 시즌에는 부상때문에 01/02 시즌의 좋은 성적을 이어가지 못했다.
  5. 융베리 문서는 2015년 8월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졌다.
  6. 이는 융베리가 뱅거 감독 최고의 영입 BEST 10 같은 순위를 보면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7. 당시 아스날은 무려 26승 12무라는 흠좀무한 성적을 거두며 우승했다.
  8. 이적 당시인 2008년에도 아스날 관련 사이트인 '거너스'에서 아스날의 위대한 50인의 플레이어 안에 들기도 하는 위용을 선보였다.
  9. 본 대회에서 스코틀랜드에게 2골을 넣었다. 당시 융베리는 타 멤버들 보다 키도 작고 국제대회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였기에 대회에서 쓰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덴마크 전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 것을 보고 Lasse Lagerbäck 코치는 그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바꿔 빠르고 좋은 선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0. 시니어 데뷔는 1998년 1월 24일.
  11. 융베리의 첫번째 국가대표 골이 나온건 덴마크 전이었다. 팀은 3:0으로 승리했다
  12. 물론 당시에도 즐라탄이 있었지만 그때는 아직 좀 어렸다.
  13. 2002 한일 월드컵 을 대비하기 위해 대표팀에서 훈련을 하는 도중 같은 팀동료인 올로프 멜베리와의 싸움이 화제가 되었다. 멜베리가 융베리에게 거친 태클을 하자 화가 난 융베리가 그를 밀쳤고, 멜베리도 덩달아 화가나 융베리의 멱살을 잡았는데 그게 또 기자의 사진에 찍혔다. 이래저래 멜베리와 융베리 측의 흑역사인 사건이다.
  14. 참고로 한일 월드컵 당시 스웨덴의 조는 죽음의 조였다.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나이지리아가 포진해 있었으니...히익 융베리는 엉덩이 부상 때문에 대부분의 경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15. 44분에 넣은 라스트 미닛 골이었다.
  16. 그의 재능을 생각해보면 스포츠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던 게 다행인 셈이다.
  17. 한 축구팬이 "융베리 순대? 얘가 한국에 왔었던가?" 했는데 밑에 "융베리 그것" 이라는 연관 검색어를 보고 본능적으로 이해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18. 출처는 http://m.sports.naver.com/wfootball/news/read.nhn?oid=343&aid=0000013438& 여기다. 뭐 사실 즐라탄에게 까인 인물이 한 두명이 아닌지라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다. 역시 모두까기 인형! 그리고 기사에 메시와 사비등의 선수들이 즐라탄에게 실망했다고 말했다는 등 사실과는 다른 말들이 많기에 걸러 읽기를 요망하는 바이다.
  19. 섹스 피스톨즈 의 보컬 쟈니 로튼이 아스날의 팬 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