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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앰배서더 | |
마이클 제임스 오언 (Michael James Owen) | |
생년월일 | 1979년 12월 14일 |
국적 | 잉글랜드 |
출신지 | 체스터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신체조건 | 173cm, 70kg |
유스팀 | 리버풀 FC (1991~1996) |
소속팀 | 리버풀 FC (1996~2004) 레알 마드리드 CF (2004~200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5~200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9~2012) 스토크 시티 FC (2012~2013) |
스태프 | 리버풀 FC 앰배서더 (2016~ ) |
국가대표 | 89경기 / 40골 |
2001 Ballond'or | ||
수상 마이클 오언 | 2위 라울 곤잘레스 | 3위 올리버 칸 |
1998 FIFA 월드컵 신인상 | ||
마이클 오언 |
목차
1 상세
현재까지 잉글랜드의 마지막 발롱도르 위너
WONDER BOY
전성기 시절 플레이스타일은 스피드스타가 보여줄수 있는 최선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볼을 가지고 움직일때 쓸데없는 움직임이나 리스크 없이 지혜롭게 볼을 운반하기 때문에 현란한 발동작 없이도 수비수 하나 둘은 무리없이 제치고 (가끔은 페인트 동작도 잘 쓰면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침착하게 슈팅해 강한 킥력 없이도 최고의 골결정력을 보여줬다. 위치선정이 뛰어나서 작은 키로도 헤딩골을 많이 넣었다.
아버지 테리 오웬은 에버튼 FC의 선수였기 때문에 원래 에버튼의 팬이지만 리버풀 FC에 입단해 유스시절 스티븐 제라드와 함께 훈련을 받았다. 참고로 이 때 리버풀 유스는 제라드, 캐러거 등을 포함해 우수한 선수를 한꺼번에 대거 배출해서 황금세대라고 불린다. 하지만 오웬은 그 중에서도 특출난 수준이었다. U-17, U-19 등에서의 활약이 워낙 좋았기에 제라드보다 이른 나이에 성인 무대에 데뷔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서 18살의 나이로 출장해 역전 골을 성공시킨 센세이션한 모습때문에 '원더 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경기는 승부차기 끝에 잉글랜드가 패했지만 이때의 임팩트는 강력하다.
2 클럽 경력
2.1 리버풀
Wonder Boy
2000년대 초반 리버풀을 이끌었던 공격수.
1군 무대에 데뷔한 2년차부터 이미 풀타임 플레이어가 되었으며, 2년차 시즌에 36경기 18골이라는 무시무시한 실력을 보여줬다. 19세 나이에 EPL 득점왕(97~98, 98~99. 2연속)을 차지하기까지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셈이다.
2000-01 시즌 리버풀의 트레블[1]의 주인공 역할을 쏠쏠히 해내며 해당시즌 발롱도르까지 수상했다.[2] 그 후 03-04시즌까지 리버풀에서 뛰면서 매 시즌 2경기당 1골 이상이라는 놀라운 득점력으로 활약했지만, 정작 메이저급 우승 트로피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래서 04-05 시즌 8m이라는 헐값에 레알 마드리드로 홀연히 이적해 팬들의 비난을 샀다.[3] 하지만 그가 이적한 시즌에 리버풀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했다.
2.2 레알 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나우두, 라울 곤살레스같은 스타들 때문에 출장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간간히 조커로 출장하며, 출장 시간 대비에서는 꽤 골을 넣었다. 그러나 호나우두, 라울이라는 기존의 스타들을 밀어낼 만한 활약은 보이지 못하였으며, 벤치멤버로 전락하게 된다. 레알에서의 기록은 36경기 출장에 13골.
이후 주전 출장을 계속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1시즌 뒤에 바로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약 18m파운드의 이적료로 이적.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종전에 가지고 있던 클럽 이적료 기록인 앨런 시어러의 16m파운드를 뛰어넘었고, 주급도 무려 1주일에 2억 가까이 수령하게 되었다. 이때 오웬 본인도 리버풀로의 복귀를 바라고 있었지만 리버풀은 불과 1년 전에 떠난 선수를 재영입하는데 보낸 이적료의 2배를 지불하고 다시 데려온다는 것을 꺼려하여 영입하지 않았다. 또 이 때 오언의 팬으로 유명한 퍼거슨 감독 또한 영입 계획이 있었지만 당시 이미 박지성을 영입한 상황이라 오언을 이어서 영입할 계획은 없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2.3 뉴캐슬 UTD
암흑기의 시작
하지만 뉴캐슬 시절 첫 시즌에 굉장한 연속골을 넣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귀신같이 부상을 당한 후 계속해서 부상을 달고 살아 4시즌 동안 71경기 밖에 못 나왔다(그나마도 교체 출장이 많다.). 그리고 뉴캐슬이 강등당한 뒤 FA 신분으로 풀리게 된다. 당시 오언은 장기간의 부상, 소속 팀의 강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새로운 팀을 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본인을 홍보하는 브로셔(일종의 안내책자)까지 만들어 배포했었다고 하니 얼마나 접촉했던 팀이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긴 해도 떠나서 홀가분하다는 게 뉴캐슬 팬들 대다수의 감상. 난 자리가 너무나도 시원한 남자였다. 속쓰린 부상과 재활도 모자라 더럽게 받아먹던 주급도 그렇거니와, 뉴캐슬의 모 선수는 인터뷰에서 높은 주급을 받던 모 슈퍼스타가 팀을 떠난 후 라커룸 분위기가 너무나 편해졌다, 그는 너무나 슈퍼스타라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 거만한 태도를 취했기에 라커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하여, 유튜브에 훈련모습을 올리는 등, 이적할 팀을 구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면서 주변에서 비록 자업자득이긴 해도 '원더보이'라 불리며 선풍을 일으켰던 그의 처지에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였으며 그리스 리그로 간다는 둥의 소문이 무성하다가...반전이 일어났다!
2.4 맨유 & 스토크 시티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계약 제의를 한 것이다! 같이 점심 먹자고 연락해서 거기서 계약제의가 있었던 듯. 결국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깜짝 이적을 성공시켰다. 소문에 따르면 퍼거슨 감독이 리버풀 시절부터 오웬을 높이 평가해서 데려오고 싶어했다고. 2009년도 맨유 방한 당시 우연찮게 데이비드 길 단장과 와인 바에서 대화를 하게 된 한 맨유 팬의 증언에 따르면 길 단장은 (당시 시점으로)몇년 전부터 마이클 오웬을 데려오라는 퍼거슨 감독의 등쌀에 시달렸다고 한다. 실제로 오언을 자유이적으로 데려오고 여러 설이 나도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그를 출전시키면서 2011년도 여름에 계약 연장까지 한 걸 보면 퍼거슨 감독의 오언 팬설은 사실인듯. 오언 본인도 맨유에서 염원해마지 않던 정규리그 우승컵 등, 몇 개의 우승컵을 챙길 수 있었으니 서로 이득이 된 셈이다.
하지만 리버풀 입장에서는 최대 라이벌인 맨유로의 이적이라는 최악의 경우였다. 리버풀 팬들도 헤어질 때의 모습은 덮어두고 그래도 우리 새끼라고 원더보이가 늘그막에 고향팀에서 파란만장한 커리어를 마감하길 바랬고, 실제로 프리로 풀리기 직전 09년 봄에 뉴캐슬이 안필드 원정을 왔을 때 교체투입되는 원더보이에게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내주기도 했지만 그로부터 몇달만에 통수를 맞은 것(...) 사실 오웬은 이때도 리버풀 이적을 원했고 제라드와 토레스(!)도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에게 오언의 영입을 요청했으나 베니테즈 감독은 이번에도 영입을 거절했다. (그리고 은고그를 취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대로 퍼거슨이 계약 제의하자 덥썩 물었다.
예전에는 엄청난 순간 스피드와 주력, 드리블링으로 득점을 하는 전형적인 돌파형 스트라이커였지만, 잦은 부상으로 스피드가 많이 죽어 이탈리아의 필리포 인자기처럼 오프사이드 라인을 무너뜨리는 움직임을 이용한 공간 침투와 문전에서의 센스로 골을 넣는 타겟 스트라이커로 변화했다.[4][5] 점프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위치선정과 헤딩에 뛰어나,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헤딩골도 많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후 09/10 시즌엔 팀내 3rd 스트라이커로 주로 조커로 많이 활용되었다. 역시 그 지긋지긋한 부상 때문에 자주 발목을 잡히긴 했지만 맨체스터 더비의 결승골과 챔스 볼프스부르크전 해트트릭을 비롯한 중요한 골을 몇 골 뽑아내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는 중. 다만 칼링컵 결승 이후 또 부상으로 시즌 아웃 당해서 2010 남아공 월드컵 출전의 꿈을 접어야했다.
10/11 시즌엔 새로 영입된 하비에르 에르난데스에게도 밀려 팀내 4th 자원으로 밀려났다. 에르난데스가 전성기 오웬을 연상시키는 빠른발과 위치선정, 골결정력에 특화된 선수라서 스타일마저 겹쳐버린 것이 큰 듯. 덕분에 맨유에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7번을 달고 있는 선수면서 얼굴보기가 힘들어졌다. 이 시즌 뉴캐슬 원정경기에서는 현지팬들이 세인트 제임스 파크 개장 이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야유소리(...)라고 평가할 정도로 극심한 야유를 받고, 교체투입 이후 수 분 동안 모든 홈 팬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there's only one greedy bastard"를 연호했다. 심지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흔드는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블랙번 전에서 마지막 골을 넣고 맨유의 19번째 리그 우승이자 자신의 첫 리그 우승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오언 : 보고있나 스티븐 제라드 난 리그 메달이 있다고 / 제라드 : 오언아 빅 이어라고 들어는 봤니?
하지만 10-11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베르바토프를 밀어내고 깜짝 교체명단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퍼거슨에게 베르바토프 대신 오웬을 벤치에 앉힌 이유를 묻자 퍼거슨은 "경기 막판에 정말 골이 필요하거나, 무에서 유를 창조할만한 선수가 필요하다면 마이클 오웬보다 나은 선수가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며 오웬을 추켜세워줬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FC 바르셀로나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오웬의 출전 기회는 없었다. 이 날 하비에르 에르난데스가 박지성의 좋은 패스를[6] 어이없는 터치로 날려먹는 등 상당히 부진했는데 차라리 오웬이 선발로 출장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아르헨티나에게는 욕먹어도 할 말이 없는 선수인데, 월드컵에 참가한 1998년과 2002년에 모두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페널티킥을 얻어내면서 아르헨티나를 엿먹였다. 1998년에는 로베르토 아얄라를 상대로 패널티 킥을 얻어내었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마우리시오 포체티노[7]에게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부당하게 패널티킥을 얻는 바람에 베켄바워에게 거의 쌍욕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다. 2002년의 행동은 대표적인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꼽혀서 KFA 홈페이지의 경기규칙강좌에서 대표적인 시뮬레이션 액션 사례로 사진이 실려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후 오언은 1998년과 2002년의 시뮬레이션 액션을 모두 스스로 인정했다.
사실, 마이클 오웬의 페널티 킥이 잘못 되었다면서 포체티노가 따지려다가 말았고, 다른 아르헨티나 선수들도 항의를 하지 않았다. 오언의 연기가 워낙 좋기도 했지만, 당시의 심판이 명심판으로 유명한 콜리나였기 때문에 "콜리나 심판이라면 제대로 봤겠지." 하고 믿은 선수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충성심에 대해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철저하게 프로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는 선수고, 언론관리에 상당히 냉철한 선수였었다. 절대 인터뷰로 기자들에게 이적에 관련해 떡밥을 던져주지 않았고, 자신의 옛 소속팀에 대한 허술한 인터뷰로 기자들에게 떡밥을 제공해주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몸담았던 팀들에 대한 인터뷰 태도가 변했다.
생애 첫 EPL 우승 이후 한 인터뷰에서 "If you can't beat them, join them(이길 수 없다면 그 편에 서라)"라는 속담을 말해 리버풀 팬들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덕분에 그 이후 별명이 합류왕이 됐다. 또한, 2011년 6월 2일 경에 자신의 트위터에 "매 경기 수준 낮은 팀(poor team)에서 뛰는 것보다 최고의 팀에서 종종 뛰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때는 즐겁지 않았거든요."라는 글을 올려 전 소속팀인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까내렸다. 당연히 뉴캐슬 팬들은 분노했고, 가뜩이나 고액 연봉에, 매 시즌 부상을 달고다니던 선수를 4년이나 품어왔던 그들의 어이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다. 현재 각 축구 팬덤에서도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중.
비록 지금은 몰락의 아이콘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유리몸인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의 골잡이로서의 능력은 무시할 수준은 아니며, 실제로 그가 저번 시즌 맨유를 구한 골을 넣은 것을 생각하면 역시 클래스는 있다. 각주에 서술된 최대 장점인 침착함과 슈팅기술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니까...이 양날의 검이 시즌 초에 부상당하지 않고 잘 쓰여진 것을 보면 맨유의 뽑기 운이 좋다고 해야하는 것인지도...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1년 재계약을 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그를 웨인 루니와 하비에르 에르난데스에 뒤이은 세번째 옵션으로 쓸 생각인듯. 덕분에 10-11시즌 EPL 득점왕은 어디론가 떠나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11-12시즌에는 잦은 부상으로 입지가 워낙 줄어들어서 결국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현재 새로운 팀을 찾고 있으나 계약 제의는 커녕 언론에 제대로 된 링크 하나 안 뜨고 있다.
UAE의 알 샤밥과 잠시 링크가 떴으나 알 샤밥의 칼리드 부 후마이드 부사장이 직접 나서 "내리막인 선수는 필요 없다"(DTD)박주영: ? 라고 영국 언론에 밝히면서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그래도 이적시장이 닫히기 전에 스토크 시티로 이적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2013년 1월 20일 23라운드 경기에서 숱한 장신들 사이에서 헤딩골을 넣었다. 이 시즌을 끝으로 오웬은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은퇴선언 기점으로 아직 33세라서 아깝다는 반응과 폼 저하의 상징이나 다름없어서 올게 왔다라는 반응이 교차하고 있다.
3 기타
리버풀에서 축구 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작 오언 본인은 리버풀 최대의 라이벌인 에버튼의 팬. 뭐 리버풀의 부주장인 제이미 캐러거도 에버튼 팬이다.
11-12 시즌에는 리버풀 자선경기와 개리 네빌의 은퇴경기를 모두 뛰었다... 또한 제이미 캐러거의 은퇴경기도 뛰었다. 제라드도 집에 트로피와 유니폼 장식장에 오웬의 레알 마드리드 셔츠가 가운데에 장식되있는 것 등을 보아[8]후에 제라드의 은퇴경기에도 출전할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원래 같은 시기 유스생활을 보냈고 서로 친해서 오언의 이적 후에도 여전히 친하게 지낸다고.
축구 외에도 경마, 사업, 부동산, 주식 등의 재테크를 하고 있고, 스타성이 굉장하기 때문에[9] 이로 인해 데이비드 베컴에 이어 영국 출신 현역 축구 선수 중 재산 2위를 자랑 중이다. 특히 손꼽히는 경마 매니아이며, 부인 또한 경마 관련 직종에 종사한다고 한다. 모 인터뷰에서 그가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가져가고 싶은 물건이 무엇인지 묻자 "경마 소식지"라고 답했던 적도 있다. 퍼거슨 감독도 경마를 좋아하기 때문에 둘이서 경마이야기를 하는 때도 있다. 말타는걸 심하게 좋아하는데 돈까지 많다보니 마을의 일정구역을 사들여서 말타고논다.
2013년 트위터에서 자신의 긴 부상경력을 조롱하며 퇴물이라고 야유하는 것에 분개해 나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하지만 너는 뭐였냐? 너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받아쳤으나 상대편에서 니가 6년 동안 부상에서 신음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나는 니 나라를 지켰다[10]고 응수하자 조용히 잠수를 탔다... 본인 말론 19살 이후 몸이 100%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11]
은퇴 이후로는 경기중계, 해설을 맡고 있는데 워낙 안티팬이 많아 쉴 새 없이 까이고 있는 중. [12]
2002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의 개고기 문화에 반대한다며 오웬은 잉글랜드 대표팀과 소속팀 리버풀의 동료인 에밀 헤스키, 제이미 레드냅이 한국의 개고기 문화에 대한 반대와 압력을 넣는 서명에 참여했고, 이어서 프랑스 대표팀이자 첼시 FC 소속의 에마뉘엘 프티도 이 서명에 동참했다. 당시 기사 지들이 뭔데 남의 나라 문화에 이래라 저래라야[13] 웃긴 건 이들은 역시 월드컵 공동개최국이었던 일본의 고래사냥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도 않았다는 것. 생선을 산 채로 살을 떠서 죽이는 스시도 얼마나 잔인한데! 물고기도 개처럼 애완동물로 많이 키우는데?
2002 월드컵 때 한국에서의 우스개소리로는 차두리와의 비교가 있었다. 당시 월드컵 참가 선수 중에 가장 스피드가 빨랐던 게 오웬과 차두리였는데 둘의 차이점은 '오웬은 공을 드리블하며 달리는 것이고, 차두리는 공보다 빠른 나머지(?) 공 없이(??) 혼자 뛰었다'는 점이라고..
2015년, 피파 온라인 3에 06년 월드컵 버전으로 재등장하였다. 높은 골 결정력, 빠른 발 등 뉴캐슬에서의 전성기를 그대로 재현해냈다. 그런데 깨알같이 특성이 유리몸(...).
초창기 대표팀 시절, 베컴의 롱패스+오웬의 스피드 조합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고질적인 왼발 트래핑 문제로 수비수들에게 롱패스 받는 패턴을 읽히면서 철저히 마크당해 큰 재미를 보지못했다. 마치 지단+앙리의 프랑스 처럼.
2016년에는 리버풀 국제 앰배서더로 선정되었는데, 데뷔 초기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 걸 제외하면 그 뒤로는 끝없는 나락만을 보여주고 구단도 저버린 선수한테 앰배서더 줬다고 까이고 있다.
4 기록
4.1 대회 실적
- 리버풀 FC (1996/97 - 2003/04)
- FA Cup (1) : 2000/01
- League Cup (2) : 2000/01, 2002/03
- FA Community Shield (1) : 2001
- UEFA Cup (1) : 2000/01
- UEFA Super Cup (1) : 2001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09/10 - 2011/12)
- Premier League (1) : 2010/11
- League Cup (1) : 2009/10
- FA Community Shield (1) : 2010
4.2 개인 수상
- PFA 올해의 젊은 선수: 1997–98년
- PFA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 1997–98년
- 칼링 프리미어쉽 올해의 선수: 1997-98년
-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선수: 1998년 8월
- 프리미어리그 공동 득점왕: 1997–98, 1998–99년
-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 1998년
-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기념 어워드(1992–93, 2001–02년): Domestic Team of the Decade
- FIFA 100 : 2004
- 발롱도르 : 2001
4.3 리그 기록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컵 | 리그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96/97 | 리버풀 FC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2 | 1 | 0 | 0 | 0 | 0 | 0 | 0 |
1997/98 | 리버풀 FC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36 | 18 | 0 | 0 | 4 | 4 | 4 | 1 |
1998/99 | 리버풀 FC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30 | 18 | 2 | 2 | 2 | 1 | 6 | 2 |
1999/00 | 리버풀 FC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27 | 11 | 1 | 0 | 2 | 1 | 0 | 0 |
2000/01 | 리버풀 FC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28 | 16 | 5 | 3 | 2 | 1 | 11 | 4 |
2001/02 | 리버풀 FC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29 | 19 | 2 | 2 | 0 | 0 | 10 | 5 |
2002/03 | 리버풀 FC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35 | 19 | 2 | 0 | 4 | 2 | 12 | 7 |
2003/04 | 리버풀 FC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29 | 16 | 3 | 1 | 0 | 0 | 6 | 2 |
2004/05 | 레알 마드리드 | 스페인 라 리가 리그 | 36 | 13 | 4 | 2 | - | - | 5 | 1 |
2005/06 | 뉴캐슬 유나이티드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11 | 7 | 0 | 0 | 0 | 0 | 0 | 0 |
2006/07 | 뉴캐슬 유나이티드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3 | 0 | 0 | 0 | 0 | 0 | 0 | 0 |
2007/08 | 뉴캐슬 유나이티드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29 | 11 | 3 | 1 | 1 | 1 | 0 | 0 |
2008/09 | 뉴캐슬 유나이티드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28 | 8 | 2 | 0 | 2 | 2 | 0 | 0 |
2009/10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19 | 3 | 1 | 0 | 4 | 2 | 6 | 4 |
2010/11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11 | 2 | 2 | 1 | 1 | 2 | 2 | 0 |
2011/12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1 | 0 | 0 | 0 | 2 | 3 | 1 | 0 |
2012/13 | 스토크 시티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 8 | 1 | 1 | 0 | 0 | 0 | - | - |
- ↑ 흔히 알고있는 그 트레블과는 약간 다르다. UEFA컵 + FA컵 + 칼링컵 석권. 어느 동네에서는 이걸 두고 "미키마우스 트레블"이라며 까더라.
- ↑ 호나우두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세 번째가 리오넬 메시. 다만 이 시즌 발롱도르는 아직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오웬보다 라울 곤살레스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당했다는 주장은 지금도 오가는 떡밥.
- ↑ 이 사건을 팬들은 유다 신드롬(Judas Syndrome)이라고 부르고 오언은 유다라고 까였다.#
- ↑ 사실 전성기 때도 그의 최대 장점은 돌파보다는 결정력이었기에 돌파형이라 여겨지던 시절에도 타겟 스트라이커 같은 역할도 수행하는데 능했다. 사실 당시에는 감독이었던 울리에가 오웬을 타겟으로 쓰는데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다. 뭐 여하간 타겟 역할을 계속 했던 것도 사실임
- ↑ 남미 선수들이였으면 오만 방정을 떨 만한 골을 넣어놓고도 손 좀 들어주고 말던 얼음같던 그 특유의 냉정함이 최상급의 슈팅능력과 결합되어서, 보는 사람도 몇 번 볼 때는 열광하지만 많이 보다 보면 기가 질릴 정도로 얼음같이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던 것이 최대의 장점이긴 했다. 허나 그가 월드클래스 공격수였던 건 그 결정력이 미친 것 같은 스피드와 세련된 기술과 결합되었기 때문이었다. 스피드가 죽자 결정력 자체를 발휘할 기회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개인기의 효과도 많이 떨어졌고, 팀 동료에게 가는 부담도 많아졌다.
- ↑ 박지성이 누운 상태에서 공을 한 번 컨트롤하고 패스를 찔러 주었다.
- ↑ RCD 에스파뇰의 선수였으며 감독을 역임한 레전드. 14-15시즌 이후 토트넘 핫스퍼의 감독.
- ↑ 맨유의 셔츠는 절대 걸어놓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루니의 셔츠도 국가대표팀 셔츠로 장식되어있다.제라드 본인도 맨유와 관련된 것은 자기 집에 들이지 않는다고 인터뷰했다.
- ↑ 이미 퇴물 취급받던 맨체스터 유나이트 입단 시기에도 유니폼 판매량 순위 상위에 랭크했었다.
- ↑ 부상하나 없이, 라고 덧붙인 것은 덤...
- ↑ 여담으로 퍼거슨 감독은 오언이 리버풀 유스일 때부터 매우 높이 평가했는데 아직 어릴 때부터 계속 출장하는 것을 보고 성장이 완료되지 않은 선수를 혹사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고 한다. 사실 어린 나이에 혹사를 당하게 되면 부상이 빈발하는 유리몸이 되기 쉽긴하다.
- ↑ "골을 넣는 선수가 필요해요. 그래야 이기죠" "골 포스트를 넘어갔다면 골이 됐을텐데요" 이런걸 말하니 까인다.
- ↑ 참고로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는 이에 대해서 한국의 전통문화일 뿐이라며 개고기 문화를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영국은 여우사냥을 왜 그만두지 않냐고 비꼬았다. 그리고 당시 FIFA 회장인 제프 블라터가 반대파인 정몽준을 깎아내리기 위해 월드컵 개최국인 한국에 개고기를 가지고 트집을 잡은 상황에서 생긴 일이라서 이들이 정말로 순수하게 동물보호의 뜻에서 동참했을지는 각자 판단하자.