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나우두/클럽 경력

1 개요

호나우두의 클럽경력을 정리하는 문서.

1.1 청소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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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제이루 EC시절

브라질의 벤투히베이루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브라질리언 축구인들이 그렇듯이 빈곤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 유일한 희망은 축구공이었다. 벌어진 앞니 때문에 내성적이고 수줍은 모습을 많이 보였지만, 축구를 할 때는 생기가 넘쳤다고 한다.

1986년 유소년 축구 팀에 입단하여 경이로운 득점력을 보이면서 지역 전체로 활약상이 퍼져 나갔다. 데뷔 후 득점이 펠레를 능가한다면서 유명해졌다.

1990년 14세의 나이로 브라질 2부 리그의 상 크리스토방과 정식계약을 맺었다.[1] 당시 감독이었던 알프레두 감독은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선수들에게 "호나우두에게 패스해!"라고 외칠 정도로 골 잔치는 상 크리스토방에서도 이어졌다.[2] 그에게 골을 넣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전 브라질 대표 자일지뉴는[3] 그런 호나우두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후견인이자 에이전트로 나섰다. 자일지뉴의 후원으로 좀 더 체계적으로 성장해간 호나우두는 브라질 U-17대표에 선발되었고 1993년 남미 청소년 대회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이런 활약에 브라질 명문 클럽들은 영입경쟁을 펼쳤고 크루제이루가 호나우두를 영입하게 된다. 크루이제루 청소년 팀에서도 활약은 이어졌으며 16살에 1군에 합류했다.

1993년 성인 대표팀으로 뽑히고 1994년 만 17세의 나이로 A 매치 데뷔전을 치룬다. 94년 미국 월드컵에 엔트리에는 포함되었으나 경기는 출전하지 못했다. 크루이제루에서 뛴 60경기에서 58골을 넣으며 그는 자신의 가치를 높였고 1994년 여름, 네덜란드의 PSV로 이적했다.[4]

1.2 PSV

PSV 측에서는 불과 몇 년 전 네덜란드를 쓸어버렸던(...) 호마리우에 대해 상당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브라질 출신 공격수인 호나우두가 제2의 호마리우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에레디비지에 입성한 호나우두는 데뷔시즌인 94/95 시즌, 32경기에 출전해 30골을 몰아치며 대활약했다.

95/96 시즌 중반 부상으로 96년 생애 첫 무릎 수술을 받았다. 부상 악몽의 시작. 그 부상 와중에서 19경기 12골은 넣어주었으니 거의 경기당 1골을 몰아친 셈이다. 부상 회복 이후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 올림픽 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비록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이 탈락하긴 했으나 호나우두는 자신이 출전한 경기는 준결승을 제외하곤 모두 이기며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5]

1.3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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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공깽 그 자체였던 바르셀로나 시절

올림픽 무대에서의 활약을 통해 호나우두는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 단 1시즌밖에 뛰지 않았지만 49경기 47골을 넣었으며 바르셀로나 일원으로 뛴 모든 경기는 팬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이 기록은 2010-11 시즌에 와서야 리오넬 메시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바르셀로나 1시즌 최다 골 기록이었다.[6] 컵 위너스 컵에선 5골로 득점왕을, 리그에선 34골로 '피치치'(라 리가 득점왕)를 수상했다.

특히 1996년 5월 19일 콤포스텔라와의 리그 경기에서는 지금도 간간이 회자되는 6명 제끼고 단독 돌파 드리블&골을 작렬시켰고, 이 골은 이틀간 각종 TV 프로에서 180회 이상 반복 재생(...)되는 등 스페인 전역에 폭풍을 일으켰다. 지금의 바르샤가 차비 에르난데스이니에스타에게서 시작되는 오곡성 패스 패스 플레이를 시작으로 메시의 돌파로 마무리짓는 방식이라면, 당시 바르셀로나의 공격은 호나우두의 개인 기량에 크게 의존했다. 그야말로 원 맨 쇼를 1년 내내 펼치던 그는 마티아스 잠머와 단 1표 차로 발롱도르 2위를 기록하고 FIFA 올해의 선수상[7]을 수상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임을 공인받았다. 이때 나이가 20살. 역대 최연소 수상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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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시즌 득점왕이라는 충공깽스런 모습 등 시즌 내내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바르셀로나는 물론이요, 스페인 전역을 데꿀멍하게 만들었으나 본인이 이적을 원했기에 바르셀로나에서의 짧은 경력을 마무리한다. 다음 행선지는, 자신이 갓 브라질을 떠날 때부터 계속해서 러브 콜을 날렸던 모라티 구단주의 인테르였다.

이 시절 호나우두는 골 수도 골 수지만, 흔히 얘기되듯 호나우두 원 루트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공격에 깊은 관여를 했고 매우 성공적이었기에 여지껏 인구에 회자될 만한 플레이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 때 호나우두가 무조건적으로 찬양되기에는 수비전술이나 공격효율 등의 한계가 엿보인 건 사실이다. 호나우두가 영입된 바르셀로나는 지난 시즌보다 실점이 늘어나 리그 최소실점 6위팀이 되어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8] 잠그는 팀에는 다른 타입의 공격수들보다 고전하는 호나우두의 근본적 약점과 더불어 상대편에게도 기회를 안겨주던 특성을 시사한다.[9]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호나우두가 월드 클래스는 기본이고 지단이나 호마리우와 더불어 세계 최고를 겨뤄 볼만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담이지만 호나우두를 버리고 히바우두를 먹은 바르셀로나는 다음해 리그 타이틀을 차지한다. 다다음해도. 심각한 뻘짓은 아니었던 것 같다.

1.4 인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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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밀란 이적 첫 시즌에 UEFA컵 우승을 견인한 호나우두

바르셀로나를 떠나 그는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인테르에 입단하게 된다. 인테르 구단 프런트도, 선수단도 그의 입단을 마음껏 반겨주었다.

등번호의 얽힌 일화가 유명한데 당시 인테르 주전 공격수였던 이반 사모라노가 호나우두의 9번을 달고있었다. 97-98 시즌에 호나우두는 10번, 사모라노는 9번을 달고 뛰었지만, 프랑스 월드컵 이후 이탈리아의 전설의 10번 로베르토 바조가 온 이후 호나우두가 10번을 바조에게 양보하며 호나우두의 등번호가 없어지며 상황이 꼬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나이키에서 호나우두의 R9 마케팅을 하고있어 9번을 달라고 구단에 압박까지 들어와 계약에 지장이 갈수있는 매우 난감한 상황이 닥치자, 사모라노가 9번을 호나우두에게 양보하여 훈훈하게 마무리되고, 사모라노 본인은 그 유명한 1+8번을 달게 되었다.[10] [11] 그러나 스펀지에서는 전후사정 설명없이 호나우두가 닥치고 강제로 등번호를 뺏어가버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알바로 레코바와 함께 데뷔전을 치뤘고 해당 시즌 리그 32경기 동안 25골로 득점왕은 차지하지 못했지만 세리에 A 최우수 외국인 선수에 세리에 A MVP로 선정되었고, 팀에게 UEFA 컵 우승을 안겨주었다.[12] 당시 세리에 A는 세계 최고의 리그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으며, 특유의 견고한 수비와 거친 몸싸움으로 공격수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호나우두는 하나의 사기캐로 군림하며 상대 수비진을 농락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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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그는 다시 한번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그해에 발롱도르도 차지했다. 이때 차지한 발롱도르는 역대 최연소 수상 기록이다.[13] 이로써 호나우두는 FIFA 올해의 선수상, 발롱도르 모두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수상하게 되었다.[14]

이런 호나우두는 이탈리아에선 "신이 내린 재능(Il Fenomeno)", 세계 각 국의 언론들로부터 "디에고 마라도나 이후 등장한 최고의 카리스마"라는 찬사를 받았다.

허나 이어지는 99/00 시즌에 부상으로 경기장을 떠났고 2년이란 시간을 병상과 재활 센터에서 보냈다.

애초에 호나우두의 인터 밀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 제대로 공헌한 적은 첫 두 시즌뿐이었고, 그나마 부상으로 절반은 날려먹은 2번째 시즌을 제외한다면 제대로 활약한 때는 루키 시즌인 97/98 시즌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9년 11월 21날 벌어진 레체와의 경기에서 무릎 부상으로 쓰러졌고, 2000년 4월 12일 SS 라치오와의 코파 이탈리아 결승 제1차전 경기에서 복귀했으나 경기를 뛴지 7분만에 부상 재발로 실려 나가 2년을 고스란히 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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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두의 축구 인생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였던 순간 지못미 ㅜ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타가 인정하는 대인배 구단주 마시모 모라티는 '호나우두는 나의 양아들이다'라는 말까지 해가며 재활을 지원했다.

02년도 봄쯤에 그라운드에 나타나 인터 밀란에서 세심한 출장 시간 조절을 받으며 서서히 몸을 데운 호나우두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출전해 득점왕까지 차지하며 부활을 알렸다. 그러나 그는 '왕자의 귀환이 스쿠데토를 쥐세페 미아자로 가져올 것'이라는 인터밀란 팬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레알 마드리드와의 염문설을 뿌리며 모라티 구단주를 압박, 이적 승낙을 받아낸다. 격앙된 인테르 팬들은 호나우두를 배은망덕한 놈이라며 맹비난했으며 후에 그가 AC 밀란과 계약으로 밀라노로 복귀할 때 '너같은 놈은 관광객으로라도 밀라노에 발을 들여놓으면 안 된다'라는 플래카드를 경기장에 걸어놓으며 성대한 귀환식을 열어주었다.

1.5 레알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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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 시즌 호나우두는 레알 마드리드는 갈락티코스 정책의 일환으로 이적하게 된다. 첫 시즌 23골을 넣으며 라 리가 우승을 일구었고 2002년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된다.[15]



전설의 3샷 3킬[16]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8강전은 일명 "3샷 3킬"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된다.[17][18]

03/04 시즌에는 리그에서 24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이 시즌에 특이할 만한 점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전에서 자신의 축구인생에 최단 시간(14초) 골을 터트린 것.[19]

하지만 04/05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체중이 불어나면서 경기력이 하락하기 시작한다.[20][21] 어느새 국내 웹 상에서는 갈락티코랍시고 화려한 선수를 끌어모았지만 마케팅에 비해 지지부진한 레알 마드리드를 상징하는 호나우두를 호돈으로 비꼬기 시작한다. 호돈 팬들은 엄청나게 싫어하는 별명이었지만 결국 스포츠 선수에 대한 대부분의 멸칭이 그렇듯 팬들도 이제는 호돈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일부 호돈팬들은 마치 박진영처럼 워낙 날조와 언플에 능해서 떼어낼 수 없는 호돈 별명을 아예 긍정적으로 이용하려고 또다른 날조를 하곤 하는데, 체중이 엄청나게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탁월해서 그 당시에도 호돈신이라고 불렸다고 날조하지만 축구선수 뒤에 신을 붙이는 것은 모따 항목에 가면 알 수 있듯 모따가 원조이며 그 시기로 볼 때 호돈에 신이 붙은 건 그냥 호나우두 선수시절 거의 막바지에 해축갤에서 아데바요르에도 신을 붙이는 아무나 신을 붙이는 분위기가 되서 그냥 붙여준 것이다. 몰상식한 팬들은 이걸 소재로도 날조를 하니 박진영의 언플에 속으면 안 되는 것처럼 올바른 팬들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뭣보다 호나우두 레알 시절에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 한국 사회가 훨씬 더 진지했고 한국 사회는 신하면 기독교 유일신을 떠올리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아무나한테 신 자를 막 붙이고 그럴 수는 없었다.

경기장 안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게으른 태도로[22] 일관했던 호나우두는 팀 동료와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로부터 비난과 야유를 피할 수 없었고 신임 감독인 카펠로는 이런쪽으로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감독이였고, 이미 노쇠화된 호나우두는 그의 성에 차지 않아 주전경쟁에서 철저하게 도태된다.[23] 결국 계약기간 만료일인 2008년 6월 20일까지 채우지 못하고 2007년 2월에 AC 밀란으로 이적했다.

1.6 AC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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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끝

06/07 시즌 그는 AC 밀란으로 터를 옮기게 된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AC 밀란 의료진들의 도움을 받아 체중 감량에 성공했고 잔부상을 치료하였다. 이후 그라운드에 복귀해 14경기 7득점 4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시작한다. 하지만 07/08 시즌을 앞두고 부상을 다시 한번 발목을 잡았다. 반년이 지난 후 칼리아리 원정에서 시즌 첫 경기를 치뤘다. 이후 후배인 카카, 알렉산드르 파투 등과 좋은 호흡을 보이며 좋은 모습을 이어갔다. 하지만 2008년 2월 13일 리보르노와의 홈경기에서 그는 또다시 그라운드 위에 쓰러졌다. 왼쪽 무릎 슬개건이 끊어진 것. 이는 인테르시절 그를 괴롭힌 부상과 동일했고, 호나우두는 실려나가며 그때랑 똑같아라며 울먹였다고 한다. 재활에 걸린 시간은 13개월. 처음에는 AC밀란 측은 부상 재활까지 기다리겠다며 재계약 의사를 내비쳤으나 브라질에서 터진 마약스캔들 + 섹스 스캔들[24]로 인해 결국 재계약을 포기하게 된다.

1.7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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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그는 고국 브라질의 코린치안스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라고 밝히며 욕심없이 순수하게 축구를 즐기는 모습[25]을 보여주고 싶었던 듯 하다.

나이 먹어서도 빠른 호돈신

하지만 슬슬 호나우두도 은퇴 시기가 다가왔는데 09 시즌엔 대표팀 선발 얘기까지 나올 만큼 좋은 활약상을 보여줬으나, 10 시즌에는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출장하더라도 비만으로 지극히 느리고 부지런하지 못한 플레이를 보여 팬들의 원성을 샀다. 사실 팬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원인은 그의 지나치게 높은 주급에서 기인할 것이다.저 주급으로 데려올 수 있는 팔팔한 신인이 몇 명이냐 이 소리 그도 자신의 몸상태를 의식했는지 2010년 5월엔 "몸이 멈추라고 명령한다"는 발언을 해 은퇴하려는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1.8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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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1년 2월 14일 은퇴 기사가 떴다. 2월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은퇴를 공식 발표. 이로써 축구 천재의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가 찍혔다. 라이언 긱스의 "몸은 느려지는데 머리는 빨라진다."라는 말과 비슷하면서도 대조적이게 "머리로는 수비수를 어떻게 따돌리는지 알고 있는데, 몸은 따라주지 못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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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린 시절 응원했던 플라멩구에 입단 테스트를 받기 위해 초청장을 가지고 가던 도중 깡패를 만나 초청장을 빼앗기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온 적이 있다. 그래서 입단한 곳이 상 크리스토방.
  2. 호나우두가 골을 넣은 후 세레머니를 하지 않자 감독이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골을 넣기 위해 제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대답했다.발로텔리 before
  3. 역사상 최강의 팀이라고 불리우는 1970년 브라질 국가 대표팀에서 1970년 월드컵 전 경기 득점을 기록한 레전드이다.
  4. 대표팀 선배 호마리우의 조언이 영향을 미쳤다. 호나우두는 후에 호마리우가 지쿠와 함께 자신의 우상이라고 밝힐 정도였고 대표팀에서 호마리우를 처음 목격하고는 호마리우가 귀찮아할 정도로 졸졸 따라다녔다.
  5. 경기를 직접 구해서 본 결과 호나우두가 출전했다. 무분별한 찬양 목적의 복사 붙여 넣기의 오류.
  6. 마라도나와 비견될 만한 전설의 드리블 돌파를 선보이기도 했다. 다만 엄청난 스피드로 순식간에 치고 나가 득점한 마라도나와는 달리, 적당한 스피드로 달리면서 계속 따라붙은 수비수들을 다 농락하고 골을 넣는다. 과연 어느 쪽 수비수들이 더 허탈할까(...).
  7. 발롱도르보단 권위가 한 수 낮고, 인기상의 성격이 강하다.
  8. 3, 4, 5위 팀인 베티스, 바야돌리드, 소시에다드와는 1, 2골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그 위로는 레알과 데포르티보가 있는데 데포르티보는 마우로 실바가 한창 전성기였을 시절이었다.
  9. 연계형이 아니니까 도전하게 되고 실패란 곧 상대편의 기회로 이어지기 마련. 샤비 체제의 바르셀로나가 지겹게 공 돌리는 이유와도 조금 통하는 면이 있다.
  10. 물론 사모라노가 9번의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는지 다른 잡놈이였다면 축구고 뭐고 다 뒤집어 엎었겠지만 호나우두니까 인정한다면서 약간의 섭섭함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리고 은퇴경기때 다른선수들이 그를 기리기위해 1+8번이 아닌 9번을 입고 뛰었다.
  11.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둘의 사이는 매우 좋아져서, 사모라노 은퇴경기때 호나우두가 모든 일정을 제쳐두고 비행기를 타고와 쉴틈도 없이 바로 사모라노의 경기에 들어와 같이 뛰었다.
  12. 인테르의 UEFA 컵 우승은 94년 UEFA컵 우승 이후 4년 만에 얻은 메이저 타이틀이었다.
  13. 마이클 오언, 리오넬 메시는 22살에 수상.
  14. 펠레를 제외하고 20살의 어린 나이에 세계 최고가 된 경우는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하다. 거의 대부분의 축구선수들이 20살 중반부터 전성기를 맞이하기 때문. 펠레, 마라도나에 이어 역대 최고의 반열에 올라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너무 일찍부터 불꽃을 태웠다는 점이 그의 커리어에 커다란 치명상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15.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컸다. 그 해 발롱도르 고득표자들은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었다.
  16. 이 영상은 에릭 칸토나가 소개한다. 당시 호나우두의 충격이 엄청났다는 반증에릭 칸토나가 나오는 부분은 우측 상단의 JOGA TV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나이키 광고 영상이며 해당 경기와의 직접적인 연관성도 없다.
  17. 이 경기에서 그는 레알 팬들은 물론, 맨유 팬들로부터도 기립 박수를 받았다.
  18. 여담이지만 세 골 모두 환상적인 골들이다. 구티의 킬패스를 폭발적인 스피드로 받아내어 골대로 완벽하게 꽂아넣은 첫 골, 환상적인 팀플레이로 맨유를 농락하며 넣은 두번째 골, 그리고 오른발 각도 생기자마자 바로 방향잡고 때린 미친 중거리골. 모두 호나우두,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골들이다.
  19.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호베르투 카를로스의 패스를 받은 다음, 디에고 시메오네를 특유의 재치있는 알까기로 넘어뜨리고, 마지막 골키퍼까지 농락하면서 인생골 중 하나를 집어넣었다. #
  20. 갑상선 기능 저하로 인해 체중이 불어났다. 또 갑상선도 갑상선이지만 마드리드 타블로이드 지에 지네딘 지단루이스 피구가 담배 한 개피씩 피고 같은 테이블에 있던 호나우두가 자기 머리통만한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는 사진도 도는 걸 보면 일단 그의 식탐도 체중 문제에 일조를 한 듯하다.
  21. 경기력에 관한 부분은 약점 항목을 참조.
  22. 결혼식 때 팀 전체를 파리로 데려가거나, 생일 파티 때 여자들과 팀 동료 전원을 데려오는 등 파티와 노는 걸 좋아했던 호나우두의 무절제한 사생활로 인해 팀을 탈선시킨다는 여론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
  23. 이 외에도 자신을 디스하고 놀기바쁘던 갱생전의 안토니오 카사노, 언론에 자주 구설수가 나며 심기를 어지럽히던 데이비드 베컴이 내쳐진다. 이 중 베컴은 카펠로와의 화해 후 역전우승의 핵심으로 활약한다.
  24. 여장매춘부(...)3명을 고용하여 코카인을 사오라 시켰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당시엔 매우 큰 사건이였다.
  25. 극심한 가난을 겪으며 브라질 리그에서 추악한 일도 겪어서인지 전성기이던 90년대 후반 유럽으로 가면서 다시는 브라질로 오고 싶지 않다고 인터뷰까지 하던 그였다. 뭐 이젠 돈도 충분히 벌었고 나이도 있으니 돈이니 뭐니 걱정도 없이 그냥 축구로 순수하게 즐기고자 돌아온 듯? 도 있겠지만 브라질이 좀 잘나가기 시작하면서 과거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수들의 페이가 올라갔다. 호나우두도 주급이 한화로 1억이 넘고 1억 5천이 안 되는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